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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220화 (220/424)

9권 20화

7. 투자자

새벽녘 햇살이 예년보다 더 빨리 뜨거워지고 있다.

밤사이 꽁꽁 싸맨 이불이 펴지고, 이르게 뜨는 해에 눈도 빠르게 떠졌다.

몸을 일으킨 진호는 언제나 보는 흐릿한 창밖의 풍경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안경을 찾아 침대 옆을 더듬었다.

투욱! 타닥!

"……눈이 좋아지는 스킬을 얻던가 해야지, 원."

아직은 어두운 방이라 몸을 숙여 손의 감각으로만 안경을 찾아 쓴 그는 기지개를 펴며 방을 나섰다.

"끄으으!"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청바지에 긴팔 티셔츠만 입은 채 드레스룸을 나선 진호는 거실 TV 옆에 놓인 진열장을 보며 입을 주욱 찢었다.

망고 뮤직 어워드 대상. 그렇게 적힌 트로피가 잘 보이도록 진열장 정중앙에 놓여 있었다.

"참 언제 봐도 질리지가 않아."

흐흐흐 웃은 그는 하양이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소파로 다가갔다.

"망?"

"맛없는 사료 먹을래, 맛있는 츄르 먹을래?"

"미야옹!"

"……와, 츄르를 포기할 줄은 몰랐네? 그래도 안돼. 가자."

"캬아아아악!"

"엄마 올 때까지 네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만 먹이기 전에 따라오지? 아님 운동 빡세게 해서 옛날의 예쁜 하양이로 돌아 가 볼까?"

"캭! 칵!"

"그래, 난 나쁜 주인이다. 따라와."

진호는 몸을 돌려 현관으로 향했고, 하양이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우울한 얼굴로 그의 뒤를 쫓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온 진호는 돌연 한숨을 내쉬었다.

찰칵! 찰칵! 찰칵!

"오늘은 너냐……."

이쪽을 향해 초고가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고 있는 교복 입은 여고생. 빨간 틴트가 번들거리는 입술이 인상적이다.

진호가 기억하기로 그녀의 언니도 지니어스고, 저 카메라도 언니것으로 알고 있다.

"시끄러워요. 오빤 여기 무시하고 저기 차로 걸어가세요. 여느 연예인처럼!"

"밥은?"

"여기 보지 말라니까요?"

"학교는 가라? 전화해서 확인한다?"

"엄마랑 같이 왔어요."

"뭐? 어머니는 어디 계셔?"

"가요, 쯤! 학교 가야 한다고!"

'……에라이.'

한숨을 폭 내쉰 진호는 회사 차로 걸어갔고, 월터는 그 뒤를 따르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세상 어느 팬이 이렇게 순번을 정해 가며 사진을 찍으러 올까. 그것도 팬클럽 규모가 160만 명 이상인 스타의 팬이…….'

탁! 탁!

차에 오른 진호는 배를 움켜잡고 몸을 들썩이고 있는 정 실장과 최실장, 성실장을 보며 이를 드러냈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래, 아침부터 참 활기차지? 어제 너 몇 시에 나올 거라고 공지 해 놨더니 저렇게 어머니랑 왔다.

저기 차에서 딸을 한심하다는 듯 보는 어머니 얼굴 보여?"

"……대본이나 주세요."

"푸하하하핫!"

"호호호호호!"

'에라이.'

콧잔등을 씰룩인 진호는 대본을 찾아 들어 펼쳤고, 차는 출발했다.

"그거 알아?"

"뭐가요?"

"이번 일에 연루됐던 연예인, 기자들이 서로 자기 살겠다고 폭로 해서, 드러난 사람들 모두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블랙리스트요?"

진호는 잠시 대본에서 눈을 떼며 정 실장을 보았다.

"피디, 감독, 작가들이 만든 절대 쓰면 안돼는 연예인 목록. 분란을 일으킬 사람을 누가 쓰겠어."

"아, 그럼 사실상 연예계 퇴출이겠네요."

"자업자득이지."

고개를 끄덕인 진호는 다시 대본을 보았다. 이미 끝난 일이니 더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촬영장에 도착한 진호는 오늘 촬영 장소로 쓸 건물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한국대였으면 좋았을 텐데……."

"한국대는 이렇게 예쁘게 생긴 건물이 없잖아. 어후. 이게 카페야, 대학교 건물이야?"

대학교 건물이라기에는 너무 아기자기하고 예쁜 건물.

이 건물만 이런 게 아니라, 이 대학교의 모두 건물들이 예뻤다.

진호는 건물 입구에서서 어떤 물건을 지키고 있는 스태프들에게 다가갔다.

"이게 오늘 제가 쓸 자전거예요?"

"으응. 헛! 만지면 안돼, 진호씨! 흠집 날 수 있어!"

"……내 손바닥이 사포예요? 만진다고 흠집 나게?"

"하지만 이거 엄청 비싸다고! 프레임만 3천만 원이야!"

"어우."

진호는 슬그머니 물러났다.

'큰일 나겠다.'

진호 자신이 아니라 스태프들이 큰일 난다.

"거의 제가 타고 다니는 차값이네요."

진호는 현재 역수입해 온 국산 suv를 타고 다닌다.

"내 말이! 우리가 괜히 이거 지키고 있겠어? 좀 있다가 넘어지면 안돼. 진짜 안돼!"

"알았어요, 알았어."

진호는 혀를 내두르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오늘 촬영장소로 쓸 강의실이 있는 층에는 드라마 관계자만 있었다.

"진호 씨, 왔어?"

김태유 피디가 다가왔다.

"이른 아침부터 고생 많으세요."

"어쩌겠어. 여기 대학생들 강의 시작하기 전에는 끝마쳐 줘야지. 오후 되면 너무 늦고."

"미야옹."

"……어이구, 우리 하양이도 왔니? 자, 여기 간식이다."

"냐앙!"

환하게 웃으며 뒷주머니에서 고양이용 육포를 꺼내 드는 김태유 피디의 모습은 완전히 켓맘, 아니 켓파파였다.

"그렇지. 옳지. 진호 씨, 하양이는 왜 이렇게 사람한테 잘 달라붙어?"

'간식 주니까 엉겨 붙는 거예요. 안 그러면 개무시해요. 주인도 무시해요.'

차마 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양이를 이렇게 풀어놔도 어디 엄한 곳을 가지 않는 것을 아는 진호는 그렇게 하양이를 김태유피디에게 맡기고 제작진이 간이로 만든 대기실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오늘 찍을 장면에 등장할 엑스트라들이 벌떡 일어났다.

"괜찮아요. 일어서지 마세요."

'부담스러워!'

약 500여 년 동안 지구에서 살아온 주인공은 10년 내지 20년마다 신분을 바꾸는데, 이번에 얻은 신분은 대학교 시간 강사였다.

즉, 대기실에 있는 엑스트라들은 주인공에게 강의를 받는 대학생 역할이었다.

'와, 힘 빡 줬네. 저러면 위화감 생겨서 편집당할 텐데…….'

대학생은 대학생 다워야 했다.

그래도 이해한다. 이들에게는 오늘 찍는 한 컷, 화면에 나오는 단 1초가 소중할 테니 말이다.

"진호 씨, 모던하게 갈까? 아님 내츄럴하게 갈까?"

"직장인처럼 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주인공에게 여긴 신분을 위장하는 곳일 뿐이잖아요. 그러니까튀지 않도록, 여느 시간 강사답게."

"이미 외모부터 튀는 거 아냐?"

"원래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잘생긴 사람도 못생긴 거잖아요."

"푸흐흐. 알았어, 오케이."

"아, 그리고 저 분장 끝나면 저분들 좀 봐주실 수 있어요? 좀 많이 튀네요."

진호 앞에 놓인 거울을 통해 엑스트라들을 살핀 성실장과 최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튀기는 하네. 어디 클럽가는 것도 아니고. 어이구, 재는 엄마가 화장을 해줬나?"

"알았어, 오케이. 오랜만에 월급값 좀 하겠네."

"흐흐. 감사합니다."

최 실장과 성실장에게 얼굴을 맡긴 진호는 아차하며 얼른 핸드폰을 들었다. 진호가 문자를 보내는 상대를 본 최 실장과 성실장도 아차 싶었다.

"맞아. 오늘이 그날이었지, 참?"

"그러게.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가네. 잘됐으면 좋겠다. 진호 씨, 나도…… 아니, 내가 보내야겠구나, 참."

"그러니까요. 진호야, 이제부터 얼굴 고정해. 움직이지 마!"

"이렇게 되는 겁니다. 누구……."

"컷!"

모든 사람들이 김태유 피디를 보았다.

그는 책상에 앉아 있는 엑스트라들을 보며 짓궂게 웃었다.

"거, 단역들. 진호 얼굴 말고, 연기에 집중합시다. 특히 여자들!"

"……푸흐흐!"

"푸하핫!"

제작진은 웃음을 터트렸고, 엑스트라들은 황급히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진호 씨, 미모 좀 죽여. 시간 강사가 너무 튀는 거 아냐?"

"흐흐흐. 그냥 학생들에게 인기 좋은 시간 강사로 갈까요?"

"……쓰-. 그거 끌리네? 최 작가, 어떻게 할까?"

최은수 작가는 진호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이번 신분이 끝나면, 어디 해외로 나간다고 하면 되니까."

"오케이. 모두 들었죠? 여자들은 방금 전처럼 하고, 남자들은 알아서 몰입해서 갑시다. 질투를 하든, 강의를 듣든, 잠을 자든. 자, 스탠바이."

"처음부터 다시 갑니다."

진호는 황급히 감정을 잡는 엑스트라들을 보며 다시 화이트보드를 향해 몸을 느릿하게 돌렸다.

그리고 최대한 시간을 끈 후 신호를 주었다.

"하이 큐!"

따악!

다시 슬레이트가 쳐지자 진호는 연기를 시작했다.

"누구 질문 있습니까?"

엑스트라들은 순간 얼어붙었다.

처음 설정과 달라진 설정에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하게 된 거다.

'아차차.'

이건 진호와 제작진의 실수였다.

진호는 바로 한 여성 엑스트라를 바라보며 애드리브에 들어갔다.

"질문 없으면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반응해라, 반응…… 그렇지!'

"저요!"

"네. 어떤 부분이 궁금합니까?"

"오늘 저녁에 뭐하시는지가 궁금한데요? 저랑 클럽 가실래요?"

사심이 꽤 섞인 것 같은 유혹하는 얼굴.

진호는 낯빛을 굳혔다.

"그럼 여기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그렇게 진호는 문 쪽으로 걸어갔고, 컷 사인이 터졌다.

다시 몸을 돌린 진호는 어느새 의자에 앉아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여성 엑스트라에게 엄지를 치켜세워 주고는 김태유 피디에게 다가갔다.

"……흠. 괜찮은데? 진호 씨는 어때?"

"저도 괜찮은데요? 속마음으로 어린 것이 발랑 까져 가지고는…… 이런 대사가 들어가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오, 그거 좋다! 딱 주인공이잖아? 500년 묵은 꼰대!"

"어린 것이 발랑 까져 가지고는, 오케이. 나도 이거 좋아."

"자, 최 작가도 오케이 했으니까모두 오케이! 다음 신으로 넘어갑시다!"

"그래요, 아침 먹고 합시다!"

"잉? ……풋, 그래. 우리 남주님 말대로 아침 먹고 합시다!"

"와우우! 밥이다!"

"오오오!"

밥이라고 해도 토스트와 삼각 김밥이 전부였다.

바스락. 우물우물.

"아, 이 집 맛있는데? 이거 어디서 사 온 거예요, 정 실장님?"

"그냥 대학교 정문 앞에 바로 보이는 곳 가서 사 온 거야."

"아, 그래요?"

고개를 끄덕이던 진호는 이쪽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들을 보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방금 전 애드리브를 한 여성 엑스트라와 오늘 함께 출연한 다른 엑스트라였다.

"무슨 일이세요?"

"감사합니다!"

우렁찬 그들의 외침에 깜짝 놀랐던 진호는 이내 푸근히 웃었다.

"뭘요, 같은 연기자들끼리 서로 돕고 사는 거죠. 오늘 마지막까지 잘해 봐요. 그리고 다음 현장에서도 또 봐요."

순간 엑스트라들의 얼굴이 울상으로 일그러졌다.

진호는 그들의 어깨를 두드려 주곤 자리를 옮겼다. 쑥스러워서 더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진호야, 재들 널 마치 신처럼 바라본다."

"쉬쉬. 보지 마세요. 잡혀서 또 감사하다는 소리 들어요."

최은수 작가 옆으로 간 진호는 그녀가 쓰고 있는 쪽대본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역시 언어의 마술사."

"시끄러워. 집중 깨지니까 저리가."

"나 주연인데……."

"키스신 많이 넣기 전에 꺼지지?"

"넵."

재빨리 일어난 진호는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고서 삼각 김밥을 씹어 삼켰다.

"아, 우승했다. 진호야, 봄이 대상탔어."

"오! 진짜요?"

진호는 재빨리 정 실장의 핸드폰을 낚아채 확인했다.

정말이었다. 진호가 피아노곡을 준 최봄이 해외 국제 콩쿠르에서 대상을 탔다.

"아자! 그렇지!"

진호뿐만 아니라 정 실장, 최 실장, 성실장도 모두 만세를 외쳤다.

"진호야, 전화. 전화!"

"맞아!"

진호는 재빨리 핸드폰을 들어 최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니, 걸려고 했다. 이쪽을 향해 달려온 김태유 피디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헉! 헉! 지, 진호 씨. 설마, 진짜 설마해서 묻는 건데 방금 해외 무슨 콩쿠르에서 대상 탄 최봄 피아니스트의 연주곡을 진호 씨가 줬어? 준 거야?"

왠지 다급하고 초조해하는 그의 모습에 진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 나 또 사고 쳤구나.'

이슈의 천사가 다시 한번 이슈를 만들어 버렸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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