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권 19화
뻥! 퍼억!
-억!
-야, 진심으로 하는 거냐!
-그냥 반칙해!
-택배 갑니다-!
-막아!
희뿌연 담배 연기가 가득한 어둡고 좁은 공간. 몇 개의 모니터가 빛을 발하며 이틀 전 밤에 일어난 일을 재생시키고 있다.
'가족이 간다' PD는 입에 문 담배를 떼어 내며 숨을 길게 내뱉었다.
"8 대 2……."
제작진 팀이 졌다.
지칠 줄 모르고 뛰어다닌 두 천재가 만들어 낸 스코어로 인해 평소 찍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촬영분이 줄었지만, 그렇다고 재촬영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분량이 너무 넘쳐서 솔직한 심정으로는 2부로 나누어 2주 동안 방송하고 싶었다.
탁! 타악!
메인 모니터에서 재생되는 화면이 빠르게 넘어가다 어 둔 밤 평상에 모여 앉은 '가족이 간다' 패밀리들과 진호를 비추자 그는 재빨리 기기에서 손을 뗐다.
-당신은 내게 물었죠.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냐고,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옆에 맥주 캔을 내려놓은 채 기타 현을 훑는 진호의 노랫소리.
"……크-! 죽인다, 죽여! 진짜 우리 중국인 심장을 저격할 줄 알아!"
밤하늘 뜬 달을 보는 연인의 애절하고도 부끄러운 속삭임, 월량대표아적심.
마침 보름달이 높이 떠서 더욱 분위기를 살렸다.
"정말 완벽해!"
PD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도 박수까지 쳐 가며 혀를 내둘렀다.
벌컥!
"뭐가 그렇게 재밌어?"
머리가 허연 노인이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왔지만, PD는 화를 내지 못했다.
"사, 사장님?"
그는 상하이 TV의 예능국 국장도 아닌 사장이었다.
"흠. 그게 그거야?"
사장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PD가 마른침을 삼켰다.
"다른 말 필요 없습니다. 이번 편은 전설입니다."
"……그놈의 허풍은 여전하군. 처음부터 재생시켜 봐. 나도 한번 봐보게."
"아직 1차 편집밖에 안 했습니다만……."
사장은 대꾸 대신 미간을 좁혔고, PD는 급히 기기를 조작했다.
이윽고 진호의 차가 마을 어귀에 나타나는 장면이 흘러나왔다.
"흠. 벤이 무척 고급이군."
"HU 에이전시에서 지급한 차량이라고 합니다."
"역시 서양 자본……."
스르륵!
문이 열리며 진호가 차에서 걸어나왔다.
화면 속 패밀리들이 침묵하는 것처럼 국장도 침묵했다.
그가 입을 땐 건 아주 한참 지난, '가족이 간다' 메인 MC가 진호의 볼을 잡으며 한바탕 난리를 피운 후였다.
"허어……."
목이 탄 사장은 책상 위에 놓인음료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놀랍군."
밑바닥 스태프부터 시작해, 상하이 TV라는 성급 방송국 사장 자리까지 오르며 수많은 미남미녀들을 보아 온 그조차도 눈을 뗄 수가 없는 외모였다.
"겨우 이 정도 가지고 놀라시면 곤란합니다."
"흠?"
PD는 싱글싱글 웃으며 모니터를 가리켰고, 사장은 눈빛을 가라앉히며 모니터를 응시했다.
그리고 충격과 전율로 가득한 5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화장실조차 가지 못한 채 자리를 지켜야 했다.
"……미쳤군."
온갖 단어가 우후죽순 떠올라 엉클어진 머리가 겨우 뱉어 낸 단어.
그러나 이보다 더 완벽하게 그의 심정을 표현할 만한 단어가 없었다.
"제가 왜 그런 기획서를 냈는지 아시겠습니까? 이틀 뒤, 이 편이 방송된 날 저녁부터 남부가 아주 시끄러워질 겁니다."
PD는 무척이나 의기양양했다.
"……기사는?"
"기자들을 스탠바이시켜 놓았고, 축구 영상과 노래 영상은 웨이브를 비롯한 중국 모든 SNS에 올릴겁니다."
"미튜브와 페이탈북도?"
PD는 깜짝 놀랐다.
중국인 미튜브 크리에이터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미튜브는 중국 내에서 접속을 금지하는 동영상 사이트다.
일반인은 너무 많아서 단속하기 힘들다지만, 방송국이 미튜브에 접속하다 못해 영상을 올리기까지 한다면 그 순간 바로 잡혀간다고 봐야 했다.
이는 페이탈북과 같은 서방 SNS도 마찬가지였다.
"……진심이십니까?"
"그래.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최대한 많은 인민들이 볼 수 있도록 해 봐."
사장은 대답을 망설이는 PD의 어깨를 두드리며 편집실을 빠져나갔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PD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 몰라."
까라면 깔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그 기획이 승인받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한편 편집실을 나온 사장은 사장실로 들어갔다.
"가족이 간다 PD는 잘 만나고 오셨습니까?"
비서의 말에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내가 호출할 때까지 누구도 들여보내지 마."
"예."
그렇게 사장실 안으로 들어온 사장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상하이 TV 사장이군.
"통화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웨이 양 기관장님. 이 늦은 오후에 연락을 드린 건 다름이 아니라……."
사장이 미튜브를 언급한 이유는 이것이었다.
진호가 일으킨 파도는 그 자신도 모르는 곳에서 더욱 커다래지고 있었다.
* * *
수군수군.
"저 사람이……."
"응. 와, 진짜 빛난다. 저 사람만 조명이 비추는 것 같아."
"정말 아무 동물이나 처음 보자 마자 친해지는 걸까?"
스타가 된다는 게 이런 걸까.
한국에서는 언제나 느끼는 시선이지만, 중국에서도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이렇게 빨리 이런 시선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역시 대중에게 빨리 이름을 알리는 건 예능인가?'
2주로 나누면 흥미가 떨어질 수 있다며 PD는 무려 3시간짜리 특집으로 방송했다. 덕분에 당초 중국에 오기 전 생각했던 것보다 더한 인기를 얻게 됐다.
'그렇다 해도 언론이 너무 우호적인 것 같은데…….'
우호적이지 않은 언론도 있지만, 그 비율은 9 대 1 정도였다.
"저기…… 실례가 안 된다면 사진을 찍어도 될까요?"
"그럼요. 얼마든지요."
진호의 얼굴이 푸근한 미소를 머금자 다가온 두 여성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꺅! 축구하시는 모습 잘 봤어요!"
"전 베컴을 보는 줄 알았어요!"
헬리캠까지 동원하며 찍은 축구신. 그 연출만큼은 여느 축구 경기 못지 않았다.
"오! 축구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그럼요! 상하이인 치고 상하이 상강 팬이 아닌 사람은 드물 거예요!"
"무슨 말이야! 당연히 상하이 선화지!"
상하이 상강과 상하이 선화는 상해를 연고지로 한 축구팀들이다.
'중국이 축구를 좋아하긴 좋아하나 보구나.'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을 테지만 말이다.
그렇게 사진뿐만 아니라 사인까지 해 주고 보낸 진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흠. 이 정도라면 중국에 오기 전 짰던 플랜을 고쳐야 할 것 같은 데…….'
그렇지 않아도 예상보다 훨씬 더 대단한 반응 때문에 회의가 소집되었다.
진호는 상해에 체류하는 동안 머무는 숙소로 향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보던 대기업 임원회의 모습 같네요……."
호텔 거실 한쪽에 놓인 커다란 TV가 한국에 있는 사무실 회의실을 정경을 비추고 있다.
화상으로 회의를 하려는 것이다.
"그럴 만한 사안이잖습니까."
급히 상해로 넘어온다미앙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축구도 잘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하하."
어색하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진호는 화제를 돌렸다.
"반응은 어떻죠?"
장경아 실장이 안경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당연하게도 러브콜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대본과 시나리오 역시도 마찬가지 입니다.
진호는 다미앙이 입국을 하며 들고 와 거실 한구석에 탑처럼 쌓은 대본과 시나리오들을 보곤 입맛을 다셨다.
별에서 찾아온 당신과 가족이 간다의 시너지 효과가 엄청났다.
"그래도 정말 천만다행이네요."
가족이 간다에서 아낌없이 능력을 드러낸 결과, 방송국들이 동물교감 능력뿐만 아니라 다른 능력도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그렇습니까? 전 조금 아쉽습니다.
"네?"
-동물 교감 능력에 대한 이미지를 지금보다 더 확립시킨 후에 이 호재가 터졌으면 더 좋았을 겁니다.
그랬다면 진호가 가진 능력들을 크리스마스 선물 상자를 까듯 하나하나 오픈할 수 있었을 터였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잘하셨습니다. 더 좋았겠다는 것이지 나쁘다는 건 아니니까요.
진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덕분에 한국에도 영향을 끼치기도 했고.
"한국?"
-타국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인지 주목도가 낮지만, 그래도 미튜브와 페이탈북 등의 조회수가 급격히 올라가며 진호 씨의 축구 실력을 알리고 있습니다. 축구 갤러리나 스포츠 전문 BJ 등이 진호씨 축구 실력을 두고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거 재밌네요. 내가 축구선수도 아닌 데요."
-진호 씨를 국대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시끄럽습니다.
진호는 피식 웃었다.
말이 안 되는 소리지만, 연예계에서 이런 논란은 잘만 이용하면 큰호재로 만들 수 있기에 당분간 지켜봐야 할 듯싶었다.
-거기다 영화계도 술렁이고 있습니다.
진호의 눈이 빛났다.
"문체부의 영화 선정 때문인가요?"
-일각에서 반칙이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같은 조건의 상품이라면 아무래도 현지에 더 알려진 브랜드를 파는 게 이득일 테니까요.
"선배님들은요?"
-모두 영화제작 관련자들이 내뱉는 말입니다. 배우들은 진호 씨의 노력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렇다면 무시하죠."
제작사나 배급사들의 말은 어차피 한때의 투정일 뿐이었다. 훗날작품을 같이하면 누구보다 잘해줄 이들이 그들이었다.
-이미 그런 방향으로 대응을 하고 있습니다.
"잘하셨어요."
진호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페이스로 계속 이름을 알린다면?'
문체부는 결국 '코리안 쉐프'를 선정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러니 진호 씨도 중국 방송에서 코리안 쉐프를 언급하지 말아주십시오.
"그 정도는 알고 있어요. 기회주의자 같은 이미지를 만들지 말라는 거잖아요."
현재 중국 활동의 목적은 중국판 '리얼 정글에 가다'로 인해 생긴 호기심 충족과 '별에서 찾아온 당신'의 인기에 대한 감사 및 홍보다.
이런 상황에서 코리안 쉐프까지 홍보한다?
'욕심쟁이라며 우호적인 시선들이 돌아설 수도 있어.'
그 때문에 '가족이 간다' PD에게도 영화 관련 내용은 편집해 달라고 부탁을 했고, 그는 결과물로 보여 주었다.
-언론이 자연스럽게 노출 시킬 때까지 함구하셔야 합니다.
"네, 그렇게 할게요."
진호의 단호한 대답에 직원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도 정말 아쉽습니다. 물이 들어왔을 때 이미지를 확립시켰어야 했는데…….
"그, 그건 죄송하다니까요.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 다른 사고치지 않고 이미지 확립에……."
"예? 누, 누구요?"
기겁하는 정 실장의 외침. 그것도 중국어였다.
급히 고개를 돌린 진호는 하얗게 질린 정 실장이 다급히 이쪽을 향해 달려오자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이쪽을 향해 몰리는 다미앙과 직원들의 시선에 정 실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또 무슨 사고를 치신 겁니까?"
"아, 아닌 데요? 그런 거 없는데요?"
"정말입니까?"
"……아마도?"
"지, 진호야, 전화 좀 받아 봐."
'아니구나.'
정 실장이 몸을 벌벌 떠는 것도 모자라 식은 땀마저 흘리자, 진호는 자신이 자신도 모르는 사고를 쳤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뭐지? 대체 뭐지?'
벌여 놓은 일이 워낙 많기에 어디서 무슨 사고가 터졌는지 짐작이 되질 않았다.
진호는 잔뜩 긴장을 하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소형제! 잘 지냈나?
"……응?"
아주 낯익은 목소리였다.
기억을 곰곰이 뒤져 본 진호는 눈을 찢어져라 크게 떴다.
"여가위 감독님?"
처음 웨이양의 저택에 초대받은 날 만나 친분을 쌓은 중경삼림의 여가위 감독. 다미앙과 TV 속 직원들이 헛바람을 삼켰지만, 진호는 의아해할 뿐이었다.
-아니지. 가족이 간다를 보니 아주 잘 지낸 것 같더군.
'아하. 웬일로 먼저 연락하셨나 했네.'
여가위와 친분을 쌓긴 했지만, 명절날에나 안부 전화를 하는 수준 정도밖에 안 되었다. 그것도 진호가 먼저 연락을 하는 것이었다.
"하하. 감사합니다. 감독님도 잘계셨죠?"
-나야 언제나 똑같지.
"다행이네요.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아, 그래그래. 내가 전화한 이유가 있었지. 소형제.
"네."
-혹시 쉔수웨이라고 아나?
"……아뇨. 죄송합니다."
-황제의 딸이라고 하면 알겠나?
"아, 네네. 알죠. …… 어, 설마?"
-그래. 그가 소형제를 원하는군. 소형제의 그 동물에게 사랑받는 능력을.
입을 떡 벌린 진호는 다미앙을 쳐다보았고, 그와 직원들은 한껏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사고가 터졌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