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권 2화
"안녕, 하세요. 난 웨이양입니다."
"오오. 니 하오마. 난 아니지. 워쓰. 이희연."
"오오오."
스케줄용으로 쓰는 밴을 모는 진호는 어설픈 한국어와 어설픈 중국어로 이야기꽃을 피우는 다섯 명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중국에서 큰 손님이 온다고 중국어를 공부하셨을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와 한국에 놀러 온다고 한국어를 공부했을 웨이양과 리즈한.
책을 부여잡고 끙끙 앓았을 다섯 사람을 떠올리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게다가 그들 모두 한국어와 중국어 기본 회화 책자를 손에 꼭쥐고 있었다.
"좋은 분들이군."
"제게 더없이 큰 행운이죠."
"그래 보여."
뒤를 힐끔 본 월터의 얼굴에 따뜻함과 부러움이 깃들었다.
"딸과 부인 되시는 분도 데려오세요. 제가 좋은 곳들을 안내해 드릴게요."
"……그래. 아내와 딸도 무척이나 좋아할 거야."
그렇게 말한 월터는 한껏 긴장을 끌어올리며 사이드 미러와 백미러를 번갈아 응시했다.
본격적인 경호 태세에 들어간 것이다.
진호는 그런 그를 보며 푸근히 웃었다.
'당신을 만난 것도 내게 더없이 큰 행운이에요, 월터. 아니, 내 주위 사람들은 모두 내게 더없이 큰 행운이지.'
다미앙을 비롯해 양진혁까지 모두 좋은 사람들뿐이었다.
그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알기에 진호는 매일매일 감사했다.
진호는 한시라도 빨리 좋은 것들을 대접하고, 보여 주기 위해 엑셀을 강하게 밟았다.
전라도 유명한 정식집에서 음식을 먹은 진호는 경북 울진의 덕구온천으로 향했다.
국내 단 한 곳밖에 없는 자연용출온천이라는 것 때문에 이곳을 첫날의 숙소로 잡았다.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에게는 꽤 긴 여정이었지만,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함께해서 그런지 다들 피곤하신 줄도 모르고 스파에서도 웃음꽃을 피웠다.
"호오?"
"오?"
"어머머?"
수영복 바지 하나만 입은 채 등장한 진호를 보며 다섯 어르신들이 눈을 빛냈다.
"어이구, 우리 손주 몸이 아주 실하네? 이제 장가가도 되겠어?"
"커흠. 나 젊었을 적을 아주 빼다박았구만. 역시 내 이씨 핏줄이야."
"엥? 내가 다른 사람하고 살았나? 나랑 한 이불 덮은 사람은 그렇지 않았는데?"
"거, 사돈과 중국에서 온 손님들도 있는데!"
"그래서 뭐요!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말이야!"
평소처럼 삿대질을 하던 할머니는 아차하며 입을 다물었고, 야외온천탕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외할아버지가 씩 웃었다.
"아직까지 금슬이 좋군요. 부럽습니다."
"……어험험."
"아이구야."
외할아버지는 부끄러워 하는 두분의 모습에 끝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트리셨고, 고성이 오가기에 놀랐던 웨이양과 리즈한도 진호가 설명해 준 덕분에 웃음을 터트리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두 분은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시며 더욱 부끄러워했다.
그렇게 행복하고 훈훈한 분위기가 야외 온천탕을 감쌌다.
"그런데 진호야."
"네, 할머니."
"중국에서 오신 저 웨 씨 양반은 뭐하시는 분이냐? 딱 봐도 사람 좀 다스려 본 본샌데?"
진호는 꽤 놀랐다. 시골에서만 사셨던 분이 그런 걸 읽어 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공무원이세요. 자식들도요."
"그래?"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도 살짝 놀랐다.
더욱이 자식들도 공무원.
"푸흐, 뭘 놀라고 그러세요. 이씨도 어디 가서 꿇리지 않는데. 나씨도요."
"……그렇지! 이씨도 어디 가서 꿇리지 않지! 암, 그렇고말고!"
"으허허허헛!"
진호는 이번엔 의아해하는 웨이양과 리즈한에게 통역을 하지 않은 채 그냥 웃기만 했다.
그렇게 따뜻한 물에서 몸을 푼 그들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숙소로 올라갔다.
"어흐."
"크, 좋다!"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짜릿해하던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각자의 방으로 향했다. 내색은 하지 않았어도 꽤 피곤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괜찮으세요?"
거실엔 웨이양만 남아 있었다.
"젊었을 적엔 한 달 동안 자지도 않고 술만 마신 적도 있는데,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렇게 말하는 그는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마치 달려드는 졸음을 쫓으려는 듯 말이다.
피식 웃은 진호는 그의 빈 잔에 맥주를 따랐다.
"아침은 이곳에서 간단하게 해결하시고, 점심은 팔공산이란 곳을 둘러보고 산채 정식을 먹을 거예요."
"오, 그거 기대되는구나."
진호가 여행 코스로 잡은 산이다보니 기대감이 생겨났다.
"아, 그런데 아까 보니 몸이 모델이 아니라 무술인이더구나."
기관총국의 기관장으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내면까지 봐 온 그가 근육의 형태로 그 사람의 직업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아니, 오직 무술로만 근육을 단련시킨 진짜 무술인보다 더하다! 마치…….'
특수 요원을 보는 듯했다.
"아, 연기를 위해서 만들었어요."
스킬 때문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단 말은 할 수 없었다.
"아니, 연기를 위해서 그런 몸까지 만들었다는 게야?"
웨이양은 그 몸을 만들기 위해 진호가 기울였을 노력과 독심에 탄식을 터트렸다.
그러며 더 뿌듯해했다.
이렇게 제대로 된 이가 자신의 손자라는 것에 말이다.
"허허허. 그래서 중국은 언제 들어올 게냐?"
"이번에 드라마 촬영이 끝나면 영화 한 편 들어갈 텐데, 그거 다 찍으면 넘어갈까 생각 중이에요."
"영화?"
진호는 영화 줄거리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고, 웨이양은 눈을 빛냈다.
"호오. 그거 우리 중국에서도 먹히겠구나."
"그래요?"
"정치적 색채가 배제되어서 더욱더. 한국을 홍보하기에 딱 알맞은 영화야."
"그런 의도가 없잖아 있죠. 흐흐흐."
'잘됐군.'
속으로 의미심장하게 웃은 웨이양은 몸을 일으켰다.
"들어가시게요?"
"……네 할미가 외로워하고 있을까 봐 들어가는 게야."
"네. 그렇다고 해요."
"그렇다는 게 아니라! ……끙. 쉬어라."
"크큭. 넴! 안녕히 주무세요!"
"에잉."
웨이양은 신경질을 내며 2층 방으로 향했고, 진호는 뒷정리를 다한 후에야 안쪽 방으로 향했다.
방 안에는 외할아버지가 누워 있었다.
"이제 들어오니?"
"먼저 주무시지."
"좋은 사람들과 좋은 곳에 와서 그런지 잠이 쉬이 오지 않아서……."
"푸흐흐. 그래요? 오늘은 즐거우셨어요?"
"그럼-. 내가 진호 네 덕분에 죽을 때 가져갈 추억 하나 만들었구나."
"에이, 그런 말은 왜 하세요. 저 결혼하고 자식 낳는 거 보시려면 아직 한참 멀었는데."
"그래?"
눈을 빛낸 외할아버지가 벌떡 일어났다.
진호는 순간 아차 싶었지만, 의연한 마음을 가졌다.
"결혼할 사람이 있어?"
"없으니까 아직 한참 멀었다고 했죠."
"……작동은 잘하지?"
"쿨럭! 자, 잘해요. 걱정 마세요."
"그런데 왜 없어?"
"할아버지 외손자가 워낙 잘생겨서 여자들이 부담스러워해요."
"……하긴 나도 그랬지. 동네 처녀들이 멀찍이서 바라보며 발만 동동 구를 뿐 다가오지 않았지. 그게 어찌나 귀찮았던지."
"푸핫! 그랬어요?"
"말도 마라. 내가 집 밖만 나섰다하면 아주……."
그들은 그렇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눈을 감았다.
"…… 고맙구나."
스윽.
이불 속에서 손을 잡아 오는 외할아버지의 거친 손이 마음을 따듯하게 울렸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너도 잘 자고."
이내 그들의 방엔 고른 숨소리만 울렸다.
* * *
다음 날 팔공산을 둘러보고 통영으로가 배를 빌려 낚시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그들은 여행을 떠난 지 3일째가 돼서야 서울로 향할 수 있었다.
웨이양과 리즈한은 중간에 내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외할아버지에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그건 할아버지와 할머니, 외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도착했어요."
차는 커다란 호텔 앞에 세워졌다.
진호가 예약한 곳이 아니라 웨이양이 예약한 호텔이었다.
"그래, 수고했다."
"몇 시에 보실래요? 서울 저녁 탐방하셔야죠. 서울에도 가 볼 곳이 무척이나 많아요."
웨이양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구나."
"아, 많이 피곤하세요?"
"난 괜찮은데 네 할머니가……."
"왜 내 핑계를 대나요? 난 멀쩡한데?"
"……푸흐흐흐흐!"
"……에잉. 됐고! 내일 저녁에나 찾아오거라!"
"하핫. 네! 아, 짐은 안 옮겨 드려도 되겠어요?"
"너 아니어도 그런 일할 손 많다. 그러면 내일 저녁에 보자. 그동안 너도 밀린 일 보고."
"옙! 푹 쉬세요."
웨이양과 리즈한이 경호원들과 함께 호텔 안으로 들어가자 진호는 아쉬움을 접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한편 로비를 걷던 웨이양은 돌연 걸음을 멈췄다.
"먼저 들어가 있어."
"……알았어요. 다녀오세요."
조심히 다녀오라는 듯한 그녀의 따듯한 시선에 옅게 웃은 웨이양은 몸을 돌려 다시 호텔 밖으로 향했다.
그 순간 그의 기질이 바뀌었다.
진호의 할아버지 웨이양에서 중국의 모든 미디어를 관리감독 하는 광전총국 기관장 웨이양으로 말이다.
"한국 정부에서 보낸 차가 곧 도착한다고 합니다."
다가온 경호실장의 말에 웨이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을 딱 맞췄군. 감시를 당한건가?"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었기에 딱히 대답을 바라지 않은 그는 더이상 물어보지 않고 호텔을 나섰다.
그러자 호텔로 진입하는 검정색 관용차를 볼 수 있었다.
탁! 탁탁!
관용차에서 다급히 내린 40대의 중년인이 웨이양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한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웨이양 기관장님."
"호오, 당신이 한국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이신가? 꽤 젊으시군."
순간 40대 중년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장관님은 현재 정책국에서 오매불망 기관장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 그러셨군. 난 한국이 이렇게 혁신적인 관료제를 택했나 싶었소. 가십시다."
"죄송합니다. 대신 환대를 기대하셔도 좋으실 겁니다."
"죄송할게 뭐 있겠소. 원래 집주인은 집 밖까지 마중을 나오지 않는 것인데. 허허헛!"
중년인의 얼굴은 더욱 하얗게 질렸다.
말에 비수가 숨겨져 있는 것도 있지만, 중국인은 웃을 때 더 무섭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다급히 변명을 하려고 했지만, 웨이양이 냉큼 차에 올라 버림으로써 무산되어 버렸다.
"갑시다. 시간은 금이잖소?"
"아, 예!"
그렇게 차는 문화체육관광 정책국으로 향했다.
중년인의 말처럼 웨이양은 아주 크나큰 환대를 받았다.
문화체육부의 모든 공무원들이 마중을 나온 것 같은 인파 속에서 꽃다발과 꽃목걸이를 받았다.
그에 그는 환하게 웃으며 환대를 받아들였지만, 속으로는 심드렁했다. 딱히 이런 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이렇게 체면을 세워 주었기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짧은 행사가 끝난 후 본격적인 회담이 시작되었다.
문체부장관은 자신이 들은 게 정말인지 귀를 의심해 보았다.
"진심이십니까? 진심으로 한국 연예인의 중국 활동에 대한 제약을 완화하겠다는 겁니까?"
얼마 전 비밀리에 중국에서 1차적으로 회담을 나누며 가닥을 잡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한국만 우대하는것이 아니오. 앞서 이야기를 나눴던 것처럼 외국 연예인 모두 중국활동에 대한 제약을 완화하겠다는 것이지. 영화나 드라마, 노래를 비롯한 연예 활동 전반에 관한 표절도 보다 단속하겠소."
그때도 그랬지만, 왜라는 의문이 문체부장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나 그걸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이 회담이 성사만 된다면 한국 연예계뿐만 아니라 장관 본인에게도 엄청난 이득이 생길 테니 말이다.
'표절 문제만 제대로 잡을 수만 있다면…… 허허헛!'
"조건은 그대로입니까?"
"당연히."
웨이양의 조건은 이렇게 조건을 완화해 주는 대신 중국 드라마와 영화 등을 일정 수 이상 좋은 조건으로 수입하고,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지원해 달라는 것이다. 중국 연예인 활동까지도 말이다.
그리고 한국 영화와 드라마 예능등 콘텐츠 제작에 관한 기술 및 노하우 전수도 원하고 있었다.
"으음……."
'역시 이번에 피바람이 불면서 중국의 고급 인력들이 많이 사라졌나 보군!'
그렇다면 이건 아주 좋은 기회였다.
"하나 이렇다고 해서 본국의 기술과 노하우가 부족하다 생각하지는 마시오. 할리우드에 대대적인 투자를 하는 본국의 제작 기술과 노하우가 한국에게 뒤처진다고는 볼 수 없으니까!"
어디까지나 양국 간의 우호적인 관계를 위한 제스처일 뿐이라는 경고에 문체부장관은 뜨끔했다.
"당연합니다. 아무렴요."
"허헛. 이번 한국 장관은 말이 통해서 좋구려. 그럼 서류를 만들어 중국에서 보도록 합시다."
"아니, 벌써 가시려고요?"
중국에서 온 귀빈이다. 이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내가 좀 피곤해서 그러니 내일 아침에 보도록 합시다. 아, 그리고 이 비즈니스 파트너십을 위한 상징으로 양국의 영화를 한 편씩 교환하여 동시 상영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한국은 한국의 멋을 살린 현대적인 감성의 영화로. 우리 중국도 중국의 멋을 살린 현대적인 감성의 영화로. 리메이크라도 상관없으니까. 어떻게 생각하시오?"
"좋군요. 아주 좋습니다. 오히려 제가 청하고 싶은 말입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소. 나오지는 마시오."
손을 휘휘 저은 웨이양은 그렇게 회의실을 빠져나갔고, 발을 떼려다 멈춘 장관은 그의 등을 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쿵!
회의실의 문이 닫히자 장관은 뜨겁게 달아오른 눈으로 회의실에 있는 공무원들을 보았다.
"들었지?"
"……."
"찾아. 기존에 개봉한 영화든, 현재 제작 단계에 있는 것이든, 아니면 시나리오로만 돌아다니는 것이든 뭐든! 리메이크라도 상관없으니까 무조건 제대로 된 걸로!"
힘차게 대답한 공무원들이 우르르 빠져나가자 문체부장관은 웨이양을 배웅하고 돌아온 비서를 노려보았다.
"내일 행사 차질 없이 준비해. 알았어?"
"예!"
"나가 봐."
꾸벅 고개를 숙인 비서가 나가자 문체부장관은 입을 쓰다듬었다.
"정말 표절 시비만 제대로 잡아도……."
그의 눈이 욕심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그는 이 일에 진호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건 앞으로도 그럴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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