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권 11화
4. 시속 100마일
진호는 '코리안 쉐프'가 극장에 걸린 이후 거의 석 달 만에 한국을 찾았다.
"다녀왔습니다."
"캬악!"
"응?"
무슨 일인지 현관 앞에 있다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하양이의 모습에, 순간 멍해졌던 진호는 이내 '아-.'하고 깨달았다.
"밍밍과 링링 냄새가 몸에 배었나 보네."
"아들-!"
진호는 이쪽을 향해 후다닥 달려오는 어머니 나진희를 향해 양팔을 활짝 벌렸다.
와락!
"엄마!"
"아들!"
"엄마!"
진호는 오랜만에 느끼는 어머니의 따뜻한 품을 더 힘주어 껴안았다.
"아들……"
"엄마, 카드 많이 썼더라."
움찔!
"이젠 강남 한복판에 있는 베이커리 사모님이 뭘 그렇게 많이 쓰셨을까?"
"우, 우리 아들 건강식?"
"……푸핫핫!"
약간 어이가 없었지만, 진호는 어머니의 귀여운 모습을 보고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집에 돌아온 이 느낌을 더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일하고 계시지. 직원 들여서 제빵 가르친다고 요즘 바빠. 정태라고, 진호 너도 안다고 하던데……"
"정태? 정말?"
정태는 곽종훈과 함께 영국에 갔던 세 천재 중 한 명이었다.
진호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늠의 자식. 그런 거라면 말해 주지."
"왜? 걔 성격 이상해?"
"아뇨, 그건 아니에요. 정태라면 베이커리 주방을 맡길 수 있을 정도로 실력도 좋고, 성격도 좋아요."
"그러니? 네 아빠가 칭찬을 많이 하기에 그러려니 했는데 그 이상이었나 보네."
"방금 말한 것처럼 정태라면 주방을, 아니 2호점을 낸다면 그곳을 맡길 수 있을 정도예요."
"어머머."
평생을 가정주부로 살아왔지만, 그런 사람을 얻기 힘들다는 것쯤은 알고 있는 나진희는 마음속에 미약하게 남아 있던 불안감을 완전히 떨어트릴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엔 얼마나 있다가 다시 가니?"
"5 일?"
"꽤 기네?"
"엑스트라 모집과 전투 신 찍을 촬영장소 섭외가 좀 꼬인 것 같더라고요."
"전투 신?"
"다 합을 맞춰서 찍는 거라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내가 몸값이 얼만데."
순간 두 눈에 걱정이 들어차는 어머니 나진희를 다독인 진호는 박박 씻고 나온 뒤에야 하양이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달그락.
소파에 앉은 진호에게 향긋한 더덕 향이 나는 차가 내밀어졌다.
"고마워요. 음-. 좋다."
"네 외할아버지가 직접 캐고 청으로 만들어서 보내 준 거야. 족히 20년은 묵은 거래."
"정말? 그런 거면 외할아버지가 드시지……"
"자기가 먹는 것보단 예쁜 우리 손자 먹이는 게 더 좋다더라. 아주 여태껏 용돈 준 딸내미는 안중에도 없지."
"와-."
그 말을 들으니 왜인지 더 맛있게 느껴졌다.
단숨에 주욱 들이켜고 나진희에게 내민 진호는 얼른 핸드폰을 꺼내어 외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잔 더 줘?"
"응!"
달칵!
-여보세요?
"할아버지!"
-어이구, 우리 손주!
나진희는 흐뭇하게 웃으며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그렇게 두 번째 더덕차를 마시며 외할아버지와 통화를 마친 진호는 핸드백을 들고 나오는 어머니 나진희의 모습을 보고 의아해할 수 밖에 없었다.
"약속?"
"아니? 오랜만에 집에 온 우리 아들 위해 시장 보러 가지?"
"아, 그럼 나도……"
"됐어. 피곤할 텐데 한숨 자고 있어. 그리고 엄마도 이렇게 무거운거 들고 다니고 해야 건강하지."
"그래도…… 끙. 알았어요."
"그래, 쉬고 있어. 아, 오늘 저녁에는 어디 안 가지?"
"응. 안 가요. 아, 그런데 내일은 낮에 선생님 댁에 좀 다녀올 거예요."
"선생님?"
"네, 이제돌 선생님."
바둑. 생각이 난 김에 초단 정도는 따놓기로 했다.
* * *
딱! 딱! 딱!
바둑돌이 부딪치는 소리가 가득한 대한 기원 안.
진호와 이제돌이 맞바둑을 두고 있고, 제법 많은 수의 사람들이 숨을 죽인 채 그 대국을 관람하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거야?"
"설마 이제돌 선생님이 밀리는건가?"
"내 눈엔 진호가 밀리는 것처럼 보이는데?"
누가 우세한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치열하고도 진흙탕 싸움 같은 대국.
이제돌이 바둑돌을 만지며 입을 열었다.
"초단을 따겠다고요?"
"예. 국제 대회에 출전하려면 프로 자격이 필요하더라고요."
움찔!
거의 모든 구경꾼들이 몸을 굳혔다.
'……아오! 왜!'
'혀엉─!'
대한기원 소속인 프로들과 연구생들은 갑자기 등장한 강력한 적에 소리 없이 몸부림을 쳤다. 특히 입단 대회를 준비하는 연구생이나 초단들은 울먹이기까지 했다.
"세계 대회?"
이제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야 어찌 됐든 진호의 프로 진출은 어느 면에서 봐도 한국 바둑 부흥에 있어 좋은 호재였다.
"그런데 바쁘지 않아요?"
"바쁘죠."
중국 내에서 섭외가 쏟아지는 것도 그렇지만, 안나 마리가 빌보드와 UK에서 각자 3위와 2위에 오르면서 그쪽 가수들의 곡 작업 의뢰가 들어오고 있다.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의 동물연구소들에서도 합동 연구 의뢰가 들어오고 있다.
진호는 휴식에 대해 말을 했고, 이제돌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이라면 괜찮겠네요. 자격은 충분하니 대회만 고르면 되겠어요."
대한기원에선 프로 기사에게 7점접바둑을 이기면, 공식적으로 아마 1단임을 인정해 준다. 이미 수없이 많은 프로 기사들을 이긴 진호는 이미 공인 아마 7단으로서 프로 입단 대회에 출전할 자격을 획득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연예계 일을 하는 진호의 프로 진출은 바둑에 인생을 바친 이들에게 있어 모욕이라 생각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애초에 수만 명의 경쟁자를 짓밟고 되는게 프로다 보니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프로 기사로서의 소양을 갖추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서 근래에 열릴 입단 대회에 출전할 생각입니다."
연구생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근래에 열릴 입단 대회 중 진호가 출전할 대회는 하나다.
연구생들과 아마들이 한꺼번에 입단 시험을 치루기에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입단 대회.
'아오오오오오!'
'아니, 왜 하필 그 대회에-!'
"호오. 그 대회에 출전한다면……."
따악!
"음?"
눈썹을 꿈틀거린 진호는 바둑판을 보며 장고에 들어갔다.
그러다 결국 고개를 저으며 돌을 던졌다.
"이건 진 거네요. 수고하셨습니다."
"휴우. 수고 했어요. 날이 갈수록 실력이 느네요."
"하핫."
진호는 바둑돌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연구생들과 초단들은 마음속으로 방방 뛰었다.
'이거 보라고! 이제돌 선생님도 겨우 이기는 진호를 어떻게 이겨! 미쳐 버리겠네-!'
'캬' 초단 애들 죽어나겠네.'
'아, 진짜 형-!'
"한 게임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스승의 허락도 맡았겠다, 진호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흑돌을 집었다.
* * *
웅성웅성! 바글바글!
'와우.'
진호는 사람들로 가득한 광경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여기 딸기빵 없나요?"
"네, 지금 나갑니다!"
"으앙! 또 품절이야! 치즈 오중주스콘은 왜 맨날 품절인데!"
"17, 900원입니다. 포인트 카드나 할인 카드 있으십니까?"
'이거…… 내 팬들만 있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진호와 아버지 이형만, 어머니 나진희의 중간 이름을 따 만든 '진형베이커리' 안에서 빵을 구입하려는 사람들의 연령층과 인종은 무척이나 다양했다.
예전에 아버지 이형만과 대화를 나눌 때 농담 삼아 '지니어스가 있으니 망하진 않을 거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실제로 외국인도 찾아올 만큼 진형 베이커리는 큰 호황을 누렸다.
진호는 국내 3대 빵집을 보는 듯 한 모습에 절로 흐뭇해졌다.
'아버지 실력이 늘었나 보네.'
맛이 없다면 불가능한 모습이었다. 어쩌면 정태가 합류한 덕분일수도 있었다.
진호는 모자를 꾹 눌러쓰며 존재감을 지운 채 주방으로 향했다.
"그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더 치대세요."
"예!"
"음. 이 정도면 된 것 같네요. 내보내세요."
"예!"
'파티셰들 숫자가 많은데?'
[스킬: 괴도 루팡]으로 인해 누군가의 이목을 끌지 않고 주방 안으로 들어간 진호는 예상외의 광경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건물을 사고, 인테리어를 하는 것까지는 간섭했지만, 그 이후의 일은 모두 아버지에게 맡겼기에 그동안 진형 베이커리의 사정을 까마득히 몰랐기 때문이다.
'냄새도 좋고.'
반죽을 치대는 모습이나 빵이 구워지는 냄새, 완성된 빵의 비주얼등 모두 합격이었다.
진호는 가장 안쪽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반죽을 치대는 아버지를 보며 찡한 울림을 받았다.
'확실히 느셨네.'
반죽을 하는 팔의 움직임이 물흐르듯 자연스럽다. 불필요한 동작들이 많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얼마나 연습을 했을지 그 노력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기계를 들이셔도 됐을 텐데 진호는 주방의 벽에 커다랗게 걸린 '내 가족에게 먹인다는 마음으로'라는 표어를 보곤 울컥했다.
"어? 진호 형……"
"쉿!"
놀랐던 정태는 다급히 입을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살이 좀 빠졌네? 내 빵 배우러온 거야? 곽 대표님한테 가지 않고?"
"형 레시피가 더 어려우니까? 그리고 전 손 반죽이 더 좋더라고요."
진호는 피식 웃었다.
"탈의실이 어디야?"
"저쪽이요. 조리복은 안에 많이 있어요."
고맙다는 듯 웃은 진호는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가 조리복으로 환복하고 이형만의 옆에 섰다.
"아버지, 치즈 어디 있어요?"
"누가 아직도 창고 위치를 외우지 못한…… 어?"
고개를 돌린 이형만은 눈을 크게떴다.
"……아들!"
그의 외침에 주방 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들은 진호를 보곤 화들짝 놀랐다.
"아니, 오늘 이제돌 9단과 약속있다며?"
"그건 이미 끝났죠. 그보다 오면서 보니까 치즈 오중주 스콘이나 과일동산 치즈 타르트는 품절이던데요?"
"만들기 어려운 건 한정 판매로만 팔고 있지."
옳은 생각이다. 진호 자신이라도 이렇게 손님이 몰려들면 그런 선택을 했을 거다.
"그럼 오늘만 더 나가기로 해요. 저 온 기념으로."
"……어이구. 손님들 계 탔네. 그런데 괜찮겠어?"
"걱정 마세요. 이럴 때를 위해 운동하는 거니까."
손을 푼 진호는 주방 한 곳에 있는 식재료 창고로 향했다. 그런 그의 등은 평소보다 더 기합이 들어가 있었다.
"오늘은 왠지 더 맛있었던 것 같지 않아?"
"내 말이. 나 아까 딸기빵 먹고 다리에 힘 풀렸잖아."
"크-! 드디어 치즈 오중주랑 과일동산을 맛보다니!"
"청포도 모찌는 또 어떻고? 진짜내가 먹어 본 것 중 최고더라!"
"안녕히 가세요. 또 오세요!"
1층에서 구매한 빵을 먹을 수 있도록 꾸민 2층의 카페테리아에 있던 손님들도 모두 나가자 진형 베이커리는 문을 닫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그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뒷정리를 모두 마친 직원들도 퇴근하자, 이형만은 자신의 어깨를 주무르고 있는 진호의 손을 툭툭쳤다.
"이제 됐다. 너도 힘들잖아."
"만날 이렇게 일하신 아버지보다 힘들까요. 그보다 기계는 왜 안 들이셨어요? 같이 알아보러 다녔잖아요."
"나도 처음엔 그러려고 했지. 그런데 진호 널 좋아하는 팬들이 찾아올 걸 생각하니까 , 힘들게 발품팔아 오는데 밥은 못 해 줘도 손수 만들어 대접해야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더라."
"아버지……"
"뭐 덕분에 이렇게 잘됐잖니. 역시 음식은 손맛이지, 암!"
해맑게 웃는 아버지의 얼굴은 심장이 떨릴 만큼 멋있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진 진호는 손에 힘을 더 주어 주물렀다.
"어이구, 시원하다. 그래도 이제됐어. 네 엄마 기다릴 텐데 얼른 들어가야지. 그리고 들어가는 길에 맥주도 한잔……. 응? 오늘도 괜찮지?"
"아버지."
"응?"
"여행 가실래요?"
"여행?"
"네. 마침 내일 휴일이잖아요."
"어이구, 우리 아들이 피곤하지 않다면 나야 좋지."
"그럼 그렇게 해요."
진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는 내일 하루를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 쓰기로 했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