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권 9화
지옥이란 게 이런 걸까.
"8번 테이블 산채 파스타 나갑니다!"
"A코스 주문 들어왔어요!"
"오더! 콩국 스프!"
끝없이 밀려드는 주문의 릴레이는 사람의 정신을 쏙 빼놓았다.
이곳이 촬영장이고, 지금 연기를 하고 있는 중이라는 일말의 끈을 쥐고 있기에 어떻게든 소화하려애를 쓰는 주문 지옥.
거기다 마치 그들의 실제로 일한 주방의 수쉐프처럼 엄청난 박력을 뿜어내는 진호의 카리스마가 주방을 지배하며 그들의 몸과 정신을 강제적으로 제어하고 있었다.
'으아아아아!'
그들은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질렸다.
"파스타!"
움찔!
"정신 안 차려! 타잖아!"
"예, 쉐프!"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쉐프란 호칭.
하지만 대답을 하는 단역은 그걸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찜! 벌써 꺼내면 어떡해! 10초간 더 익혀!"
"예, 쉐프!"
"샐러드! 다 됐으면 가져와야지 뭐하는 거야! 더 비비면 숨이 죽잖아! 콩국 스프 오케이! 내보내! 삼겹 간장 스테이크……."
진호는 굽고 찌고 튀기고, 마지막으로 특제로 만든 비법 간장에 조린 주먹만 한 크기의 삼겹 스테이크에 예쁘게 플레이팅을 한 다음 크게 외쳤다.
"오케이! 내보내!"
그렇게 크게 외친 진호는 정신없이 손과 몸을 움직이는 단역들을 보며 옅게 웃었다. 그 미소는 평소진호의 선한 미소가 아니라 무심하지만 정이 많은 코리안 쉐프의 주인공의 미소였다.
"쉐프! 쉐프!"
"왜 그러시죠?"
진호는 음식이 나가는 창구를 통해 고개를 들이민 여주 아닌 여주, 김예은의 다급한 표정에 묘한 기쁨과 의아함을 드러냈다.
"지금 강창석 씨가 저희 레스토랑에 왔어요!"
"……그게 누군데요?"
진호의 눈이 의구심과 미약한 질투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SNS에서 미식가로 유명한 사람이요! 그가 극찬한 가게는……"
SNS라는 말에 진호의 얼굴에서 감정이 급격히 사라졌다.
"그래서 주문은요? 지금 바쁩니다."
"강창석 몰라요? 그 강창석!"
"알아야 합니까? 어차피 내가 이 주방에서 내보내는 요리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 만든 요리입니다. 그가 설혹 대통령이라고 해도 이 이상 특별한 대우를 할 수는 없습니다."
진호의 단호한 말에 김예은의 눈이 순간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주관이 너무 뚜렷한 내 남자가 너무 섹시하게 느껴져서다.
"주문은 오늘의 추천 코스예요!"
"……오더! 오늘의 추천 코스!"
"예! 쉐프!"
진호는 아무도 몰래 김예은에게 윙크를 하곤 돌아섰고, 순간 흐뭇하게 웃은 김예은도 곧 경력 많은 홀 매니저로 빙의되어 돌아섰다.
"오케이 커엇-!"
"……푸하아!"
"크허억!"
장영진의 힘찬 외침에 가장 먼저 주방에 있던 단역들이 조리대를 붙잡으며 무너졌다.
그러나 진호는 불 위에서 조리되고 있는 음식들을 보곤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뭣들 해! 음식은 마무리 지어야 할 거 아냐!"
"예, 예! 쉐프!"
조연과 단역들이 헐레벌떡 일어나 다시 조리 기구를 잡자 진호는 콧방귀를 뀌었다.
"어디 음식이 다 나가지도 않았는데……."
'아차!'
한 박자 늦게 몰입이 깨진 진호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쉬어도 마무리는 짓고 쉬죠! 타버리면 설거지 하기 힘드니까!"
"……푸흐흐! 예, 쉐프!"
"알겠습니다! 쉐프!"
그렇게 하던 음식을 모두 마무리 짓고 내보낸 진호는 조연과 단역들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모두 실력들이 대단하신데요?"
지난 준비 기간 동안 요리를 연습한 게 확연히 보이는 실력들이었다. 미각이 예민한 진호의 기준에서 보자면 약간 떨어지긴 하지만, 그래도 여느 일반적인 레스토랑에서는 충분히 한자리를 차지하고도 남을 실력자들이었다.
이런 진심이 담긴 칭찬에 그들은 쑥스러워했다.
"그렇게 말하는 진호 씨는 소문보다 더한데요?"
"에이, 아니에요. 가져온 운암정 장 맛이 좋아서죠."
진호는 너스레를 떨었지만, 명품 조연의 계보를 잇는 이재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아. 진짜 아깝다. 이런 실력이라면 스타 쉐프가 될 텐데……. 진짜 장난으로 묻는 건데, 배우는 왜 하는 거예요?"
이재영이 혀를 내두르자 진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선배님과 같은 이유죠. 연기가 좋아서요. 아, 말 편하게 하세요. 한참 후배입니다. 선배님들도 말편하게 해 주십시오."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이재영과 단역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자 진호도 웃을 수 있었다.
'이제야 좀 서로 연결된 것 같네.'
그들과 더 대화를 하며 서로 파이팅을 다진 진호는 홀에 있는 장영진에게로 향했다.
'음?'
진호는 음식을 입에 가져가는 이 한 명 없는 홀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렸다.
"반장님!"
"예, 진호 씨!"
어디선가 엑스트라 반장이 달려오자 진호는 입을 열었다.
"엑스트라분들 음식 드시게 하세요."
"예에?"
"음식은 식으면 맛없잖아요."
"하, 하지만……."
"괜찮아요. 음식이야 또 만들면 되죠. 저희 제작비도 많으니까 팍팍 드시게 하세요. 어차피 오늘 하루 만에 다 찍을 수 있는 신도 아니고."
"……예! 알겠습니다!"
"그럼 반장님만 믿을게요!"
"옙!"
돌아선 반장은 크게 외쳤고, 요리에서 올라오는 향긋한 냄새에 군침만 꼴깍꼴깍 삼키던 엑스트라들은 만세를 외쳤다.
진호는 이쪽을 향해 엄지를 치켜 드는 장영진을 보며 피식 웃었다.
"역시 진호라니까."
"흐흐. 모니터링이나 하죠."
"그래, 한번 봐 봐."
장영진은 확인을 하던 촬영본을 다시 처음으로 돌려 재생시켰고, 진호는 그 자신도 모르게 헤벌쭉 웃고 말았다.
장영진은 그런 진호를 보며 어이 없어했다.
"진호야, 손님…… 아니, 엑스트라들 반응이 아니라 네 연기를 봐야지."
흠칫!
"……크흠."
진호는 그제야 자신의 연기, 아니 주방 안에서 일어난 모든 연기를 보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음. 동선이 좀 난잡하네요."
서로 제대로 된 합을 맞춰 보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래? 흐음……."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참 생동감 있다고 생각했던 장영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영상을 보았다.
"당장 어제까지 운암정에서 일한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수정할 수 있겠어?"
이런 디테일은 진호가 한 수위라는 걸 익히 알고 있는 장영진은 스스럼없이 도움을 구했다.
"방금 같은 상황을 몇 번 더 겪으면 자연스럽게 될 것 같아요."
주방 내에서의 동선이란 누군가 가르쳐 준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서로 부딪치며 욕설을 받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익히는 거다.
"오케이, 알았어. 몇 번 더 찍자. 재영이도 괜찮지?"
"……끙. 오너 쉐프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뭐야. 벌써 서로 인정한 거야?"
쑥스럽다는 듯 웃은 이재영은 돌아섰고, 장영진은 진호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도 이제 주연이구나."
"흐흐흐."
"……홀 움직임 좀 봐 봐. 어때 보여?"
"아, 그렇지 않아도 말하려고 했어요. 지금…… 그래요. 이 상황."
"으음."
장영진은 진호가 말하는 걸 기록해 갔고, 진호는 눈에 밟히는 모든 걸 차근차근 풀어냈다.
* * *
주문 지옥이 몇 번 더 이어지고, 엑스트라들이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며 여유를 찾자 그림이 생동감 있게 살아나기 시작했다.
아무런 지시 없이 그냥 가만히 놔둬도 일류 레스토랑을 보는 듯 한 풍경이 카메라에 담기자 장영진은 연신 오케이를 외칠 수밖에 없었고, 영화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신과 레스토랑에서 찍을 모든 신은 10일 만에 마무리될 수 있었다.
"이게 푸드 트럭에서 팔아 볼 첫번째 요리예요."
마치 잘 익은 돼지갈비처럼 갈색으로 노릇노릇하게 익은 돼지고기 숯불구이와 달콤하게 볶은 김치를 넣어 만든 찹쌀 주먹밥.
"소박하네?"
방금 전 주방에서 풍겨 나온 강렬한 냄새를 생각하면 결코 상상할 수 없는 비주얼이었다.
얼핏 보면 태국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 같았다.
"그래도 내용물이나 조리 방법은 결코 소박하지가 않죠."
일단 텍사스 바비큐 형식으로 약한 불에 훈제하듯 오랜 시간 익혀 로스트 포크로 만든 돼지고기를 [스킬: 엄마 손 맛]의 갈비 소스 레시피에 버무려 강력한 숯불에 살짝 더 익힘으로써 불 맛과 고기 맛을 극한까지 끌어을렸고, 김치는 운암정에서 3년간 묵힌 김치를 특제 참기름에 달달 볶아 만든 것이다.
이런 진호의 설명에 장영진은 군침을 삼켰다.
"미쳤네. 이게 점심시간 길거리에 사악 퍼지면……."
"그냥 줄 서는 거죠."
쫀득한 찹쌀밥에 달콤새콤매콤한 김치볶음, 그리고 그 위에 얹어지는 돼지갈비 숯불구이. 생각만 해도 침이 꼴딱꼴딱 넘어갔다.
"원래 고기는 부담돼서 점심에 잘 안 먹는데…… 이건, 뭐."
냄새란 폭력이 강제적으로 사람의 발길을 붙들어 버리는 거다.
"원래 아는 맛이 무섭잖아요. 그리고 점심에 고기를 잘 먹지 않는 이유는 옷에 냄새가 배니까 그러는 거고요."
"……허어. 같은 텍사스 바비큐로 이렇게 다른 결과물이 나오나?"
텍사스 바비큐는 아메리칸 셰프에서도 썼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아요?"
"괜찮은 정도겠어?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서양인을 향한 어필이 좀 부족하다는 거겠지."
장영진은 해외 영화제도 욕심을 내고 있었다.
"아, 그것도 모두 짜 놓았어요. 여기 보시면……."
진호는 뒷주머니에서 레시피 수첩을 꺼내어 보여 주었고, 장영진은 눈을 빛냈다.
"호오, 이거 괜찮겠다. 너비아니 치아바타. 쫀득하고 고소한 치아바타 안에서 쭉 뛰어나올 짭짤달콤한 너비아니 육즙. 크-!"
"그렇죠? 그건 아침에 판매할 거예요. 두유처럼 묽게 만든 콩국과 같이."
"든든하겠네! 와, 여기 고등어 케밥도 맛있을 것 같은데?"
바다에서 막 올라온 싱싱하고 심심한 고등어를 매콤달콤한 불고기 소스를 발라 숯불에 구운 후, 진호가 직접 만든 바게트에 여러 야채와 특제 소스를 넣어 베트남의 반미처럼 만든 케밥.
"그건 점심용으로 동치미 에이드와 함께 팔 거예요."
"캬으. 좋다, 좋아. 그냥 꿀떡꿀떡 넘어가겠네."
"어때요? 감독님이 선정한 도시의 특산 식재료들과 잘 어울리는 요리들이죠?"
장영진은 어느 도시의 특산 식재료를 가지고 요리를 만들라고 말했을 뿐, 조리 방법은 모두 진호에게 맡겼다.
"그걸 말이라고 해? 딱 내가 막연하게 생각하던 퓨전 한식 그대로야! 안동에서 고등어 먹고, 통영에서 굴 먹고, 목포에서 갈치 먹고!"
"횡성에서 한우 먹고, 장흥에서 삼합 먹고, 언양에서 불고기 먹고!"
"그냥 지금 가자, 진호야!"
네, 하고 크게 외치려고 했던 진호는 갑자기 침울해졌다.
"카메라 감독님들 모두 휴가 가셨잖아요."
장영진이 10일간 수고 했다는 의미로 허락했다.
"……아오오!"
'저도 아오오! 프랑스 요리 관련 스킬도 익혀 놓을걸! 그랬으면!'
더 맛있는 요리가 나왔을 것이다.
"에이. 맥주나 마셔야겠네."
"맥주 가져올까요?"
"그래야겠지? 여기에 소주 마시면 집에 기어 들어갈 것 같아."
"계세요. 가져 올게요."
"얼음도! 이 비주얼 보니까 꼭 태국 길거리 생각난다."
"옙!"
"저기……."
일어서던 진호와 장영진이 가게 입구를 보았다.
30대 중반의 사내와 예쁘게 차려입은 20대 후반의 여성, 그리고 60대 노부부가 이쪽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어? 어?"
순간 웃음이 터질 뻔한 진호는 고개를 숙였다.
'환기 때문에 문을 열어 놨더니 또 이런 일이 생기네.'
더 씨프를 찍을 때 몇 번 있었던 상황이라서 그런지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안녕하세요. 이진호입니다."
"장영진입니다."
"……허어억!"
"부모님 모시고 식사하러 나오셨나 봐요?"
"네? 예, 예."
"그런데 어쩌죠? 오늘 이곳은 장사 안 하는데……."
카메라를 찾아 가게 안을 두리번거리던 그들은 다급히 손을 저었다.
"아뇨, 아뇨. 그, 그럼 실례했습니다."
그들이 황급히 가게를 나가자 진호와 장영진은 서로를 보며 크게 웃었다.
"그럼 전 먹다가 끊기지 않게 요리 몇 개 더 만들어 올게요."
"흠. 그럼 난 윤식이 형을 불러야겠다. 괜찮지?"
"오! 윤식 삼촌! 재정 삼촌이랑…… 아니, 더 씨프, 더 제이 팀모두 부르죠! 재영 형님이랑 예은 누나도."
"감당할 수 있겠어?"
"왜 이러세요. 저 200명 스태프 음식도 책임졌던 이진호예요."
"으흐흐. 오케이!"
그리고 이날, 예비 신랑과 예비 시부모님과 함께 초겨울 나들이를 나왔던 예비 신부가 올린 글이 커뮤니티 사이트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