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권 22화
리딩은 무척이나 치열했다.
오늘리딩 결과에 따라 출연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한 치의 실수도 있으면 안 될 것이다."
장칭의 눈에 위엄이 서리고,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묵직한 목소리가 리딩장을 짓누른다.
어떻게든 그 명령에 따라야 할것 같은 마력을 가진 목소리.
그런데 약간은 경박해 보이는 목소리가 불만을 잔뜩 품고 반박하고 나섰다.
"이건 말이 안 됩니다, 대장군! 공주의 암행 호위 따위를 대장군께서 맡으시다니요! 말이 암행이지, 숫제 꽃구경이 아닙니까! 대체 황제 폐하께서는……"
경박한 목소리의 주인은 말을 다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가만히 노려보는 장칭의 시선 때문이었다.
그가 입을 다물자 장칭은 시선을 거두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한 치의 실수도 있으면 안 될 것이다."
"예!"
'워, 왜 대장군 장칭이라고 하는 줄 알겠네.'
방금 전까지 사람 좋은 미소를 짓던 할아버지는 어디가고, 일국의 대장군만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신 넘버 12. 꽃구경할 생각에 신난 8공주."
"와아!"
사람들이 귀엽게 탄성을 터트리는 8세가량의 여자아이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녀는 너무 기특하게도 또랑또랑 귀엽게 연기를 했다.
진호의 어린 시절을 연기할 아역도 마찬가지였다.
"신 넘버 20. 성장 후. 늦은 밤황궁을 몰래 빠져나가는 8공주."
진호는 비롯한 배우들은 려위에, 한국어로 리월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눈동자가 흔들린 그녀가 대본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 아무도 없지?"
'호오?'
표정은 무심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불안과 초초, 흥분이 가득 담겨있다. 진호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감독님과 함께 들어오기에 낙하산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한마디의 대사가 단숨에 귀를 사로잡고 있었다.
"공주님, 정말 이러시면 안돼요. 폐하께서 아시면……"
"시끄러워, 링링. 오늘이 아니면 내년까지 기다려야 한단 말이야. 이러다 들키면 모두 네 책임인 줄알아!"
"들키면 공주님이 아니라 제가 혼난다고요……"
"그, 그건……"
"순찰을 하다 공주를 발견한 병사. 공주님?"
"끕! 쉿. 쉬잇!"
"쉬잇?"
사람들은 순간 웃음이 터질 뻔했다.
그러면서도 강하게 몰입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그렇게 병사의 도움으로 겨우 황궁을 빠져나와 축제 구경을 하던 공주는 뒤늦게 그녀가 사라진 걸 깨닫고 쫓아온 황궁 병사들에게서 도망을 친다.
이대로 축제 구경을 끝내기에는 아쉬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도망을 치던 그녀는 마차에 숨었다가 잠이 들고, 결국 성도를 벗어나 주인공이 사는 마을에 당도 하게 된다.
도둑으로 오인을 받은 그녀와 시녀는 이번에도 도망을 치다 숲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늑대와 만나게 된다.
"호랑이 위협한다. 크르릉."
"끄흡!"
"호, 호랑이!"
려위에와 시녀가 양손으로 입을 막자 사람들의 시선은 진호에게로 몰렸다.
그렇게 전신에 시선들이 틀어박혔지만, 이미 주인공에 몰입한 진호는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크게 외쳤다.
"멈춰, 링링-!"
쩌렁쩌렁하지만 다급함이 가득 서린 목소리. 진호의 연기를 눈앞에서 보는 것은 처음인 장칭과 소윤발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이 드라마의 진짜 주인공 등장이었다.
"후아!"
"하!"
리딩이 끝나자 사람들은 너 나할 것 없이 모두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만큼 치열한 리딩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그렇게 외치는 쉔수쉐이의 얼굴이 밝았다.
주연과 주연급 조연들의 연기력이 상상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장칭, 런다텐, 소윤발의 포스에 밀리기는 커녕 오히려 잡아먹으려고 들었던 진호의 연기력은 감동 그 자체였다.
"수고하셨습니다!"
모두 힘차게 외쳤지만,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울상을 지었다.
합격과 탈락 통보는 문자를 통해 보내져 결과를 모른다지만 그건 아니다. 결과는 연기를 한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저 중에서 다음 주에도 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참 언제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여주는 다음 주에도 볼수 있겠네.'
얼른 카메라 앞에서 호흡을 맞추고 싶을 정도로 뛰어난 연기력.
대배우들 사이에서도 기죽지 않고 태연히 연기하는 그녀의 모습에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이게 겨우 두 번째 작품이라고?'
천재라는 단어가 진호의 머릿속을 스쳤다.
진호는 왜인지 이쪽을 보며 머뭇거리는 그녀를 향해 웃어 주고는 장칭을 보았다.
"할아버지, 제 연기 어땠어요?"
"허허. 말해 뭐할까."
매번 볼 때마다 성장을 하는 진호는 장칭에게 있어 가장 큰 자랑거리였다.
오늘은 더더욱 그랬다.
물이 오른 것을 너머 완숙의 단계에 접어든 연기력.
'이 나이에 이런 연기력이라니…… 이 아이가 삼십대가 된다면?'
인간으로서 모든 게 성숙해지는 나이인 삼십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전율이 온몸을 내달렸다.
'휴우. 다행이다.'
친할아버지처럼 생각하는 장칭이기에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진호는 머리를 쓰다듬는 장칭의 따뜻한 손길에 배시시 웃다가 아차하며 이쪽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는 소윤발을 비롯한 다른 배우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하핫! 다음 주에 보자고, 주인공!"
'인정받았다!'
진호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소윤발과 다른 배우들은 엄지를 치켜들고는 리딩장을 빠져나갔다.
진호는 이젠 손을 쓰다듬는 장칭을 향해 싱긋 웃어 주었다.
"저희도 이제 일어나요."
마지막으로 려위에까지 나가면서 리딩장에는 둘만 남겨졌다.
"그럴까? 오늘 다른 일 있니?"
"있어도 할아버지와 보내야죠. 오늘 저랑 백화점 가서 옷도 사고, 맛있는 것도 먹어요!"
"허헛! 그럴까?"
"오예! 어서 가요!"
진호는 장칭의 손을 꼭 잡고 나가며 리딩장의 불을 껐다.
딱!
* * *
드라마에 관한 소식은 놀랍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아무리 인터넷을 뒤져 봐도 대본 리딩에 관한 이야기는 단 하나도 나오질 않았다.
"극비리에 진행하려고 하나? 하긴……"
제작비만 3억 위안, 한화로 500억이 훌쩍 넘는 제작비를 투자한 드라마 두 작품을 거하게 말아먹었다.
대본조차 완전히 다듬어지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욕을 먹을 필요는 없었다.
"역시 중국은 중국이네. 투자액의 규모가 달라."
그렇다 보니 페이도 굉장히 차이가 났다.
왜 한국에서 어느 정도 뜨면 중국에 진출하는지 확실하게 이해될 정도였다.
"그런데 많아도 너무 많은데……"
돈은 많을수록 좋지만, 그래도 너무 많았다.
진호는 이 돈을 어떻게 하면 알차게 쓸 수 있을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아, 린펑 형!"
고개를 든 진호는 쑤린펑의 옷차림을 보곤 피식 웃어 버렸다.
"형은 진짜…… 그 좋은 몸과 외모를 왜 그렇게 낭비해요?"
쑤린펑이 입은 건 트레이닝복 재킷과 청바지였다.
정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패션이었다.
"크흠. 가자. 늦었어."
"큭큭. 네!"
"아, 축구화는 챙겼지?"
오늘은 쑤린펑에게 축구를 배우는 날이었다.
진호는 옆에 둔 가방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와. 연습 구장이 이런 곳이구나……"
난생처음 와 본 연습 구장은 신세계나 다름없었다.
"3부 리그로 시작한 상하이 상강의 연습 구장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좋지. 역사도 길고!"
"푸하핫!"
역시 상하이 선화에서 레전드라 불렸던 선수다운 말이었다.
'하지만 홈구장 크기는 작지.'
상하이 선화의 홈구장은 진호가 생에 처음으로 콘서트를 열었던 훙커우 스타디움이다.
'그래서 다음번엔 상하이 스타디움에서 열 생각인데……'
상하이 스타디움은 상하이 더비라 할 수 있는 상하이 상강의 홈구장이다. 8만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 경기장이다.
진호는 그 말을 아끼기로 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지금 시즌 중 아니에요?"
"어제 경기가 끝나서 선수들 모두 하루 동안 휴식이야."
"그래도 이렇게 함부로 쓰면 돌아갈 때 정리만 잘하면 돼. 우릴 들여보내 준 관리인 아저씨에게 드릴 약간의 술값도 잊지 말아야겠지."
"아아,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드려야죠."
덕분에 이목을 끌 걱정 없이 맘편히 축구를 배울 수 있게 됐다.
사인해 주고 사진 찍어 주는 걸 좋아한다지만, 계속 방해를 받을 수는 없었다.
'괜히 기사화되는 것도 싫고.'
"따라와. 몸부터 풀자."
"옙!"
진호는 쑤린펑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억?"
공을 뻤기 위해 발을 뻗었는데, 어느 순간 타닥! 쑤린펑의 발이 공 위에서 춤을 추더니 공이 사라져 버렸다.
쑤린펑도 함께 말이다.
진호는 빙글 돌 듯 옆을 지나가는 쑤린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게 크루이프 턴."
"오오오."
짝짝짝!
진호는 찰나지만, 정말 마술처럼 공을 사라지게 만든 그의 개인기에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어때, 이번에도 할 수 있을 것같아?"
"……아마도?"
제자리에 서서 발을 까딱거리고 발목과 몸을 살짝 살짝 비틀던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습 몇 번만 하면 될 것 같아요."
"……해 봐."
고개를 끄덕인 진호는 툭 패스된공을 발바닥으로 잡으며 툭툭 치고 달렸다.
그러다 순간 몸을 틀며 공을 컨트롤했고, 마치 자석에 붙은 듯 진호의 발을 따라 움직이는 공에 쑤린펑은 허탈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직 어설프긴 했지만, 분명 크루이프 턴이었다.
"역시 반칙이라니까 ……"
가르쳐 주면 가르쳐 주는대로 흡수해 버리는 악마 같은 재능.
피식 웃은 그는 순간 눈을 빛내며 이쪽을 향해 공을 몰며 달려오는 진호에게 달려들었고, 진호도 눈을 빛내며 더욱 속도를 높였다.
촤좍! 타닥!
다시 한번 뺏으려는 자와 뚫으려는 자의 대결이 시작 됐다.
아니, 시작되려던 그때였다.
"오! 이게 누구야! 린펑 형이잖아!"
"오오! 연예인이 여긴 웬일?"
진호는 안으로 들어오는 선수로 보이는 사람들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오늘은 여기까지인가?'
* * *
"끄응. 죽겠군.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나."
긴 복도를 걷는 상하이 선화의 감독인 키케 산체스가 무거운 이마를 잡았다.
오랜만의 대승을 자축하며 코칭 스태프들과 맥주 한 캔을 마셨을 뿐인데, 마치 감기에 걸린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핫!"
"더 높이!"
"음?"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창문을 향해 고개를 돌린 키케 산체스는 미간을 좁혔다.
'분명 휴가를 줬을 텐데, 누가?'
몸이 생명인 선수는 휴식도 훈련의 일환이라는 게 그의 지론인 만큼 , 기껍기보다는 짜증부터 났다.
혀를 차며 소리의 주인들을 찾아 움직인 그는 헛웃음을 지었다.
"역시 저들이었군."
공을 가지고 뛰어노는 이들은 그의 예상대로 유부남인 선수들이었다.
"오늘도 집에서 도망쳐 나온 건가? 그런데……"
가만히 그들을 보던 키케 산체스는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게임을 할 거면 장비를 갖추고 할 것이지 왜 운동화만 신고 있어!"
부상을 생각 안하는 그들의 안일한 모습이 키케 산체스의 심기를 자극했다.
거기다 너무 진지했다.
"막아!"
"좁혀! 좁히라고! 패스할 공간을 주지 마!"
실제 경기 같은 치열함이 전해져왔다.
뻥!
'오?'
포물선을 그리며 빠르게 날아가는 크로스에 키케는 잠시 화를 잊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아름답군. 완벽해."
폼마저 날갯짓을 하는 학을 보는 것처럼 우아했다.
"호오? 누구지?"
난생처음 보는 뒷모습이었다.
"2군 선수인가?"
그 자리에 선 그는 담배를 입에 물며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는한 장면을 보며 입을 벌릴수밖에 없었다.
"……우아아아악!"
"고오오오올!"
20미터의 거리에서 레이저처럼 쏘아져 우측 상단 야신 존을 꿰뚫은 슛. 우연이 아니라 분명 노리고 쏜 것이었다.
툭!
키케 산체스는 입에 물었던 담배를 떨어트렸다.
"대체 누구야, 저놈?"
멍해 있던 그의 눈동자가 소유욕으로 화륵 타올랐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