11권 21화
스페인 세비야의 어느 학교. 청바지에 하얀 티셔츠를 입은 소녀가 학교 건물을 나서자마자 기지개를 폈다.
"끄으응!"
소리가 커서일까, 아님 소녀가 너무 예뻐서일까.
주위를 지나는 남학생들이 금발의 긴 머리카락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지닌 소녀를 힐끔거렸다.
그녀는 그런 걸 느끼지 못한 듯 핸드폰을 꺼내 들었고, 그런 그녀에게 눈썹이 짙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남학생이 다가와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까아악-!"
식겁하며 손을 뺀 남학생은 갑자기 든 섬뜩한 생각에 다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역시나 주위 모든 학생들이 남학생을 보며 경멸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 무슨……! 아니야! 진짜 아니라고!'
손끝이라도 닿았으면 이렇게 억울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 상황의 돌파구인 소녀를 향해 다급히 입을 열었다.
"미아……"
"진짜다, 진짜…… 응? 마테오?"
"아, 안녕?"
"그래, 안녕? 무슨 일이야?"
"……아! 네가가 보고 싶다고 했던 코리안 바비큐 식당을 예약했는데 갈래?"
"코리안 바비큐!"
눈이 동그래졌던 소녀는 곧 당황하더니 이내 한숨을 폭 내쉬었다.
"미안. 급한 일이 생겼거든."
"그, 그래? 그럼 다음……"
"그럼 난 이만 가볼게! 다음 주에 봐! 즐거운 주말 보내!"
가방을 고쳐 맨 그녀는 정말 무슨 일이 있는 지 교문을 향해 뛰기 시작했고, 남겨진 남학생은 그런 그녀를 보며 미련이 가득한 손을 흔들었다.
"응. 너도 즐거운 주말 보내……"
한참 동안 손을 흔들던 남학생은 한숨을 길게 내뱉고는 핸드폰을 들어 누군가의 SNS에 접속했다.
세계 최고의 모델이라는 어느 남성의 SNS.
"나도 이렇게 자존감이 넘치면 좋을 텐데……"
모르는 이들과도 스스럼없이 웃으며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적극성. 모델을 꿈꾸는 마테오 자신에게 필요한 건 그것이 아닐까 싶었다.
한편 집으로 달려온 소녀, 미아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거실 소파를 향해 가방을 집어 던지며 거실 한구석에 있는 컴퓨터를 켰다.
부으응!
"아, 다녀왔습니다!"
"……빨리도 인사한다."
"에헤헤."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웃던 미아는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며 굵직한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아빠!"
그녀는 날 듯 의자를 박차며 부엌에서 걸어 나오는 수염을 덥수룩한 50대 중년인에게 안겼다.
와락!
"윽! 아쿠쿠. 이 아빠 허리 부러진다."
"왜 이렇게 빨리 온 거에요? 모레 온다고 했잖아요."
"우리 미아 보고 싶어서 빨리 왔지? 그런 너는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이자벨은 어쩌고?"
"이자벨은 저녁에 만나기로 했어요. 지금은 뭐 좀 확인할게 있어서 온 거예요!"
디리링!
로딩이 끝난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다시 날 듯 컴퓨터로 달려갔고, 중년인은 딸이 뭘 하나 느긋이 쫓았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또 SNS 인가? 음? 호오?'
못마땅해졌던 마음이 단숨에 날아갈 만큼 잘 찍은 사진들이었다.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의솜씨. 한 장 한 장 모두 작품이라고 불러도 무방했다.
풍광, 인물, 사물, 요리, 거기다 동물까지.
"스페인?"
커다란 표지판에 적힌 어느 지명까지도 모두 스페인이었다.
"아름답군."
스페인의 정열과 열정이 가득 느껴지는 사진들이었다.
'스페인 관광청 홍보 사진인가? 아, 학교 숙제인가 보군.'
딸이 너무 SNS에 빠져 사는 건 아닌 지 걱정이 됐던 중년인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숙제를 하는 모습에 흐뭇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허헛. 녀석도 참. 이렇게 타이트하게 공부를 안 해도 되는데.'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일 뿐이었다.
"지, 진짜야. 진짜 이곳 세비야로 오고 있어! 어떡해!"
"음?"
중년인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뭔가 이질적인 말이었다.
딸의 뒤로 다가간 그는 이윽고 모니터가 비추는 한 장의 남자 사진을 보곤 눈을 크게 떴다.
"……지노 리?"
휙!
미아의 고개가 다급히 돌려졌다.
"아빠도 지노 리를 알아?"
'어떻게'라는 의문이 담긴 그녀의 눈동자에 담겼다.
동물학자이자, 국립공원 관리스태프인 그녀의 아빠는 진호와 접점이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중년인은 그런 딸의 반을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군. 모델이라고 했지, 참."
"응?"
중년인은 의자를 끌고 와 앉으며 입을 열었다.
"지노 리는 아빠 같은 동물학자들에게 꽤나 유명한 인물이란다. 혹시 리얼, 정글에 가다 아마 존편을 본 적 있니?"
"……아, 그래서!"
이제야 알아차린 듯한 딸의 모습에 중년인은 진호를 떠올리며 작게 흥분했다.
진호는 그동안 그 누구도 알지 못한 야생 동물들의 습성을 몇개나 밝혀낸 인물이다. 비록 의도한 건 아니었다지만 그로 인해 학계엔 폭탄이 떨어졌고, 그도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이런 일들 때문에 그를 데리고 아마존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박사가 한둘이 아니란다."
"와, 그랬구나. 그런데 섭외비가 감당 안 되지 않아요?"
"그래서 못 가는 거야."
미아는 웃음을 터트렸고, 중년인도 따라 웃었다.
그러다 돌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아빠가 전에 말한 동물 있지?"
"아, 그. 멸종할지도 모른다는……."
중년인은 한숨을 무겁게 내쉬었다.
이젠 한 집단밖에 남지 않아서 이대로 몇 년만 지나면 야생에서 멸종해 버릴 이베리아 시라소니.
그는 이를 악물며 팔걸이를 내려쳤다.
"정말 왜 그렇게 개체 수가 감소하는지만 알 수 있다면 어떻게든 방법이 생길 텐데……"
그러나 이베리아 시라소니는 워낙 예민해서 인간이 다가오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사진이 몇 장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가까이 다가갈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쿵!
그는 다시 팔걸이를 내려쳤다.
"아!"
"……아, 미안하구나. 아빠가 너무 답답해서."
"아니, 아니, 괜찮아. 그런데……"
"응?"
"정말 가까이 다가갈 수만 있으면 돼? 그거면 돼?"
"일단은 그렇지."
"그럼 지노 리에게 부탁해 봐."
"응?"
"지노 리, 지금 세비야로 오고 있잖아. 힘들면 내가 부탁해 볼까? 나 지니어스 스페인 지부 플래티넘 등급인데."
중년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 * *
카가각!
"끄아악!"
차에서 내리며 기지개를 쭉 편진호는 마을을 둘러보며 눈을 빛냈다.
'재밌게 생긴 마을이네.'
전체적으로 하얀 색채의 마을은 바닥이 온통 흙모래였고, 이 현대에 말들이 교통수단인 듯 지나고 있었다.
"푸르륵!"
"음?"
갑자기 멈춘 말에, 말의 주인은 놀랐지만 진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뭘 야, 타야. 엄한 사람 꼬시지 말고 갈 길 가라. 접근하면 혼낼거야."
진호는 특별히 스페인어로 나지막 하지만 살벌하게 중얼거렸다.
"……푸르륵."
"허어. 얘가 갑자기 왜 이래?"
진호는 멀어지는 말뿐만 아니라 이쪽을 힐끔힐끔 바라보며 접근할 타이밍을 잡는 말들에게 경고를 주고 나서야 겨우 맑고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역시 나도 나이가 들었나 보군."
방금까지 잔 것인지 비몽사몽한 얼굴로 내린 월터는 뿌드득 허리까지 꺾으며 굳은 몸을 풀었다.
그는 제법 큰 식당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오늘까지 해산물은 아니겠지?"
"……설마요."
빠에야, 감바스 알아히요 등스페인 국경을 넘어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하루에도 두세 번씩 해산물을 먹었다. 이젠 물리다 못해 질릴 정도였다.
"이 동네, 아니 안달루시아는 스프랑 오렌지 와인이 유명하대요."
"……와인도 이제 질려. Give me the beer, want vodka!"
"나도 기브 미 소주!"
"고기! 돼지고기! 소고기!"
"이베리코 흑돼지!"
각 지방의 맛만 기억하려고 했던 건 정말 미친 짓이었다. 이제 당분간 해산물은 쳐다보기도 싫었다.
니냐 에르난데스와 LVMH를 통해 경고를 주었는데도 달려들었다가 진호의 단호한 거부에 돌아서야 했던 스페인 와인 관계자들도 모두 해산물을 대접해 주어서 더욱 그랬다.
"오늘 저녁엔 고기 잔치 콜? 굽고, 찌고, 삶고, 튀기고, 끓이고 콜? 술은 아무거나 독한 걸로!"
일각에선 세계 4대 진미 중 하나라는 이베리코 흑돼지.
그냥 구워도 입안이 행복해지는 그걸로 온갖 요리를 해서 먹을 생각을 하니 월터도 입에 침이 고였다.
"코올!"
시장이나 주류 판매점은 이곳에 숙소를 잡을 때 이미 확인해 두었다. 고개를 힘차게 끄덕인 둘은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주차장에 들어오는 고급 차에 시선을 집중했다가 갑작스런 생쇼를 한 둘의 모습에 웃음을 꾹참은 종업원은 그들을 빈자리로 안내했다.
진호는 약속한 손님을 올 동안 가볍게 먹고 있을 음식들을 미리시켰다. 혹여 그들이 와서 대접을 해 준답시고 해산물을 시키면 그런 낭패도 없으니 말이다.
고기와 스프만 잔뜩 시키는 진호의 모습을 월터는 조용히 응원했다.
이윽고 음식들이 나올 때, 약속을 했던 손님들도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무리한 부탁이었을 텐데 흔쾌히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진호 리. 파블로 세르지오입니다."
"소중한 팬의 부탁인데 당연히 들어줘야죠. 부디 제가 힘이 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아니다. 진호에겐 다른 의도도 있었다.
'국립공원을 마음대로 돌아다닐수 있는 기회인데 거부할 리가 없잖아요. 그것도 방송 촬영 없이 아주 자유롭게!'
학자나 관계자가 아니면 결코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는 곳인 국립공원. 더욱 이 도냐나 국립공원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그 풍광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생각만 해도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그걸 찍어서 사진 공모전에 출품도 해 보고!'
스킬을 얻은 이상 자연스럽게 드는 욕심이었다.
"아, 네가 미아구나?"
'고마워. 덕분에 이런 좋은 기회를 얻게 됐어.'
"이번에 미스 세비야에서 3위했다며? 정말 축하해. 이제 곧 패션위크에서도 볼 수 있겠네."
"저, 절 아세요?"
"당연하지. 이 스페인에 얼마없는 팬인데 모를 리가 없잖아. 네 친구라는 지젤은 안 왔어?"
"……브론즈 등급 이상 팬은 모두 기억한다는 게 진짜 였구나."
"하핫. 나도 사람인데 수백만명을 어떻게 기억하겠어. 팬사이트에서 활동을 많이 하는 사람만 겨우 기억하는 거야."
"그, 그래도요!"
'와, 이런 반응은 오랜 만인데?'
특히 플래티넘 계급 중에서 이렇게 격하게 반응을 하는 건 여기 미아가 거의 처음이었다.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 진호는 보다 더 조심히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고, 파블로는 그런 진호의 모습을 보며 꽤나 놀라야했다.
'정말 성격이 좋나 보군.'
방송 촬영을 위해 도냐나 국립공원에 오는 스페인을 비롯한 세계 각지의 연예인과는 꽤나 다른 인상이었다.
"아, 저희가 먹을 음식은 먼저 시켰는데 괜찮으시죠?"
"이런. 제가 대접해 드리려고 했는데 말입니다. 그럼 그 음식들은 제가 사도록 하겠습니다."
"아뇨. 스페인에서 활동을 하지 않는데도 좋아해 주는 팬에게 밥을 사 주지 못할망정 얻어먹을 순 없죠. 미아, 먹고 싶은 거 다시켜도 돼."
진호는 손을 들어 메뉴판을 주문했고, 파블로는 그제야 안심할수 있었다.
그런 그의 반응이 왜 그런 지 알길이 없어 의아해한 진호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식당 밖을 향해 시선을 두었다.
"왜 그러세요? 아, 그러고 보니 같이 만날 거라는 다른 팬은 아직 안 왔어요?"
HU 에이전시 모델 아카데미 세비야의 S클래스 학생이라는 그는 지니어스 스페인의 골드 등급이기도 하다며 꼭 만나고 싶다고 연락을 해 왔다.
진호는 이번 일을 들어 며칠 후에 만나자고 했지만, 원래 자기가 살던 마을이 이곳이라며 꼭 보고 싶다고 애원하다시피 부탁했다.
우연이라면 참 우연이어서 결국 진호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좀 늦네."
'무슨 일 있나?'
통화만 한 것뿐이지만, 이렇게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을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아서 걱정마저 들었다.
그 순간 한 미청년이 식당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진호는 눈을 빛냈다.
'태가 좋은데?'
그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지금 들어온 저 청년이 s클래스 학생이자, 자신의 팬이라고 말이다.
'패션위크에서 충분히 통할 몸이야.'
"헉헉! 죄송합니다. 제가 늦었죠? 빨리 오려고 했는데, 형한테 잘 보이려고 옷을 고르다 보니 시간이…… 가는 줄……"
청년은 진호의 앞에 앉은 미아를 보며 말을 줄여 갔고, 미아는 그런 그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테오?"
"……미, 미아?"
서로 아는 사이인 듯 보이는 둘.
둘만큼은 아니지만 놀란 진호는 서로의, 아니 마테오의 당황으로 달아오른 얼굴과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눈을 빛냈다.
'뭐야? 이거 뭐야? 얘들 뭐야?'
왜인지 이번 도냐나 국립공원여행은 풍광과 동물 말고도 또 다른 재미가 있을 것 같은 느낌아닌 느낌이 들었다.
진호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진하게 그려졌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