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권 22화
에밀리 카터는 결국 에이전시 대표직을 받아들였다.
막대한 투자금보다 운영 방식을 터치하지 않는다는 점이 그녀로 하여금 승낙을 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사무실을 얻자마자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보며 마음을 놓게 된 진호는 촬영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코끝을 아릴 만큼 매콤하고 달달한 새빨간 양념이 선홍빛 고기에 투하되고, 하얗고 큰 손이 우악스럽게 스테인리스 볼 안을 헤집는다.
"주물주물, 콱콱! 주물주물, 콱콱! 연인을 쓰다듬듯이 노노."
진호는 자신을 찍는 커다란 카메라를 보며 빨간 양념이 묻은 손가락을 흔들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고기가 찢어져도 상관없으니까 팍팍 주무르세요. 다 주물렀으면 이대로 20분간 방치! 왜? 양념이 스며들어야 하니까! 야들야들한 속살에 스며든 매콤한 제육양념……."
끼리릭!
어떤 소리에 옆을 본 진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뚜껑이 따진 초록색 병을 든 김주아가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20분 후에는 먹을 수 있는 거지?"
"쉬쉬, 저리 가세요. 안 드릴 거예요."
"됐고. 주인장, 일단 양파와 된장좀 가져와 봐! 거기서 식고 있는 콩나물국도!"
"아, 진짜. 누가 주정뱅이를 촬영장에 들인 겁니까!"
"컷! 그래, 누가 저주정뱅이 좀끌어내 봐요!"
김태유 피디가 외치자 스태프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크고 고급스런 아파트 안에 펼쳐져 있던 촬영장의 분위기가 밝아지자 김태유 피디가 다가왔다.
그는 볼 안을 보곤 입맛을 다셨다.
"원래 젊은 배우들이 이렇게 음식을 만들면 시청자들이 썩 좋아하지 않는데……."
실제로 만들 수 있냐는 의구심 때문이다.
그러나 진호는 아니었다.
'진짜 외계인 아냐?'
운동이면 운동, 요리면 요리. 못하는 게 없는 진호다. 극 중 진호가 맡은 남자 주인공 외계인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을 할 수 없는, 말했다가 진호가 정말 외계인이면 큰일 난다고 생각한 그는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이거 방영된 날 야식은 무조건 제육볶음이겠네."
"그래서 쉽게 따라 하라고 이렇게 만드는 법을 알려 주는 거잖아요."
현재 찍는 이 장면은 미튜브에 올릴 비하인드 영상을 겸한 것이다. 그렇기에 김주아가 이렇게 난 입할 수 있었다.
요리 잘하기로 유명한 진호의 요리 강습.
비록 이 자유로운 모습들은 편집에서 모두 덜어 낼 테지만, 시청자들은 진호가 요리를 만들어 먹는 모습에 더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진호가 이렇게 요리 강습을 시작하게 된 것은 그가 자신이 먹을 음식은 자신이 만들고 싶다고 말해서다.
음식을 즐겁게 만드는 진호의 모습을 본 김태유 피디는 비하인드 영상으로 쓰는 게 어떻겠냐 진호에게 건의했고, 이미 미튜브에서 요리 강습 영상을 올리고 있는 진호는 어려울 것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승낙했다.
"아, 양념 좀 넉넉하게 만들까요? 촬영 다 끝나고 한잔하게?"
"한잔?"
'매콤한 제육볶음에 소주 한잔이라…….'
꿀꺽!
카메라 감독의 목에서 아주 큰 소리가 났다.
"풋. 부탁할게요."
"흐흐흐. 알겠습니다. 대신 이 주정뱅이 누나 좀……."
"아, 맡겨 주세요. 자! 갑시다, 주아 씨!"
"어허! 감독이 메소드 연기를 하려는 배우를 말리면 되겠어요? 오늘 만취한 제가 이 집에 쳐들어오는 신 찍잖아요!"
"술을 마시지 않아도 메소드 잘하는 대배우인 거 아니까 그 소주병은 이리 주세요. 아이, 착하다."
"다가오지 마요! 싫어! 내 거야!"
김주아는 소주병을 들고 도망을 쳤고, 진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난 저렇게 늙지 말아야지.'
"카메라 감독님도 좀 쉬세요. 20분 동안은 이렇게 놔둬야 해요."
고개를 끄덕인 카메라 감독이 물러나자 진호는 위생 장갑을 벗으며 거실 중앙에 있는 소파로 향했다.
최 실장과 성실장이 다가와 진호의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다.
"예, 예. 상의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정실장이 한숨을 푹내쉬었고, 진호는 의아해하며 그를 보았다.
"무슨 일이세요?"
"아, 너 광고."
"광고?"
"기업들이 너보고 계약해 달라고 이렇게 연락이 온다."
"잉? 그게 왜 정 실장님 전화로와요?"
최봄의 일로 인하여 기존의 스마트한 이미지에 고급스런 이미지마저 더해지자 광고가 쏟아지고 있다는 말은 들었다.
하지만, 그런 전화는 정 실장이 아니라 회사에 연락이 가야 했다.
"내가 전에 있던 기획사에서 내 전화번호를 알려 준 거지. 알잖아. 기업 마케팅부하고 기획사들 사이관계. 어떻게든 계약 성사시키려고 이러는 거지."
"아아……."
대충 알아들은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돈을 자신이 다 내고 이익도 5대 5로 나늘 테니까 프랜차이즈 개업하자는 사람들도 연락 오고. 넌 얼굴마담만 하래."
"……별의별 연락이 다 오네요."
'흐음.'
진호는 생각보다 파장이 크다고 생각했다.
'연락이 와도 너무 오는데…….'
이것도 한순간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귀찮았다.
'그냥 잠수 타 버릴까?'
충동적으로 생각했지만, 순간 혹했다.
완전 사전 제작에다가 첫 화 방영일도 9월이라서 얼마쯤 잠수를 타도 촬영 스케줄에는 지장이 없었다.
"흐음……."
"왜? 그런 사람들은 다 수신 거부를 해 놓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마."
"아뇨, 아뇨. 그게 아니라 귀찮으시면 차라리 연락처를 바꾸시는게 어떤가 해서요."
"에이, 사업용 전환데 그럴 수 있나. 그보다……"
"음?"
"재벌도 이렇게 제육볶음을 먹는 줄은 몰랐네."
순간 멍해진 진호는 눈을 끔뻑였다.
최 실장과 성실장도 멍하니 정실장을 보았다.
이상한 기류에 당황한 정 실장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 뭐냐, 제육볶음은 서민 음식이…… 아니구나."
"네, 엄청 잘 먹죠. 없어서 못 먹어요."
"어, 그래?"
"식단 관리를 해 주시는 아주머니들께서 건강 생각한다고 이런 자극적인 음식은 잘 안 하시거든요."
"정말?"
최 실장과 정실장도 그것까지는 몰랐다는 듯 놀랐다.
"어설픈 재벌, 혹은 졸부나 괜히 서양 따라 한다고 삼시세끼 스테이크 써는 거지, 진짜 재벌들은 그냥 평범하게 먹어요. 다만 식재료가 고급이죠. 도토리만 먹여 키운 흑돼지, 사과만 먹여 키운 소, 1년에 50킬로그램만 만드는 어란. 그런 것들."
모르고 먹으면 여느 중산층 식탁과 다를 게 없다.
"저녁 11시에 치킨 시켜 주면, 양손과 입에 양념 가득 묻은 먹깨비를 볼 수 있을 겁니다."
구영재가 그랬다.
그래서 그가 진짜 재벌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치느님은 재벌에게도 통하는구나……."
"괜히 치느님이겠어요. 그보다 광고라…… 흠."
"해야 하지 않겠냐? 올해에는 1위 해야지."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모델1 위.
이는 모델료를 가장 많이 버는 모델을 의미했다.
"이미 1위는 무리 없이 할 거 같은데요?"
다른 수익을 다 제쳐두더라도 LVMH 산하 하이패션 브랜드 4개가 더 붙었다.
모델로서 기본으로 깔고 가는 수익이 60퍼센트 이상 상승했다.
이젠 얼마나 압도적인 격차로 2위를 따돌릴까만 생각하면 되었다.
"광고에 대한 부분은 정례 회의에서 언급할 테지만, 일단 구성 그룹과 안 좋게 연관된 기업들은 제외할 거라는 것만 알고 계세요."
"크-. 대기업 광고를 가리는 연예인이 내 연예인이 될 줄이야. 내가 이 맛에 매니저 하지! 오케이. 알았어. 그렇게 알고 응대할게."
고개를 끄덕인 진호는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진호야! 20분 다 됐어!"
"……아, 나. 저주정뱅이."
한숨을 내쉰 진호는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 * *
- 진호야!
드라마 촬영 말고는 큰 스케줄이 없어서 드라마 촬영에 매진하던 진호는 오랜만에 반가운 전화를 받게 됐다.
"대표님!"
곽종훈이었다.
"잘 지내셨죠? 촬영은 무사히 잘다녀오셨고요?"
곽종훈은 이번에 스트리트 푸드시즌2를 찍으면서 해외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흐흐. 맛난 거 먹으며 살 팍팍찌우고 왔지.
"아, 부럽다. 저도 데려가시지……."
-그러게. 진호랑 함께 먹고 싶은 거 많은데……. 맛있는 거 먹을 때 마다 진호 너도 생각나더라.
"첫 번째는 서유진 선배님이셨죠?"
-당연하지! 우리 여보는 언제나 내게 1등이여.
"꿀이 팍팍 떨어지네요. 부럽습니다."
-흐흐흐.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아차차. 진호, 너 그거 기억해? 빵 프랜차이즈.
진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연히 기억하죠!"
제빵 천재인 세 아이들과 함께 영국에 촬영을 갔을 때 곽종훈과 나눈 이야기.
진호는 [스킬: 태양 여왕의 황금손]의 주인공이 만든 래시피 중일부를 투자하기로 했고, 곽종훈은 그 대가로 일부 지분을 챙겨 준다고 약속했다.
"드디어 런칭하는 거예요?"
-그럼-. 이번 달 말일에 런칭혀
"오오오! 가정의 달인 5월에 런칭인가요."
-그렇지! 원래는 5월 5일에 이벤트 열면서 성대하게 오픈식 하려고 했는데, 중간에 여러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이렇게 늦어 버렸네. 일단 종로에 1호점 내고, 이후 바로 홍대와 청담동에 지점을 내면서 반응을 지켜 볼 거야. 괜찮지?
"제가 괜찮지 않을 게 있나요."
-하지만 아버님께서 베이커리 차리신다면서.
"그건 내년에 하실 거고, 레시피도 겹치지 않을 거예요."
-그럼 다행이지. 아무튼 올 거지?
"당연히 가야죠."
배당금을 받기로 했기 때문에 더더욱 가야 했다.
-그래. 와. 그날 그때 이야기한 제과제빵 학교에 대해서도 말할거야.
진호는 다시 놀랐다.
이 제과제빵 학교에는 진호의 자본이 투자된다.
"그건 프랜차이즈 반응 보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네가 만든 레시피에 자신 없어?
"……할 말 없게 만드시네요."
-흐흐흐. 원래 사업하는 사람은 말재주가 좋아야 하는 거여. 그럼동의한 걸로 알고 있을게.
"옙! 그때 봬요."
전화를 끊은 진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짜 잠수 타야겠네."
곽종훈이 대표로 있는 더 번 코리아의 새로운 프랜차이즈 런칭이었지만, 그렇게 떠들썩하지는 않았다.
내빈 몇 명과 기자 몇 명만 1호점을 찾아 오픈식을 빛냈다.
"음!"
"오!"
빵을 먹은 사람들은 스스럼없이 엄지를 치켜들며 빵의 릴리티를 찬양했다.
"곽 대표, 이거 제대론데?"
"이게 뭡니까, 대표님. 싼값에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이겠다는 대표님 이념을 여기서 접으시는 겁니까?"
곽종훈과 사업적인 관계에 있는 내빈들은 새로운 캐시카우에 기뻐했지만, 기자들은 아니었다.
그의 사업 마인드와 정반대되는 고급스러운 맛 때문이었다.
곽종훈은 실망하는 기자들을 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거기 가격표나 뒤집어 봐."
"……헉!"
"단팥빵 하나에 치, 칠백 원?"
"여기 고로케는 천 원이야!"
"이 양에 이 퀄리티에 이 가격이라고? 이거 진짜입니까?"
"그럼 가짤까. 어느 천재가 준 레시피 덕분에 이렇게 맛있는 빵을 저렴한 값에 만들 수 있게 됐지."
곽종훈은 은근히 진호를 보았고, 놀란 기자들이 기겁하며 그를 보았다.
진호는 머리를 긁으며 쑥스러워했다.
"그리고."
곽종훈이 다시 기자들의 이목을 끌어모으자 진호는 슬그미니 뒤로 물러났다.
'튀자.'
귀찮은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 튀어야 했다. 그를 위해 제대로 잠수를 탈 준비까지 해 놓았다.
그렇게 진호가 가게를 나서자 곽종훈의 입이 열리며 프랜차이즈런칭에 관한 비하인드 스토리와 제과제빵 학교 설립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잠깐.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진호 씨가 있어서 이 프랜차이즈 베이커리를 런칭할 수 있었고, 제과제빵 학교를 만든다는 겁니까?"
"그렇지! 제대로 알아들었네!"
"……."
순간 말을 잃었던 기자들은 다급히 진호를 찾았다.
하지만 이미 도망쳐 버린 진호를 찾을 수는 없었다.
"아 씨, 어디 간 거야!"
"누구 이진호 배우 소속사에 전화해 봐!"
"이진호 씨-!"
이렇게 기자들이 뒤집어졌을 때, 어딘가를 향해 쏜살 같이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진호는 누군가에게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네, 여 피디님! 저 지금 가고 있어요!"
진호가 전화를 거는 상대는 여정호 피디. '리얼, 정글에 가다'의 메인 피디였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