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권 1화
1. 문화교류
벌목이 되어 세계 각국으로 팔려나가는 아마존의 나무들은 굉장히 높고 크며, 올곧게 자란다.
다 커 버린 나무는 장정 몇 명이 손을 맞잡고 둘러싸도 다 감싸지 못할 정도고, 빛이 잘 들어오지 못한 숲에서 그 꼭대기를 보노라면 목이 꺾여 아플 지경이다.
그런 나무에 한 채의 나무집이 붙어 있다.
지상에서 2미터 높이에 지어진 제법 큰 나무집. 나무판자가 아니라 나뭇가지들을 엮어 만든 그 집은 어릴 적 읽은 동화를 떠올리게 만들 만큼 신비로웠다.
내부는 더욱 그랬다.
새근 새근 쉭쉭.
바닥에서 몸을 만 채 자고 있는 동물들.
원숭이를 비롯해 온갖 동물들이 함께 모여 자는 모습은 정말 이곳이 동화 속 나라가 아닌지 의심케할 정도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진호가 앉아있었다.
"……아, 이놈들 또 여기서 똥 쌌네."
'때릴까?'
진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미 원숭이의 털을 꼭 끌어안은 채 자고 있는 새끼 원숭이처럼 새끼 동물들의 실수일 테니 진지하게 화낼 수도 없었다.
"에휴. 좀 이따가 치워야지."
기지개를 펴며 일어선 진호는 집의 입구에 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침 해가 어스름히 나무를 뚫고 들어와 새벽의 안개를 흐트러트리며 드러내는 숲의 정경은 퍽 신비로웠으나, 몇 번이나 봐 온 진호는 심드렁할 뿐이었다.
그는 집을 빙 둘러 만든 난간을 걸어 집 뒤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토기로 만든 항아리들이 있었다.
달그락.
큼큼하다 못해 썩어 버린 음식물 냄새가 진호의 코를 확 찔러 왔다.
"음…… 역시 젓갈이나 장아찌는 함부로 도전하는 게 아닌가?"
코팅이 되지 않은 항아리 때문일테지만, 그래도 제작진에게 겨우 얻어 낸 소금과 간장을 날려 버려서 그런지 입맛이 썼다.
'한국에 돌아가면, 스킬 얻을까?'
살아생전 한두 번 오고 말 정글이 아니니 얻어두면 나쁘지 않을것 같았다.
'이젠 단순 조리만 한 음식도 질리고.'
흰쌀밥에 김치 한 점, 깻잎 장아찌 한 점이 무척이나 그리웠다.
고개를 끄덕인 진호는 항아리들을 들고 땅으로 내려와 파묻기 시작했다.
"결국 실패야?"
"그러네요. 회생불가예요."
"아쉽다."
어느새 내려온 서정문이 입맛을 다시며 진호를 도왔다.
그렇게 모든 항아리를 묻을 때쯤, 제작진도 일어나 모여들었다.
여정호 피디는 아침에 수거한 영상을 보며 소리 없이 감동했다.
동물들 사이에서 깨어나는 진호와 서정문의 모습은 정말 역대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영상이었다.
아니, 지난 시간 동안 찍은 모든 영상들이 매 시간마다 역대 최고를 계속 갱신했다고 봐야 했다.
"여 피디, 오늘 뭐 할 거야?"
"피라루크도 낚았고, 돌고래랑도 놀았고……. 할 건 다 한 것 같은데 오늘은 뭐해요, 피디님?"
여정호 피디는 천진난만하게 물어 오는 둘을 보며 어이없어했다.
"오늘이 며칠인지는 아세요?"
"엥? 그야…… 잠깐. 하나, 둘, 셋…… 어라?"
진호는 깜짝 놀랐다.
'와,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여정호 피디는 그런 둘을 보며 활짝 웃었다.
"예. 이제 한국에 돌아갑시다!"
* * *
입국 게이트가 가까워질수록 서정문의 표정은 어두워져 갔다.
"아, 나가기 싫다."
언제나 아쉬움보다 후련하고 이제 쉴 수 있다는 생각이 앞섰던 한국.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호야, 우리 그냥 돌아갈까?"
"그럴까요?"
진호도 무척이나 아쉬웠다.
'시간만 넉넉했으면 정착 생존이 아니라 아마존 횡단을 했을 텐데……'
밝혀진 것보다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많은 아마존이다 보니 아쉬움이 컸다.
"에휴, 이렇게 눈이 높아져서 다음 정글은 어떻게 가나 몰라."
"족장님이라면 잘하실 수 있을 거예요."
"같이 가겠다는 소린 안 하지?"
"이틀 쉬고 파리에 가야 해서요. 드라마 촬영도 이제 빡세게 달려야 하고."
"바쁘구나."
"바쁘죠……."
"그럼 바빠지기 전에 한잔? 이렇게 헤어지는 것도 아쉽잖아."
"저야 좋죠!"
흰쌀밥만큼 그리워했던 음식이 치킨과 해물 파전, 그리고 소주와 맥주였다. 시간도 저녁이니 아주 술술 넘어갈 것 같았다.
그들은 침을 꼴딱꼴딱 삼키며 입국 게이트를 나섰다.
지이잉!
"이진호다!"
촤라라라라라라!
외침과 함께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들.
진호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뭐지? 조용해질 시간이 아니었나?'
그렇기에 입국 게이트 밖에 사람들이 좀 몰려 있는 걸 느꼈어도 별생각 없이 나왔던 것이다.
"이진호 씨! 최봄 피아니스트에 이어 박성후 피아니스트에게도 곡을 주셨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박성후 피아니스트는 어떻게 발굴하신 겁니까!"
"이진호 씨, 여기 좀 봐 주세요!"
'……아.'
진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 치킨…….'
* * *
떠들썩한 소란을 일으키며 돌아온 진호는 이틀 후 맨즈패션위크를 다녀온 후 드라마 촬영에 열중했다.
그는 양해를 구했어도 한 달 동안 촬영을 쉬었다는 미안함에 혼신을 다해 연기를 했고, 그의 분량은 빠르게 채워지다 못해 다른 배우들의 분량을 앞서게 되었다.
그렇게 6월이 지나가고 완연한 여름인 7월이 되었다.
"덥다."
카페에 앉은 진호는 몰리는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쪽쪽 빨아 마셨다.
"그러게. 더럽게 덥네."
"아, 오셨어요?"
진호는 오랜만에 만나는 장영진을 보며 환하게 웃었고, 장영진도 그 특유의 선한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뭐하고 지냈어?"
"연예인이 달리 할게 있나요. 촬영하고, 촬영하고. 아, 녹음하고."
"녹음? 앨범 내려고?"
"7월 중순에 내려고요."
"그럼 이제부터 가수로 활동하는거야?"
진호는 고개를 저었다.
"걸그룹 여신님들을 보기 위해서라도 음악 방송 순례는 돌 테지만, 따로 행사 같은 건 다니지 않을 생각이에요."
"왜?"
"부러워서요. 난 일하는데 자기들은 놀러 왔잖아요."
"……푸핫!"
그런 대답은 생각지 못했던 장영진은 배를 잡은 채 끅끅거렸고, 진호도 피식 웃었다.
"농담이고, 피서지 위주로 한 바퀴 돌 생각이에요. 감독님은 좀 어떠셨어요? 더 씨프 이후 오래 쉬셨잖아요."
"일단 자리 옮길까?"
"아, 네. 이 카페 지하에 미팅룸있어요."
장영진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둘은 지하로 향했다.
장영진은 지하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진호에게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그게 내가 오래 쉰 이유야."
"오? 신작이에요?"
장영진은 뛰어난 감독임과 동시에 훌륭한 시나리오 작가다.
진호는 바로 시나리오를 펼쳤다.
"어라? 이거……."
"계속 읽어 봐."
"네."
시나리오를 계속 읽은 진호는 역시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거 아메리칸 셰프잖아요. 조나단 파블로 감독의."
한 블로거 때문에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은 요리사가 푸드 트럭 한 대를 끌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성공하는 내용.
분명 캐릭터와 배경 설정이 다르지만, 그 뼈대는 제니퍼 로제 때문에 인사를 나눈 조나단 파블로 감독이 직접 연출하고 출연한 그 영화였다.
'지난 공백이 이 영화의 표절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서였다고?'
진호는 믿을 수 없었다.
장영진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거기다 The J와 더 씨프를 성공리에 연출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 그다.
아무 시나리오나 잡고 영화를 찍어도, 그것이 터무니없는 예산이 필요한 블록버스터라고 해도 투자자가 몰릴 수밖에 없는 그가 표절영화를 만든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
진호는 마음속에 피어나려는 실망을 억지로 누르며 장영진을 보았다. 그리고 놀랐다.
"어? 설마 진짜예요?"
"그래. 그 조나단 파블로에게 허락받았다. 한국판으로 리메이크해도 된다고."
"……말도 안돼!"
진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온몸에 전율이 내달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현재 할리우드에서 명성을 얻은 한국 감독이 몇 명 있다지만, 할리우드 감독이 연출한 영화를 리메이크한 한국 감독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들이 허락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건 다른 감독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자존심이 강한 감독이라면 자신이 연출한 작품이 오로지 자신의 업적으로만 남기를 바랄 테니 말이다.
그것이 조나단 파블로라는 대감독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아니면 믿을 만한 감독이 리메이크를 해야 하는데, 그 정도로 실력이 있는 감독이라면 굳이 리메이크를 할 필요가 없었다.
"어떻게요? 대체 어떻게?"
"널 주연으로 쓸 거라고 하니까 바로 오케이 하던데?"
"……네?"
잠시 진호의 뇌가 활동을 멈췄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네 매력을 살릴 만한, 굳이 연쇄살인마니, 재난 영화 속 휴머니즘 주인공이니같은 어두운 역할로 네 연기력을 극대화시키지 않아도 네 연기력을 맘껏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떠올리다 보니까 이것밖에 없더라."
"그, 그럼 애초부터……."
장영진의 지난 공백이 진호 자신을 위한 공백이었다는 것이다.
장영진은 담담하게 웃었다.
"할 거지?"
"……해야죠. 어떻게든 할게요."
재밌게 각색된 시나리오는 둘째 문제다.
진호는 주먹을 꽉 쥐며 세상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작품부터 찍겠다고 다짐했다.
"그래. 그럼 날짜 정해지면 말해줄게."
"예."
'스킬, 얻어야겠네.'
장영진의 시나리오 속 주인공은 퓨전 한식 요리사다.
그리고 진호가 얻으려고 했던 스킬도 한식 관련 스킬이었다.
* * *
우글우글, 바글바글.
진호는 다시 인천공항을 찾았다.
출국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요한 손님을 마중 나온 것이다.
기이잉!
입국 게이트의 문이 열리며 평범한 노부부가 나오자 진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할아버지! 할머니!"
힘찬 중국어에 웨이양과 그의 부인 리즈한이 놀랐다.
갑자기 찾아온다고 해서 놀라게 만들었던 둘.
촬영에 열중하여 분량을 만들어놓지 않았다면, 이렇게 시간을 빼지 못했을 거다.
진호는 곧바로 달려가 리즈한을 와락 끌어안았다.
깜짝 놀란 그녀는 이내 푸근히 웃으며 진호의 등을 토닥였다.
"잘 지냈니?"
"그럼요. 저야 잘 지냈죠. 할머니도 그동안 건강하셨고요?"
"그럼. 누가 보내 주는 보양식 때문에 처녀 적보다 더 건강하단다."
"헤헤헤."
"어흠!"
"할아버지!"
진호는 재빨리 웨이양을 끌어안았다.
그제야 질투로 살짝 일그러졌던 웨이양의 얼굴이 펴졌다.
"진호, 넌 아주 못된 손자다. 알고 있지?"
"네…… 제가 먼저 가족들과 함께 찾아됐어야 했는데……."
바쁘지 않은 사람이 바쁜 사람을 찾아가는 게 옳았다.
"죄송해요."
"……푸흐흐, 됐다. 누가 먼저 찾아가면 어떨까. 이렇게 만나는 게 중요하지."
"그래도요……아, 이쪽은 제 경호원인 월터예요. 앞으로 저분들보다 더 가까이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안전을 책임져 줄 사람이에요."
움찔!
웨이양과 리즈한과 같이 나왔지만, 일행이 아닌 척 빠져나가려던 중국인들, 비밀 경호원들이 몸을 굳혔다.
웨이양와 리즈한도 놀라 진호를 보았다.
진호는 헤실 웃었다.
"보폭이나 걷는 모습이 일반인과 완전히 달라요. 제가 모델이라서 그런지 그런 게 잘 보이더라고요. 저분들 모두 군인이죠?"
웨이양은 순간 심경이 복잡해졌다.
'내 정체를 눈치첸 건가?'
진호가 그런 사람이 아닌 줄 알지만, 만날 불순한 의도로 다가오는 사람만 보아서 그런지 웨이양은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왜 그러세요? 아, 이렇게 오픈된 곳에서 말하면 안 되는 거였나요?"
"……아무렇지 않은 게냐? 내가 이렇게 비밀 경호원으로 데리고 다니는 것에 대해."
"음? ……아. 하하핫! 할아버지가 높은 분이라는 것 쯤은 이미 옛날에 알아차렸어요. 솔직히 그런 대저택을 보여 주셔 놓고 평범한 공무원이라고 우기시려고 했어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시잖아요. 제가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손자이듯이."
"……푸하하하하하핫!"
기분 좋은 충격에 크게 웃은 웨이양은 모든 걱정을 털어 버리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냐? 그래도 모른 척해 주어라. 이런 걸로 밥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이야."
"흐흐. 네."
진호는 눈치채서 미안하다는 듯 그들에게 고개를 숙여 주고는 웨이양과 리즈한을 데리고 공항 주차장에 세워 둔 차로 향했다.
그리고 시골로 향해 차를 몰았다.
조부모님과 외할아버지도 모두 함께 맛집 탐방과 절경 관람, 그리고 낚시 및 온천 여행을 가려는 것이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