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권 12화
차르륵!
자갈이 가득 깔린 커다란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진호가 시동을 끄며 내리자, 등산복 차림을 한 아버지 이형만과 어머니 나진희도 내렸다.
탁! 탁!
"스읍- 하."
"와아."
탁 트인 바다와 넓게 펼쳐진 백사장, 불어오는 짠 내 섞인 깨끗한 공기가 온몸을 절로 늘어트렸다.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린 그들은 이내 곧 눈을 빛냈다. 옆에 세워진 하얀색의 커다란 카라반때문이다.
"이런 곳도 있구나. 세월 참……"
"그러게요. 우리 땐 민박 잡아서 자는 게 최고였는데."
이형만과 나진희는 신기하다는 듯 카라반을 살폈고, 진호는 흐뭇이 웃었다.
'모셔 오길 잘했네.'
"이런 게 생긴 지 꽤 됐어요. 글램핑이라고 커다란 천막 안에서 캠핑하는 곳도 있고요."
"천막?"
이형만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설마 숲속에 있는 거냐?"
쏟아질 것같이 별들이 반짝이는 밤하늘 아래 사람 없는 숲속. 친구들끼리 모닥불 앞에 모여 앉아 고기도 구워 먹고 술도 마시며, 기타치며 노래하다 쳐 놓은 텐트 속에 들어가 자는 건 그의 옛 로망 중 하나였다.
전문대를 졸업하자마자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기에 엄두도 못 냈던 일.
"그렇죠. 다음엔 거기도 가 봐요."
"약속한 거다!"
아버지의 얼굴이 확 밝아지자 진호는 처음부터 거기로 갈 걸 그랬나 하는 작은 자책을 했다.
"아들, 혹시 그 글램핑이라는 곳에서 온천욕도 할 수 있니?"
"어……. 있지 않을까? 온천은 모르겠는데, 수영풀이 있는 글램핑장은 얼핏 본 것 같아."
"어머머. 그럼 겨울에는 따뜻한 물을 틀어 주겠네?"
"그렇겠죠?"
'아마도?'
아니면 아예 캠핑장 전체를 하루동안 빌려도 됐다.
"자, 자, 그럼 어서 들어가서 옷갈아입고 나오세요. 바다에 왔으니 물놀이 해야죠."
"무슨 . 짐부터 내리는 게 먼저 지!"
"에이. 제가 출발하기 전에 말했잖아요. 오늘은 이 아들이 머슴이라고! 자, 자."
"어? 어?"
"어머? 어머?"
이형만과 나진희는 아들의 기특한 모습에 못 이기는 척 카라반안으로 들어갔다.
치이익! 지글지글!
뜨겁게 타오르는 숯불 위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새우와 두툼한 삼겹살이 익어 간다.
그 옆에서는 양파 토마토, 파인애플 등을 꼬챙이로 꿴 꼬치도 함께 익어 가고 있었다.
치익! 탁! 꿀꺽꿀꺽!
"크으-. 좋다."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여름밤, 목을 얼리며 넘어가는 차가운 맥주는 감로수와 다름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 물놀이를 해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다 익었어요. 안주도 드세요."
"오오. 그럼 우리 아들이 구워 준 새우를 먹어 볼까?"
진호가 만든 녹색 소스에 푹 찍어 입에 가져가 한 입 크게 베어문 이형만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혀를 내둘렀다.
꿀꺽 !
"허어. 여기가 태국이네, 태국이야."
입안 가득 씹히는 새우의 단맛과 탱글하고 쫄깃한 육질 사이로 태국 현지에서 먹은 그 해산물 소스가 스며들고 있다. 마치 이곳이 한국이 아니라 태국의 바다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아들, 최고!"
어머니 나진희가 엄지를 치켜들자 진호의 얼굴에도 미소가 맺혔다.
"하핫. 많이 드세요."
"그래, 진호 너도 많이 먹고."
"넵! 아, 노래 들으실래요?"
"노래? 노래 좋지!"
"어이구, 그럼 우리 아드님이 불러 주는 노래를 들어 볼까?"
"잠시만 계세요."
냉큼 차에서 기타를 꺼내 온 진호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이 형만과 나진희는 손뼉을 치며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세 가족의 밤은 깊어져갔다.
* * *
"야구? 축구? 아."
예전에 축구 스킬을 얻으며 했던 말을 떠올린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들은 어느 편이 좋다고 하나요?"
"반반이지만, 야구 쪽으로 약간 더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래요? 이유가 있나요?"
"간단합니다. 한국에서는 야구가 더 인기 있습니다."
해외 축구를 제외하면 1년에 한 번, 2년에 한 번, 어쩌면 4년에 한 번 이슈가 되는 축구보다 는 매년매일 이슈가 터지는 야구가 마캐팅적인 측면에서 훨씬 낫다.
이렇게 설명한 다미앙은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이 편이 만능 운동꾼이라는 진호 씨의 이미지에도 좋습니다."
테니스에 축구. 이미 운동 실력이 뛰어나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진호이기에 어느 한 분야만 파는 것보다 는 여러분야를 다양하게 건드려 두각을 나타내는 게 좋았다.
이런 다미앙의 설명에 진호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네?"
진호는 다미앙이 무슨 말을 한것 같아서 쳐다봤고, 다미앙은 고개를 저었다.
'터무니없는 생각이지. 판타지 같은 생각.'
그런데 진호라면 이 터무니없는 생각을 현실로 만들 것 같아서 약간 불안해지면서도 기대가 되었다.
"아닙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단 두 스포츠 모두 서울 연고 팀들에서 오퍼가 들어와 있는 상태이기에 당장 내일이라도 시축이나 시구를 할 수 있습니다."
"오, 그래요?"
진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뭘 할까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미 마음은 야구 쪽으로 거의 기운 상태였다.
여태껏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아니 글러브나 방망이조차 잡아본 적이 없는 야구.
그 순간 언젠가 리셋라이프 스토리 진행을 위한 참고용으로 봤던 홈런 영상과 호쾌한 스트라이크 영상이 진호의 귓가와 머릿속을 스쳤다.
'……역시 해 본 것보다는 안 해본 거지!'
진호는 약간 흥분한 눈으로 다미앙을 보았다.
그에 다미앙의 눈이 불안함으로 흔들렸다.
"야구로 할게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알고 일을 진행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네?"
"아닙니다. 그럼."
"넵! 수고하세요."
진호는 돌아서는 다미앙을 보며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스킬 얻자.'
이왕 하는 거 제대로, 최대한 재밌게 해 봐야 했다.
* * *
휘익! 팡!
"뜬금없이 웬 캐치볼이냐."
재준이 글러브로 잡은 공을 되돌리며 투덜거리자, 진호는 어깨를 으쓱이며 날아오는 공을 잡았다.
'스킬 해금 때문이지.'
이 스킬의 1차 해금 조건이 '캐치볼 100개'다.
어릴 적 야구 선수인 아버지와 캐치볼을 하며 야구 선수에 대한 꿈을 키운 주인공. 이때부터 야구선수로서의 재능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겸사겸사 생존 신고도 하고.'
진호는 이쪽을 찍는 재준의 인터넷 방송용 카메라를 힐끔 보았다.
이번 인터넷 방송은 현재 한국 방송에는 얼굴을 비추지 않는 진호의 생존 신고용으로 찍는 거였다.
"어머님이 너 운동 좀 시키래."
"울 여사님이?"
"너 요새 집에 들어가면 침대 위를 벗어나질 않는다며?"
찔끔!
재준이 몸을 움츠리자 진호는 한 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주 디룩디룩 쪄 가지고. 너 그러다 진짜 돼지 된다."
"돼지는 무슨 ! 이렇게 잘 빠진 돼지도 봤냐!"
"너 옆구리에 살쪘어."
재준은 입을 꾹 다물었고, 진호는 빠르게 날아온 공에 키득키득 웃으며 글러브를 움직였다.
파앙!
"이렇게 살에 민감한 놈이 왜 뒹굴거려서 한 소리 듣냐?"
그는 다시 빠르게 공을 되돌렸다.
딱 재준이 날린 속도만큼 말이다.
파앙!
"……야, 너 가. 중국으로 가 버려."
"응. 모레 새벽에 가."
그렇게 유치한 두 남자의 침묵의 캐치볼이 시작됐다.
물론 방송용이었다.
파앙!
'오케이 백 개.'
어깨와 팔꿈치가 미세하게 간지 러워지자 진호는 공을 빼며 그대로 날려 보냈다. 그 순간 몸의 중심과 다리 허리 팔을 비롯한 전신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호?'
쉬익! 퍽!
"윽?"
'오? 빠르다.'
분명 방금 전과 똑같은 힘으로 던졌는데도 글러브에 틀어박히는 소리가 달라졌고, 진호는 몸이 찌릿해지는 전율을 느꼈다.
그것은 일종의 쾌감이었다.
'팔꿈치와 어깨가 더 질겨진 것 같고.'
그렇지 않아도 [스킬: 테니스의 황태자]와 여러 육체 관련 스킬때문에 생고무나 다름이 없던 인대가 더 강인하고 유연해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왼팔이……'
왼팔을 보며 슬쩍 웃은 진호는 부글부글 끓고 있는 재준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쏘리, 쏘리. 우리 허약돼지 재준이 많이 아팠지?"
"……넌 진짜 뒤졌어!"
글러브를 내팽개친 재준은 진호에게 달려들었고, 진호의 출연 때문에 무려 50만 명 이상이 접속해있는 인터넷 방송 채팅창은 'ㅋㅋㅋ'로 도배되었다.
중얼중얼, 투덜투덜.
진호는 아랫입술을 삐죽 내민 채 옆에서 걷는 재준을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삐졌냐?"
"꺼져. 친구란 놈이, 어? 사람을 그렇게 농락하고, 어?"
진호는 잡힐 듯 말 듯 거리를 유지한 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재준을 도발했고, 재준은 그런 진호를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탈진하고 말았다.
"그러게 운동 좀 하라니까."
"맨날 하거든! 관장님이 잡아먹으려 들거든!"
"그런데 옆구리에 살이 붙었다고?"
그건 그것대로 놀라웠다.
"아, 진짜 좀 꺼지라고!"
"……소매는 좀 놓고 그렇게 말하면 안 될까?"
순간 카메라 앵글이 밑으로 내려왔고, 재준은 재빨리 손을 놓았다.
하지만 늦었다. 채팅창이 다시 웃음으로 도배 되었다.
"허흠. 그래서 다음으로 갈 곳은 어디인가요, 이진호 씨! 아니다! 방금 전은 너 하자는 대로 했으니까 이번엔 나 하자는 대로 하자! 스크린 야구장 어때? 게임비에 안에서 마실 맥주값까지 피 보기로!"
진호는 살짝 놀랐다. 2차 해금조건이 '날아오는 공 12번 연속으로 치기'였기 때문이다.
'이 열두 번은 딱 원 코인 한판으로 칠 수 있는 공의 개수지.'
어릴 적 급격히 몰락한 집안 사정으로 인해 야구 선수의 꿈을 잊어야 했던 주인공은 어느 날 친구들과 배팅장에 들렀다가 다시 재능을 깨닫게, 아니 타자로서의 재능과 재미를 깨닫게 된다.
그렇게 한 달에 한 번 이 한판으로 스트레스를 풀던, 어떻게든 본전을 뽑아야 했기에 무조건 맞추던 주인공은 우연히 중학 야구감독의 눈에 띄어 장학생으로 선발된다.
'솔직히 이번 스킬은 완전 거저 먹긴데……'
시속 200킬로미터를 넘나드는 테니스의 서브도 핀 포인트에 맞춰 되돌리는데, 그보다 느린 속도의 공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진호는 방송용 재미를 위해 판을 키우려 이 마음을 슬그머니 감추며 살짝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야, 너 다른 사람들과 술 마시면 맨날 스크린 야구장 간다며."
그중엔 현재는 은퇴하여 스트리머 겸 스포츠용품 판매점 사장님이 된 야구 선수들도 있다고 했다.
스트리머로서 인지도가 없는 그들에게 이젠 밥만 먹어도 1만 명씩 보는 재준은 무조건 친해져야 할 대상이어서 그런지 그쪽에서 먼저 연락해 와 친해졌다고 했다.
이런 진호의 설명에 재준은 입술을 비틀었다.
"그래서 쫄?"
……울컥!
남자의 승부욕은 백약이 무효하다고 누가 말했던가.
순간 진심이 되어 버린 진호는 이를 드러냈다.
"저녁에 술값까지면 콜."
"오케이 콜! 낙장불입, 퉤퉤퉤! 넌 뒤졌어. 아싸. 오늘 저녁은 소고기에 양주로구나!"
진호는 팔짝팔짝 뛰는 재준을 보며 오늘 꼭 파산시켜 버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어디에 1인분에 7만 원하는 소고기집이 있다고 하던데……'
우웅!
"어? 이 형님이 무슨 일이지? 네, 여보세요!"
진호는 갑자기 전화를 받는 재준을 무시하며 핸드폰으로 그 소고기집 위치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더 비싼 음식을 파는 곳이 있는지도 말이다.
"야, 진호야."
"왜?"
"내가 승근이 형님에 대해 몇 번 말한 적 있지?"
"아, 은퇴하시고 현재는 스트리머하신다는 그 전직 야구 선수 형님?"
"엉. 그 형님이랑 다른 형님들도 우리 내기에 끼려고 하는데 괜찮아?"
진호는 약간 초조해하는 재준을 보며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렇게 해."
"진짜?"
"네가 허튼 사람 소개시켜 주겠냐. 얼른 오시라고 해. 대신, 오실때 한도 높은 카드도 함께 가지고 오시라고도 해 주고."
"……푸하핫! 암튼 그놈의 허풍은……. 네가 아무리 운동신경이 좋아도 선출 형님들에게 되겠냐?
아무튼 오케이! 땡큐!"
재준은 다시 통화를 하기 위해 멀어졌고, 진호는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진심인데……"
이 스킬의 주인공은 시속 100마일의 강속구와 휘둘렀다 하면 담장을 넘기는 거포의 재능을 가지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레전드가 된다.
"방심해 주면 나야 좋지, 뭐."
'근데 몇 십 연속 안타를 치고 끝내야지? 아, 스크린 야구에도 콜드 게임이라는 게 있나?'
따아악!
제대로 후려치니 놀랍도록 손에 감촉이 없었다.
"……우아아아악!"
"홈런-!"
"또 넘겼다-!"
"10연속 호옴런-! 메이저리그 난이도에서 10연속!"
"아, 이진호 선수! 폭포처럼 떨어지는 포크볼을 노리고 있었다는 듯 제대로 걷어 올렸습니다! 이선수, 처음엔 똑딱이 안타만 치더니 몸 풀렸다는 듯 모두 담장을 넘기고 있어요! 이게 사람입니까! 안 그렇습니까 , 김승근 선출! 재준씨!"
"아! 꺼져, 좀!"
배팅룸 밖 대기실 같은 편들을 향해 양팔을 들어 올려 흔들던 진호는 낯빛이 거무죽죽한 재준과 상대팀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서울 어디에 한 대당 25만 원이 넘는 소갈비집이 있다고 하던 데……'
돈을 낼 사람이 늘면 음식값도 올라가는 게 옳았다.
[스킬: 외계인]
[메이저리그의 역사는 그가 데뷔하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