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권 18화
진호와 함께 있는 건 좋지만, 뭐가 뭔지 몰라서 금세 흥미를 잃은 이서형은 노인과 다시 하하호호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덕분에 진호는 카메라를 신중히 고를 수 있었다.
'그때 저기 사장님이 추천한 제품이……'
진열장에 쌓여 있는 카메라 박스들을 뒤지는 기분은 마치 보물찾기를 하는 것처럼 심장을 기분 좋게 뛰게 만들었다.
'아, 이거다.'
진호는 내용물도 확인하지 않고 카메라 박스를 옆구리에 끼었다.
노인이 얼마나 카메라를 사랑 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렇게 세 개의 카메라 박스와 렌즈 몇 개를 골라 노인에게 내밀었다.
"여기요."
"벌써 다 골랐어요?"
진호는 깜짝 놀란 이서형을 어이없다는 듯 보았고, 노인은 진호가 내민 카메라를 보곤 눈을 빛냈다.
'……이것들은?'
그 자신이 정말 단골인 손님들에게만 추천하는 것들이었다.
내구성부터 명품인 제품들.
'기억하고 있구나.'
노인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필름 카메라도 사려고?"
"네, 이걸로 취미를 시작해 볼 생각이에요."
"그래. 추억을 담아내기에 필름만 한 것도 없지. 좋은 생각이다."
진호는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현상을 선명하게 잡아내는 디지털 카메라보다 흐릿하지만 왜인지 따뜻한 느낌을 주는 필름카메라가 더 취향에 맞았다.
"일단 필름부터 계산해 주세요. 나머지는 따로 계산 할게요. 카드 되죠?"
"흠? 뭐, 그래. 대신 사진 좀 찍어 주면 5퍼센트 할인까지 해주마."
"어이구. 무조건 찍어 드려야겠네요."
진호와 노인은 서로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사진도 찍고, 사인도 한 진호는 '서비스로 필름 몇 통 담았다'라는 노인의 말에 크게 감사하다 외치곤 이서형과 함께 가게를 나섰다.
'해금했다.'
딱히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잘 느껴지진 않았지만, 해금을 했다는 감각만큼은 느껴졌다.
"지루했죠?"
"아뇨, 재밌었어요. 사장님도 유머러스하셨고."
특히 추억을 담아내기엔 필름만한 것도 없다는 말은 꽤 로맨틱하게 들렸다.
이런 서형의 말에 진호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수밖에요. 사장님 옛날에 사진 작가셨어요. 전시회도 열만큼 유명했던."
제자도 굉장히 많다는 걸로 알고 있다.
"정말요?"
그럴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그녀와 다시 차로 향한 진호는 물품들을 뒷좌석에 내려놓곤 바로 필름 카메라와 필름을 조립했다.
그리곤 음흉하게 웃으며 서형을 보았다.
"서형 씨, 여기 좀 보세요. 김치?"
"네?"
찰칵!
"앗! 진호 씨!"
"흐흐흐. 자, 갑시다!"
"가긴 어딜 가요. 일단 봐 봐요!"
"예쁘게 나왔으니까 가죠! 자, 자!"
"안 된다니까요!"
그렇게 둘은 투덕거리며 다시 거리로 향했고, 진호의 입가엔 미소가 가득 맺혀 있었다.
'몰아서 3차 해금도 해 볼까?'
[스킬: 뷰 파인더 속 세상]의 3차 해금 조건은 '10종류의 사진찍기'다. 동물, 인물, 풍경 등 각기 다른 테마를 가진 10종류의 사진을 말이다. 같은 인물이 등장하더라도 풍경이 다르면 스킬해금 카운트에 포함된다.
* * *
"지노, 여기."
"아, 고마워요."
월터가 내민 어두운 색의 미군특수부대용 점퍼를 배낭에 넣으려고 했던 진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몸에 걸쳤다.
이전과 달리 혼자, 아니 월터와 단둘이 떠나는 여행이다. 도와줄 사람이 없기에 짐은 최소화 하는게 좋았다.
"잠깐 스톱. 그 칼 내려놔요."
영화 람보 같은 곳에서나 볼 법한 살벌하게 생긴 군용 나이프.
"하지만 지노, 유럽은 위험한 동네야."
"공항 엑스레이부터 통과가 되지 않는다고요."
"……아, 오케이. 이해했어."
미련 없이 칼을 내려놓은 월터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흠, 무기는 현지에서 조달해야겠군."
'아이고, 두야.'
머리가 아파 왔지만, 진호는 말리지 않았다. 경호원인 그의 심적 안정을 위해서 말이다.
진호는 옆에서 아쉬움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다미앙을 보았다.
"연락처는 꼭 살려 두십시오."
"걱정 마세요. 혹여 핸드폰이 망가지거나 안 터진다고 해도 여기 월터가 위성전화를 가져가니까요."
'대체 어디까지 들어가려고?'
순간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다미앙은 월터의 듬직한 덩치를 보며 겨우 참아 냈다.
"그런 데 그 정도 짐으로 되겠습니까?"
진호의 배낭 안에는 양말 몇 개와 속옷 몇 개, 카메라를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었다.
"나머지는 현지에서 조달할 거예요."
"훌륭한 생각이야."
월터가 엄지를 치켜들자 다미앙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호는 그를 보며 히죽 웃었다.
'나는야, 자연의 왕자가 있으니 옷 같은 건 최소한의 기능만 해줘도 돼.'
이 지구에서 안가 본 곳이 없는 [스킬: 나는야, 자연의 왕자]의 주인공. 아마존 열대우림 안에 알몸으로 던져져도 여유롭게 생존할 자신이 있었다.
"……후. 그럼 올 연말 중국에서 뵙겠습니다."
"네. 그때 봬요. 피부도 걱정 마시고요."
[스킬: 지성이면 감천이다]와 [스킬: 내가 제일 잘 나가]가 있는 이상 그 어떤 태양빛이라도 진호의 피부를 상하게 만들 수 없었다. 그는 작정하고 선탠을 해도 며칠이면 원래대로 돌아와 버리는 경이로운 재생력을 믿었다.
"믿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넵!"
힘차게 대답한 진호는 거실 소파에 앉아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어머니 나진희를 보며 히죽웃었다.
"다녀올게요."
"……조심히 다녀와. 하루에 한 번 씩 연락하고."
"걱정 마세요. 가요, 월터. 그칼은 가는 길에 월터 집에 던져놓고요."
그렇게 일어서 집을 나선 둘은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택시에 올라탔다.
부우웅!
"하이고, 어디 먼 곳으로 가시나 봐요?"
"네, 포르투갈이요."
"포르투갈!"
놀라는 택시 기사와 이런 저런 잡담을 나누며 차창 밖을 본 진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게 사진작가가 보는 시야인가?'
'찍은 사진 직접 현상하기'라는 5차 해금 조건까지 해치우며 스킬을 온전히 습득한 진호는 휙휙지나가는 거리의 풍경이 이전과는 조금 달리 느껴졌다.
지나가는 차 뒤로 느리게 걷는 사람들.
언제나 그 자리에 서서 들어오라 손짓하는 건물들.
'새로워.'
[스킬: 참 쉽죠?]와는 약간 다른 시각이었다.
당장 카메라를 꺼내들어 눈에 들어오는 저 모습을 남기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왜 사진작가 하면 아무 곳에서나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생기는지 알 것 같아.'
언제나 보아 온 풍경이지만, 지금은 새로운 세상에 새로운 사람들이다.
'카메라를 들어 지금 보는 모습을 남기지 않으면 너무도 아쉬울것 같으니까.'
그래서 더 기대되었다.
매일 보는 풍경도 이렇게 새롭고 다채롭게 느껴지는데, 난생처음 보는 풍경은 얼마나 아름답게 다가올지 말이다.
진호는 부풀어 오르는 가슴을 억지로 누르며 택시야 얼른 가라 발을 동동 굴렀다.
* * *
"지노! 여기야, 여기!"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 위치한 공항의 입국 게이트를 빠져나온 진호는 슈트가 너무도 잘 어울리는 40대 중년 미남을 보며 밝게 웃었다.
"살라!"
HU 에이전시 포르투갈 지사 캐스팅 디렉터인 그와는 파리 패션위크에서 다미앙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다.
프랑스식 인사로 반갑게 인사한 진호는 살라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안 본 사이에 더 잘 생겨진 거 아니에요?"
"으하핫! 포르투갈 남자는 언제나 매력적이지!"
"푸흐. 아, 이쪽은 제 경호원인 월터예요."
"오우. 무서운 몸이군요. 살라 미구엘라입니다."
"월터 스미스입니다."
둘은 악수로 인사를 나눴고, 진호는 눈을 빛냈다.
"제가 부탁한 건 준비했어요, 살라?"
"우리 HU의 황제께서 처음으로 부탁한 건데 감히 안 했을까 봐. 따라와."
공항을 빠져나간 살라가 멈춘곳은 공항 주차장에 세워진 한 대의 허머 앞이었다.
탕탕!
"이 정도면 되겠어?"
"퍼펙트하죠."
무광택 검은색의 허머는 남자의 가슴에 불을 지를 만큼 매력적이었다.
"국경통과 서류 등 유럽횡단에 필요한, 네가 다미앙 치프를 통해 부탁한 서류들은 모두 안에 있어. 이쪽 한국 대사관에서 발부한 서류들도 있으니까 이놈을 몰고 유럽어디든 갈 수 있을 거야."
"고마워요, 살라."
"지노 네가 HU에 해 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뭘. 업무 통합시스템도 잘 쓰고 있고.
사무직원들이 무척이나 좋아하더군."
진호는 머리를 긁었고, 살라는 흐뭇이 웃었다.
명실상부 HU의 제왕임에도 다른 톱모델들처럼 뻐기는 것 없이 겸손하고 순수한 모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럼 갈게. 지노의 여행에 신의 은총이 함께하길."
"살라의 앞날에도 신의 은총이 함께하길 빌게요."
"하하하하핫!"
웃음을 터트린 살라가 공항 쪽으로 향하자, 진호는 짐을 모두 실은 월터를 보았다.
"경호용 물품부터 구할 거죠?"
"당연한 말을. 항구 쪽 시장에 아는 놈이 있어. 운전은 내가 하지."
"아, 그 전에 일단……"
진호는 뒷좌석에 실린 자신의 가방에서 카메라와 삼각대를 꺼냈다.
"우리가 여기에 왔다는 흔적부터 남기자고요."
"오, 좋지. 여기 아름다운 아가씨와 함께 찍을 거지?"
월터가 말한 아름다운 아가씨는 허머였다.
크게 웃은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고, 곧 둘은 허머와 푸른 하늘, 그리고 공항 건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찰칵!
항구 쪽 시장, 무기라는 단어때문에 어둡고 음습한 골목을 상상했던 진호는 시장 근처에 번듯이 차려진 건물을 보곤 살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부도 무척이나 밝아서 모르고 들어왔다면 일반 캠핑용품을 파는 곳이라고 오해할 정도였다.
아니, 정말로 캠핑용품도 판매하는 매장이었다.
'잡화상? 철물점?'
한쪽에 놓인 커다란 해머나 철사 뭉치 등을 보면 커다란 철물점으로 봐도 무방했다.
'신기하네.'
익숙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라서 그런 지 눈이 휙획 돌아갔다.
"카타리나!"
"월터!"
카운터를 뛰어넘다시피 황급히 걸어나온 170센티미터 정도의 탄탄한 체구와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금발의 라틴계 여성.
'은퇴한 용병인가?'
그녀를 본 순간 코끝에 희미한 화약 냄새가 스치고, 몸이 절로 반응하며 그녀의 빈틈을 찾으려고 하는 걸 보니 그런 것 같았다.
"잘 지냈어?"
"나야 뭐 보다 시피. 은퇴하고 지노의 경호원으로 들어갔다는 소리는 들었……지, 지노 리?"
"하하, 반갑습니다. 이진호예요."
"……와우. 내 가게에 세계 제일의 모델이 오다니!"
"아하하."
월터는 진호가 그녀와 사진을 찍고 사인도 해 준 다음에야 이곳에 온 목적을 꺼낼 수 있었다.
"장난감들 있지?"
움찔 한 카타리나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진호를 곁눈질했고, 월터는 피식 웃었다.
"많이 아픈 건 필요 없고, 스턴건이나 가스건 나이프 정도면 돼."
"아, 그건 카운터에 있어. 생존키트는 안 필요해?"
"당연히 필요하지. 여기서 캠핑용품도 모두 살 예정이야."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는 세상에서 이보다 밝을 수 없다 싶을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어서 오세요, 손님!"
"……."
"……."
카타리나의 배웅을 받으며 묵직한 더블 백을 들고 차로 돌아온 둘.
더블 백을 풀어 한국에서 가져온 가방에 넣던 두 사람은 더블백 가장 밑에서 나온 '많이 아파보이는 장난감'을 발견하곤 눈을 껌뻑였다.
"오, 카타리나. 이 미친 할망구야."
"……푸하핫! 선물이라잖아요. 챙겨 두세요."
'맨 밑에 있는 건 내 선물이야. 나중에 확인해 봐!'라고 했던 그녀.
월터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진호는 보았다.
"괜찮겠어?"
"들키지만 않으면 되죠. 그리고 이 정도는 있어야 월터가 정말 마음을 놓을 거고."
"그렇다면 나야 땡큐지만……"
말을 줄인 월터는 혹여 진호의 마음이 바뀔까 그것을 얼른 점퍼 안쪽에 집어넣었고, 피식 웃은 진호는 보조석에 올랐다.
이윽고 월터도 운전석에 오르자 진호는 창문을 내리며 차를 탕탕쳤다.
"자, 이제 진짜 출발하죠."
"오케이. 출발-!"
부르릉!
허머는 그렇게 포르투갈의 관광명소를 향해 출발했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