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권 23화
8. 아마존의 왕자
인천공항 안쪽, 진호는 무척이나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서정문도 진호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째서죠?"
이번 촬영의 메인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출연자가 살벌한 눈빛을 보내 왔지만, 여정호 피디는 표정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힐링이니까."
담담하다 못해 감정 하나 느껴지지 않는 그 말에 진호와 서정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그 힐링에 왜 여자 게스트가 없는 겁니까!"
"그래! 왜!"
그랬다. 이번 편에는 여자 게스트, 아니 게스트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오직 진호와 서정문 둘만 떠나는 생존이었다.
"이미 완벽한 힐링이라서? 굳이?"
"……아 씨, 그거 말 되네."
서정문의 말처럼 생존 치트키나 다름없는 진호가 있다. 굳이 다른 비주얼을 채우지 않아도 분량은 풍부해질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정글 초보인 게스트들이 나와서 난리법석을 떠는 게 분량을 망쳐 버릴 것 같았다.
"……하, 사람은 너무 완벽해도 좋지 않구나."
진호의 탄식에서정문도 우울해했다.
여정호 피디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진호, 너 그렇게 말해도 괜찮아? 팬들 신경 안 써?"
"제 팬들은 저보고 얼른 연애하라고 하는데요. 꽃다운 20대, 솔로로 지낼 거냐고."
"……말도 안돼."
서정문도 놀라서 진호를 보았다.
덕질 경력이 많은 강성 팬들만 모인 곳이 지니어스였기 때문이다.
"모두 처음부터 주지시킨 덕분이죠. 난 너희 남자 친구가 아니라고. 연예인을 우상이 아닌 이성으로 생각할 거라면 차라리 딴 연예인을 좋아하라고."
"……그게 가능하구나."
그게 가능한 건 모두 진호가 초반에 모델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팬들의 인기가 없어도 패션을 좋아하는 사람들만 흘리면 얼마든지 먹고살 수 있는 모델.
팬들의 충성이 무척이나 중요한 아이돌이나 가수와는 팬을 대하는 마인드부터 다를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잘 이해시키기만 하면돼요. 사람이 사람에게 말하는 건데 알아듣지 못할 리가 없잖아요. 들어가시죠."
"어, 어. 그, 그래……."
"아, 그런데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비밀 유지 계약서와 촬영 중 출연자의 과실로 인한 부상은 제작진의 책임이 아니라는 각서도 작성했다.
그럼에도 여정호 피디는 출발하기 직전까지 목적지를 말해 주지 않고 있었다.
"그래, 우리 어디로 가? 진호가 있으니 어디로 가든 힐링이긴 하겠는데……."
식재료가 알아서 찾아오는 생존 치트키인 진호가 있기에 어딜 가든 힐링이다.
"네. 그래서 아마존 갑니다. 다시."
"응?"
"예?"
진호와 서정문은 여정호 피디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 * *
25시간의 비행시간은 진호조차도 진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어우! 에콰도르여, 내가 돌아왔다!"
진호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만세를 하는 서정문을 보며 피식웃고 말았다.
"벌써부터 힘이 나세요?"
"그럼-. 누구 때문에 벌써부터 힘이 나지."
"저도요. 흐흐."
화창한 하늘에서울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맑은 공기.
해발이 높은 곳에 위치한 공항이라서 그런지 공기가 희박하다는게 느껴졌지만, 이내 편안해졌다.
[스킬: 나는야, 자연의 왕자]와 여러 육체 관련 스킬들 때문이었다.
"앞으로 메뉴는 어떻게 됩니까, 쉐프!"
"가서 현지 식재료를 봐야 알 것 같습니다, 손님."
"그거 굉장히 든든한 말이군요!"
피로에 절어 있던 제작진은 둘의 대화에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번 '리얼, 정글에 가다. 리턴 아마존 편'은 여태까지의 촬영 컨셉과 달리 스무스하고 역경이 없는 사이다 같은 생존을 찍을 예정이다.
어떻게든 분량을 만들려 노력하지 않아도 절로 분량이 뽑히는 생존 전문가 둘의 고퀄리티 정글 생존.
제작진은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진호와 서정문도 마음을 놓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른 출연자들이 다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흠?"
돌연 하늘을 본 진호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런 그의 반응에 주위 사람들은 절로 긴장했다.
"왜? 비 와?"
"아뇨. 비는 안 오는데, 바람은 강하게 불겠네요."
거의 태풍급의 강풍일 것 같았다.
[스킬: 나는야, 자연의 왕자]가 그렇게 경고하고 있었다.
"얼른 이동해야 할 것 같아요. 최소한 오늘 안에 이 도시는 빠져나가야 해요."
"……다행이네. 안 그래도 바로 국내선 타고 이동하려고 했거든. 자, 이동합시다!"
인간 기상관측기 진호의 말이다.
제작진은 그 어떤 의심도 없이 펼치려던 촬영 기기를 정리하며 공항 안으로 향했다.
"음?"
"흠?"
"얼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저거……."
입국 게이트를 넘자마자 보인 조명 기기들과 카메라들. 그리고 그앞에는 형형색색의 아웃도어를 입은 동양인들이 떠들썩하게 떠들고 있었다.
"중국인가?"
"아, 우리 프로그램 플랫폼을 사간 그 방송국인가 보네."
"아아."
공교롭다면 공교로웠다.
'흠. 안데스 산맥으로 가는 건가? 아니면 갈라파고스에 갈 수도 있고.'
등산 준비를 단단히 마친 그들 중 한 명의 배낭에 통발이 달려있었다. 낚싯대가 배낭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연예인도 있었다.
"여 피디, 어쩔 거야?"
순간 수많은 생각을 한 여정호 피디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같은 플랫폼의 방송이라고 해도 타 방송국의 촬영을 방해할 수 없죠. 무시합시다."
핸드 헬드 카메라 두 대와 조명기기 두 개만 앞세운 그들은 공항을 빠르게 가로질러 국내선 탑승구로 향했다.
"캬! 여길 다시 오네!"
나포강 보트 터미널에 선 서정문이 넓고 탁한 강을 보며 환하게 웃자 진호도 미소를 지었다. 콧속으로 훅 빨려 들어오는 물비린내와 흙냄새가 절로 심신을 풀어 주는 것 같았다.
"지금부터 한국을 떠나기 전 여러분이 맡기신 생존 도구를 나눠드리겠습니다."
"오오!"
바닥에 화라락 생존 도구들이 펼쳐졌다.
서정문은 벌목용 도끼에 톱과 군용 나이프였고, 진호는 무식하게 생긴 무쇠칼에 웍, 그리고 조립식삽이었다.
완벽한 힐링 생존을 위한 도구들.
"진호야, 그건 뭐냐? 식칼 맞아?"
식칼보다는 날카롭고 긴 쇠주걱을 보는 듯한 비주얼이었다.
"자잘한 나무들도 베려고 특수제작을 한 거예요."
"그래? 어디 줘 봐."
칼을 넘겨받은 서정문은 깜짝 놀랐다.
"워. 무거운데?"
"철도 레일을 이용해 만들어서 그럴 거예요."
"처, 철도 레일? 그, 그래서 손잡이도 통짜 쇠구나."
"손잡이 부분은 특수 처리를 해서 쇠 냄새가 손에 밸 염려는…… 아, 조심하세요. 그거 날 엄청 벼려 놓았어요."
"어이쿠!"
놀라 내미는 칼을 받아든 진호는 가죽으로 만든 칼집에 칼을 넣고 배낭 안에 갈무리했다.
거기에 웍과 삽까지 단단히 배낭에 고정한 진호는 몸을 일으켰다.
"가시죠."
'재들이 가까이 오기 전에!'
저 멀리에 떨어져 있는, 인간에게 길들여진 것 같은 원숭이들이 이쪽을 바라보며 의아해하고 있었다.
[스킬: 페로페로몬]이 벌써부터 동물들을 흘리고 있었다.
'저 원숭이들에게 잡혔다간 귀찮아진다.'
지능이 발달해서 그런지 원숭이들은 무척이나 끈질기고 영악했다.
[스킬: 페로페로몬]이라면 달라붙는 원숭이들을 언제든 돌려보낼 수 있지만, 문제는 떠나기 전 그들이 짓는 슬프고 처연한 표정이었다.
마치 자신이 천하의 몹쓸 놈이 되어 버린 듯한 기분.
'한 마리라면 무시하겠지만, 수십마리가 동시에 그러면…… 어후. 내가 왜 동물원을 안 가는데!'
단독 콘서트를 할 때처럼 인기스타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스킬: 페로페로몬]을 얻은 이후 동물원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크, 짐을 벌써 다 정비했어? 든든하다, 든든해! 여 피디! 이제 출발하자! 우리 완전 오케이!"
"알겠습니다! 모두 배에 오르세요!"
* * *
부우우우웅!
작은 배가 빠르게 강물을 가로지르고, 선선한 바람이 온몸에 부딪쳐 온다.
진호는 습한 물기가 섞인 바람을 맞으며 미소를 지었다.
'피라냐, 악어. 아, 피라냐 구워먹으면 맛있다는데 조금 있다가 구워…… 오, 저 악어는 크다.'
물속에서 1.5미터 정도 크기에 악어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씁, 오지 마. 오면 안돼."
"응?"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멀어지는 악어의 모습에 옅게 웃음을 지은 진호는 그 뒤로 20여분 뒤에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은 놀랍게도 강 안에 있는 섬이었다.
자연이 만든 위대한 경관에 진호는 감탄을 터트렸고, 서정문은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전에는 펫목을 만들어서 들어왔는데……."
"그래요?"
"응. 저번에는 수심이 얕아서 배가 진입하지 못했거든."
"아, 그거 식겁했겠네요."
"그러게……. 그땐 대체 어떻게 땟목을 탈 생각을 했나 몰라."
'리얼, 정글에 가다'를 만든 지채 1년이 되지 않아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언제 악어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강에 뗏목을 띄울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땐 출연자와 제작진 모두 안전불감증을 가지고 있었다.
"와, 나중에 그걸 알아차리고……."
"물론 현지 안전 팀이 절대 안된다고 카누를 태웠지만."
"아, 뭐예요."
"뭐긴 뭐야. 분량을 위한 과거씬 넣기지. 크크크. 자, 이진호 전문가! 생존지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해야 할 일이 뭐죠?"
"집을 지어야 합니다!"
"오브 코스! 자리 잡고 집 짓자! 자리는……아, 저기에 공터 있다."
"음. 여기는 물가와 너무 가까우니까 좀 더 안쪽에 짓죠."
"그럴까?"
그렇게 숲 안으로 들어간 진호와 서정문은 이내 넓은 공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 괜찮지 않아요?"
"좋은데?"
"오케이. 그럼 전 지지대로 쓸 나무랑 넝쿨 잘라 올게요."
"난 지붕으로 엮을 긴 풀들 잘라올게! 한 시간 뒤에 여기서 만나자!"
"아, 자, 잠깐! 촬영 기기 펼 시간을 줘야……아, 씨! 카메라, 조명, 안전 팀! 정문이 형이랑 진호따라붙어!"
가방을 멘 채 탐사를 나선 진호는 수원부터 찾았다.
"흐음……."
'물소리가 안 들리네.'
강물 냄새 때문에 혹여 있을지 모르는 샘터 냄새도 맡아지지 않았다.
'강물을 정화해서 마셔야 하나…….'
그렇다면 내일 즈음에나 안전한 물을 마실 수 있을 터였다.
"아, 워터트리다."
'뭐?'
'응?'
진호를 다급히 따라잡은 제작진과 안전 팀은 진호가 응시하는 곳을 보곤 입을 벌렸다.
정말로 워터트리가 있었다.
'아니, 뭐 이렇게 쉽게…….'
'처음 아마존에 왔을 땐 저거 찾는다고 2시간 가까이 걸렸는데.'
아무리 힐링 생존이라지만,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오케이. 1일 차 수원 확보. 지지대 가져다 놓고 가지러 와야겠다."
진호는 근처에 난 팔목 굵기의 대나무를 베기 시작했다.
쿵쿵쿵! 쩌적 좌르르르!
5분도 안 되어 꺾이는 나무에 사람들은 넋을 놓았다.
"거기 조심하세요. 그쪽으로 개미 기어가요."
"뭣?"
아마존의 개미는 그냥 개미가 아니었다.
'흠. 확실히 벌레 문제도 있겠구나. 벌레가 싫어하는 게…… 저건가? 아, 저 풀이다. 저것도 싫어하나 보네.'
[스킬: 나는야 자연의 왕자]와 [스킬: 셜록의 후예]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진호는 대나무를 베면서 그 풀들과 열매를 뜯어 챙겨 공터로 향했다.
때마침 서정문도 도착했고, 둘은 다른 말없이 바로 집 짓기에 돌입했다.
그렇게 두 시간이 흐른 후, 해가 모두 저물었을 때 여정호 피디는 잘 지어진 넓은 집을 보며 피식웃고 말았다.
"역시 치트키라니까."
이게 진정한 정글 힐링 생존이었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