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권 25화
"여기서부터 50미터 뒤까지 저희가 양해받은 구역이었는데, 이야기를 못 들으셨나 봐요?"
대여가 아니라 양해지만, 더 이상 동선이 겹치기 전에 이 일에 대해 경고를 해야 했다. 능력을 숨기려는 것도 있지만, 그들을 느낄 때마다 진로를 틀어서 조금 짜증이 난 점도 있었다.
"아, 그건……."
너무 선한 미소 때문인지 중국 방송국 스태프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잠깐만요."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잘생긴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방금 그 뱀, 당신이 키우는 뱀입니까?"
"……진심이세요?"
"하지만!"
눈을 껌뻑이던 진호는 코웃음을쳤다.
"오다가다 귀여워서 몇 번 쓰다듬어 주기는 했습니다. 아마존 트리 보아는 공격을 받지 않는 이상 먼저 공격을 하지 않는 온순한 개체거든요. 여기 아구티처럼 아마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개체이기도 하고요."
진호는 머리를 툭툭 쳤다.
아구티가 몸을 세웠고, 사람들은 탄성을 터트렸다.
"그리고 제가 동물에게 좀 사랑받는 체질이다 보니 빨리 친해진 경향이 없잖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하는 것보다는 이런 위험한 정글에 들어왔으면서도 주의력 없이 돌아다닌 당신들의 안전 불감증을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을까요?"
동물에게 너무 사랑을 받아 결국 어느 정도 조종을 할 수 있는 능력보다 동물과 빨리 친해지는 체질이 훨씬 나았다.
"……."
진호는 입을 꾹 다무는 사내에게서 시선을 떼곤 중국인들을 보았다.
"곧 저희 피디님을 통해 연락이 갈 테지만, 제 출연 분량은 쓰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그럼 수고들하세요."
'좋아. 이제 깔끔하게 마무리됐…….'
"이진호 씨! 아니, 진호 형! 나 지니어스예요! 골드 등급! 잠깐만요! 네?"
"……에라이."
한숨을 폭 내쉰 진호는 몸을 돌렸다.
아직 스무살이 채 안 되어 보이는 귀엽게 생긴 소년이 눈을 마주치자 환하게 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호는 띠꺼운 표정을 지었다.
"왜? 뭐? 왜 귀엽게 생긴 연예인이 남자를 좋아하고 난리야?"
"에이, 좋으시면서! 지금 좋으시죠?"
"싫어! 남자 놈한테는 이것도 아까워. 귀여운 소녀도 아니고 말이야. 네가 귀여운 소녀였어 봐. 내가 해 달라는 거 다 해줬다."
"그런 것치고는 브로맨스를 너무……."
"뭐 인마?"
"흐히히."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단순히 사진이나 찍어 달라고 부른 건 아니잖아."
"역시 코난……."
진호의 관찰력과 추리력을 코앞에서 목격한 것에 감동하던 소년은 이내 공손하게 양손을 내밀었다.
"남는 식재료 있으면 좀 주세요! 저희 3일 전부터 하루에 한 끼도 못 먹었어요!"
"……아, 나."
아무래도 동선이 제대로 겹칠 것 같았다.
팬이라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
* * *
여정호 피디는 한참을 고민을 하다가 오케이를 했고, 중국 측 피디는 분량에 욕심이 많은지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로 다른 연예인들까지 데리고 달려오며 무조건 승인을 외쳤다.
"우와!"
"와아아!"
"헉!"
진호와 서정문의 야영지에 도착한 중국 연예인들은 마치 백화점에 처음가 본 사람처럼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제대로 지어진 집들에 여기저기 매달려 있는 식재료들과 흙바닥을 뛰어다니는 아구티들.
그들에겐 이곳이 천국이었다.
"너무 달라……. 우리와 완전 달라. 이걸고작 3일 만에 만들었다고요?"
"당연하지. 나랑 저분이 왜 생존 전문 연예인이라고 불리는데?"
"……하지만 형도 저희랑 같은 때 도착했잖아요. 저 그때 공항에서 형 봤다고요! 너무 순식간이라서 확신하지 못했지만!"
"그렇다면 그냥 너희가 어설픈거야."
"아닌데…… 저희 족장님도 실력 좋으신데……."
진호는 서정문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중국 족장을 힐끔 보곤 소년을 향해 코웃음을 쳤다.
"그럼 네 손이 야물지 못한 거겠지. 일단 있어 봐."
메고 온 식재료를 한곳에 쏟은 진호는 훈제를 하기 위해 따로 빼놓은, 아침에 잡은 물고기들과 여러 허브들, 그리고 방금 캔 카사바와 옥수수, 사탕수수, 열매들을 어깨끈이 있는 대나무 바구니에 담아 소년에게 내밀었다.
"……형이 다 캐 버렸던 거구나."
"네 관찰력이 똥인 건 생각 안하지? 야생 옥수수는 독이 있을 수 있으니까 완전히 물러질 때까지 익힌 후에 먹어. 그렇게 해도 혀끝이 아리면 바로 뱉고."
"……."
"증류한 물도 줘?"
"부탁드릴게요."
"오냐."
증류한 물이 담긴 대나무 물통 몇 개를 대나무 바구니에 올린 진호는 그제야 야영지 곳곳을 안내해 주었다.
중국 연예인들과 중국 제작진은 넋을 놓았다.
제대로 안내받은 한국 야영지는 그들이 10일을 노력해도 만들 수 있을까 의문이 들 만큼 완벽했다.
특히 중국 피디에게는 이상향 같은 모습이었다.
"기, 기술을 전수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풋!"
통역을 자처한 진호가 마시던 물을 뿜었다.
진호는 의아해하는 여정호 피디에게 통역을 해 주었고, 그도 별반 다르지 않는 반응을 보였다.
"쿨럭! 기, 기술 전수요? ……진호야, 너 기술이랄 거 있어?"
"그럴 리가요."
있다. 스킬이라는 치트키가 있다.
하지만 그 외에 집을 짓거나 벽돌을 만드는 건 미튜브에서 본 것을 그대로 따라 한 것뿐이다.
'아, 이거 난처하네.'
타국 방송국의 일이라 무시해도 되지만, 저들 방송에 팬이 출연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아니, 플랫폼을 사 간 지가 몇년인데,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못먹을 만큼 힘들게 살아?'
여정호 피디가 말하기를 중국에서 플랫폼을 사 간 건 5년 전이라고 했다. 일반 게스트들은 어쩔 수 없더라도 프로그램의 중심이자 메인인 족장은 노하우가 쌓일 만큼 쌓일 시간이라고 봐야 했다.
"진호야, 우리 이 사람들한테 집 짓는 법 가르쳐 주자. 이쪽 족장 실력이 산군이보다 허술하다."
갑자기 다가온 서정문의 말에 진호는 의아해했다. 그의 눈에 측은함이 서려 있어서 더욱 그랬다.
"그게 가능해요?"
"이번에 중국 쪽이 시끄러웠잖아. 그때 원래 있던 족장이 불미스런 루머에 휘말려서 나오지 못하게 됐나 봐."
"……어쩐지. 족장님 같은 분위기가 안 난다 싶었어요."
"원래는 산군이 같은 포지션이었대. 그것도 시즌 중반 즈음에 하차하게 된 케이스. 다른 엘리트 부족원들은 스케줄이 안돼서 못 나왔고."
"아아."
그렇다면 실력이 좋다던 팬의 말과 피디가 이렇게 매달리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팬인 소년의 입장에서는 경력 있는 사람이니 실력이 좋다고 느낄수 있었고, 피디는 무려 5년이라는 장수 프로그램을 망칠 수 없다는 압박감을 느끼는 중일 터였다.
"피디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으음……."
"여 피디, 아니 정호야. 하자. 이거 기회잖아. 리얼 정글에 가다 원작자, 원조로서 후발 주자에게 실력 차이를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분량도 제대로 뽑힐 테고. 그리고 쟤들 어제 졸쫄 굶었대. 불쌍하지도 않아?"
진호는 순간 여정호 피디가 승낙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몸 밖으로 보이는 신호들이 긍정으로 급격하게 기울어 갔다.
"……끙. 진호, 너는 괜찮아?"
"저도 괜찮아요. 어차피 오늘은 더 이상 할 일도 없잖아요. 있다면 선반 같은 거나 만들 텐데 그럴바에는 그냥 제 팬이라는 소년 좀 케어하는 게 백배천배 보람차죠."
"……오케이. 승낙한다고 전해줘. 대신 출연료는 정가로 받을 거라고."
엄지를 치켜든 진호는 바로 통역을 해 주었고, 중국 제작진과 연예인들은 양팔을 번쩍 들며 만세를 외쳤다.
그렇게 생존 전문 한국 연예인 두 명이 정글 베이비 중국 연예인들을 위한 생존 기술 전수가 시작되었다.
* * *
뚝딱뚝딱!
중국 연예인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건 중국 방송국 제작진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깜빡하면 지지대가 올라가고, 또 눈을 깜빡하면 나무껍질로 만든 냄비에서 그럴듯한 탕이 끓는다.
단 3시간. 그 안에 집이 지어졌고, 배불리 먹을 음식이 만들어졌다.
"참 쉽죠?"
'전혀 안 쉬운데-!'
"이렇게만 하면 돼요. 그럼 앞으로 생존 잘하세요. 량첸은 아까 내가 한 말 기억하고 중국에 돌아가면 나한테 연락 꼭 해!"
그렇게 진호와 서정문이 위풍당당하게 떠나자, 중국 연예인들은 눈을 끔뻑였다.
뭔가 폭풍이 지나간 느낌이었다.
그러나 분명 깨닫는 점이 있었다.
"정글 생존이 이렇게 쉬웠나?"
그렇게 어려웠던 일들이 진호와 서정문을 따라 하니 무척이나 쉽게 느껴졌다.
그들의 마음속에서 자신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 그런데 첸. 방금 이진호 배우가 한 말은 뭐야?"
연예인들뿐만 아니라 제작진의 시선도 모였다.
량첸은 잠시 갈등을 했다가 이내 말하기로 했다.
'진호 형은 언제나 베풀고 다니지. 그래서 더 성공하는 거야.'
그는 닮고 싶은 우상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 하고 싶었다.
"별말아니었어요. 분량을 생각하지 말고 네 할 일에 집중해라. 그러면 분량은 알아서 따라온다."
"……아."
별말이 아닌 게 아니었다.
그 말은 중국 연예인들의 가슴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명언이네요."
스태프의 말에 피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역시 한국인가……."
한국이 왜 수많은 드라마와 예능을 수출하는지 알 것 같았다.
진호가 왜 성공을 했는지도 말이다.
'저런 헌신하는 마음이 있기에 성공을 하는 거겠지.'
"아, 그런데 대체 이진호와는 어떻게 만나게 된 거야?"
"……아차차. 아까 그 장면은 정말 대박이었어요. 여기 좀 보세요."
카메라맨의 호들갑에 미간을 좁히며 그가 넘겨준 카메라에서 재생되는 영상을 본 피디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건? ……무슨?"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분명 난리를 피우는 출연자들이 있는데, 보이는 것은 오직 진호와 아마존 트리 보아뿐이다.
뱀이 진호의 명령을 듣는 듯한 모습은 무척이나 신비로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말하기로 동물에게 사랑받는 체질이라고 하더라고요."
"……대체 얼마나 사랑받는 체질이기에 야생 동물들마저 이렇게 애교를 피우게 만드는 거지?"
절정은 진호의 머리 위에서 몸을 일으킨 아구티였다.
'마치 숲속의 왕자 타잔 같군. 아니, 이 경우에는 아마존의 왕자라고 해야 하나?'
허허롭게 웃은 피디는 이내 눈을 빛냈다.
"분명 아까 이 분량도 허락한다고 했지?"
"네, 대신 값만 잘 치르라고 했어요. 이런 장면은 한국 리얼 정글에 가다에도 많이 찍혔다고."
피디는 직감했다.
이번 편의 최고 시청률을 찍을 장면은 바로 이것이라고 말이다.
"편집을 제대로 해야겠어……."
'그래서 불러와야겠어. 내 리얼 정글에 가다에!'
잘만 찍는다면 역대급 시즌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진한 욕심을 드러내며 입맛을 다시는 그는 자신의 이 결정으로 인해 진호의 본격적인 중국활동이 시작된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 * *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앞으로의 활동 방향이 정해지는 것도 모른채 야영지로 복귀한 진호는 여정호 피디에게 꽤 흥미로운 제안을 듣게 됐다.
"아마존 안쪽으로 더 들어 가 보자고요?"
"솔직히 바로 옆에 중국 방송국이 있는데, 여기서 뭉개고 있기도 좀 그렇잖아. 원조로서 더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자는 거지."
"잠깐, 여 피디."
서정문이 급히 입을 열었다.
"지금 여 피디 말은 정글 베이비인 너희는 여기 있어라, 우리는 더 스릴 넘치는 곳으로 가겠다. 이거지?"
"그렇죠. 저번에 욕을 대차게 먹은 것처럼 원주민 마을에 가는 게 아니라, 진짜 아마존 탐방을 하자는 겁니다. 물론, 위험하니까 깊숙이는 들어가지 않을 겁니다."
여정호 피디는 이곳보다 조금 더 안쪽이라는 상징성을 말하고 있었다.
"흐음."
"흠."
생각에 잠긴 둘은 서로를 보았다.
그리고 이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든 함께라면 무서울 게 없었다.
"오케이, 콜!"
"저도 콜!"
그렇게 둘의 본격적인 아마존 탐방이 시작되었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