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권 21화
당연하게도 촬영장은 난리가 났다.
미영은 동물 관리를 못한 사육사와 관리자들에게 불같이 화를 냈고, 정 실장도 콧김을 씩씩 뿜으며 차례를 기다렸다.
그렇게 둘은 뜨거웠지만, 다른 이들은 온몸에 피가 빠져나간 듯한 한기를 느껴야 했다.
그들은 촬영장 한구석에 있는 진호를 바라보았다.
탁!
진호의 손이 늑대의 주둥이를 때렸다.
"못된 입. 못된 입. 너 누가 함부로 혀 놀리래?"
늑대의 혀는 입마개 밖으로 튀어나와 진호의 얼굴을 침 범벅으로 만들어 놓았다.
"컹!"
"뭐가 몇 년째 혼자라는 거야? 너 지금 변명해?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먹힐 줄 알아?"
"컹!"
"씁! 뭐가 사랑해야? 난 인간이라니까? 너랑 종족이 달라요. 그리고 암컷이 도도할 줄도 알아야지, 어? 아무 남자한테 막, 어? 사과도 안 하고, 어?"
"끄으응."
"……쯧."
사과라는 말에 금세 미안한 모습을 보이자 마음이 약해진 진호는 한숨을 내쉬며 늑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헥헥헥."
"……그저 좋단다. 잠깐만 여기있어. 네 주인 좀 구해 주고."
"컹?"
"주인 아니야?"
"컹! 크르르."
"……아, 그래."
'그냥 밥 주는 사람이니까 따라주는 거구나.'
눈이 짜게 식은 진호는 그래도 귀여운 늑대를 한 번 더 쓰다듬어주고는 미영에게 다가갔다.
"난 괜찮아요, 이모."
"넌 시끄러워! 이런 건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어!"
"그래, 진호 넌 가만히 있어!"
살벌한 반응이었지만, 진호는 씩 웃었다.
"어쩌겠어. 내 매력이 철철 넘치는 건데."
"뭐?"
"흐흐. 재도 반성하고 있고, 나도 단단히 주의 줬으니까 이쯤에서 그만합시다. 촬영해야지."
입을 꾹 다문 미영은 말없이 진호를 째릿 노려보다 가 이내 돌아서 어딘가로가 버렸고, 진호는 입맛을 다셨다.
"삐졌네. 실장님도 그만하세요. 이분이 제일 놀라셨을 거예요."
"씨…… 하아. 됐다, 됐어. 너한테 말해 봤자 공염불이지. 하지만 한 번 더 이런 일이 있으면 그땐 정말 가만 안 있을 거다."
"흐흐. 알았어요."
정 실장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돌아서자 진호는 혀를 내둘렀다.
'씨 다음에 바까지 입이 벌어졌지?'
"아, 괜찮으세요? 많이 놀라셨죠?"
"죄, 죄송합니다-! 밍밍이 원래 그런 아이가 아닌 데…… 정말 죽을죄를 졌습니다."
"아니에요. 활동적이다 보면 그럴수 있죠. 그런데 스트레스가 많이 쌓인 것 같더라고요."
"스트레스 말입니까?"
"그 수컷과 암컷 간의…… 무슨 말이신지 아시죠?"
"아……"
진호는 그들이 알아들은 것 같자 눈빛을 싸늘하게 가라앉혔다.
"아무리 임신하면 돈을 벌기 힘들어서 그런다고 해도 순리는 지키면서 살아야죠."
"흡? 아, 아니, 그게……"
'애가 얼마나 굶었으면 사람한테 덤벼들어?'
아무리 [스킬: 페로페로몬]과 [스킬: 나는야, 자연의 왕자] 때문이라고 해도 과했다. 이성보단 본능이 강한 동물들이기에 더욱 자연의 순리를 지켜 줘야 했다.
진호는 쩔쩔 매는 밥 주는 사람들을 노려보다가 돌아섰다.
'밍밍 상태가 좋지 않았으면, 당신 진짜 가만 안 뒀어.'
"메이 실장님! 어디 계세요? 저 만져 주셔야 촬영 시작하죠!"
그렇게 촬영장은 빠르게 안정되어 갔다.
파바바바밧! 타다다다닷!
검은색 슈트를 입은 진호와 서면 진호보다 큰 잿빛 늑대 밍밍이 대나무 숲을 달린다.
비이이이이잉!
십여대의 헬리캠이 하늘을 날며 쫓고, 초고속 카메라가 놓인 레일위를 달린다.
포토그래퍼는 초고속 카메라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구도를 바꿔 가며 진호를 찍었다.
"훅훅훅훅훅!"
"헥헥헥헥헥!"
"진호 씨! 편안하게! 훅훅거리지마!"
'그게 가능한 겁니까?'
"코 벌름거리지 말라고! 입도 오므리지 마! 그렇지. 그렇지. 그래, 그거야! 눈빛은 불타오르게! 아이, 좋다!"
촤라라라라라락!
카메라 셔터음이 진호의 귀를 간질였다.
"레일이 끝나 갑니다!"
"스탑-!"
타닷!
진호와 밍밍도 멈췄다.
"훅! 후욱!"
"헥! 헥! 케헥!"
진호는 밍밍을 보며 피식 웃었다.
"어쩐지 살이 말랑말랑하더라니. 살찌고 허약한 밍밍이었네. 그래서 마음에 드는 상대를 쟁취할 수 있겠어?"
"컹!"
"……어, 음. 그래. 나한테는 하지마."
찍어 누르면 된다고 외치는 걸크러쉬 밍밍에게서 슬쩍 물러선 진호는 포토그래퍼에게 다가갔다.
"진호 씨, 이거 어때?"
"……워후."
역동적이다.
그 말 외에는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었다.
"S급이네요."
A를 넘어 S. 이보다 더 좋은 장면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지? 진호 씨가 봐도 그렇지? 모두 진호 씨랑 저 늑대의 캐미가 미칠 듯 좋아서 그런 거야! 아, 이 표정 살아 있는 거 좀 봐!"
진호뿐만 아니라 늑대마저도 표정이 살아 있다.
제아무리 CG가 발전했다고 하더라도 흉내 낼 수 없는 날 것 그대로의 자연스러움.
"애니멀 포토그래퍼가 이런 표정을 찍을 수 있을까, 내셔널 포토그래퍼가 이런 아우라를 찍을 수 있을까! 진짜 미치겠네!"
진호는 동감이라는 듯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단번에 감탄이 터져 나올 만한 샷이다.
그러면서도 슈트가 제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이젠 밍밍이랑 레슬링만 하면 되겠네요. 열심히 할게요."
"슈트가 찢어지지 않게만 해. 슈트에 묻는 흙먼지 따위는 보정하면서 지우면 되니까!"
고개를 끄덕인 진호는 이쪽을 가만히 바라보는 미영을 향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이번 화보, 느낌이 좋았다.
'이슈되겠다.'
* * *
화보는 10일 뒤에 발행되었다.
진호의 예상대로 패션계의 반응이 무척이나 뜨거웠다.
여태껏 오지나 야생 동물을 쫓아다니는 사진 작가들조차도 찍기 힘든 맹수의 다양한 표정과 몸짓.
거기다 간간이 드러나는 야생성.
그리고 그런 맹수와 함께 뛰어놀며 슈트를 완벽하게 드러낸 진호.
그것은 분명 거장이 만든 명화나 다름없는 감동을 주었다.
패션계뿐만 아니라 포토그래퍼들마저도 막대한 충격을 받았다.
지니어스는 말할 것도 없었다.
화보가 실린 잡지는 발매한 지단 하루 만에 증쇄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진! 정말 당신은…… 당신은!
"하하. 진정해요, 팀."
-……하아. 정말 나보고 어떡하라는 건가요, 진. 이번 맨즈 컬렉션에 올릴 작품들을 모두 만들어놨단 말입니다!
"아……"
-후! 아무튼 오늘부터 나와 연락이 안 될 거예요. 누구 때문에 컬렉션에 올릴 작품들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니까!
뚝 전화가 끊기자 진호는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다시 전화가 오자 재빨리 받았다.
"네, 피에트로!"
-이번에도 멋진 사고를 쳤더군요, 뮤즈. 당신 때문에 6월 맨즈와 9월 패션위크의 테마가 야생일 거라는 소문이 도는 건 압니까?
"네?"
-당신의 화보에 영감을 받은 많은 디자이너들이 맨즈와 패션위크에 선보일 작품들을 찢어 버렸다는군요. 물론 마리나와 팀 역시도 말이죠. 전 세계가 사바나 정글이 될 겁니다.
"……아하하하하."
'헐? 그 정도였어?'
충격과 공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굉장히 뿌듯했다.
'또 몸값이 오르려나?'
그래 주면 감사할 뿐이다.
'밍밍이한테 소시지 보내 줘야겠다.'
아주 특별히 손수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축하드립니다.
"하하. 고마워요, 피에트로."
-그런데 아르노에겐 연락이 왔습니까?
"아뇨? 원래 그분은 잘 연락하지 않잖아요. 무슨 일 있나요?"
-요새 볼 만한 드라마가 없다고 꽤 투덜거리더군요. 별에서 찾아온 당신은 모두 봤다고.
"푸하핫! 그래요?"
그렇게 피에트로와 제법 길게 통화를 한 진호는 시간이 되자 전화를 끊으며 차에서 내렸다.
"진호야, 파이팅이다."
따라 내리는 정실장의 표정이 굳어 있다.
오늘이 총 리딩을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오늘 리딩 결과에 따라 중국 체류 연장과 한국 복귀가 갈린다.
'주인공이 바뀌는 경우는 거의 없고, 난 애초부터 컨택이 된 거지만……'
요는 자존심 문제다.
배우로서의 자존심.
생전 처음 보는 이들이라고, 타국인이라고 굽히고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압살해 버려!"
"넵!"
진호는 전의를 다지며 지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잉?"
"엥?"
"오?"
그 어떤 텃세가 있더라도 실력으로 찍어 누르겠다는 전의를 가지고 들어온 리딩 장소다.
그런데 아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었다.
"할아버지!"
장칭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장칭의 소극장의 배우들도 있었다.
"허허. 왔니?"
"오랜만이야, 진호야!"
"자주 좀 찾아와!"
"거기다 다랜 아저씨와 안젤리카 이모까지?"
"오! 조카!"
더 씨프에서 친해지게 된 런다렌과 안젤리카.
둘과는 더 씨프 촬영 종료 이후 자주 통화를 하며 친해지게 되었다.
'뭐야, 이건?'
모르는 배우도 많지만, 그래도 힘이 쭉 빠졌다.
물론 반가움이 더 앞섰다.
"아니, 여기에 출연하시는 거라면 말을 하시지……"
진호는 장칭 옆에 난 빈자리에 앉으며 투덜거렸다.
"이런 일은 놀래켜야 맛이 아니겠니."
"그럼그럼."
진호가 쉔수쉐이의 섭외를 받아들였다는 말에 할아버지로서 힘이 되고자 발 범고 나선 장칭이 푸근히 웃었다.
같은 의미로 쉔수쉐이를 찾은 런다렌과 안젤리카도 짓궂게 웃었다.
"전 별론데요."
"허허헛."
입술을 삐죽 내민 진호는 맞은편에 앉아 이쪽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노년에 가까운 배우를 보곤 마른침을 삼켰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샤오룬파 씨. 이진호입니다."
사오룬파. 한국식으로 발음하면 소윤발.
영원한 따거라 불리는 그였다.
'이 배우 구성, 실화냐?'
영원한 대장군 장칭에 대배우 런다렌, 영원한 형님 소윤발.
대본을 발로 써도 볼 수밖에 없는 배우들이다.
'와, 이런데도 이 드라마에 대해 소문이 안 났다고?'
오늘 리딩이 끝난 후에 이에 관한 기사가 나갈 터였다.
이젠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테니 말이다.
"하핫. 여기 장칭 선배님과 다랜이 그렇게 칭찬하던 만능 엔터테이너를 만나게 되어 제가 더 영광입니다."
본래 소윤발은 출연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런다렌이 혀를 내두르며 칭찬을 하고, 장칭이 후회하지 않을 거라 말하며 부르자 호기심이 생겨 출연하게 되었다.
"마, 말 편히 해 주십시오. 까마득한 후배입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진호는 그 특유의 선한 미소를 짓는 그를 보며 '역시 젠틀하다'라는 생각을 가졌다.
그러며.
'이거 까딱하면 잡아먹히겠다!'
배우진 구성은 정말 화려하지만, 그 때문에 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연기해야 할 듯 싶었다.
이들 세 명의 연기력에 짓눌릴수도 있으니 말이다.
'……뭐, 언제는 쉬웠냐마는!'
생각해 보면 첫 드라마부터 배우진이 화려했다.
최근에 찍은 드라마 별당신의 상대역은 김주아였고, 코리안 쉐프는 우해진이 아빠였다.
진호는 싱긋 웃었다.
"물론이죠."
'호?'
'호오?'
순식간에 상황을 깨닫는 것도 모자라 각오를 다진 진호의 모습에 장칭과 런다렌, 소윤발, 안젤리카등 나이 든 배우들 모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하하. 그러도록 하지. 하지만 연기에서는 안 봐줄 거야."
"어후. 당연하죠. 그건 제가 거부하겠습니다!"
"……하하하하핫!"
다시 싱긋 웃어 준 진호는 장칭을 보았다.
"살을 좀 찌우셨네요?"
"배역 때문이지."
"대장군?"
"그렇지. 여기 룬파는 황제고, 다렌은 나와 반대 파벌의 대장군이란다."
"아아."
'그럼 안젤리카 이모가 내 엄마거나 공주의 엄마겠구나. 근데…… 여주는 누구지?'
젊은 여자 배우들 모두 누가 더낫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미녀들만 있다.
진호는 일단 의문을 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기 좋으세요."
"그러니?"
진호는 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장칭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보일지는 몰라도 몸이 무거워서 영……"
"운동하시면 되죠. 정말 보기 좋으세요."
"운동은 무슨……"
벌컥.
문이 열리자 고개를 돌렸던 사람들 모두 몸을 일으켰다.
이보다 더 기쁠 수 없다는 듯 환하게 웃는 쉔수쉐이가 한 명의 젊은 여성과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
'아, 저 사람인가 보네.'
앞으로 몇 달이 될지 모르는 시간 동안 함께 호흡을 맞춰야 하는 여주인공.
'딱 봐도 발랄해 보이는 게……'
이번 드라마 여주인공의 성격과 아주 잘 어울렸다.
아니, 귀염상인 얼굴을 본 순간 바로 여주가 떠오를 정도였다.
진호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