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권 21화
그녀의 봄은 무척이나 아름다웠고, 신비로웠으며, 사랑스러웠다.
그 나이답게 풋풋했고, 그 나이답지 않게 성숙했다.
다시 한번 들을 수만 있다면 난…….
우우웅!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심사위원의 인터뷰를 읽던 진호는 혀를 차며 전화를 받았다.
"네, 사장님."
양진혁 사장이었다.
-걔 나 주라. 최봄.
'이럴 줄 알았지.'
"제대로 서포트하실 수 있겠어요? 분야가 완전 다른데?"
"거기다 아시죠? 그 대회 역대 최연소 대상."
-네가 곡을 준 것 때문에 더 난리 난 것도 알지.
덕분에 진호가 찍은 구성건설 아파트의 이미지가 더 좋아졌다.
"감당 못 해요."
-끄응. 그래서 넌 어떡할 건데?
"안 그래도 퇴직한 에이전트 한 분 섭외했어요."
유키 구라모토를 통해 섭외한 인물이다.
최봄의 연주를 들은 유키 구라모토가 바로 연결시켜 주었다.
-에이전트? 그쪽 일에 잔뼈가 굵은 매니저가 아니라?
"흐흐."
-……최봄만 있는 게 아니구나! 그때 말한 그 아이들이냐!
"그럼 끊습니다."
-야! 야! 진호야!
전화를 끊은 진호는 고개를 저었다.
"양 사장님이 봄이를 원해도, 그쪽 이사들과 투자자들이 허락해줄 리가 없지."
최봄을 지원하기 위해 서는 파트 하나를 만들어야 한다. 아니, 진호는 JH 엔터테인먼트가 파트 하나를 만들 정도의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최봄을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 않나요, 다미앙 씨?"
"그게 저희 같은 에이전시의 장점 아니겠습니까? 간섭할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
다미앙이 옅게 웃자 진호도 웃었다.
그런 그들에게 한 사람이 다가왔다.
"저…… 진호야?"
"왜요, 계란 한 판 김 기자님?"
진호에게 언제나 우호적인 기사만을 써 주는 매일스포츠의 김영란 기자.
"죽인다, 진짜!"
"결혼하면 냉장고 사 드릴게요!"
"오케이, 콜! ……아 씨, 또 말렸어. 그래서 여긴 왜 온 거야?"
그들이 있는 곳은 현재 인천공항입국 게이트였고, 주위엔 김영란 기자 말고도 여러 기자들이 있다.
듣기로 해외에서 사고를 친 어느 배우의 입국 사진을 찍기 위해 서라고 했다.
"혹시 최봄? 최봄 지금 들어와? 지금 들어오는 거지?"
기자들의 눈이 번뜩였다.
그러나 선뜻 다가오지는 못했다.
얼마 전 진호가 꽤 많은 기자들의 목을 날려 버렸기 때문이다.
"아뇨? 이미 들어왔는데요?"
"뭐? 언제!"
"어제요. 상 받고 바로 들어왔어요."
"……그래서 어제 사회부 신 선배가 저녁 11시 넘어서 들어왔구나, 공쳐서. 비행장에서 낚아챈 거야?"
"아뇨…… 걔 입국 게이트로 당당히 나왔는데요. 단지 화장만 지웠을 뿐인데,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아서 많이 서운했대요."
"아……."
김영란 기자뿐만이 아니라 다른 기자들도 탄식을 터트렸다.
"그리고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 비행장에서 낚아채요. 제가 대통령입니까?"
"그, 그건 그렇지? 아, 알아! 내가 말실수한 거 아니까 그렇게 한 심하다는 듯 보지 마!"
지이잉!
"나왔다!"
입국 게이트가 열리자 기자들은 재빨리 뛰어갔다.
"진호야, 나중에 봐! 지광영 씨-!"
진호는 한 연예인을 감싼 채우르르 몰려 사라지는 기자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러게 카지노 가서 고액 베팅을 하고 놀 거면 들키지나 말지."
세상이 세상이다 보니 기자들도 연예인이 카지노에 출입하는 건 어느 정도 눈감아 준다. 다만 그 베팅액이 이슈화가 될 정도로 크다면 얄짤없이 물어뜯지만 말이다.
즉, 이 말은 고액 베팅을 한 순간 한국에 곱게 들어 올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처럼 분장하고 가면 얼마나 좋아?'
"카지노에서 술 마시고 난동을 부렸다는군요."
"아, 그런 거였어요? 그럼 저렇게 야단법석을 떨만하네요."
"종업원이 전치 3주의 부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저런……."
그렇게 잡담을 나누던 진호와 다미앙은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열린 입국 게이트에서 걸어나오는 여성을 보곤 환하게 웃었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금발의 여성은 진호를 보곤 흠칫 놀랐다.
"진호 리? 확실히 따로 피켓이 없어도 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네요."
그녀의 한국어는 무척이나 매끄러웠다.
'6개 국어를 할 줄 아는 인재라더니…… 다행이네.'
"반갑습니다, 이진호입니다. 이쪽은 제 파트너인 다미앙 토마소입니다."
"다미앙 토마소입니다. 이렇게 만나서 반갑습니다."
"에밀리 카터예요. 그래서 둘 중 누가 제 새로운 보스인거죠?"
"보스라……."
진호는 피식 웃었다.
"이 문제는 일단 자리를 옮긴 후에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죠. 이쪽으로."
진호와 다미앙은 그녀를 인천공항 주차장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차에 오르자 진호는 오디오 시스템에 USB를 꽂았다.
"일단 가는 길에 심심하지 않도록 음악이나 들을까요?"
"전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보시면 압니다."
차는 이내 출발했고, 따로 비싼 값을 들여 튜닝한 스피커를 통해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울렸다.
"음?"
살짝 놀랐던 에밀리 카터는 이내 곧 눈을 감았다.
마치 촉촉한 나무에 앉은 작은 새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기분 좋게 노래하는 듯한 선율.
'새벽. 이건 새벽이야!'
문제는 여태껏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연주곡이라는 거다.
감겨진 그녀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정신을 차린 건 USB에 담긴 10개의 연주곡이 모두 끝난후였다.
"즐겁게 들으셨습니까?"
다미앙의 말에에밀리 카터는 진호를 노려보았다.
"누구죠? 당신인가요? 그리고 이곡들은 당신 외에 어떤 이들이 만든 거죠?"
발갛게 상기된 얼굴은 그녀가 무척이나 흥분해 있다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작곡은 모두 제가. 연주는 한 천재가."
"뭐, 뭐라고요?"
그녀는 경악하고 전율했다.
듣는 것만으로도 절로 심상이 그려지는 곡이 무려 10곡이다. 그것도 장르와 색깔이 모두 달랐다.
'이런 천재였다니!'
비행기를 타기 전 조사해 본 결과, 진호의 나이는 이제 고작 이십대 중반이다.
'최봄은 우연히 얻어 걸린 게 아니었구나!'
그녀는 처음 최봄의 연주곡을 들었을 때, 그리고 그 곡을 진호가 작곡했다고 했을 때, 그 곡은 하늘이 도와줘서 나온 곡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나이에 만들수 없는 곡이기 때문이다.
저명한 피아니스트라고 해도 일생에 두 번 이상 작곡할 수 있을까 의심이 되는 레벨의 곡.
'쇼팽, 모차르트, 베토벤과 같은 레벨의 천재라고?'
그건 맞으면서도 틀렸다.
[스킬: 오만한 천재]의 주인공은 그런 그들을 밑으로 볼 정도로 오만한 성격과 실력을 갖춘 이였으니 말이다.
"겨우 이 정도로 놀라면 곤란함니다, 에밀리 카터 양."
다미앙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하자에밀리 카터는 미간을 좁혔다.
"그게 무슨…… 서, 설마?"
"예. 이건 진호 씨가 만든 곡들중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래도 잘빠진 곡 중에서 고르기는 했죠."
"오 마이 갓! 홀리 퍽!"
'와우. 성격 죽이네.'
진호가 혀를 내두를 때, 겨우 정신을 수습한 에밀리 카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되면 제가 생각한 플랜을 바꿔야겠네요."
"호. 어떤 플랜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다섯 개의 곡으로 8년. 연주회는 1년에 10번. 그게 제가 생각한 최봄 양의 활동 플랜이에요."
"느리군요. 그리고 적어요."
"피아니스트를 혹사시켜 은퇴시키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요. 그래서 절 부른 게 아닌가요, 토마소 씨?"
다미앙과 진호는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 아니라 사람을 우선시하기에 결국 에이전시에서 퇴직했던 인물이 바로 에밀리 카터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유키 구라모토가 추천했다고 하더라도 거부했을 것이다.
"맞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바뀌었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곡이 이렇게 많은 이상 스케줄은 똑같이 진행하더라도 제가 당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최봄양의 이름값을 높일 수 있어요. 그리고 방금 전 진호 리가 말한 그피아니스트. 그를 위한 플랜을 새로 짜야 하죠."
그녀의 눈에 욕심이 강하게 서려있었다.
진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 아이는 세상에 나올 수 없어요."
"……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군요."
'서번트 증후군인가? ……아쉽다.'
무척이나 욕심이 났다.
장르와 색깔이 다른 10개의 곡을 완벽하게 연주하는 천재에게 욕심이 나지 않는다면, 에이전트로서 실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번트 증후군을 가진 아이를 제어할 자신이 없는 그녀는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너무 아쉬워.'
"아쉬워하지 마세요. 어차피 정신없이 바쁠 테니까."
"네? 무슨……."
에밀리 카터는 의아해하며 진호를 보았지만, 그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아, 도착했네요. 내리죠."
의아해하며 차에서 내린 그녀는 코끝을 스치는 고기 냄새에 입맛을 다셨다.
'내가 고기 마니아인 건 또 어떻게 알고!'
"이 냄새가 외국인이 한국에 오면 무조건 먹어 봐야 한다는 삼겹살인가 보군요. 그런데 건물이 꽤 허름하네요."
"허름하지만, 이 동네에서는 손꼽히는 맛집이에요. 안으로 들어가시죠."
에밀리 카터는 군침을 삼키며 진호의 뒤를 따랐다.
드르륵!
"그러니까 이제 진태 너는 나한테 안 된다니까? 봤지? 이 누나가 국제 대회에서 우승한 거?"
"안녕히 가세요."
"……푸하하핫!"
"크크크크크!"
"야! 진태, 너 딱 말해! 너 원래 말 잘하지! 근데 못하는 척하는 거지? 맞지?"
목에 핏대를 세우는 최봄과 그녀를 무시하며 고기를 집어 먹는 진태. 그 외에도 가게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십대 후반 소년소녀들과 그들의 부모들.
"어? 진호 오빠!"
"진호 형!"
벌떡 일어나는 소년소녀들을 보며 에밀리 카터는 방금 전과 다른 의미로 눈을 파르르 떨었다.
"서, 설마 이들 모두……."
"네. 한 명 한 명 모두 봄이와 동등한 레벨의 천재들이죠. 그리고 당신이 케어해야 할 아이들이고요."
이들 모두를 감당해야 하기에 에이전트였던 그녀를 불러온 것이다.
여러 사람을 다루는데 이골이 난 에이전트를 말이다. 최봄만을 감당할 거였다면, 경력 있는 매니저를 섭외했을 것이다.
"왓 더……."
진호는 넋을 놓는 그녀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 * *
아이들과 에밀리 카터는 빠르게 친해졌다.
진호가 소개해 준 사람이라는 이유가 컸지만, 앞으로 자신들의 스케줄을 담당해 줄 가족 같은 사람이라는 이유도 컸다.
그렇게 울타리 안으로 받아들일 사람이라고 생각한 건지 아이들은 진호가 정 실장을 통해 미리 들려보낸 전자 피아노들에 몰려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다.
"……결함이 있군요, 모두."
가만히 아이들의 연주를 지켜보던 에밀리 카터는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분명 천재가 맞긴 했다.
그러나 결함이 있었다.
피아니스트로서는 치명적인 결함.
'하나의 이야기만 좋아해.'
진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십대 중반부터 후반까지의 아이들이에요. 자기가 원하는 것만 해도 하루가 모자를 나이죠. 그냥 입맛이 무척이나 까다로운 아이들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죄송합니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알아요. 분명 피아노 좀 친다는 사람들이 보기엔 결함이 있어 보이는 게 맞으니까."
그래서 아이들이 국내 콩쿠르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 것이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잘도 저런 천재들을 끌어모으셨군요."
나이가 차고 경험이 쌓이면 세계를 울릴 천재들이 무려 13명이나 이 자리에 모여 있었다.
"우연이에요, 우연. 전 저 아이들을 우연히 발견했을 뿐이에요. 그저 그뿐이에요."
"……확실히 세상엔 재능이 있어도 여건이 되지 않아서 꿈을 포기 하기에 묻혀 버리는 천재들이 많죠.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네?"
"보스께서 가이드 라인을 잡아 주시죠."
"보스? 제가요? 아닌데요?"
"아, 그럼 여기 토마소 씨가 제 보스입니까?"
"저도 아닙니다만?"
"……그럼 대체 누가?"
진호와 다미앙은 그제야 에밀리 카터가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당신입니다. 에밀리 카터, 보스는 당신입니다."
"……예?"
"그렇지 않습니까, 진호 씨?"
진호는 다미앙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에밀리 카터 씨를 일개 에이전트가 아니라 저 아이들을 모두 케어해 줄 수 있는 에이전시 대표로 모신 거예요. 저와 다미앙씨는 그저 그 에이전시의 투자자 일 뿐이죠."
"자, 잠깐?"
"저와 다미앙 씨의 쌈짓돈을 잘부탁드려요, 카터 대표님. 저는 몰라도 다미앙 씨는 결혼할 때 살 신혼집 자금을 투자하는 거거든요."
"……holy Jesus."
에밀리 카터는 웃고 있는 진호와 다미앙을 보며 넋을 놓았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