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권 12화
둘이 술집을 나선 시간은 그리 늦은 저녁이 아니었다. 각자의 일이 있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호감이 있는 걸 인식했기에 둘은 아쉬움을 접으며 오늘은 여기까지 하기로 했다.
저벅저벅!
가로등이 밝히는 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이서형은 돌연 멈춰 서며 배시시 웃었다.
일순 어둔 밤거리가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이제 됐어요. 전 여기서 들어가면 돼요."
"……아쉽다. 조금만 더 갔으면서형 씨 집에서 커피 한 잔 마실 수 있냐고 물어봤을 텐데."
"꿈 깨요. 저는 소개팅 첫날에 남자한테 집을 알려 줄 만큼 호락호락한 여자가 아니랍니다."
"어, 그럼 두 번째 만남에서는 된다는 건가요?"
"……노코멘트. 아주 엉큼해, 진짜."
진호는 피식 웃었고, 그건 이서형도 마찬가지였다.
"재밌었어요."
작은 미련이 담긴 그녀의 말에 진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이런 게 소개팅인가 싶었고, 이 좋은 걸 왜 이제야 했나 싶었다.
"들어가요. 추워요."
아쉽지만 이젠 보내야 했다.
이서형도 같은 마음인 듯 아쉬움에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진호 씨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리고 다음에는 우리 동물원에 가요."
"아, 그건!"
"잘 가요!"
휙 몸을 돌린 그녀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고, 청천벽력 같은 말에 잠시 넋을 놓았던 진호는 이내 다시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역시 집이 부유하나 보네.'
조금만 더 가면 서울에서 유명한 부촌이었다.
사업가나 대단한 연예인들이 모여 사는 곳.
고모부 비상금은 마를 일이 없겠다고 안심이 되었다.
"그나저나 자산 관리라……."
'돈은 통장에만 있으면 죽은 돈이라고 했던가?'
굉장히 여운을 남기는 말이었다.
"흠, 시스템 트레이딩 프로그램이나 만들어 볼까?"
골드만삭스나 JP모건 등 굴지의 회사들이 쓴 [스킬: 코딩의 신] 주인공이 만든 시스템 트레이딩 프로그램.
'매달 1.5퍼센트 수익이 나도록 만들면 되려나? 그 정도면 아슬아슬하게 주목받지 않겠네.'
[스킬: 코딩의 신]의 주인공이 만든 시스템 트레이딩 프로그램은 매달 최대 7퍼센트의 수익을 낼수 있다.
'굳이 주목받을 생각이 없기에 그렇게까지 수익률을 올리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상황이 생겨 그 이상을 바라려면 주식 관련 스킬이 필요하겠지.'
문제는 그걸 얻으려면 뉴욕의 월스트리트의 투자사에서 일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아니, 그 전에 일단 그걸 만들어 운용하려면 컴퓨터부터 업그레이드시켜야 할 테지만…….'
"아, 택시!"
한편입가에 미소를 달며 걷던 이서형은 담벼락이 높이 솟은 커다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다녀왔습니다."
달그락!
넓은 거실에서 TV를 시청하고 있던 중년 부부가 놀란 눈으로 이서형을 보았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했다.
"왜 벌써 와? 마음에 안 들었니?"
"그 자식이 허튼짓 했냐? 서우호, 이 썩을 놈의 자식이 어디서 그딴놈을!"
이서형은 이상한 오해를 하는 부모님을 한심하다는 듯 보았다.
"그런 거 아니니까 아빠는 핸드폰 내려놔요."
중년 부부의 눈이 빛났다. 서형의 부모님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앉아있는 소파를 탁탁 쳤다.
이서형은 한숨을 내쉬며 그 둘 사이에 앉았다.
"진짜 이상해. 원래 딸이 연애하면 아빠는 싫어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큼. 나도 묻기 싫다. 그러나 우리 집안 사람이 될지도 모를 사내에 대해선 알아 둬야지."
"아빠, 오늘 처음 만났어요."
"난 네 엄마와 26살에 중매로 만나 결혼했다."
"그건 이씨 집안 사정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너도 이씨다. 네가 연애결혼을 할 수 있다는 건 큰 축복이야."
그건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어땠는데?"
서형은 오늘 하루 진호가 어땠는지, 자신은 어땠는지를 생각했다.
시종일관 매너 있고 위트 있던 진호.
유명한 셀럽이라서 허세가 있을까 걱정을 했는데, 오히려 소탈하고 자신의 재력도 드러내지 않았다.
흠이라면 약간은 엉큼한 게 있지만, 그걸 숨기지 않고 드러내 버리니 오히려 귀엽게 느껴질 정도였다.
자신의 말을 경청하던 진호의 진지한 눈빛과 장난스럽게 웃던 미소가 떠오르자 그녀는 볼이 확 붉어지는 걸 느꼈다.
"아, 몰라요. 씻을게요."
그녀는 벌떡 일어나 자신의 방이 있는 2층으로 향했고, 남겨진 둘은 그런 그녀의 등을 보며 다시 눈을 빛냈다.
"우호가 제대로 된 사람을 소개시켜 줬나 보군."
중학교 때부터 친구인 서우호. 그는 이서형의 아버지, 아니 이혁진 이 어느 가문의 사람인 줄 알았음에도 그 어떤 태도 변화 없이 똑같이 대해 준 유일한 이였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친구로 지내는 것이었다.
"구정경 사장이 지인들에게 그 드라마를 협찬하라고 적극 권유한 이유가 있었어."
"덕분에 구성 건설뿐만 아니라 지인들 기업 주가도 올라갔다죠?"
모두 못해도 2퍼센트 이상 주가가 올랐다.
기업 이미 지에 신뢰와 혁신이란 두 단어가 생긴 덕분이다.
"괜히 설레발 치지 말고 지켜봐요. 그룹 경영에 참가하지 않는 당신이 굳이 서형이를 재촉할 이유가 없잖아요."
"당연하지. 내가 포기하면서 얻은게 얼마나 많은데. 물론 서형이는 서른다섯 넘어서 결혼했으면 좋겠지만!"
"……에휴. 이거나 드세요."
"읍!"
"하나 더 드세요."
이혁진은 입안에 욱여넣어지는 귤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 * *
이진호 열애 중?
이진호 소개팅! 상대는 누구?
다음 날,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스캔들이 났다.
가십거리나 다루는 삼류 언론사에서 내보낸 것이지만, 대중에게 인기가 많은 진호라서 금세 실시간 검색어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물론 팀 이진호의 능력이라면 그대로 묻어 버릴 수도 있었지만, 둘의 모습을 찍어 SNS에 올린 사람들이 너무 많고, 또 모두 응원해줘서 참기로 했다.
대신 진호는 거의 전담이라고 할 수 있는 매일 스포츠를 불러 인터뷰를 하였다.
'혈기 왕성한 20대 남성이 외로워 소개팅을 한 것뿐이다, 겨우 서로를 알아가는 단계일 뿐이니 과한 추측은 삼가 달라'라는 골조의 인터뷰였다.
이는 인터넷에서 엄청난 공감대를 이끌어 낸 것으로 모자라, 도리어 스캔들 기사를 내보낸 삼류 언론사를 지탄하게 만들었다.
솔로가 연애하려는데 괜히 재 뿌리지 말라고, 아무리 연예인이라지만 사생활까진 알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그런 여론에 힘입은 진호는 파이팅하며 영화 촬영과 시스템 트레이딩 프로그램 제작에 몰두해 갔고, 연기 대상의 날짜는 점점 가까워졌다.
"SBC 연기대상의 명예로운 대상은! 별에서 찾아온 당신, 이진호! 축하드립니다!"
오늘 날씨가 참 춥다고 생각했다.
이런 날 김주아와 시상식 키스신을 찍었으면 CG를 입히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됐을 거라며 '별당신' 사람들과 시시껄렁한 농담을 했다.
그리고 시상식 끝나면 다들 어디갈 생각하지 말고 술 마시자며 시시덕 댔다.
어차피 상을 탈 거라 생각했기에 마음이 여유로웠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호명이 되니 눈앞이 깜깜해지며 주위의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됐다.
마치 다른 공간에 혼자 남겨진 느낌이었다.
'나 대상 탄 경험 있는데……. 이렇게까지 놀라면 안 되는데……. 응? 왜 놀라면 안 되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조차 모를 만큼 당황하던 진호의 의식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 올린 건 볼을 쓰다듬는 손길이었다.
멍하니 옆을 본 진호는 흐뭇하게 웃고 있는 김주아를 발견하곤 정신을 온전히 차릴 수 있었다.
"…… 고마워요, 이모."
"짜식이, 또 이모래. 그래도 오늘은 봐준다. 얼른 가!"
"예!"
벌떡 일어난 진호에게 박수가 쏟아졌다.
씩씩하게 걸어가 무대에 올라 상패와 꽃다발을 받아든 진호는 세종문화회관을 가득 채운 사람들을 보자 한 가지 깨닫는 점이 있었다.
'이제 시작이구나.'
입가에 미소를 달고 있는 수많은 선배들, 대선배들, 선생님들을 보니 이 대상이 연기 인생의 정점이 아니라 이제 연기라는 높은 산의 출발점에 섰다는 게 불현듯 깨달아졌다.
그러자 스스로 놀랄 만큼 마음이 진정되었다.
진호는 저 멀리 앉아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눈시울을 붉히는 부모님과 다미앙, 팀 이진호의 직원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 * *
예상된 결과라서 그런지 떠들썩해지지는 않았다.
사랑스런 눈빛으로 진호의 볼을 쓰다듬는 김주아의 모습이 작은 논란을 일으켰을 뿐이었다.
이후 다시 영화 촬영에 몰두한 진호는 중간중간 서형과 만남을 가지며 묵묵히 스케줄을 진행했다.
"음, 이러면 안 되는데……."
진호는 어떤 프로그램이 작동되고 있는 노트북을 보며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왜 수익이 10퍼센트지? ……대체 뭘 잘못한 거야?"
영화를 촬영하는 도중 틈틈이 제작해 두 달 만에 완성시킨 시스템 트레이딩을 가상으로 실행해 봤는데 단 하루만에 10퍼센트의 수익을 올려 버렸다.
시드 머니로 100억을 설정해 두면서 한 달 수익률을 2퍼센트로 잡았는데도 말이다.
눈살을 찌푸린 진호는 코딩창을 열어 처음부터 다시 훑어보기 시작했다.
"……아, 여기 설정값을 잘못 적었구나. 에라이."
기본이라면 기본인 것에서 오타를 내 버렸다.
입맛을 다신 진호는 설정값을 제대로 기입한 이후 틀린 곳이 또 있나 다시 코딩을 주욱 훑어보았다.
"뭐해?"
"아, 삼촌."
등 뒤에서 우해진이 껴안아 왔다.
"워우, 머리 아파. 이건 뭐야? 뭐 만들어?"
"시스템 트레이딩이라고 아세요?"
"주식? 자동으로 투자해 주는 그거 아냐?"
"용돈 벌이를 해 볼까 해서 한번 만들어 봤어요."
"그런 것도 만들 줄 알아? 와, 대단하다. 수익률은 얼마로 잡았어?"
"달에 1퍼센트?"
진호는 일부러 줄여서 말했다.
"히에! 일 년이면 12퍼센트잖아. 십 년이면 지금 자산이 두 배로 불어나는 거고."
수익이 나는 부분을 재투자한다면 그보다 빠르다.
"그런데 그게 가능해? 듣기로 1년에 7퍼센트만 돼도 엄청나다고 하던데……"
맞는 말이다.
이서형이 이 말을 들었으면 결코 믿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진호에게는 가능했다.
"대신 잘못되면 다 날리는 거죠."
아니다. 진호는 현재 원금 손실을 제로로 설정한 상태였다.
"어휴. 주식같이 무서운 걸 어떻게 하나 몰라?"
"타짜셨던 분이 너무 겁내는 거 아니세요?"
"영화와 현실이 같아? ……그런데 참 신기한 게 사람들하고 고스톱 치면 난 무조건 딴다? 패만 볼줄 아는데 말이야."
"그러다 쇠고랑 차시면 무조건 모른 척할 거예요."
"파하하하하! 그러지 않도록 자제해야겠네. 그나저나 진짜 재주 좋다. 이런 것도 만들 줄 알고 말이야. 장 감독 회사의 업무 통합시스템도 만들었다며?"
언젠가 회사에 구경 온 장영진은 업무 통합시스템을 보더니 단번에 그 가치를 알아차리고는 바로 구매해 갔다.
현재 HU 에이전시의 아시아 총괄지사에서도 다미앙이 적극 권유한 탓에 이 업무 통합시스템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워낙 평이 좋아서 HU 에이전시 본사에서도 관심을 가지는 중이었다.
"에이, 그래 봤자 삼촌 손재주와 비교할 수 있을까요. 아주 막 이케아가 따로 없으시잖아요."
"그렇지? 진호도 필요한 거 있으면 삼촌한테 말해. 다 만들어 줄게!"
"흐흐, 옙!"
차가웠던 공기가 잠시 따뜻해졌다.
"아, 맞아. 요새 그분과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어? 잘 만나고 있어?"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바빠서 자주 만나지 못하는 것만 빼면요."
"잘됐네. ……그래서 손은 잡았어?"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이야기가 남의 연애 이야기라더니, 우해진의 눈망울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네."
"뽀뽀는? 했어?"
"아직?"
"느리다……. 요새 젊은 사람들처음 만나서 막 뽀뽀하고 그러지않아?"
"글쎄요. 아직은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좋은가 봐요."
"멋진 말이다. 아주 로맨티스트야."
진호는 지금쯤 열심히 일하고 있을 이서형을 떠올리며 웃었고, 우해진은 그런 진호를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장난스런 표정을 지었다.
"에휴. 배 아파서 더 듣지 못하겠다. 난 촬영이나 하러 가야겠어."
"아, 같이 가죠."
진호는 노트북을 닫으며 일어섰다.
이제 앞으로 열흘이면 끝날 영화촬영이니만큼 혼신을 다할 생각이었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