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권 6화
팀 이진호는 진호가 없어도 바빴다.
띠리링! 띠리링!
"예! 팀 다미앙입니다. 네, 이진호 배우의 회사가 맞습니다."
"아직 모델을 새로 뽑을 의향은 없습니다. 다른 에이전시에 문의해 주세요."
"BJ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장경아 실장님! 지니어스에서 연말 콘서트를 할 거냐고 물어 왔습니다!"
"네, 지 실장님. 연습생들 레벨은 어디까지…… 알겠습니다! 콘서트문제는 일주일 안에 연락드린다고 하세요!"
언제나 같은 풍경.
쉴 틈 없이 바쁨에도 직원들의 열의는 엄청났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다미앙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컵을 손에 든 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바쁘군. 아직 드라마가 방영되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쉬는 입과 손이 하나도 없다.
사무직 직원이 무려서른 명이나 되는데도 말이다.
후룩!
다미앙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머리를 굴렸다.
'방송국 내부 사정으로 인해 나중에 방영될 리얼정가 아마존 편, 곧 방영될 드라마, 늦어도 내년 말 안에는 상영될 영화…….'
"이 세 개가 모두 터져 준다고 가정하면?"
드라마 3화 이후부터는 대기업 광고도 엄선해서 찍을 예정이었다.
톡톡톡.
머그컵 주둥이를 검지로 두드리던 다미앙은 이내 입을 열었다.
"사무실을 이전해야겠군."
그러며 직원도 더 뽑아야 할 듯 싶었다.
눈을 빛낸 그는 몸을 돌리다가 갑자기 드는 생각에 피식 웃었다.
"정들만 하면 옮기고, 정들만 하면 옮기고....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말은 이렇게 했지만, 다미앙은 감사했다.
자신의 기대에 멋지게, 아니 그 이상으로 부흥해 주는 진호에게 말이다.
"진호 씨는 지금쯤 뭘 하고 계실지……."
진호를 보지 못한 지 벌써 두 달여. 가을의 쓸쓸한 바람이 불어와서 그런지 부쩍 진호가 보고 싶어졌다.
* * *
"아, 춥네요."
"그러게. 며칠 전까지 만해도 쪄죽을 듯 더웠는데……. 가을은 가을인 가 봐."
주방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서 담배를 펴고 있는 숙수들의 얼굴에 피로가 서려 있다. 아직 점심 장사를 시작하려면 시간이 남았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요새 손님이 많아진 것 같지 않아?"
"형님도 그 생각 하셨습니까?"
"어? 너도?"
숙수들은 살짝 놀랐다.
모두가 이렇게 느꼈다면 정말 손님이 늘어난 게 맞았다.
"뭘 놀라고 그래. 가을이면 손님많아지는 거 알면서."
가을은 천고마비의 계절임과 동시에 수확의 계절이다.
사람들은 단풍과 맛있는 음식을 찾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예년보다 더 많아진 것 같아서요."
"……확실히 그렇기는 하지. 홀에서도 비명 소리 튀어나온다고 하고. 아, 그래서 주차장에서 손님을 돌려보내는 알바생을 구한 건가?"
"허, 그랬어? 그 정도였어? 왜지?"
그들은 현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계절별로 들쑥날쑥하다 해도 결국 운암정을 찾는 손님의 숫자는 거의 일정했었기 때문이다.
"왜긴 왜야. 막내 때문이지."
"막내? 창영이?"
"진호."
숙수들은 눈을 껌뻑였다.
그러나 진호가 막내라는 말은 부정하지는 않았다.
"뭘 모르는 척해? 저번 주에 진호가 출연한 드라마를 같이 시청했잖아."
"……아, 1화 시청률이 15퍼센트라고 인터넷에서도 떠들썩했지? SNS로 퍼진 건가?"
"그렇지. 진호가 여기서 음식을 배운다고 SNS에 올린 홀 애들 때문에 손님이 늘어난 거지. 진호의 한국 팬이 무려 50만 명에 육박한다고 하더라고."
그들은 입을 떡 벌리며 이곳 어딘가에 있을 진호를 찾았다.
한편, 담배 냄새 때문에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쪼그려 앉은 진호는 얼마 전 스킬을 해금하는 과정에서 얻은 결과물인 약과를 입에 가져가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3차 해금 조건인 운암정 주방에서 나물 무치기는 해금했고, 4차 해금 조건인 운암정 주방에서 한과 천 개 만들기도 해금했고, 5차와 6차인 육고기 요리 100개와 생선 요리 100개도 모두 해금.'
숙수들은 위한 아침과 점심 식사를 만들 때, 매번 자원했기에 겨우 해금을 할 수 있었다.
"남은 건 장 담그기와 젓갈, 김치 담그기와 장아찌 담그기인데……."
운암정 숙수와 함께,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라는 조건이 붙는 이 해금 조건들.
"푸후. 젓갈이나 장아찌를 담그는건 20년 차부터라고 했는데……."
젓갈이나 장아찌, 김치는 밑반찬으로 치부되기에 손맛이 좋다면 아무나 해도 상관없을 듯하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다.
이 젓갈과 장아찌, 김치는 제주도 에서도 와서 먹을 만큼 운암정을 대표하는 요리였다. 그렇기에 20년 차가 되어야 겨우 배울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는 요리기도 했다.
장아찌의 베이스가 되는 장은 말할 것도 없다.
아니, 된장을 비롯한 여러 장들은 운암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장 담그기는 운암정 주방에서 30년 이상 근속한 숙수들만의 영역이었고, 외인 에겐 결코 알려줄 수 없는 비법 중 비법이었다.
즉, 진호가 아무리 부탁을 해도 장을 담글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음?"
초조한 마음을 달래고자 약과를 입안에 밀어 넣던 진호는 어디선가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이쪽을 바라보던 이들이 재빨리 시선을 돌려 버렸기 때문이다.
무슨 일인지 물어볼까 하던 그는 이내 그만두며 일어섰다.
'시간이 됐네.'
"5분 후에 대문 연다고 합니다!"
"……끄아! 그럼 일해 볼까?"
"어구구. 점심에 일 끝나면 침이나 맞으러 갈까. 몸이 영 무겁네."
"같이 가죠, 형님."
"점심 일 끝나고 사우나 가실분?"
그랬다. 이제 일할 시간이었다.
진호는 피로가 가득한 그들의 낯빛을 보며 다시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가 이내 눈을 가늘게 떴다.
머릿속이 근질근질한 게 어떤 방도가 떠오를 것 같아서였다.
'요새 부쩍 피곤해 하신다는 말이지…….'
모두 주문량이 많아서였다.
때문인지 40대 후반 이상의 숙수들이 벅차 하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진호는 이내 눈을 번쩍 떴다.
"……저녁 일 끝나면 마사지를 해 드릴까?"
'그래서 아주 조금이라도, 티끌만 이라도, 아니 잡일만 해도 되니까 젓갈들을 만드는 걸 지켜 볼 수 있다면?'
진호는 눈빛을 형형하게 빛냈다.
'어쩔 수 없네. 그 레시피를 꺼내야겠어.'
[스킬: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의 주인공이 말년에 만든 아로마 오일. 하루의 피로를 완전히 풀어 주다 못해 활력이 너무 넘쳐서 70대 노인도 펄쩍펄쩍 뛰어 다닐 수 있게 만드는 그 오일.
말이라도 붙여 보려면 이 정도 밑밥은 깔아야 했다.
'거기에 내 악력이 합쳐지면……으흐흐.'
진호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퍼져 갔다.
* * *
손님이 늘어나면서 주방뿐만 아니라 홀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니, 질러야 했다.
"어서 오십시오. 운암정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세 분이십니까?"
손님을 맞이하는 서버들의 얼굴에선 피로는 커녕 윤택마저 흘렀고, 전신에서는 활기가 넘쳐났다.
그 때문인지 그들의 미소는 멀리서 찾아오면서 어쩔 수 없이 쌓인 손님들의 짜증과 피로를 날려 버릴 만큼 환하고 상큼했다.
때문인지 손님들은 무척이나 기분 좋게 음식을 기다릴 수 있었다.
"매니저님."
웃고 떠들며 음식을 기다리고 먹는 손님들의 모습을 주욱 둘러보던 30대의 서버가 50대의 중년 여성을 향해 입을 열었다.
"요새 홀 분위기가 좋지 않나요? 클레임도 줄어들었고."
머리를 곱게 틀은 매니저는 그말에 홀이 아니라 응대를 하는 서버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진심으로 웃으면서 응대하는데 클레임이 줄어들 수밖에 없지. 진호 씨에게 고맙다고 해."
"호호. 역시 진호 씨가 준 아로마 오일과 향초 때문이겠죠?"
원래 서비스 직종이라는 게 기분이 나빠도 웃을 수밖에 없는데, 그게 쌓이고 쌓이다 보면 사람인 이상 티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진호가 어렵게 구했다며 가져다준 오일과 향초는 그 냄새만 맡아도 그런 스트레스와 피로가 모두 날아갈 버릴 만큼 효과가 좋았다.
심지어 너무 스트레스가 풀려 버린 나머지, 깊이 잠들어 늦잠을 잔탓에 지각을 할 뻔한 서버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거 아세요? 숙소에 사시는 주방 숙수님들은 저녁에 진호 씨에게 마사지를 받는데요. 5분만 받아도 막…… 어후우."
"그랬어?"
마사지란 단어에 매니저의 몸이 움칫 굳었다. 여느 아주머니들처럼 그녀도 마사지 마니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새 음식 맛이 더 좋아졌다는 평이 나오는 건가?"
"그래요?"
30대의 서버는 들어 보지 못했다는 듯 화들짝 놀랐고, 매니저는 옅게 웃었다.
"VIP들이 말하는 거라 영숙 씨는 듣지 못했을 거야."
"어머머!"
미식가, 요리 연구가, 재벌 등 만날 좋은 것만 먹고 마시기에 입맛이 고급스러울 수밖에 없는 운암정의 VIP들.
그런 그들의 맛평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던 그녀의 낯빛은 돌연 흐려지기 시작했다.
"후, 이럴 때 총주방장님이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다른 이들은 모르지만, 그녀는 총주방장이 지난 2년간 운암정에 들르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 자신이 주방을 떠나기 전에 윤헌수가 주방을 온전히 장악할수 있도록 베푼 배려이자, 시험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는 운암정의 사장과 총주방장, 그리고 홀 매니저인 그녀만 아는 일이었다.
"그러게요. 연세도 많으신 분인데, 몸은 건강하실지……. 하아, 총주방장님이 해 주신 약과 먹고싶다."
'나도.'
속으로 동의를 했지만, 체면상 드러낼 수는 없는 홀 매니저는 영숙을 툭 쳤다.
"마지막 손님께서 일어나셨어. 자세 바로 해."
"네!"
허리를 꼿꼿이 세운 그녀들은 스쳐 지나가는 손님들을 향해 공손히 읍을 했다.
그렇게 그들이 계산을 한 뒤 신발을 신고 나가자, 운암정 홀을 바쁘게 돌아다니던 모든 서버들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끄으."
"누구 저랑 시내로 커피 드시러 가실 분?"
오늘은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점심 장사만 하는 날이라서 그런지 삽시간에 홀 분위기가 흐트러졌지만, 홀 매니저는 그 부분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녀가 가장 먼저 근처 의자에 앉았기 때문이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나 봐. 관절이 예전 같지가……."
무릎을 두드리다 무언가를 느낀 그녀는 벌떡 일어나 허리를 세웠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다른 서버들도 재빨리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운암정 홀안으로 손님 한 명이 들어왔다.
홀 매니저는 가까워지는 그림자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본 운암정의 점심식사 시간은 이미 끝났으니……."
"오랜만이구만, 매니저."
쩌적!
그녀뿐만 아니라 홀에 있던 서버 전원이 굳어 버렸다.
재빨리 고개를 든 홀 매니저는 허허롭게 웃고 있는 70대 노인을 보곤 눈을 부릅떴다.
'아, 장 담그는 날이 오기 전에 집에서 출퇴근하시는 숙수님들도 마사지를 해 드려야 하는데…….'
도통 타이밍을 잡을 수가 없었다.
슥슥! 첨벙첨벙!
"끄읕!"
"나도 끝!"
마지막 설거지까지 깨끗이 끝낸 진호와 창영, 새벽은 재빨리 식재료들이 올려진 조리대 앞에 섰다.
오늘은 일주일에 딱 한 번, 운암정의 식재료를 마음껏 이용하면서도 다른 숙수들이 모두 시내에 나가기에 맛 평가를 듣지 않아도 되는 날이다.
때문인지 그들의 눈은 무척이나 빛나고 있었다.
"오늘은 무슨 요리를 하실 생각입니까, 요리 천재님들!"
입가에 미소가 가득한 진호의 말에 새벽과 창영의 입가도 주욱 찢어졌다.
"오늘은 가을 제철 식재료인 전어를 이용한 전어무침을 해 볼 생각이다, 이진호 숙수."
"전 병어찜을 해 볼 생각입니다, 이진호 숙수님!"
"그럼 전 삼겹살기름에 대하를 튀겨 봐야겠군요! 창영 숙수, 맥주는 준비됐습니까?"
"영숙 누님이 언제든, 얼마든지 꺼내 가도 된다고 허락했습니다!"
"굿!"
창영을 향해 엄지를 치켜든 두사람, 아니 창영까지 세 사람은 잠시 말을 멈추며 몸을 배배 꼬았다.
"아오, 우리 앞으로 이거 하지 말자. 손발이 펴지지가 않네!"
"흐흐. 왜요. 재밌잖아요."
진호와 창영이 웃자 새벽은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소매를 걷으며 외쳤다.
아니, 외치려고 했다.
"자, 시작하……."
저벅! 저벅!
홀이 아닌 바깥으로 향하는 문쪽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의아해하던 셋은 곧 문 안으로 들어오는 윤헌수 숙수를 발견하곤 하얗게 질렸다.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지만, 조건 반사라 할 수 있었다.
"여기에 내 핸드폰 있나?"
"차, 찾아보겠습니다!"
세 사람은 다급히 흩어져 주방을 뒤지기 시작했고, 윤헌수 숙수는 그들 중 진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사지라…….'
숙소에서 출퇴근하는 숙수들의 음식 맛이 좋아졌다.
만날 같은 맛을 내는 그들의 맛이 좋은 쪽으로 변화했다.
누가 보아도 진호 때문이었다.
'천사라 불린다지?'
손맛이나 요리에 대한 재능도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칠 정도로 뛰어나다.
훔쳐 배우고 있음에도 나날이 솜씨가 늘어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그래서 다른 숙수들도 굉장히 아쉬워하고 있었다.
'……연예인만 아니라면'
진심으로 스카우트를 했을지도 모른다.
"죄송합니다, 숙수님. 주방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 알았다."
'집에 두고 왔나 보군.'
고개를 끄덕인 그는 몸을 돌렸다.
그 순간이었다.
홀로 향하는 문이 거칠게 열렸다.
"정식 한 상과 한우 육회 골동반 주문 들어왔어요!"
윤헌수뿐만 아니라 진호와 창영, 새벽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니, 윤헌수는 아예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만들 숙수 없습니다, 매니저님."
눈앞의 서버가 홀 매니저가 아니었다면, 윤헌수는 울컥 솟은 화를 그대로 표출했을지도 몰랐다.
"손님께선 상관없으니 일단 내오시랍니다."
"그런 진상은……."
거칠게 말하려던 윤헌수 숙수는 홀 매니저가 뻐끔뻐끔 소리 내지 않고 말하는 단어에 눈을 부릅떴다.
"저, 정말입니까?"
"네."
"……알겠습니다. 손님께 대신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말한 그는 몸을 돌렸고,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윤헌수의 격렬한 반응에 의아해하던 셋은 이내 곧 그가 한 말에 경악하고 말았다.
"새벽이는 지금 당장 밥 앉히고, 창영이는 밑반찬 잡고, 그리고 진호 씨는 나를 도우세요."
"……네?"
"뭐해! 움직여!"
"예, 예!"
"예, 숙수님!"
그들은 다급히 움직였고, 진호도 칼을 뽑아 들며 윤헌수 숙수에게 달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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