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권 8화
3. 코리안 셰프.
약속된 시간이 되자 진호는 예정된 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다.
"……."
소파에 앉아 멍한 눈빛을 짓는 진호의 곁으로 피부가 갈색으로 탄 아버지 이형만이 앉았다. 그는 진호에게 상큼한 냄새가 올라오는 따뜻한 매실차가 담긴 컵을 넘겨주었다.
"힘들어?"
참 많은 뜻을 담은 한 마디의 물음이었다.
"뭐랄까…… 실감이 잘 나지 않네요. 어제 헤어져서 이런가 봐요."
아쉬운 점도 있었다. 매 계절, 매달마다 식재료와 조리법이 바뀌는 운암정의 맛을 모두 흠치지 못해서 말이다.
"그래도 즐거웠지?"
진호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더 아쉬운지도…….'
역시 정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시간에 출근해서, 같은 시간에 퇴근하며 쌓은 정은 촬영장에서 배우, 스태프들과 쌓은 정보다 훨씬 더 진했다.
안 가면 안 되냐 소매를 잡으며 물어 왔던 운암정 사람들의 모습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김덕주 총주방장님과 홀 매니저님의 만류가 아니었다면…….'
아마 어쩌면 지금도 운암정 사람들과 술자리를 가지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권유를 못 이겨 출근을 해 버렸을지도.'
진호의 입가에 작은 미련이 담긴 미소가 절로 번졌다.
"즐거웠어요. 아주 많이."
"그거면 됐다."
"네."
둘은 잠시 침묵을 하며 따뜻한 매실차로 서늘한 아침에 굳어 버린 몸을 깨웠다.
진호는 힐끔 아버지 이형만의 컵을 보곤 피식 웃었다.
굉장히 작은 그의 컵에는 매실차가 아니라 새까만 에스프레소가 담겨 있었다.
"세계 일주를 다녀오신 여파가 너무 큰 거 아니에요?"
에스프레소뿐만 아니다. 지금은 운동을 가고 없는 어머니 나진희는 당연하다는 듯이 아침 식사를 서양식으로 차렸다.
"어흠흠. 사람은 역시 적응의 동물이더구나."
"네네. 그렇다고 해요. 그래도 집안에 신발 신고 들어오시면 안돼요?"
"뭐야?"
"푸흐흐흐."
"……."
어이없어하다가 픽 웃은 이형만이 진호의 손을 쓰다듬었다.
"괜찮겠니?"
오늘 아메리칸 셰프, 아니 코리안 셰프가 크랭크 인을 한다.
어제 운암정을 관둔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타이트한 스케줄이었다.
"괜찮아요. 쌩쌩해요."
"그래도……."
"정말 괜찮아요. 오히려 어서 촬영을 하고 싶은 걸요?"
[스킬: 엄마 손 맛]의 레시피와 운암정에서 일하며 떠올린 퓨전 한식 레시피들을 풀어내고 싶어미칠 것 같았다.
'비록 내가 만든 장은 숙성되려면 아직 멀었지만…….'
윤헌수 숙수가 그동안 수고 했다며 준 운암정 표 장의 양이 엄청났다. 간장, 된장, 고추장 모두 각기 커다란 항아리 하나씩 분량이었다.
진호는 베란다의 공간을 제법 크게 차지한 커다란 항아리들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띵동!
"아, 성실장님이 오셨나 보네요."
"……그래. 잘 다녀오고. 날 추우니까 몸조심하고."
"옙! 다녀오겠습니다!"
미지근하게 식은 매실차를 단숨에 들이켠 진호는 약간 커다란 가방을 들고 현관으로 향하려다가 거실에 세워진 진열장을 보곤 순간 발을 멈추었다.
진호가 여태껏 받은 상패들이 진열된 진열장 안에는 '운암정 명예 숙수'라는 작은 상장이 놓여 있었다.
운암정 주방 사람들이 준 이별 선물이었다.
스윽 상장을 쓰다듬은 진호는 다시 현관을 향해 발을 뗐다.
그런 그의 입가에선 더 이상 미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젠 본업을 해야지.'
* * *
수능이 가까워져서 그런지 입가에서 김이 날 정도로 추운 날임에도 코리안 셰프의 촬영장은 시끌벅적 뜨거운 온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양파! 양파 어디 있어!"
"방금 도착했습니다! 갑니다-!"
"빨리 가져와!"
진호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스태프들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여기가 촬영장 맞지?"
장영진 감독은 세트장을 짓는 게 아니라 아예 강남의 한 건물 1층을 임대하여 실제 레스토랑처럼 촬영장을 꾸몄다.
바깥에는 간판마저 멋지게 달아놓았다.
그렇게 리얼리티가 살아서인지 이곳이 실제 레스토랑인지 아닌지가 잘 구분되질 않았다. 여기저기 세워져 있는 촬영 관련 도구들만 아니라면 레스토랑이라고 오해했을지도 몰랐다.
"멋지지?"
어느새 다가온 장영진 감독이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말을 해서 뭐 할까요."
방금 전 들어가 본 주방이 어찌나 마음에 드는지 그대로 떼어 집에 가져다 놓고 싶을 정도였다.
"저희 제작비가 얼마라고 했죠?"
"일단 백억이지."
언제나 그렇듯 크리스찬 디올을 비롯해 LVMH까지 11개의 스폰서가 붙었고, 구성그룹에서도 제작비를 투자했다.
덕분에 이런 식으로 촬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투자자들이 말하길 부족하면 얼마든지 더 투자해 준다고 했고."
'그 백억도 다 쓸 수 있을지가 의문인데요…….'
어색하게 웃은 진호는 촬영장을 다시 둘러봤다.
"그런 거면 배우를 많이 쓰시지."
오늘 인사를 나눈 주조연급 배우는 겨우 세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세 명만이 영화가 끝날 때까지 같이한다.
"그런 영화니까. 여주 아닌 여주 한 명, 너 따라다닐 조연 두 명."
나머지는 모두 단역 및 카메오였다.
"더 이상 투입시키면 그림이 난잡해져."
'제작비가 부족한 게 아니라 남아돌아서 곤란한 상황이라니……. 모든 걸 최고로 맞추기는 했지만 그래도 남아…….'
헛웃음을 터트린 장영진은 이런 상황을 불러일으킨 진호를 사랑스럽다는듯 보았다.
"내가 우리 외계인님처럼 다재다능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1년에 네 작품씩 우리 외계인님과 작업할 텐데."
"쿨럭! 감독님도 그 소리세요?"
'별에서 날아온 당신'이라는 약간 유치한 제목을 지닌 최은수 작가의 드라마는 진호에게 외계인이라는 별명을 안겨 주었다.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진호도 못하는 게 없기 때문이었다.
현재 17화 시청률이 34.1 퍼센트를 달성해서 그런지 거의 진호를 대표하는 별명으로 굳어진 상태였다.
"으흐흐."
짓궂게 웃는 그의 모습에 고개를 저은 진호는 조리사복을 입은 채 촬영장 한구석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네 명의 사내들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주방의 스태프를 연기할 이들이었다.
'긴장하고 있네.'
마치 진호 자신이 운암정에 첫출근을 했던 것처럼 말이다.
"왜 그래?"
"너무 긴장한 것 같아서요."
주방의 스태프, 즉 셰프를 연기할 이들뿐만 아니다.
서버를 연기할 단역들도, 또 손님이 될 엑스트라들도 모두 긴장해있었다.
고개를 돌린 장영진도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네. 많이 긴장해 있네. 아마 쟤들 인생에선 더없이 큰 기회라서 그런 거겠지. 엑스트라들은 반장에게 한소리 들었을 거고. 백억원짜리 작품이 흔한 게 아니잖아. 안 그래?"
"그건 저도 마찬가지인데요……."
코리안 셰프는 난생처음으로 단독 주연을 맡는 작품이다.
장영진이 괜히 극중에서 진호와 연결이 되는 여자 주인공을 여주아닌 여주라 말한 게 아니었다.
거기다 백억 원짜리 초대형 작품이었다.
'아무래도 이런 중압감을 느끼는 상태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긴장을 풀 동료 배우가 적어서 그런 것 같은데…….'
진호 본인도 그런 감정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장영진이 난색을 표한 것처럼 다른 배우들을 대거 섭외할 수는 없었다.
"으음. 이래서는 곤란한데……."
"확실히 곤란하지."
"음?"
진호는 동의를 하는 장영진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니, 감독님은 제 말에 동의하시면 안 되잖아요. 대책을 내놓으셔야지."
"진호야."
정색하는 장영진의 말에 진호는 반사적으로 긴장했다.
그러나 이내 흘러나온 말은 진호의 예상과 달랐다.
"저건 될 때까지 카메라 돌리는것 말고는 답 없어. 나라고 해도 저건 어쩔 수가 없다. ……진짜 어쩌지?"
처량하기까지 한 그의 어조에 진호도 맥이 탁 풀려 버렸다.
'그걸 왜 저한테 물으세요…….'
"……진짜 첫 촬영부터 이래도 돼요?"
"그럼 어쩔까? 그냥 오늘 접고 술 마셔? 난 술을 마신다고 해도 내일이 되면 똑같을 것 같은데?"
진호는 동의했다.
카메라 앞에 서는 긴장감은 카메라를 자주 접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해소될 방법이 없다.
'그렇게까지 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냐는 건데…….'
"흐음."
진호는 다시 실제 레스토랑처럼 만든 촬영장을 둘러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다 순간 번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감독님."
"왜? 우리 진호, 방법이 생겼어?"
'……에라이.'
마음을 가다듬은 진호는 눈을 빛냈다.
"저분들 실제로 레스토랑 주방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고 했죠?"
"서버들도 모두 실제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애들로만 뽑았지. 제작비도 남아돌겠다, The J에서처럼 리얼리티를 위해 …… 잠깐, 설마?"
"네. 우리 그냥 실제 상황처럼 가죠."
장영진은 진호를 멍하니 바라봤다.
"진심이세요?"
조감독은 멍하니 장영진을 보았다.
"어음…… 감독님, 아니 영진이형. 정말 실례가 될 수 있는 말인데……."
"실례가 되는 말이면 하지 마."
"……진심이라는 거네요."
"그럼 곧 진호가 해 줄 맛있고 따뜻한 요리를 먹을 내가 흰소리할까? 가서 엑스트라 반장에게 고지나 잘해. 서버들과 셰프들의 귀에 이 소리 들어가면 너 진짜 죽는다."
"……돌아 버리겠네."
인상을 크게 찌푸린 조감독이 에라 모르겠다 머리를 벅벅 긁으며 멀어지자 장영진은 촬영장을 둘러보며 눈을 빛냈다.
'의외로 멋진 그림이 나올 수도 있겠어.'
이제 남은 건 진호가 잘해 주는 것뿐이었다.
장영진은 진호가 있는 주방을 보았다.
'분위기 잘 잡아라, 진호야.'
"흐읍! 후우."
"후우우."
공간이 넓은 홀과 달리 공간이 좁아서 그런지 단역들의 긴장한 모습이 더욱 세세하게 느껴졌다. 그중에는 요새 한창 명품 조연의 계보를 잇는 30대의 배우도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눈을 빛낸 진호는 여유롭게 물을 마시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긴장하시면 안 좋을 텐데……."
마치 혼잣말처럼 나지막하게 읊조린 말이었지만, 주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듣게 되었다.
진호는 시선이 몰리는 걸 느꼈지만, 모른 척 다시 혼잣말하듯 읊조렸다.
"장 감독님은 롱 테이크를 엄청 좋아해서 벌써부터 긴장하면 지쳐서 연기 못 할 텐데……."
롱 테이크. 그 어떤 명품 배우라도 지쳐 버리게 만드는 악몽의 촬영 기법이었다.
움찔.
반사적으로 몸을 굳힌 그들은 당혹스러운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저…… 진호 씨?"
"아, 네?"
진호는 이번 영화를 끝까지 찍을 조연 배우를 향해 의아함을 드러냈다. 그 태연하고도 능청스러운 모습에 조연 배우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방금 전 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장영진 감독님이 롱 테이크를 좋아하신다고 하셨잖아요……."
"아아, 들리셨어요? 죄송합니다. 혼잣말이 좀 컸나 보네요. 그래도 질문에 답을 드리자면, 네. 20분은 거의 기본이죠. 컷을 쉽게 안 하는 스타일이시라서요. 그로 인해 발생되는 돌발 변수도 좋아하시고."
"20분이요? 거기다 돌발 변수?"
"그럼요. 그렇게 길게 롱 테이크를 하는데, 돌발상황이 생기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으음. 그런 말은 듣지 못했는 데……."
"무슨 말을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아마 예전 스타일일 거예요. 저 The J 찍을 때의 장 감독님은 리얼리티도 좋아하셔서 액션 신 같은 경우엔 한 시간도 롱테이크 한 적 있는걸요."
"하, 한 시간이요?"
사람들은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진호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네. 한 시간. 드라마로 방영된건 정말 많이 잘린 거죠. 그럼 경험을 비추어 보면 오늘 촬영은…… 음. 그냥 정신줄을 놓는 게 좋을 듯하네요."
"……네?"
"여기 주방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들 보이시죠?"
마치 CCTV처럼 설치된 작은 카메라뿐만이 아니다.
촬영팀도 촬영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홀에서 촬영을 준비하고 있는데 말이다.
"이건 그냥 밖의 상황이 끝날 때까지 요리만 죽어라 만들라는 소리 같네요. 실제 쉐프들처럼……. 아마 그러라고 주방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선배님들을 섭외하신게 아닐까요?"
데뷔 년도로 치면 진호보다 앞서는 조연과 단역 배우들의 낯빛은 하얗게 변해 갔다.
"그럼 그런 롱 테이크라도 마음에 안 들면 다시……."
꿀꺽.
누군가 침을 넘기는 소리에 진호는 싱긋 웃었다.
"뭐, 죽기야 하겠어요?"
그 미소는 꽤 초탈해 보여서 위험해 보이기까지 했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