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권 16화
쑤린펑은 바로 말을 걸진 않았다.
'오랜만에 힘 좋은 사람이 왔네.'라고 사람 좋게 웃으며 수도가 있는 마당 한구석으로 향했다.
흙 묻은 야채가 가득 든 바구니를 단숨에 머리 위에 올리며 귀엽게 힘자랑을 했지만, 그가 짓는 미소는 참 푸근했다.
그렇게 '가족이 간다' 패밀리들이 야채를 씻으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진호도 냉큼 그 대열에 합류했다.
"저도 도울게요."
"이게 의외로 힘든 건데…… 괜찮겠어요?"
'저 하얗고 가는 손으로 채소를 제대로 씻을 수는 있을지…….'
'저번에 어떤 출연자가 당근을 잘못 씻어서 탕이 흙탕물이 됐던 걸 생각하면…… 으으으.'
진호의 필모그래피는 젊은 나이 임에도 화려하다.
그들로서는 천운이 깃들어 성공하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승승장구해 온 케이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믿고 맡겨 주세요. 저 이래 봬도 한국에서 손꼽히는 한식당의 명예숙수예요."
더 이상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기로 한 진호는 냉큼 그들 사이에 끼어 앉아 야채를 들었다.
벅벅벅! 첨벙!
슥슥슥! 첨벙!
"끝! 그럼 전 점심 준비할게요! 읏차!"
사람들은 깨끗하게 씻어진 야채가 가득 든 대나무 바구니를 가볍게 들고 일어서는 진호를 멍하니 바라봤다.
"……방금 내가 뭘 본 거지?"
"분명 여기 졸졸 흐르는 물에 몇번 벅벅 문지르고, 칼로 몇 번 슥숙 다듬었을 뿐인데……"
야채들이 대형 마트에서나 볼 법할 정도로 깨끗해졌다.
"우리 원래 이거 하는데 1시간 정도 걸리지 않아?"
"그렇지. 원래 이런데서 하는 수다가 참맛이라 1시간은 금방이지."
"그런데 지금은 15분밖에 안 지났는데?"
서로 평소처럼 대화를 하지 않았으면 또 모른다.
그런데 분명 그들은 평소처럼 대화를 했고, 진호도 간간이 끼어들며 자신들 사이에 녹아들었다.
"허……."
사람들은 슬그미니 쑤린펑을 바라봤다.
야채 씻는 시간이 30분을 넘기면 자신 몫의 야채를 모두 씻고 핀잔과 재촉을 해야 할 그가 성질 한 번 못 부리게 되었다.
"내가 살다 살다 린펑 손이 느리게 느껴지는 건 또 처음이네. 야, 몇 개 씻었냐? 한 여덟 개 씻었냐? 거봐, 내가 이런 걸로 근육 자랑 할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그럼-. 역시 이런 건 전문가가 제일 잘하지! 명예 숙수라잖아!"
"오우. 우리 린펑 형, 라이벌을 만났는데요?"
가족이 간다에서 까불이 1, 2, 3을 맡는 세 사람이 속을 뒤집자 쑤린펑의 눈에 화륵 불이 붙었다.
"라이벌은 무슨. 성실한 사람 왔으면 좋은 거지. 그럼 나도 점심 준비할게."
사람들은 순간 뜨악했다.
"네가? ……힘쓸 때 말곤 손 하나 까딱 안 하던 네가?"
"갑자기? 물론 네가 음식은 잘하긴 하지만…… 갑자기?"
수다를 떠느라 음식을 만드는 데3시간이 넘어가면 그제야 성질을 못 이겨 '비켜' 하고 순식간에 조리를 끝내는 쑤린펑.
"놔둬, 놔둬. 얘 지금 불붙었어."
뜨끔한 쑤린펑은 헛기침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아닌 게 아니지만, 쑤린펑은 말이 더 나오기 전에 부엌으로 향했다.
'분명 그 친구, 근육이 범상치 않았어.'
야채를 씻기 위해 걷어 올렸던 소매 때문에 드러난 진호의 팔뚝은 마치 야생마처럼 잔 근육으로 역동하고 있었다.
말라서 드러난 근육이 아니라 진짜 운동을 제대로 한 근육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그는 어이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나 지금 그 젊은 청년을 질투하는 거 맞지?'
그 이유는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리시시를 힐끔 본 그는 그녀가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려 하자 재빨리 부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굳어 버렸다.
"……반죽들? 그사이에 벌써?"
"아, 오셨어요?"
진호는 부엌 안으로 들어오는 쑤린펑을 보며 역시라는 생각을 가졌다.
'승부욕 강한 사람은 종목을 가리지 않고 승부를 보려고 하지.'
그 자신이 이길 때까지 끈질기게 말이다.
'그걸 뿌리치려면 간단해. 그냥 압도적이면 돼.'
진호는 두 덩이의 반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그를 향해 모른척 설명을 했다.
"이쪽은 사오롱바오용이고, 이쪽은 성지엔바오용 반죽이에요. 이대로 조금만 숙성시키면 돼요. 그리고 여기 이 닭은…"
"꼬곡."
'미안.'
진호는 운명을 알아차린 듯 슬프게 빛나는 동그랗고 까만 눈동자를 차마 바라보지 못했다.
"상하이차이판에 쓸 육수용 닭이고요. 그럼 잠시만요."
진호는 닭을 안아 들며 다시 수돗가로 향했다.
그의 손에는 날카롭게 빛나는 중식도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쑤린펑은 그런 진호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얘 봐라?'
여태껏 가족이 간다에 출연하지 않았던 캐릭터.
'그 소문들이 진짜라는 거지?'
믿지 못할 내용으로 가득한 진호의 소문들.
승부욕이 제대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와!"
"우와!"
"아니, 이게 다 뭐야?"
따끈한 김을 모락모락 뿜어내는 만두와 슈마이, 밥그릇에 산처럼 쌓인 볶음밥과 그 옆에서 매콤한 향기를 풀풀 풍기는 붉은 탕.
거기에 식탁 중앙에는 온갖 야채 요리들이 놓여 있다.
"다섯, 여섯, 일곱…… 크헉! 이걸 고작 1시간 만에 다 만들었다는 거야? 그것도 겨우 둘이서?"
잠시 자리를 비웠던 피디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식탁 위를 노려보았다.
"난 한 거 없어. 진호 씨가 90퍼센트 한 거야."
"말도 안돼!"
"그럴 리가요!"
"진짜야. 카메라 돌려 보면 알아."
'요리로는 졌어.'
쑤린펑은 쑥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는 진호를 뚫어져라 쳐다봤고, 그 시선을 눈치챈 진호는 속으로 살짝 웃었다.
'승부욕 강한 사람이 인정은 또 빠르지.'
진호는 경악하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식기 전에 드세요."
"……잘 먹을게요, 진호 씨!"
"진호 씨, 고마워요!"
사람들은 특이하게도 모두 동시에 성지엔빠오를 집어 들어 반으로 갈랐다.
"우와!"
"이거 식당에서 파는 거 가져온거죠! 그쵸?"
"이 마을에 식당이 있었냐, 이 바보야!"
"……우왓! 이거 뭐야!"
"맛있어! 정말 맛있어!"
남들과 다르게 야채 요리를 입에 가져간 쑤린펑도 놀라 허겁지겁먹어 치우자 진호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럼 나도 먹어 볼까?'
만드는 도중 간을 보기 위해 먹었는데도 너무 맛있었던 요리들.
진호는 냉큼 숟가락부터 들며 전투 같은 식사에 참전했다.
* * *
"대충 설렁설렁해도 알아서 편집해 줄 텐데……."
PD 자신이 소속된 상하이 TV에서 '별당신'을 방영한다. 혹여 진호가 거만하게 행동한다고 해도 성실한 것처럼 편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진호는 그렇지 않았다.
"이건 분량이 너무 많아서 뭘 써야 할지 정할 수 없을 정도네."
"역시 소문대로 성실하고 재주많네요. 그리고 모두 능숙해요."
조연출의 말이 정답이었다.
"우리나라 말도 잘하지. 저 한국 친구, 분명 상해 사투리로 말하고 있지?"
"네. 기본 베이스는 북경어인데, 간간이 상해 사투리를 써요. 마치 오래전 북경으로 상경한 사람처럼. 아마 쑤린펑 때문이겠죠."
그건 아니다. 상해에 사는 장칭과 웨이양 때문이다.
그들과 자주 통화하다 보니 상해 사투리가 입에 익은 거다.
"그런 사람 있잖아요. 금세 사투리에 적응하는 사람. 이 말은 곧 광둥에 가면 광둥어를 섞은 북경어를 한다는 거겠죠."
그건 예능에서 엄청난 귀여움 포인트다.
저런 미남이 사투리를 한다? 여성들은 기본으로 공략하고 간다고 봐야 했다.
"완전 예능을 위해 태어난 존재네…"
그것도 롱런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다.
"이거 저 사람을 중국에 이름을 알리러 온 일반적인 한국 연예인으로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은데요?"
"음."
고개를 끄덕인 PD는 눈을 강렬하게 빛냈다.
"저런 소재를 못 써먹으면 이 짓을 그만둬야지. 린펑 반응 봤지? 앞으론 둘이 대결 구도로 간다."
"푸허!"
"배, 배가 터질 것 같아. 가족이 간다 하면서 이렇게 배부르게 먹어 본 건 처음인 것 같아!"
"난 샤오롱빠오 만두피가 그렇게 쫄깃한 건 처음이었어!"
"디저트로 나온 고구마 탕후루는 어떻고?"
고구마를 반으로 잘라, 다진 땅콩을 섞은 튀김옷을 입혀 튀긴 후그 위에 특제로 만든 시럽을 버무려 굳힌 고구마 탕후루.
"진짜 더 이상 먹을 수 없어."
"나도……."
사람들은 이 행복한 식사를 만들어 준 진호를 찾아 마당 한구석을 보았다.
"끝!"
사람들이 디저트를 먹는 동안 설거지를 모두 끝낸 진호는 기지개를 펴며 한 번 볶아 소금을 뿌린 땅콩 한 알을 입안에 집어넣었다.
오도독! 오도독!
고소하고 짭짤한 맛이 온몸을 나른하게 만들고 있었다.
'역시 혼자 하는 게 빠르다니까.'
그래서 그들을 디저트로 붙들어놓고, 설거지를 한 것이다.
성실한 모습을 보이려는 작은 욕심도 있었다.
"아, 여기에 맥주만 있으면 딱인데."
"진호 씨, 옮기는 건 우리가…… 끄헉! 안돼!"
"악! 그런 말은 안돼!"
화들짝 놀란 진호는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이쪽을 향해 다가오던 출연자들이 이마를 붙잡으며 한탄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불안한 눈으로 피디를 보고 있었다.
"응?"
그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던 진호는 흠칫 몸을 굳혔다.
'저 눈빛…….'
분명 어디서 많이 보았다.
나씨 성을 가진 어떤 피디가 출연자를 골탕 먹일 빌미를 잡을 때 종종 짓는 눈빛.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자 금세 온화한 미소를 짓는것도 딱 판박이였다.
"진호 씨, 맥주가 드시고 싶은가요?"
"아뇨, 괜찮습니다! 물이면 돼요!"
분명 중국에 얼굴을 알리려나온 프로그램이지만, 골탕을 먹는 건 사양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닿지 못할 외침이었다.
PD는 못 들은 척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저희 제작진이 준비를 했습니다. 이른바 저녁 식사 복불복! 팀을 나눠 게임을 해서 이긴팀은 저녁에 아무것도 안 하셔도 되는 걸로도 모자라, 저희 제작진까지 이긴다면 특별히 맥주를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출연자들이 경악했다가 이내 눈을 가늘게 떴다.
엄청난 상품들이 걸려 있지만, 무작정 콜을 외치기에는 제작진에게 당해 온 세월이 5년이다.
"……당신, 무슨 속셈인거야? 왜 이런 엄청난 게 바로 튀어나오지? 미리 준비한 거 맞지?"
"그래. 이번엔 뭘 꾸미고 있는 거야?"
"만약 마지막에 제작진이 이기면? 뭘 어쩌려고!"
"당연히 출연자 전원 야외 취침을 하셔야죠. 한 8주 만의 야외취침이죠, 우리?"
"이럴 줄 알았지! 날이 풀리니까 바로 꺼내 드는구나!"
"하지만 이기면 술과 안주가 무한대로 지급됩니다. 촬영? 내일 아침까지 없고, 아침도 저희 제작진이 차려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경악했고, 진호도 입을 벌렸다.
'악마다! 저건 악마의 유혹이야! 아, 진짜 나 피디님-!'
복불복 게임은 나연석이 옛날에 제작했던 그 전설적인 프로그램의 공식 게임이다. 그 포맷을 사 온것이니 당연히 나연석의 악랄함도 배웠을 터였다.
'예능'을 찍는 '연예인'이라면 결코 거부할 수는 악랄하기 그지없는 교섭 능력.
"그래서 어떤 게임을 하려는 건데요?"
모든 이의 시선이 진호에게로 몰렸다.
PD는 온화하게 웃었다.
"축구입니다. 마침 마을 뒤편에 넓은 공터가 있더군요."
"……린펑 형! 나 알지? 형 동생!"
"린펑 오빠!"
출연자들은 단숨에 린펑에게 달려가 그의 어깨를 주무르거나 애교를 떨었다.
'나, 나도 저래야 하나?'
진호도 나름 심각하게 고민하던 차에 PD의 입이 다시 열렸다.
"주장은 쑤린펑과 운동 신경이 좋은 이진호 씨로 나누겠습니다."
"네?"
"예?"
마을 뒤편에 있는 제법 넓은 공터는 놀랍게도 평평하다 못해 짧은 풀로 뒤덮여 있었고, 미니 축구 골대나 농구 골대, 여러 놀이 기구들도 있었다.
제작진이 말하길 이곳은 마을 어른들이 마을에 얼마 없는 아이들을 위해 만든 놀이터라고 했다.
그런 훌륭한 곳이지만, 진호는 아랫입술을 내민 채 툴툴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쑤린펑 씨가 전직 축구선수라고 해도 말이야……."
팀원 정하기는 출연자가 마음에 드는 주장의 뒤에 서는 방식이었는데, 진호의 뒤에는 단 한 명도 서지 않았다.
그래서 당황한 제작진이 부랴부랴 팀을 나누게 했는데, 진호의 기분은 이미 상한 뒤였다.
"물론 나라도 쑤린펑 씨 뒤에 섰을 테지만…… 끙. 이거 완전히 다윗과 골리앗인데."
육체 관련 스킬들 때문에 우월한 신체 능력을 가지게 됐다지만, 축구는 다른 문제였다. 스포츠에서 피지컬은 기본에 불과했다.
진호는 쑤린펑이 무서워 골대에 몰려 있는 출연자들을 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난 공격수 확정이네. 이대론 개망신을 당할 것 같은데…….'
헉헉거리며 공만 쫓아다니다 끝나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 있다. 얼굴을 알리러 온 이상 그건 절대 안 되었다.
진호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어쩔 수 없지. 얻자.'
그는 축구 관련 스킬을 떠올렸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