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권 1화
1. 아이돌의 신
-떠나거든 내 소식이 들려오면
진호는 눈을 번쩍 떴다.
첫 소절부터 귀를 사로잡고 있었다.
'호오?'
공연 영상을 보며 실력이 탄탄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이 정도 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거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잔뜩 얼어 있었는데, 마이크 앞에 서자 언제 그랬냐는 듯 감정을 듬뿍 담아 노래를 부르고 있다.
아쉽게도 좋지 못한 버릇이 몇개 있긴 하지만, 이는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이다.
'아님 트레이너의 실력이 허접했든지.'
진호는 눈을 감으며 그의 노래를 느긋이 감상했다.
슈가달달의 멤버들은 진호의 입가에 피어나는 미소에 주먹을 불끈 쥐며 녹음 부스 안에 있는 리더를 향해 소리 없는 환호를 보냈다.
-너무 힘이 들어 날 버릴까 봐
마지막 멤버의 노래까지 모두 들은 진호는 박수를 쳤다. 다듬어야 할 부분이 꽤 있지만, 인정해 줄만한 실력이었다.
슈가달달은 순간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흑!"
어찌 보면 그들에게 있어서 처음인 타인의 인정.
그것도 갓진호라 불릴 만큼 성공한 진호의 인정이라서 더 감정이 북받칠 수밖에 없었다.
진호는 설움을 절절 토해 내는 그들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나라도 2년 동안 무명이었다면 이랬겠지.'
아니, 이미 그 전에 연예계 일을 하지 않고 다른 일을 찾았을 것이다.
진호는 술 냉장고로 걸어가 맥주를 꺼냈다.
"마셔요."
"네? 아, 아뇨! 괜찮습니다!"
"이게 제 녹음 스타일이라서요. 혼자 마시면 뻘쭘하니까 같이 마셔요."
당황한 슈가달달은 눈치를 보다 가 이내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치익! 딱! 치익!
울었기 때문에 긴장이 풀려서일까.
술이 들어가자 그들의 얼굴이 느슨하게 풀려 가기 시작했다.
"다들 진짜 나이가 어떻게 돼요?"
"네? 아, 전 21살입니다."
"저는 20살입니다."
가장 어린 막내가 18살이었다.
"프로필을 속이지 않았구나……. 그럼 학교는?"
진호는 그렇게 호구 조사를 하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술과 이야기라는 마법에 그들의 긴장이 풀리자, 진호는 이제 때가 됐다는 듯 옅게 웃었다.
"자, 다들 놀 만큼 논 것 같으니까 일합시다!"
"……예!"
벌떡 일어나 녹음 부스 안으로 들어가는 그들의 얼굴은 무척이나 빛이 나고 있었다.
* * *
짝짝짝짝짝!
커다란 스크린이 검게 변하자 넓은 공간에 앉아 있던 코리안 쉐프관계자들 모두 일어나 박수를 쳤다.
"여윽시! 장 감독!"
"수고 했어, 장 감독!"
우해진과 주먹을 부딪친 진호는 오늘 내부시사회를 찾은 관계자 와 투자자들을 향해 허리를 숙이는 장영진에게 다가가 꼭 안아 주었다.
"수고하셨어요."
영상을 보니 장영진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편집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수고하긴. 이제 시작이지."
"이렇게 잘 뽑혔는데도 이제 시작이에요?"
"그러니까. 나도 그것 때문에 죽겠다."
덜어 낼 것을 최대한 덜어 냈는 데도 러닝 타임이 2시간 30분이다. 최소 5분은 더 덜어 내야 했다.
"감독님이라면 잘 해내실 거예요."
"그래야지. 문체부에 선정되라고 중국에서 열심히 활동해 준 어떤 예쁜 사람 때문이라도."
"하하."
"왜 이렇게 예쁜 짓만 할까."
"우연이에요. 우연히 타이밍이 맞았던 거예요."
진호의 볼을 쓰다듬던 장영진이 핏 웃었다.
"그래, 그렇다 치자. 아, 이번에 무명 아이돌에게 노래 줬다면서?"
"아니, 그게 여기까지 들려요?"
"만나는 사람마다 그 소리를 하더라고. 어떻게 잘될 것 같아? 아이돌에게 곡을 준 건 이번이 처음이잖아."
"지켜봐야죠. 그래도 녹음은 잘됐어요."
"와, 깐깐한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로 실력이 좋아? 언제 컴백인데?"
"내일이요."
이제 내일, 아니 일주일이면 실험에 대한 성패가 판가름 날 것이다.
"인성은 어떻습니까?"
LVMH 코리아의 전무 이사가 눈을 빛내며 다가왔다.
진호는 못 말리겠다는 듯 웃었다.
'작은 액수의 스폰이라도 그 애들에게는 빛과 같겠지.'
"다들 착했어요. 성공에 대한 욕심도 가득하고."
"흐음…… 알겠습니다, 진호 씨. 아, 장 감독님. 영화 재밌게 봤습니다. 저희 LVMH가 조금 더 드러났으면 훨씬 더 재밌었을 테지만 말입니다."
진호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박 이사님."
"크흠.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전무 이사가 그렇게 떠나고, 다른 사람들도 내부 시사회장을 떠나자 장영진은 진호의 등을 팡 쳤다.
"역시 우리 진호가 있으니까 깔끔하네!"
투자자의 개입으로 인해 쓸모없는 협찬 물품이 들어가 영상을 망치는 건 이 업계의 고질적인 문제였다.
"그러니까! 교통 정리가 아주 휙휙! 진짜 영화 찍을 맛나네. 수고 했어, 장 감독. 앞으로 더 수고해야 할 것 같지만."
"우배우가 좀 도와줘요."
"에우으! 난 그런 거 못 해! 대신술친구는 해 줄 수 있는데, 그건 어때?"
"아, 그거 좋다. 언제든 콜입니다?"
"당연하지!"
"헐? 저만 쏙 빼시는 거예요?"
아차 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피식 웃은 진호가 입을 열었다.
"오늘 시사회 결과도 좋았는데, 한잔하러 가셔야죠?"
"당연히 그래야지. 이미 예약 다잡아 놨어."
"오오, 역시 장 감독! 메뉴가 뭐야?"
"당연히 우리 진호가 맛깔나게 구워 주는 삼겹살이죠!"
"뭐야, 오늘 집에 들어가지 말자는 소리야? 그렇지만 나도 콜!"
"뭐예요. 제 의견은 없는 거예요?"
"사랑한다, 진호야!"
"……에휴. 가시죠, 가."
"푸흐흐! 그래. 자, 갑시다-!"
"가즈아-!"
그들은 그렇게 나란히 서서 근처 고깃집으로 향했다.
* * *
슈가달달의 리더, 승현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복도를 보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건 슈가달달의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이 음악방송 복도……"
"우, 우리가 음악방송에 출연하게 되다니……"
"난 우리가 뮤직비디오랑 쇼케이스를 다시 할 줄도 몰랐어."
야심차게 데뷔를 했을 땐 뮤직비디오와 쇼케이스를 진행했지만, 데뷔 앨범을 대차게 말아먹은 이후로 지난 2년간 컴백 쇼케이스는 커녕 뮤직비디오조차 찍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볼을 꼬집어 보았다.
그건 그들을 따라온 사장도 마찬가지였다.
"윽! 진짜네……"
승현과 멤버들은 사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가 순간 울컥했다.
평소엔 그렇게 든든했던 사장님이 오늘만큼은 왜인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장님은 전에 여기 자주 오셨다면서요!"
"그, 그게 벌써 몇 년 전인데!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진호 씨! 갓진호 님! 갓진호 님에게 연락을…… 억? 내 핸드폰!"
"……차에 놓고 오신 거 아니에요?"
"맞아! 차!"
"얼른 다녀오세요!"
"그래! 얼른 …… 아니지, 일단 너희들 대기실부터 집어넣고! 빨리 따라와!"
"네!"
그들은 어미 오리와 새끼 오리들이 되어 빠르게 대기실로 이동했다.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간 그들은 순간 주춤했다. 안에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곧 정신을 차렸다.
몰리는 시선들에 우렁차게 인사한 그들은 능숙하게 빈자리를 찾아 들어가 이제부터 여긴 우리 것이라며 못을 박듯 짐들을 내려놓으며 영역을 만들었다.
"오면서 화장실 봤지? 난 얼른 핸드폰 가져올 테니까 그동안 너희들은 선배님들께 인사드리고 와. 할 수 있지?"
"걱정 마세요. 행사 뛰면서 앨범들고 인사 드렸던 게 한두 번인가요? 얼른 다녀오세요!"
떠밀듯 사장을 내보낸 그들은 내려놓은 짐에서 앨범을 꺼냈다.
"안녕하세요, 슈가달달입니다."
"안녕하세요."
"오, 너희들이 개들이야? 이진호 작곡가한테 처음으로 노래 받았다는?
"넵! 슈가달달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슈가달달입니다!"
그렇게 다른 대기실까지 모두 돌고 온 그들은 대기실에 구축해 놓은 영역 안에서 초조하게 대기했다.
"하, 전화 안 받으시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스케줄 중이시겠죠."
"그렇겠지?"
"네. 그러니까 방해하지 말아요, 저희."
"끙. 그래야겠네."
승현은 리더로서 애써 대범하게 말했지만, 그래도 좀 서운했다.
'아니지! 너 미쳤어? 이렇게 좋은 곡을 주신 게 어딘데!'
승현은 스스로를 욕하며 정신을 다잡았다.
그건 다른 멤버들과 사장도 마찬가지였다.
벌컥!
"슈가달달! 있어요?"
"네! 여기 있습니다!"
"리허설 10분 전입니다! 대기하세요!"
리허설. 그동안 행사를 뛰는 동안 단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것.
순간 잔뜩 얼어 안절부절못하던 그들은 이내 이를 악물며 일어섰다.
두 번 다시 찾아오질 않을 기회다.
그걸 이렇게 초조해하다가 놓칠수는 없었다.
슈가달달 멤버들은 동시에 서로를 보았고, 승현은 크게 외쳤다.
"슈가달달!"
"여심을 녹이자!"
"아자아자, 파이팅!"
대기실 안에 있던 다른 가수들과 스태프들은 그런 그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어찌어찌 리허설을 마치고, 어찌어찌 대기를 하고 있자 어느새 순서가 되었다.
백스테이지에 선 그들은 멍하니 무대를 보았다.
쿵쿵쿵쿵쿵!
중독성 강한 비트와 현란하면서도 절도 있는 군무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지금 그들의 눈과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심장 소리와 숨소리가 머리를 터트려 버릴 듯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희야! ……현아!"
"응?"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고개를 돌린 승현은 방방 뛰고 있는 사장을 볼 수 있었다. 그제야 멍해있던 그의 오감이 돌아왔다.
"너희 차례라고! 얼른 올라가!"
"네, 네! 애들아!"
"어, 응!"
조명이 켜진 무대 위로 후다닥 올라간 그들은 객석을 보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이쪽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심드렁한 얼굴들 때문이다.
행사에서 너무 자주 보던 모습.
가소롭다는 듯 쳐다보는 여자들의 눈빛 또한 너무 익숙했다.
왜인지 웃음이 나온 그들은 서로를 보며 다시 한번 파이팅을 했다.
"셋, 둘!"
* * *
쿵쿵쿵쿵쿵!
"와아아아아아!"
"꺄아아아아아!"
다행히도 무대가 아주 잘 보이는 자리를 얻게 된 진호는 화려하고 절도 있는 군무를 추며 노래하는 보이 그룹을 보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양 사장님이 군무도 아이돌 음악의 일부분이라고 했지?'
전과 달리 각을 잡고 보니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거……'
무슨 일인지 낯빛이 흐려졌던 진호는 스테이지로 올라오는 남성들을 보곤 눈을 빛냈다.
슈가달달이었다.
화려한 무대 의상과 무대용 메이크업을 한 그들의 빛나는 모습은 진호로 하여금 절로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진호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난생처음 서 본 무대인지 저번 가녹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는 그들.
'에구. 이름이라도 불러 줘야 하려나?'
진호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셋, 둘! 안녕하세요! 누나들을 달콤하게 녹여 버리겠다! 슈가달달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스피커를 통해 우렁차게 울리는 그들의 인사에 진호는 양손을 입앞으로 모으며 입을 벌렸다.
아니, 벌리려고 했다.
"꺄아아아악!"
"슈가달달-! 파이팅-!"
스테이지까지 쩌렁쩌렁하게 닿는 세 명의 외침.
슈가달달뿐만 아니라 진호마저놀라 목소리의 주인을 쫓을 수밖에 없었다.
"오?"
객석 구석진 곳에서 슈가달달 파이팅이라는 피켓을 든 세 남녀가 주위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었다.
눈시울이 붉어지는 슈가달달의 모습에 다시 흐뭇하게 웃은 진호는 입을 크게 벌렸다.
"슈가달달 파이팅-! 오늘 실수하면 나한테 죽는다-!"
쩌렁쩌렁!
"악!"
"큭!"
다급히 귀를 막은 진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진호를 발견하곤 경악했고, 슈가달달은 끝내 눈물한 방울을 흘렸다.
그러다 아차하며 다급히 눈물을 닦은 그들은 재빨리 자세를 잡았고, 이윽고 MR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간주에 맞춰 화려한 군무를 추던 그들 중 리더가 앞으로 걸어 나오며 입을 열었다.
진호는 홀을 울리는 그의 노래에 미소를 지었다.
역시 오늘도 리더는 귀를 만족시켜 주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진호의 얼굴은 점점 굳어 갔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