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권 15화
명예 시민권은 시작이었다.
진호가 북경 시장에게 명예 시민권을 받자마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드라마의 성공에도 움직이지 않았던 중국 대기업들이 광고 모델이 되어 달라 섭외 요청을 해 왔다.
뿐만 아니라 현재 그가 찍고 있는 드라마에도 투자가 줄을 이었다.
배우, 가수, 감독 등 중국 연예계 종사자들에게서도 수없이 연락이 왔다.
이렇게 진호의 중국 내 주가가 폭발하자 '팀 이진호'의 핵심 직원들은 중국 지부로 넘어올 수밖에 없었다.
"이것 좀 보십시오."
장경아 실장이 어이없다는 듯 섭외 요청서를 내밀자 진호는 눈을 껌뻑였다.
"와, 여기서도 오퍼가 왔어요?"
알리바마.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에서도 연락이 왔다.
"어디 보자. 계약 기간은 3개월마다 갱신이라는 건 다른 곳과 똑같고 출연료는…… 워-."
여태껏 진호가 받았던 그 어떤 광고 출연료보다 높다.
그런 데 그걸 3개월마다 지급을 한다고 한다.
광고 촬영은 1년에 고작 1번.
이뿐만이 아니다.
진호에게 제의된 액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지만, 지금 데뷔한 아이들에게도 굵직한 광고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중국은 원래 이렇게 통이 커요?"
중국이 통이 크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건 상상을 초월했다.
현재 들어온 광고 섭외 목록 중 아무거나 5개만 수락해도 작년 한 해 동안 번 수익을 가볍게 넘어설 정도다.
앨범 수익까지 모두 합쳐서 말이다.
"그, 그건 저도 잘……. 지 실장님?"
너무 놀라운 상황이라 답지 않게 당황한 장경아 실장이 바라보자, 곁에 있던 지 실장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나한테 묻지 마! 나도 이런 계약서는 처음 봤어!"
PJY, SY 소속이었다가 팀에 합류한 직원들뿐만 아니라, 중국 내에서 뽑은 직원들도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와, 말로만 들어 봤던 계약서를 실제로 보게 되네."
사람들의 시선이 한 홍콩 출신직원을 향해 모여들었다.
"저도 들은 이야기인데, 최고 등급 연예인들에게 이런 계약서가 내밀어진다고 하더라고요. 오직 중국 연예인에게만."
눈을 껌뻑인 사람들은 다시 계약서를 바라보며 입술을 꿈틀거렸다.
내 연예인이 인정을 받았다는데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걸리는 점이 있었다.
"외부의 힘이 작용했을 확률은?"
지 실장의 날카로운 말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스폰서, 진호의 외모가 외모이기에 그들은 연예계의 어두운 면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진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사람들과는 다른 의미였다.
이런 일이 생기자 진호는 가장 먼저 웨이양과 저우지엔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이 일의 뒤에 그들이 있을까 봐 말이다.
그런 데 아니었다.
'분명 두 분도 전혀 모르는 눈치였어. 오히려 기쁨을 감추지 못하셨지.'
내 손자가 인정받았다 동네방네 자랑 하고 싶은 마음이 그들의 음성에 뚝뚝 묻어났었다.
'그렇다면 진짜라는 건데……'
절로 씰룩씰룩 움직이는 볼을 쓰다듬은 진호가 은은히 웃었다.
"그건 아니겠죠."
사람들은 진호를 보았다가 '아'하며 탄성을 터트렸다.
"그렇지. 설사 그렇다고 한들 중국 모든 대기업이 이런 최고의 계약서를 내민다는 건 말이 안 되지."
"맞아요. 정치 쪽에서 강력한 외압이 들어왔다고 해도 말이 안 되죠. 이 기업들마다 손을 잡은 파벌이 다 다를 텐데."
"그건 모르죠. 혹시 알아요? 중국 주석이 진호 씨의 팬일지?"
"뭐?"
"푸하하하하핫!"
"호호호호호!"
사람들은 배를 잡고 웃었다가 이내 진호는 보며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박수를 쳤다.
"축하해요, 진호 씨!"
"슈퍼스타, 아니 중국에서도 톱스타 등극! 축하해, 진호야!"
"흐흐흐."
진호는 머리를 긁으며 고마워했다.
'정말 이분들을 만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일단 뜨는 게 먼저인 연예계에서 이렇게 소속 연예인을 걱정해 주는 사람은 쉽게 찾아볼 수 없을 터였다.
가슴이 뻐근해진 진호는 섭외 요청서 한 장을 들었다.
"이것부터 시작하죠. 가장 센 것부터."
"그렇지. 일단 몸값은 올려 놓고 봐야지."
사람들과 진호는 서로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런 그를 보며 다미앙이 눈을 빛냈다.
'예정보다 직원들을 더 늘려야겠어. 다신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 * *
"예, 예. 알겠습니다.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중국 어느 기업의 홍보부. 전화를 끊은 30대 중반의 사내는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재빨리 한 사람을 보았다.
"부장님! 이진호 씨가 저희 그룹의 광고를 찍으시겠답니다!"
부장뿐만 아니라 홍보 1팀 전원의 시간이 정지됐다.
"……그렇지. 됐어."
정신을 차린 부장은 조용히 주먹을 쥐었고, 홍보 1팀 전원 양팔을 번쩍 들며 소리 없이 기뻐했다.
갑작스레 위에서 내려온 명령에 간이 콩알만 해졌던 그들.
'와, 하루만 늦었어도 이진호 회사에 찾아가려고 했는데!'
"자, 짐 하나 덜었으니 담배나 한 대씩 피고 와. 난 이 소식을 보고하고 올 테니!"
"옙! 다녀오십시오!"
부장은 외투를 챙겨들곤 바로 걸음을 옮겼고, 직원들은 우르르 흡연실로 몰려갔다.
"어우. 달다, 달아. 오늘따라 담배가 무척 다네. 수고 했어, 샤오밍. 역시 우리 부서 에이스!"
쑥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던 사내는 어디 불편한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20대 후반 신입 사원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집에 무슨 일 생겼어?"
"……아뇨. 그냥 좀 허무해서요."
"뭐가?"
"누구는 땀 뻘뻘 흘려 가며 이렇게 일하는데, 누구는 윗사람과 관시 잘 맺어서 그런 돈 벌고. 마음이 좀 그러네요."
사람들은 어이없다는 듯 신입 사원을 보았고, 사내는 신입 사원의 뒤통수를 가볍게쳤다.
"아, 왜 그러십니까?"
"야, 여긴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이득을 뽑아야 하는 회사야. 그런 데 제아무리 고위 임원이 그런 명령이 내렸다고 해도 '네, 알겠습니다.'하고, 순순히 그런 최고 등급 계약서를 꺼낼 수 있을 것 같아? 회장님, 아니 그 위에서 명령을 내렸다고 해도? 그보다 반 등급 아래 계약서를 꺼내면 몰라도 말이야."
진호는 화보를 찍었다하면 완판을 시켜 버리는 것뿐만 아니라, 연관된 회사 중 주가가 뛰지 않은 곳이 없다.
여기에 프로듀스 88과 드라마를 통해 인지도가 정점을 쳐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는데, 명예라고 해도 같은 중국인까지 됐다.
한계까지 배팅할 수밖에 없었다.
간을 보았다가 적대 회사 광고를 찍어 버리면 그보다 낭패일 수 없으니 말이다.
이런 그의 설명에 신입 사원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다.
"죄, 죄송합니다."
"됐어."
후다닥! 벌컥!
"다들 옷 챙…… 뭐야? 분위기 왜 이래?"
"아, 아닙니다. 부장님, 그런 데 무슨 일이세요?"
"아, 푸하핫! 애들아, 전무님께서 퇴근과 회식을 명하셨다! 다들 자리로 튀어 가서 옷 챙겨 나와!"
"……우와아아아아!"
자리로 달려가는 그들의 얼굴은 더없이 밝았다.
* * *
'와.'
광고 촬영을 위해 알리바마 본사에 도착한 진호는 혀를 내둘렀다.
층수는 그렇게 높지 않지만, 굉장히 넓고 멋진 디자인의 건물이었다.
'내부도 멋지네.'
깔끔하고도 미래지향적인 인테리어. 마치 실리콘벨리의 회사들이 이럴까 싶을 정도였다. 그런 데 가장 놀라운 점은 직원들의 옷차림이 무척이나 프리하다는 점이었다.
'츄, 츄리닝? 저래도 돼?'
그것도 모자라 옆구리에 노트북을 끼고, 음료를 쪽쪽 빨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한국 내에서도 몇몇 벤처 기업들이 저런다고는 하는데……'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절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고, 알리바마가 왜 세계에서도 유명한 기업이 됐는지 알 것 같았다.
'흠. 우리도 매칭해 볼까?'
어찌 보면 예술계보다 자유스러운 세상이 연예계다.
그런 연예계 종사자로서 딱딱한 정장을 입고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을 떠올리자 '좀 이상하지 않나'하는 이질감이 느껴졌다.
'건의해 봐야겠어. 어차피 이젠 건물을 옮겨야 할 테니까.'
아이들의 성공으로 인해 직원을 더 늘리기로 결정되었다.
중국뿐만이 아니라 한국도 회사 건물을 옮겨야 할 때다. 아이돌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샴페인을 터트린 HU 에이전시 본사에서 지원해주기로 했기에 아예 건물을 한 채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쪽입니다."
"아, 네."
진호는 웅성거리며 이쪽을 보는 알리바마 직원들과 내부 인테리어를 머릿속에 각인시키듯 기억하며 안내자의 뒤를 따랐다.
광고 콘티는 제법 단순했지만 스토리가 있었다.
그런 데 재밌으면서도 놀라운 점이 있었다.
"……이거 진짠가요? 과대 포장하는 게 아니라?"
"하핫! 걱정 마십시오, 미스터리. 저희가 이번에 도입하는 시스템입니다!"
능숙한 한국어로 말하는 알리바마 임원의 자신감에 진호는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진짜요? 진짜 차가운 음료를 주문하면 집에서 차가운 상태로 배달받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것도 당일, 아니 2시간 안에?"
"일단은 몇몇 품목들에 한해서만 각 도시들에서 시범적으로 운영해볼 예정입니다."
"와."
정말 감탄사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거 편의점과 마트에 타격이 가겠는데?'
"대단하시네요. 그리고 이런 좋은 프로젝트에 광고 모델로 뽑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편의점과 마트에 타격이 간다고 해도 결국 소비자, 일반인들에겐 기뻐할 일이다.
"아닙니다! 지금 중국에서 미스터리만큼 인기 있는 젊은 연예인이 어디 있다고요! 오히려 싱동닷컴보다 저희 알리바마를 택해 주셔서 감사할 뿐이죠."
싱동닷컴은 텐젠트라는 곳에서 만든 전자상거래 회사인데, 현재 중국 내에서 알리바마 다음가는 위상을 갖추고 있다.
"최선을 다해 찍도록 하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알리바마의 임원이 물러나자 진호는 감독에게 다가갔다.
"아, 정 실장님. 제 노트북 가져오셨죠?"
"……너 여기서도 작업하게?"
"이렇게라도 안 하면 시간 못 맞춰요."
"이번엔 그냥 프로그램을 사는게 낫지 않을까?"
"제가 만든 것보다 편한 시스템을 정 실장님께서 찾아오실 수 있다면요."
"……박 대리!"
회사가 커지며 지부들도 활성화됐으니, 그에 따라 업무 통합시스템도 업그레이드해야 했다.
타다다다다다! 따각, 따각!
키보드와 마우스 위에 올려진 진호의 손과 마우스가 빠르게 움직인다. 정장을 입은 채 피로에 젖은 얼굴을 한 진호는 안경을 추켜세우다 노트북 모니터를 잡으며 눈을 부릅떴다.
"오케이, 컷! 업무 컷은 여기서 마무리하고 잠시 쉬었다가 부장에게 혼나는 신을 찍겠습니다."
이 콘티의 내용은 단순하다.
업무는 실수하고, 상사에게는 꾸지람을 받으며 직장 생활에 힘들고 지친 주인공이 퇴근을 하며 핸드폰 앱으로 맥주와 안주를 주문한다.
그렇게 집에 도착해 씻고 나오니 벨이 띵동 울리며, 알리바마 택배원이 환한 미소와 함께 차가운 맥주와 안주를 내민다.
주인공이 그 맥주와 안주와 함께 티비를 보며 웃는 걸로 광고는 끝이다.
이후 다른 버전으로 몇 번 더 촬영하고, 그중 한 가지 혹은 모두를 광고로 쓴다는 게 이번 광고 계약의 골조다.
"얼굴 그대로 고정. 화장 고쳐야돼."
"넵!"
그렇게 대답한 진호는 눈만 움직여 다시 키보드와 마우스를 조작했다.
"근데 진호 씨. 이거 찍혀도 돼? 누가 따라 할 수 있잖아."
프로그래밍에 대해 모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아, 괜찮아요. 주석을 달지 않아서 본다고 해도 못 따라 해요. 세계 최고의 프로그래머라고 해도."
"그래?"
"네."
진호는 코딩 창을 닫고는 일단 실행해 보았다.
따각, 따각, 따각!
'……오케이. 일단 기본 틀은 해결된 것 같고.'
분장 중이라 속으로 만족스럽게 웃은 진호는 다시 코딩 창을 켜서 작업을 이어 가려고 했다.
뒤로 누군가 다가오지 않았다면 말이다.
"호? 이건 저희 쪽 업무 시스템이 아닌 것 같군요."
"음?"
아까 전 잘 부탁한다고 말한 뒤스태프들 뒤에서 구경을 하던 알리바마의 임원. 그가 진호의 업무 프로그램을 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