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권 14화
5. 파도가 밀려오다
진호는 동물원 입구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결국 왔네.'
"쩝!"
'야생 동물들도 날 그렇게 좋아하는데, 인간에게 길들여진 동물들이라면…….'
무슨 상황이 벌어질지 장담을 할 수 없었다.
거기다 동물원은 한 종류의 동물들을 보고 몇 발자국 걸으면 다른 동물이 나오는 곳이다.
각자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는 야생과는 다른 곳이었다.
'부디 얌전히 반응해 주라.'
"표 끊어 왔어요! 들어가요, 진호씨!"
해맑게 웃으며 빠르게 걸어오는 이서형이 오늘은 왠지 얄밉게 느껴졌다.
"……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마음이 이럴까. 어깨를 축 늘어트린 진호는 존재감을 한껏 줄이며 슬그머니 이서형의 손을 잡았다.
아직은 스킨십이 어색한지 흠칫 놀란 그녀가 깍지를 껴 오자 진호의 마음에 온기가 퍼졌다.
'……그래. 뭐, 죽기야 하겠어?'
진호는 파이팅하며 힘차게 발을 내딛었다.
"진호 씨는 자산 관리를 어떻게하고 계세요?"
"호-. 영업하시는 거예요?"
이서형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는 사람의 자산은 관리하지 않는 주의라서요. 그게 이렇게 호감 있는 상대라면 더더욱."
진호는 살짝 놀랐다가 배시시 웃었다.
소개팅을 한 지 몇 달이 지난 지금에야 물어오는 그녀의 배려가 참 고마웠다.
"그동안 궁금해서 어떻게 참았는지 몰라?"
"아무튼!"
"쿡쿡. 지금은 시스템 트레이딩으로 관리하고 있어요."
그녀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진호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했다.
시스템 트레이딩은 차트만 보고 매매와 매수를 판단하기에 공포심리로 인한 급락에 대처할 로직이 없다면 망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에 대처할 로직은 짜여 있지만, 굳이 모험을 할 필요는 없지. 그래서……'
"안전한 대기업 위주로 투자하고 있어요."
그계야 그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잘하고 계시네요. 시스템 트레이딩의 장점이 바로 그 부분이니까요."
웬만해선 떨어질 리가 없는 대기업 주식들.
인간의 감정이 배제된 시스템 트레이딩으로써 일정 시점에서 사고 파는 것을 반복한다면 분명 돈은 늘어나게 된다.
"그러면 장기 투자 쪽으로는요?"
"일단 부동산에 투자를 해 볼 생각이고, 믿고 맡길 만한 자산 관리사를……"
진호는 앞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어머? 진호 씨, 타조예요."
"네, 저도 보이네요."
타조.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있지만, 작은 머리와 동그랗고 까만 눈때문에 인기가 아주 많은 동물이었다.
그런 타조 수십 마리가 우리 안에 있었다.
"귀여워라-. 진호 씨, 우리 저기로 가 봐요."
살짝 주춤했던 진호는 손을 잡아끄는 그녀의 행동에 피식 웃으며 못 이기는 척 발을 내딛었다.
그 순간이었다.
휙! 이쪽을 향해 돌아가는 작은 머리들.
"어머?"
'내 이럴 줄 알았지.'
진호는 마른침을 삼켰다.
넓은 우리 안에 퍼져 있던 타조들이 이쪽을 향해 점점 몰려들고 있었다. 사람만 한 크기의 타조들이 말이다.
"어머머."
이서형은 이 신기한 광경에 감탄을 금치 못했지만, 진호는 썩 달갑지 않았다.
"꾸엑!"
진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두목 아니다, 이 자식들아."
"꾸엑?"
'서형 씨는 아직 내 부인이 아니다. 오해하지 마.'
아무래도 오늘 데이트에는 보는 눈이 굉장히 많을 것 같았다.
* * *
치익! 딱!
주인의 성격을 반영하듯 깔끔하게 꾸며진 원룸에 맥주 캔이 따지는 소리가 울린다.
꿀꺽꿀꺽!
"카-!"
호리호리한 체구에 긴 머리칼을 지닌 밍링은 입가를 훔치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일을 마친 후 집에서 마시는 맥주 한 잔은 오늘 하루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한 최고의 선물이었다.
"아차!"
그녀는 재빨리 TV를 켜 리얼 정글에 가다를 틀었다.
사육사인 그녀가 내셔널 지오그래픽과 함께 가장 애청하는 프로그램인 '리얼, 정글에 가다'.
중국의 국민 족장인 티안밍 족장이 불미스런 사태로 인해 구속되면서 한동안 시청하지 않게 됐지만, 얼마 전 티안밍 족장이 무혐의로 풀려나면서 다시 애청하는 프로그램이 됐다.
"오!"
타이밍이 좋았다.
이제 막 광고가 시작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마존에서 쉽게 볼 수 있다는 아마존 트리 보아가 부족원들을 위협하는 모습에서 끝난 저번 주 마지막을 떠올리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아마존 트리 보아가 독이 없는 개체라지만, 그래도 이빨이 날카롭고 힘도 강하지."
그 위협을 어떻게 벗어날지가 굉장히 흥미진진했다.
"다치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아, 시작한다."
첫 장면은 부족원들이 어딘가로 걷는 모습이었다.
아마존 트리 보아를 만나기 전 걷던 저번 주의 마지막 장면.
이제 곧 게스트 중 한명이 풀숲에 내려와 있던 아마존 트리 보아의 꼬리를 밟게 될 것이다.
-응?
-캬아악!
-으아아아악!
-배, 뱀이다! 꺄아아아악!
"아, 진짜 암 걸리겠네. 왜 길에서 벗어나 수풀을 밟은 거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TV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뭐해? 얼른 도망쳐. 화난 뱀은 정말 끈질기다고."
사육사인 그녀라도 화가 난 동물은 위험하다. 사자나 코끼리 같은 동물이라면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다.
포유류에 비해 지능이 낮은 뱀은 아예 도망쳐야 한다.
"개한테 잡혀 다리 말리면 부러져. 얼른 도망치라고."
그녀는 초조하게 TV를 응시하며 맥주 캔을 입에 가져갔다.
목이 무척이나 탔다.
그 순간이었다.
-안돼. 그만.
"응?"
귀가 아플 만큼 시끄러운 비명
소리를 뚫고 들어온 중국어가 아닌 말. 그 이후 벌어진 상황에 밍링은 눈을 부릅떴다.
"공격을 당해 화가 난 뱀이 갑자기 진정됐어? 뭐지? 뭔데!"
이윽고 화면이 휙 돌며 누군가를 잡아내자 그녀는 넋을 놓았다.
한 번 보면 결코 잊을 수 없을 듯한 미모의 남성.
-이리 와.
이번에도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어 아닌 말이 불러일으킨 상황은 밍링의 멍해진 정신을 깨우다 못해 기절초풍하게 만들었다.
"마, 말도 안돼! 어떻게 야생의 뱀이! 애, 애교? 지금 애교 부리는 거 맞지? 아, 아구티? 아구티가 왜 사람 머리 위에 있어!"
그 이후 상황은 더 경악스러웠다.
"아, 아구티가 떼로…… 뛰어다녀? 워, 원숭이? 앵무새? 쟤는 또뭐지? 도마뱀…… 아니, 새끼 악어다!"
한국 리얼 정글에 가다의 야영지 풍경은 사육사인 그녀라도 불가능한, 아니 40년 경력의 사육사라도 만들기 불가능한 그 광경에 밍링은 생각하기를 관두기로 했다.
-다음 주! 한국 리얼정가에게 생존 기술을 배운 중국 리얼 정가!
이제 제대로 된 생존을 할 수 있을 것인가!
"……."
예고편이 끝나고 광고로 넘어간TV를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는 조용히 일어나 컴퓨터로 걸어가 앉았다.
방금 전 자신이 본 게 맞는지 확인해 봐야 했다.
* * *
현대판 드루이드! 그는 과연 인간인가!
한국 연예인 이진호는 외계인!
그 증거를 제시한다!
동물에게 사랑받는 체질?
중국 포털 사이트와 커뮤니티 사이트, 웨이브 등 SNS가 시끄럽다.
결코 믿을 수 없는 상황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에이, 뭐야. 진호가 진호 한 거네. 시끄럽다기에 이상한 스캔들 난 줄 알았잖아.
┗중국은 이제 안 건가? 얘들아, 진호가 진호 한 것뿐이야. 놀라지마.
┗진호가 진호 한 것뿐? 당신들 한국인?
┗어, 한국인. 한국어 못 알아들을 것 같아서 모두 중국어로 쓰고 있는 중. 지니어스 손!
-손!
-난 이제 궁금해지는 게, 진호가 야생의 사자를 만나도 저렇게 친해질 수 있을까?
┗진호라면 하마 떼 사이에서도 수영하며 놀 수 있을걸.
┗……진호라면 왠지 그럴 수 있을 듯!
┗내셔널 지오그래픽 뭐하냐! 최적의 인재가 여기 있어!
┗뭐야! 한국인들은 왜 이렇게 태연한 거야!
┗처음이 아니거든.
┗응응. 처음이 아니지.
┗너희가 본 건 예고편에 불과 해. 본방은 얼마 전부터 한국에서 방영되는 한국판 리얼 정글에 가다, 아마존 편이야.
┗보고 왔는데…… 인간 맞아?
┗현재는 외계인설이 가장 유력해. 얼마 전에 그런 드라마를 찍었거든.
"이러다간 정말 외계인 이미지로 굳어지겠는데……."
팀 이진호의 직원들이 정리해 놓은 중국 반응을 보며 머리를 긁던 진호는 장경아 실장을 보았다.
"별에서 찾아온 당신이 다음 주부터 방영된다고 했나요?"
"그렇습니다. 총 세 개의 방송국 채널에서 방송될 것입니다. 북경TV, 상하이 TV, 마카오 케이블TV입니다. 이번 일로 인해 다른 성급 방송국들에서도 SBC에 접촉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중국은 중앙, 성급, 시급, 지방방송으로 나뉘는데, 성급이면 하나의 성 전체에 방송을 내보내는 초대형 방송국이다.
"……타이밍이 예술이네요."
누가 작정하고 의도한 건 아닌 지 의심될 만큼 완벽한 상황이었다.
장경아 실장은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장영진 감독님이 5개월 안에 최종 편집을 마친다면, 커다란 파도를 탈 수 있을 듯합니다."
"문체부 선정에서 탈락을 하더라도 어떻게든 중국에는 상영을 해야 한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그 때문에 장영진 감독께서도 백방으로 알아보고 다니시는 중이라고 합니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호재가 터졌는데, 그가 움직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럼 저도 중국 활동을 준비해야겠네요."
"그렇지 않아도 섭외가 몰려드는 중입니다. 다만……."
"다만?"
"콘셉트는 제각기 다르지만, 촬영지로는 꼭 동물이 있는 장소가 있더군요. 동물원이라든가, 유기 동물 보호소라든가. 노골적으로 판다가 진호 씨의 뒤를 졸졸 따르는 모습을 찍고 싶다는 방송국도 있습니다."
"판다는 엄청 제멋대로인 동물 아니에요?"
판다는 기본적으로 순하지만 게 으르고 느리고 둔하면서 고집이 센 동물이다. 집착도 강해서 청소하는 사육사가 멀리 떨어트려 놔도, 달려와 매달리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은 미튜브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판다는 모든 중국인이 사랑하는 국민 동물이었다.
"그러니까요. 그 제멋대로지만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동물들이 진호씨의 뒤를 따르며 앞구르기를 하는 모습을 보고 싶답니다."
"……그건 나도 보고 싶네요."
네발로 좆아오기가 버거워 데굴데굴 구르며 쫓아오는 아기 판다들.
"생각만 해도 심장이 아파요."
어떤 동물이든 새끼는 사랑이었다.
"그건 저도……. 크흠! 게다가 중국 유명 대학들과 유명 동물 연구소들에서도 한번 와 줄 수 있겠냐 연락이 왔습니다."
"엥? 그곳들에서는 왜요?"
"현재 SNS에서 퍼진 진호 씨가 이서형 씨와 동물원 데이트를 하는 모습을 찍은 영상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
무리를 이끌 두목이 되어 달라던 타조 무리는 애교에 불과했다.
'원숭이들이 자기들이 먹을 먹이를 던져 주며 부킹을 신청하고, 코끼리는 내 몸을 코로 휘감고 놓지 않았지. 사파리 투어에서 만난 호랑이들은…….'
왜 이렇게 말랐냐며 진호가 주려던 먹잇감을 사양했다.
그 외에도 난처한 상황은 너무도 많았다.
진호는 이날 길들여진 동물은 야생 동물보다 더 집착이 강하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됐다.
"저 완전 인기 스타였죠."
"아이돌이 따로 없으시더군요. 아니, 피리 부는 사나이라고 해야 하나요?"
"……아하하."
'차라리 동물들의 생각을 알아듣지 못하면 마냥 귀엽다 여겼을 텐데…….'
"아무튼 이런 상황이다 보니 연구원들은 꽤나 진지하게 부딪쳐 오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관리하고 있는 희귀 동물에게서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도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절 아마존에 데려가려는 것일 수도 있죠."
지어 놓은 집안에서 야생 동물들과 함께 잤던 진호.
야생 그 자체의 모습을 코앞에서 직접 지켜볼 수 있는 기회가 왔으니 그들로서는 흥분을 주체할 수 없을 터였다.
"일단 그 부분은 생각해 보도록 하죠. 실장님은 중국 활동 준비를 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한 치의 차질 없도록 철저하게 준비하겠습니다."
"믿을게요."
진호는 활활 타오르는 그녀의 눈을 보며 싱긋 웃었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