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권 20화
7. 스페인
도망치듯 포르투를 빠져나온 진호는 포르투갈의 남쪽이 아니라 바로 스페인으로 향했다.
"하아. 못 먹어 본 음식이 아직 한가득인데……"
한국도 그렇듯 윗동네와 아랫동네의 음식 스타일은 다른 법인데, 그걸 다 맛보지 못하고 떠난다니 한 사람의 요리사로서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포르투갈이다 보니 더욱 그랬다.
"그냥 남쪽으로 향하면 되지 않나?"
월터도 많은 아쉬움을 드러냈다.
"정말 제게 최악의 가정을 해서 제 팬클럽의 10분의 1만 움직였다고 해도, 제가 어제 찍어 올린 와인들 중 한 병씩만 구매한다고 해도 20만 병이에요. 1년 매출의 2.5퍼센트가 단 하루 만에 발생한 거라고요. 해마다 매출이 감소하는 추세인 포르투 와인의 전체 매출이요."
이것도 SNS 팔로워 중에서 혹여 구매했을 이들을 뺀 가정이다.
물론, 일시적인 현상일 수 있다.
그러나 기업으로서는 이런 구매력을 발생시킨 사람을 잡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튀는 게 맞군."
"그렇죠. 포르투갈 안에 있다면 바로 날아올 테니까."
비행기도 있고, 각 도시 지점직원들을 먼저 보낼 수도 있다.
무엇이든 맘 편히 휴가를 즐길수 없을 터였다.
"그런 거라면 차라리 프랑스로 향하는 게 낫지 않아? 지노 널 보호해 줄 사람이 넘쳐 나는 곳이잖아."
"갈 건데요, 프랑스?"
"차로 갈 거잖아."
"당연하죠. 바로 옆이 스페인인데, 어차피 프랑스에 가려면 스페인을 거쳐야 하는데, 엘 클라시코를 보지 않고 간다고요?"
"……뭐?"
"엘 클라시코!"
스페인으로 향하는 두 번째 이유.
세계적으로 유명한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FC의 대결을 관람하기 위해서다.
'그것도 올해 마지막 엘 클라시코!'
축구를 좋아하게 된 사람으로서 이런 경기를 놓칠 수 없었다. 그래서 인맥의 힘까지 빌려 예약도 미리 해 놓은 상태였다.
"하아. 공이나 뻥뻥 차며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게 뭐 재밌다고 보는지 모르겠군."
"하? 최소한 사람 죽일 듯 달려들고, 여차하며 주먹부터 날리고 보는 미식축구보단 백배 재밌거든요? 월터가 패스의 미학을 알아요?"
"하아? 그건 무슨 참신한 개소리지? 사나이의 스포츠 미식축구가 그런 계집애 스포츠보다 재밌다고?"
"미식축구는 미국만 보지만, 축구는 전 세계가 보죠."
"연봉은 미식축구가 훨씬 높지."
'……아, 씨.'
그건 맞는 말이다.
미식축구 선수의 연봉은 넘사벽이다.
명치를 훅 때리는 팩트에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진호는 고개를 돌렸고, 월터는 이겼다는 듯 의기양양했다.
'연봉이 높다 해도 그렇게, 어? 물론 단위 차이가 꽤나지만, 어? 재미는, 어?'
입술을 달싹이며 투덜거리던 진호는 이렇게 도망치듯 포르투갈을 떠나는 이유를 다시 떠올리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솔직히 스페인만 가도 포르투와인 관계자들은 따라 올 수가 없지. 아르노가 내 거라고 경고 할 테니까. 문제는 스페인 와인 관계자들이야.'
구세계 (Old World)의 숨어 있는 보석이라 불리며 세계 3위의 와인 생산국인 스페인.
"……아, 몰라."
'이쪽도 경고해 두겠지. 그런 의미에서 포르투 와인 회사 홈페이지들이 날아가 버린 게 나에게 있어서 천만다행이고.'
정확한 통계가 나올 때 즈음에는 이미 프랑스에 넘어간 상태일테니 말이다. 그렇게 골치 아픈 생각을 털어 버린 진호는 저멀리 앞을 보곤 눈을 빛냈다.
"국경이네요."
국경 통과.
한국을 떠나기 전 작성한 버킷리스트에도 있을 만큼 꼭 해 보고 싶었던 일이다.
진호는 정체가 일어나기 시작한 도로와 저 멀리 톨게이트 같은 곳을 보며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 * *
서류가 모두 갖춰져 있고, 보증도 확실해서 그런 지 국경 통과는 바로 이뤄졌다.
그들은 이름난 관광지에 이틀씩 머물며 마드리드로 향했다.
"오-. 이곳이 Puerta del sol."
관광객과 현지인, 퍼포먼스를 하는 사람들로 북적북적 거리는 솔 광장을 보니 눈이 휙휙 돌아갔다.
박수 소리 하나로 붉은 드레스를 입고 플라멩코를 추는 여인, '데스파시토'에 맞춰 춤을 추는 청년, 보드를 탄 채 묘기를 부리는 아리따운 여성.
스페인이 왜 정열과 열정의 나라라 불리는지 단번에 알 수 있을 만큼 눈과 귀가 무척이나 즐거웠다.
"이곳도 오랜만에 와 보는군."
아련히 웃는 월터를 본 진호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언제, 어떤 이유로 와 봤냐'라는 질문을 다시 삼켰다.
용병이었던 그가 스페인에 올 이유는 그렇게 많지 않을 테니 말이다.
'경호 때문이겠지. 그런 걸 거야.'
"지노, 이곳이 왜 솔 광장이라 불리는지 알아?"
알고 있지만, 추억에 빠진 아저씨의 수다를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월터 덕분에 호객꾼들이 다가오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솔 광장에는 무작정 어깨동무하며 사진 찍고 사진값을 요구하는 애들이 많다고 했는데……. 아, 저들인가 보네.'
인형 탈을 쓰거나 영화 캐릭터분장을 한 사람들이 거의 필사적으로 이쪽을 바라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진호는 월터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역시 험악해."
……와락.
월터의 얼굴이 구겨졌다.
"왜 갑자기 시비야?"
"덕분에 편하게 여행할 수 있으니까?"
진호는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먹으며 엄지로 자신의 등 뒤를 가리켰다.
"흠?"
진호의 손가락을 좇았던 월터는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사람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흡?"
등 뒤에서 들린 소리에 피식 웃은 그는 좌우도 가리켰고, 월터는 최대한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오는 이들에게 경고를 주었다.
진호는 급히 유턴하는 발소리를 들으며 아이스크림을 한 입 더 먹었다.
"역시 치안은 한국이 제일이라니까."
"그건 맞는 말이지만……. 지노 너에게 큰 의미가 있을까? 대체 어떻게 알아차린 거야?"
월터는 진호가 가리키기 전까지 소매치기가 다가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동업자의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 할…… 에브브.'
"시선이 너무 노골적으로 느껴지더라고요."
"……역시 넌 미군에 입대했어야 해,
"미군이 연봉으로 제 두 달 수익만큼이라도 줄 수 있다면 고민해 볼게요."
"그건 불가능한 이야기잖아."
한국에서 천조국으로 불리는 미국이라지만, 한 명에게 백억 대의 연봉을 줄 순 없었다.
민간군사업체도 마찬가지였다.
"아니까 하는 말이죠. 가요, 근처에 빠에야 맛집 있대요."
"오, 빠에야. 해산물을 팍팍 넣어 주려나? 날씨도 쌀쌀해졌으니 그렇겠지?"
"부족하면 해산물 요리 시키면 되죠. 우리가 위통이 작지, 돈이 없어요?"
"……으하핫! 역시 돈 많은 고용주가 최고라니까!"
"알면 잘 하라고요."
둘은 웃으며 근처의 맛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 그런데 우리는 투우 경기 안 봐? 일정에 없던데 말이야."
"……그건 좀."
'흥분한 소가 이리 와, 하며 달려 올 수도 있으니까.'
진호 자신이야 다치지 않는다지만, 그 경로에 있는 관객들이 다칠 게 염려되었다. 그리고 칼에 찔려 죽어 가는 소를 볼 자신도 없었다.
"가요."
"쩝. 알았어."
와아아아아아아!
마지막 엘 클라시코라서 그런 지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딱히 응원하는 팀은 없지만, 좌석 때문에 오늘만큼은 레알을 응원하기로 한 진호가 필드를 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전반 43분, 스코어는 0:0. 골이 한 번 터져 줄 때가 되었다.
그걸 아는 듯 레알의 대표 미드필더가 상대편 선수들을 젖히며 폭주 드리블을 시작했다.
진호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그렇지. 가라-! 고 !고! 고!"
"달려-!"
"슈웃-!"
일 순간 함성으로 무너질 듯 울리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그건 진호가 앉은 VIP 에어리어도 마찬가지였다.
철썩!
"……고올-!"
"우와아아아아아!"
"골! 골! 골!"
"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
축제가 터졌다.
와락!
"어? 흡?"
양손을 번쩍 들었던 진호는 몸을 훅 몸을 파고들며 부딪쳐 오는 입술에 눈을 동그랗게 떠야했다.
쪽!
"꺄아아아아아!"
자신을 끌어안고 방방 뛰는 미녀를 보며 뒤늦게 정신을 차린 진호는 그녀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타이밍이 늦었다는 걸 알고는 에라, 모르겠다 같이 방방 뛰며 응원가를 따라 불렀다.
그녀를 밀어내기엔 이 열기, 이 함성이 온몸을 취하게 만들었다.
'서형 씨! 미안해요!'
진호는 슬쩍 월터의 눈치를 봤다가 피식 웃었다.
월터도 처음 보는 여성과 어깨동무를 한 채 응원가를 따라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애물도 사라졌겠다, 진호는 목청이 터져라 응원가를 불렀다.
"하아, 하."
"하아아."
양볼이 붉게 달아오른 채 달뜬 신음을 내뱉던 둘이 자리에 앉은건 3분의 추가 시간마저 지난 후였다.
둘은 그제야 서로를 보며 풋 웃었다.
"이진호입니다."
"한국인?"
"어, 아세요?"
"당연히 알죠! 라리가에서도 한국인이 뛰잖아요!"
"오!"
한국인으로서 무척이나 뿌듯해졌다.
"아, 반가워요. 난 니냐 에르난데스에요. 참고로 남자 친구는 없어요."
눈웃음이 무척이나 치명적이었지만, 진호는 태연히 웃었다.
"저는 있어요."
"에이."
입맛을 다신 그녀는 맥주가 담긴 플라스틱 컵을 내밀었고, 진호도 컵을 내밀며 건배를 했다.
꿀꺽꿀꺽!
"크으-!"
"크!"
둘은 서로를 보며 다시 웃었고, 니냐는 진호를 보며 눈을 빛냈다.
"그래서 스페인에는 어쩐 일로 온 거예요? 일? 관광? 어학연수?"
"여행이죠. 먹거리, 풍광 구경등 느긋이 많이 보기 위한."
"……부럽네요. 전 회사원이라서 그런 건 꿈도 못 꾸거든요."
진호는 순간 치솟는 웃음을 꾹눌렀다.
"와. 이제 스물셋 정도 되어 보이는데 벌써 회사원이에요? 무슨 일을 하는데요?"
"아, 저는……"
"아니다. 제가 맞춰 볼까요? 와인 회사 맞죠?"
니냐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진호는 지진이 난 듯 흔들리는 그녀의 눈을 보며 씩 웃었다.
"다가오는 게 너무 노골적이었어요."
애초부터 이런 미인이 다른 자리에 있다가 다가온다는 게 말이 되질 않았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이라면 더더욱.
다만, 방금 전 키스는 미인계가 아니라 응원한 팀이 골을 넣어서 잠시 정신이 나갔던 게 분명 했다.
'스페인의 축구 사랑이야 너무 유명하니까.'
"VIP라운지에서도 저만 쳐다보셨고."
"……푸후, 들켰네요. 다시 인사드릴게요."
"아뇨, 하지 마세요. 어차피 광고는 안 찍을 테니까."
"……왜죠?"
"답은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제 몸값을 맞춰 줄 수도 없거니와 딱히 끌리지도 않아요."
이미 한 광고당 한화로 수십억의 몸값을 자랑 하는 진호다.
아무리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페인 와인이라고 해도 스페인 국내에서 인지도가 부족한 모델에게 그만한 모델료를 지급할 순 없었다.
게다가 그는 이젠 LVMH의 상징이 되었다.
조금만 더 힘내면 LVMH 전체 자회사의 광고를 찍을 수가 있다. 초거대그룹의 모든 자회사광고를 찍게 되는 엄청난 위업을 달성하게 되는 거다.
남자, 아니 사람으로서 해내고 싶은 욕망이 가슴을 꽉 채운 상태다.
그런데 다른 주류회사의 광고를 찍는다?
말이 되질 않았다.
"……아쉽네요."
"그보다 어떻게 안 거예요? 이제야 포르투 와인 회사들 홈페이지가 복구됐다고 하던데."
"아시아 쪽에서 포르투 와인만 사재기 현상이 일어났으니까요."
"……아, 그거였구나."
'홈페이지가 다운되니까 마트에 가서 샀나 보네.'
그제야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한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짝!
박수를 친 진호는 환하게 웃었다.
"아무튼 이야기는 여기까지! 이젠 경기나 즐기자고요."
"……에휴."
고개를 저으며 완벽히 포기한 그녀는 경기장을 보았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수들이 다시 입장을 하고 있었다.
와아아아아아아!
심란 한 마음조차 흔들어 동조시켜 버리는 뜨거운 함성.
그녀는 모든 걸 잊고 입을 크게 벌렸다.
"꺄아아아아아!"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