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229화 (229/424)

10권 4화

2. 운암정

검은 기와가 빼곡하게 올려진 커다란 대문을 지나 푸른 잔디와 함께 어우러진 돌길을 걸으며, 이리저리 제멋대로 솟은 소나무를 감상하다 보면 달큼하고 짭짤한 간장의 향기가 시원한 바람과 함께 코끝을 스친다.

꽃을 찾는 나비가 되어 날 듯 걷다 보면 어느새 사람들이 가득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는 공간에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색색의 음식이 절로 웃음을 만들게 하는 행복한 공간.

"미쳤다."

공기 중에 퍼진 잔향만 맡아도 이 한식집의 맛 레벨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었다.

진호는 꼴깍 꼴깍 넘어가려는 침에 곤혹스러워하며 초조히 음식을 기다렸다.

똑똑똑!

"들어가겠습니다."

질 좋은 나무로 만든 살에 한지를 붙여 만든 문이 열리며 음식이 들어오자 진호의 엉덩이가 크게 들썩였다.

시작은 위를 보하며 더위를 식힐수 있도록 만든 시원한 콩국이었다.

작고 푸른 자기 그릇 안에 담겨, 마치 두유처럼 씹히는 건더기 하나 없이 고소하고 달달하며 끈적끈적해 묽은 죽과 같은 콩국이 입안을 헤집자 진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와, 이건 뭐지?"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을 본 진호는 혀를 내둘렀다.

"왜? 이게 그렇게 대단해?"

진호를 따라온 정실장이 의아해하며 단숨에 들이켰던 콩국을 보았다.

"그렇게 대단하냐고요?"

대단하다.

맛도 맛이지만, 그 정성이 이루말할 수가 없다.

"콩국인데도 거친 건더기가 하나도 없다는 것은 천에 걸렀다는 소리고, 이렇게 끈적끈적한 점성을 가지려면 오랜 시간 불 앞에서 뭉치지 않도록 계속 저었다는 소리예요. 거기다 이 콩국의 간!"

소금이다.

설탕 같은 당류 하나 없이 오직 소금으로만 절묘하게 간을 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고소하고 달달했다.

"대체 무슨 소금을 어떻게 쓴 거지? 암염? 자염? 천일염? 설마 히말라야 핑크 소금인가?"

"……일단 제대로 찾아왔다는 소리지?"

"그럼요! ……하아, 할아버지들과 할머니들을 여기에 모시고 올걸."

아쉬움이 뇌리를 스쳤다.

그 아쉬움은 연이어 나오기 시작한 요리들에 더욱 진해졌다.

"진짜 미쳤다, 미쳤어. 쌀밥 봐. 국은 또 어떻고? 반찬은?"

젓가락을 톡 가져다 대자마자 푸딩처럼 찢기는 갈비찜은 정말 미쳤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한식집의 진짜 정수는 다른 반찬에 있었다.

"……."

진호는 하얀 접시 속 맑은 간장에 잠긴 깻잎 장아찌를 비롯한 여러 젓갈과 장아찌를 찢어발겨 버릴 듯 노려봤다.

언젠가 레오 덕분에가 본 미술랭 3스타의 한식집보다 한 단계위에서 있는 맛. 아득히도 높은 벽이 눈앞에 세워진 것 같았다.

'운암정의 맛은 이렇구나.'

리셋라이프에서 한식 관련 스킬을 얻는 장소가 운암정이기에 이곳을 찾았는데, 게임 속 텍스트가 그 맛을 다 표현하지 못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만약 내가 미식가 관련 스킬을 얻은 상태였다면?'

지금쯤 절망에 허우적거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진호는 음식 좀 한다고 여기저기 기웃거렸던 지난날의 행동을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푸하! 잘 먹었다. 이 집 잘하네……."

"정 실장님."

"응? 왜?"

"나 3개월 동안 스케줄 모두 빼주세요."

"…….어?"

"파리 스케줄을 제외한 모든 스케줄을."

'이 집의 모든 맛을 훔칠 수 있도록.'

원래는 점심 브레이크 타임에만 와서 배우며 스킬을 익히려고 했으나 온몸에서 오싹오싹한 호승심이 내달리고 있었다.

이 감정으로는 다른 스케줄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

* * *

"언니, 언니. 봤어요?"

"봤지……."

"어때요? 막 후광이 비추고 그래요?"

"비추다 뿐이겠어? 내가 서빙 경력 10년 차만 아니었어도 거기서 넋 놓고 있었을 거야. 진짜 왜 CG라고 하는지 알겠더라."

"와……"

부러움이 가득담긴 눈으로 선배 서버를 바라보던 20대 중반의 여성은 순간 코끝을 스치는 알싸한 담배 냄새에 눈살을 찌푸렸다가 이내 화들짝 놀랐다.

"숙수님!"

그녀의 외침에 선배 서버도 화들짝 놀라며 건물의 모퉁이에서 아이코X를 물고 있는 50대의 중년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흠."

무심히 고개를 끄덕인 중년인은 담배를 갈무리하며 몸을 돌렸다.

그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그녀와 선배 서버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총주방장님이 물러나시면 윤헌수 숙수님께서 운암정의 주방을 총괄하시게 되겠죠?"

"응…… 그렇겠지. 우리 운암정 주방의 2인자시니까."

너무 과묵하고 또 여러 소문이 있어 무서운 그가 운암정 주방을 총괄하게 된다?

두 사람의 낯빛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한편 담배를 다 펴지 못하고 주방으로 돌아오게 된 윤헌수는 자신이 들어오자마자 경직된 분위기에 미간을 좁혔다.

"손님은?"

"배우 이진호 씨 이후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음식은?"

"더 주문하지 않았습니다."

"다행이군."

40대 중년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그는 주방 전체를 보며 입을 열었다.

"공지 사항이 있다."

그의 나지막한 말에 주방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오늘부터 배우 이진호 씨가 운암정의 요리를 배우기로 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숙수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는 총주방장님께서 허락하신 일로, 배우 이진호 씨는 한 달 동안 점심 저녁 사이 브레이크 타임에 이곳 주방에서 요리를 배우게 될 것이다. 질문?"

"이진호?"

"그게 누구야?"

"아, 거 왜 있잖아. The J."

"아아, 그 액션 드라마?"

"그 청년 잘생겼던데."

윤헌수의 미간이 와락 구겨지자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몇몇 숙수들이 손을 들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배운다는 겁니까?"

"처음부터 끝까지요."

화들짝 놀란 사람들이 홀로 향하는 주방 입구를 보았다.

그곳엔 진호가 선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쌀을 씻는 법부터 찜을 찌는 것까지 운암정의 모든 맛을 배우고 싶습니다. 한 달이 아니라 3개월 동안요. 가능할까요?"

사람들은 미소는 선하지만, 눈빛은 활활 타오르는 진호를 보며 다시금 놀라야 했다.

그건 윤헌수도 마찬가지였다.

* * *

어스름히 해가 뜨기 시작한 새벽, 말끔한 모습으로 운암정 숙소 건물을 나선 진호는 양팔을 활짝 벌렸다.

"스읍-! 하."

진호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공기 맑네. 역시 강원도라서 그런가?"

분명 도심인데도 서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공기가 맑다.

나날이 심해지는 미세 먼지가 이곳만큼은 없는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스킬: 나는야, 자연의 왕자]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지만 말이다.

진호는 우둑우둑 몸을 풀며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곽종훈 대표와 황재상 쉐프 등의 인맥을 통해 겨우 계약을 하게 된 1개월짜리 연수가 3개월로 늘어난 바람에 운암정에서는 난색을 표할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아직 만나지 못한 총주방장이 허락을 해줬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꽤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회사와의 문제도 잘 매듭지어졌다.

1년의 스케줄 중 현금을 가장 많이 버는 패션쇼는 참가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부스럭!

"……진짜 여기서 잤네."

"일어나셨습니까, 선배님!"

놀란 눈을 한 20대 초반의 청년은 이내 신기한 동물을 보듯 진호를 응시했다.

"정말 3개월 동안 연수를 할 거예요?"

"연수가 아니라 기본부터 배우는거죠."

맑고 힘 있게 빛나는 진호의 눈빛은 청년의 말을 잠시 앗아 갔다.

……벅벅벅!

"따라와요."

청년은 머리를 긁으며 앞장섰고, 진호는 재빨리 그 뒤를 쫓았다.

그렇게 도착한 새벽의 운암정은 낮의 운암정과 다른 멋을 풍기고 있었다.

'왜 그 영화가 성공했는지 알겠네.'

진호는 화백이라고도 불리는 대작가의 원작 만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를 떠올렸다.

'이런 풍경을 배경으로 썼으니 성공할 수밖에 없지.'

"우리 운암정에서 쓰는 모든 물은 여기 우물물로 써요."

싸늘한 냉기가 피어오르는 우물은 옛것 그대로의 기술을 차용하고 있었다. 나무로 만든 도르래에 꼬아 만든 밧줄에 달린 나무통.

얼음 나오는 정수기가 흔해져 버린 시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지만, 진호는 깨닫는 게 있었다.

"왜 그런지 아시나요?"

"쇠 맛을 최대한 배제하기 위해서 이렇게 한 건가요?"

살짝 의기양양한 눈빛을 짓던 청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어떻게 그걸……."

보통 운암정 주방에 들어와 3년정도 허드렛일을 할 때 즈음에야 선배 숙수들이 알려 주는 것이 바로 왜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까지 우물물을 길어서 쓰느냐다.

"스승님 밑에서 엄하게 배워서요. 박 코흐트라고 아실지 모르겠네요."

"……아, 박소희 쉐프님. 저희 운암정에 몇 번 찾아오셨죠."

그건 몰랐지만, 그녀라면 그랬을것 같았다.

해외에 있는 레스토랑의 오너 쉐프이자 주인인 그녀가 한국을 찾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요리에 대한 영감을 얻기 위해 서니 말이다.

"그럼 있어요. 난 물을 받아야 하니까."

"같이 하겠습니다."

"……그럼 나야 고맙죠. 아, 혹시 핸드크림이나……."

"화장품은 하나도 안 발랐습니다. 머리도 무향 샴푸를 썼고, 향수도 뿌리지 않았습니다."

"헐?"

깜짝 놀라 진호의 얼굴을 다시 본 청년은 부러움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물론 준비성은 칭찬해 줄만 하지만! 그래도!'

고개를 저은 그는 물을 받아 주방으로 옮겼고, 진호도 성심성의껏 그의 일을 도왔다.

그 이후의 일은 배달되어온 식자재를 다듬는 일이었다.

진호는 물과 흙이 묻은 식재료가 가득한 대야 앞에 앉아 칼을 잡는 청년을 보곤 꽤 놀랐다.

"선배님은 언제 운암정에 들어오신 거예요?"

"5년 전에 중학교 졸업하자마자 운암정에 들어왔죠."

"와."

식당의 주방을 잘 모르는 이는 식재료를 다듬는 일을 허드렛일로 치부할 수 있는데, 결코 그렇지가 않다.

'칼'을 잡기 때문이다.

칼을 잡는다는 건 언제든 조리대 앞에 설 수 있다는 의미로, 예비숙수로 인정을 받는 단계였다.

"베테랑이셨네요."

"크흠. 아직 베테랑은……."

찌익! 찍! 풍덩!

진호의 칭찬에 겸연쩍어하며 선배로서 온화한 모습으로 식재료 다듬는 법을 가르쳐 주려고 했던 청년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순식간에 껍질이 벗겨져 맑은 물속으로 떨어지는 양파.

'어? 어? 그렇게 함부로 다듬으면…… 안 되는 게 아닌데…….'

화들짝 놀랐던 청년은 이내 멍해졌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무작정 아무렇게나 까는 듯 싶은데 손실된 부분 하나 없이 매끈한 알맹이를 드러낸 양파.

체감상 거의 10초에 한 개씩 다듬어지는 것 같았다.

환각으로 치부하기엔 대야 밖으로 튀는 물방울이 너무 역동적이었다.

"베테랑은 그쪽 같은데요……."

"하하. 이 정도는 기본이죠."

'아닌데. 절대 아닌데?'

청년은 엉덩이를 들썩였다.

다듬는 속도와 결과물이 말해 주고 있다.

눈앞의 미남은 요리를 제대로 배운 사람이라고 말이다.

'아씨. 사람이 이렇게 잘나도 돼? 양심 진짜 없네!'

비록 외모는 떨어질지라도 식재료 다듬는 것만큼은 자신이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던 청년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후. 괜히 분란만 일으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토 달지 마. 총주방장님이 허락한 일이야."

"하지만 연예인이 어떻게 주방에서 일을 하겠습니까! 분명 한량처럼 여기저기 어슬렁거리면서 분란만 일으킬게 뻔합니다. 지금이라도 브레이크 타임에만 잠깐 배우는걸로……."

40대의 중년인은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윤헌수 숙수의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아차!'

운암정 주방의 모든 숙수들에게 있어 총주방장은 정신적 지주이자 스승이지만, 윤헌수 숙수는 그런 총주방장을 누구보다 더 따르고 신봉하는 이다.

그런 그의 앞에서 총주방장의 결정에 토를 달았으니 불호령이 떨어져도 할 말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혀를 찬 윤헌수 숙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보며 안절부절못하던 중년인은 냉큼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창영이 이놈은 식재료를 다 다듬었나 모르겠습니다. 들어온지 5년이나 된 놈이 아직도 어설프니 원……."

그렇게 말하였지만, 중년인이나 윤헌수 숙수의 눈에 온기가 서렸다. 창영은 비록 21살의 어린 나이지만, 나날이 발전해 가는 모습이 눈에 보여서 참 기꺼운 아이였다.

16살 어린 나이에 운암정 주방에 들어와 경쟁자들을 모두 물리치고, 주방의 식구가 된 아이.

"그래도 내년 즈음에는 창영이 후임을 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년이면 6년 차니 슬슬 쌀을 씻을 때도 됐지 않습니까."

"……총주방장님께 건의 드리지."

그렇게 주방에 도착한 둘을 맞이 한 건 진호와 창영이었다.

"오셨습니까."

윤헌수 숙수와 중년인은 그런 그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하며 조리대 끝에 올려진 다듬어진 식재료들을 응시했다.

다가가 이리저리 살핀 둘은 의문과 경악을 담아 창영을 바라봤다.

그러다 이내 흐뭇하게 웃었다.

'제시간 안에 끝내다 못해 바닥의 물기마저 치웠다니……."

"늘었구나."

너무도 단순한 한 마디의 칭찬.

그러나 윤헌수가 과묵한 걸 알기에 입이 찢어져라 웃었던 창영은 이내 움칫 몸을 굳히며 낯빛을 어둡게 가라앉혔다.

"죄송합니다. 오늘 다듬기는 온전히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아니, 70퍼센트는 여기 진호 씨가 다 했습니다."

"음?"

깜짝 놀란 둘은 진호를 보았고, 진호는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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