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권 11화
4. 소개팅
생에 첫 소개팅이었다.
기합이 빡 들어간 진호는 새벽부터 일어나 깨끗이 씻고, 옷도 신중하게 골랐다.
'옷이 많은데도 입을 옷이 없다는 여자들 말이 이제야 이해되는 것같아! 입을 옷이 없어-!'
"정장이 좋을까? 캐주얼? 헤어스타일은 모던하게? ……그래, 맞아!"
진호는 재빨리 재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쪽 분야에선 재준이 베테랑이었다.
-여보세요…….
"잤어?"
-음…… 왜?
진호는 재빨리 사정을 설명했다.
-뭐, 소개팅? 진짜? 재벌 집 딸이야? 아니지, 너희 첫째 고모부가 부장검사니까 검사? 변호사?
"몰라. 다 알려 주면 재미없다고 이름하고 나이만 알려 주셨어."
-이야기는 나눠 봤어? 괜찮은 사람 같냐?
"전화번호도 안 알려 주셨어."
-……미안하다. 형이 널 케어했어야 했는데……. 그래도 사전에 이야기조차 나눠 보지 않고 만나는 건 좀 그렇지 않아? 대체 얼마나 굶주린 거야?
"……아무튼 그렇게 됐으니까 조언 좀 해 주라. 정장이 낫겠냐, 캐주얼이 낫겠냐? 역시 단정하게 입는 게 낫겠지?"
-상대가 몇 살인데?
"스물여덟 살."
-그렇다면 정장은 집어치우고, 네 드레스 룸에 걸린 아무 코트나 하나 집어 입어. 날이 추우니까 밝은색 계열로.
"그런 건 알고 있으니까, 스타일을 어떻게 해야 하냐고요."
-……알면 혼자 하시죠?
"형."
-그냥 캐주얼하게 입어. 춥다고 조끼 같은 거 처입지는 말고.
"땡큐! 고맙다!"
-내일 어떻게 됐는지 이야기해줘.
"그래. 잘 자."
전화를 끊은 진호는 드레스 룸을 가만히 둘러보다가 눈을 빛냈다.
"이게 좋겠다."
전체적으로 회색으로 입고 밝은 색상의 캐시미어 코트와 하얀 캔버스화, 하얀 셔츠로 포인트를 살리며 캐주얼함과 모던함을 동시에 표현한 진호는 약속 장소인 호텔커피숍에 들어갔다.
커피숍 입구 근처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그대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넋을 놓았다.
그 침묵은 점점 번져 가서 곧 커피숍 전체를 휘감았다.
'어디 보자……아, 저분이네.'
다른 이들과 반응이 다른 여성이 한 명 있었다.
그녀를 보자 드는 감정은 딱 하나였다.
'예쁘다.'
웬만한 연예인은 압살시킬 만큼 아름다운 외모였다.
진호는 그녀에게 다가가며 본능적으로 그녀에 대해 분석해 갔다.
'직장인. 성공한 커리어우먼.'
정장에 작은 포인트만 준 스타일.
직장인이라는 것에 자부심이 없으면, 그리고 정장이 편하지 않으면 쉽게 입을 수 없는 스타일이었다.
"이서형 씨?"
"……서우호 부장검사님께선 제 이름과 나이만 알려 주셨다고 했는데요."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시선에 진호의 머릿속에선 온갖 말이 떠올랐지만, 결국 나온 건 하나였다.
"후, 다행이네요. 아니었다면 홀로 오신 여성분들에게 다 물어보려고 했거든요."
"역시 듣던 대로 관찰력이 대단하시네요."
'눈치가 좋으시네.'
방금 한 말이 거짓말이었다는 걸 알아챈 듯싶었다.
'그런데…….'
진호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저는 이서형 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이서형 씨는 저에 대해 다 알고 있네요. 제가 불리한 상황 맞죠?"
"아, 그건……."
"일단 앉아도 될까요?"
[스킬: 지성이면 감천이다]의 주인공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곤란하게 만드는 질문을 하지 말라고 했다.
"……네."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진호는 입을 열었다.
"케이크 드실래요? 여기 딸기 조각 케이크가 평이 좋거든요."
당분을 섭취하면 사람의 긴장은 느슨해지는 법이었다.
"네, 뭐."
'케이크를, 아니 달달한 걸 좋아하는구나.'
분명 애써 심드렁하니 대답했지만, 그녀의 몸은 정직했다.
'무슨 조언 같은 걸 받고 나온것 같고.'
애써 심드렁하게 대답하려는 듯 한 모습이 딱 그래 보였다.
고개를 끄덕인 진호는 딸기 케이크와 커피를 주문하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찬가지로 그녀도 이쪽을 바라봤는데, 입을 열지 않아서 둘은 졸지에 눈싸움을 하게 되었다.
'이분도 소개팅이 익숙하지 않으시구나. 어쩌지? 무슨 말을 해야하지?'
[스킬: 지성이면 감천이다]의 주인공은 이런 상황에서 결코 초조해하지 말고 의연해지라 했지만, 처음 하는 경험에서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었다.
'서로 통할 만한 주제를 찾아 말문을 트라고 했는데, 그 주제를 어떻게 찾냐고!'
어색해 죽어 버리고 싶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건 이서형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는 답답함과 초조함에 주선자를 향한 원망마저 생겨날 정도였다.
'그런데 잘생기긴 정말 잘생겼다…….'
직장 내에서 최고 훈남이라 불리던 사원이, 여사원들에게 대시를 많이 받을 만큼 잘생긴 사원이 오징어처럼 느껴졌다. 아니, 그 사원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몸에서 나는 향기도 좋고. 향수는 뭐 쓰지? ……어? 향수? 그래, 향수! 언니가 정 할 이야기가 없으면 향수 같이 사소한 걸로 말문을 트라고 했어!'
드디어 이 어색한 상황을 타파할수 있을 거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긴 그녀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타이밍이 겹쳤다.
"향기가 좋으시네요. 향수는 뭐쓰세요?"
"향수 향이 좋네요. 펜디 신상이죠?"
거의 동시에 튀어나온 말.
흠칫 몸을 굳힌 그들은 다시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네, 펜디……."
"저는 마크 제이콥스……."
그 말을 끝으로 둘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더 어색해졌다.
'아오오오오!'
'아아악!'
눈앞에 상대가 없었더라면 바닥을 뒹굴었을 진호는 거의 필사적으로 대화거리를 찾아 눈을 움직였다.
'일단 기본적으로 부유해 보이기는 하는데…… 사치를 부리는 스타일은 아니야.'
차고 있는 롤렉스 시계나 옆에 놓인 프라다 백, 액세서리 등 모두 고가의 명품이지만, 손때가 묻어있다.
'그리고…… 만년필을 쓰네?'
뚜껑이 열려 있는 몽블랑 만년필 아래엔 영어와 어떤 기호가 적힌 쪽지가 놓여 있었다. 진호는 그걸 보자마자 그녀의 직업을 알아차릴수 있었다.
그래서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음, 일단 저희 고모부와는 어떤 관계이신지 물어도 될까요? 아무리 봐도 법조계에 계신 분으로는 보이지 않아서요."
"그걸 묻는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진호는 싱긋 웃었다.
"고모부와 친하시다면 편하게 제모습을 보여 드릴 테고, 아니라면 헤어질 때 주선자에게 뭐 이런 불편한 사람을 소개시켜 줬냐 전화할 수 있도록 과한 예의를 갖춰야 할 테니까요."
"……제 아버지와 서우호 부장검사님은 중학교 때부터 친구셨다고해요."
'안 웃으시네…….'
방금 전 경계를 하며 이유를 물어온 것까지 비추어 보면 방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아아, 그러셨구나. 그래서 고모부 비상금이 마르지 않는 건가?"
"네?"
"서형 씨 아버님께서 고모부 비상금을 관리해 주고 계시죠? 이를 테면 보너스나 상여금 같은 걸."
움찔!
이서형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걸 어떻게?"
"그 쪽지에 금융 관련 용어들이 적혀 있어서요."
화들짝 놀라 옆을 본 이서형은 기겁하며 쪽지와 만년필을 백에 집어넣었다.
"흠흠. 방금까지 업무를 보느라…… MPB(private banker)도 바쁜 직업인가 보네요. 소개팅 날쯤은 일을 잊어도 되실 텐데."
이서형의 눈이 다시 동그랗게 떠졌다.
"……제가 PB인 건 어떻게 확신하시는 거죠?"
"만년필 때문에요. VIP나 그에 준하는 고객을 관리하는 PB는 고급 만년필을 몇 개씩 들고 다닌다고 들었거든요. 고객들이 가져가니까."
이런 진호의 설명에 이서형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우호 삼촌이 각오하라고 하더니…… 대단하시네요."
"어떻게든 공통 주제를 끌어내려고 발악한 거죠. 그 쪽지가 아니었다면 아마 한참 후에나 알아차렸을 거예요. 그런데 그 나이에 PB가 되시다니…… 정말 대단하시네요. 서형 씨 나이 때문에 고객들이 자산을 쉽게 맡기지 않을 텐데……."
"그런 것도 아세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애환을 건드리자 바로 반응이왔다.
'좋았어!'
"사람이 일하는 곳은 다 똑같잖아요."
"응? 연예계도 그런가요?"
"그럼요. 나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하지 못하는 일이 많죠. 어떤 역할은 어리다는 이유로 오디션조차 보지 못하는 걸요."
"하지만 20대의 진호 씨가 40대의 역할을 맡으면 관객을 이해시킬 수 없잖아요."
"그래서 어서 나이가 들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정말 욕심이 나는 역할들은 모두 30대 이상의 나이를 가지고 있거든요. 서형 씨는요?"
"저도 그래요. 30대 중반만 돼도 고객의 클레임이나 담당 PB를 바꾸는 게 반절 이상 줄어들거든요."
"그렇게나 많이 줄어요?"
"그 나이가 되면 고객들도 인정을 해 주는 거예요. 이젠 믿고 맡길 수 있는 나이가 됐다고."
"아, 그거구나. 중도 탈락하지 않고 고객의 자산을 불려 왔으니 앞으로도 그래 줄 거라는 믿음이 생기는 거군요."
"연예계도 그렇지 않나요?"
"비슷하죠. 오랜 시간 동안 주어진 역할을 계속 성실하게 연기해오면 결국 빛을 발하거든요. 그게 꼭 주연이 아니더라도요. 가요계도 비슷하죠. 인디에서 십 년 넘게 노래를 부르다가 우연한 기회로 뜨는 가수들이 있거든요."
이렇게 말문이 트인 둘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가며 이야기를 계속이어 갔다. 점심을 먹고 거리를 걷고 해 가질 때까지 말이다.
우글우글, 왁자지껄.
사람들이 가득한 술집 앞에 선 이서형은 잠시 망설였다.
"이런 곳에 들어가도 돼요?"
"괜찮아요. 연예인도 사람인데요."
"아뇨. 제가 괜찮지 않을 것 같아서요. 벌써부터 열애설 터지면 저 시집가기 힘들잖아요."
장난기가 가득한 그녀의 말에 진호는 피식 웃었다.
"괜찮아요. 제가 해 놓은 게 있어서 함부로 기사 못 내요. 낸다고 해도 저희가 뭐 나쁜 짓을 하는 중인가요?"
"진호 씨 팬들이 무섭다던데…… 응집력이 강하다고."
"장담하건대 오늘 일이 기사로 나가면 그다음 날부터 서형 씨는 선물 공세에 시달리게 될 거예요."
"제가요?"
"네. 저 좀 잘 부탁한다고."
"……에이, 설마요."
팬에게 있어 연예인은 단순한 우상을 넘어 애정하는 상대다. 그래서 질투심으로 인해 무분별한 행동을 하는 사건 사고들이 많다.
하지만 진호는 그럴 일 없을 거라며 고개를 저었다.
"제 팬들은 절대……."
우웅! 우우웅!
때마침 걸려온 전화의 발신자를 확인한 진호는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발신자가 누구인지 보여 줬다.
"회장 누나?"
"제 팬클럽 회장이시죠. 잠시만요."
진호는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받았다.
"엡, 누님."
-소개팅 중이지?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그렇게 돌아다녔는데 우리가 모를까 봐? 여태까지 같이 있는 게 목격되는 걸 보니 서로 호감은 있는 것 같고…… 오케이, 그분 이름하고 직장 주소 보내. 이 추운 겨울날 단 하루라도 우리 진호 옆구리를 따뜻하게 해 주신 고마운 분이 몸 아프시면 안 되잖아.
"어? 나는?"
-넌 오늘 사고 치면 죽여 버릴거고. 소개팅 첫날에 끝까지 가면 죽는다, 진짜. 끊을게.
마지막 말에 살짝 얼굴을 붉힌 진호는 이내 당당한 표정으로서 형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도 살짝 붉었다.
"들었죠?"
"……끝까지 가면 죽는다는 거요? 전적이 있나 봐요?"
"에비, 그런 나쁜 생각은 하지 않는 거예요."
"풋. 아니라고는 안 하네요?"
"시작할 술자리를 위해 노코멘트하겠습니다. 이제 들어가죠. 줍네요."
"흐음…… 이번만 봐 드리는 거예요."
"그런 의미로 손금 봐 드릴까요?"
"싫어요."
"쳇. 요거 안 먹히네."
"소개팅 처음 한 티 그만 내고 들어가시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꽤 많이 한 것 같네요?"
"……이번엔 내가 노코멘트."
서로를 보며 피식 웃은 둘은 술집안으로 들어갔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