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216화 (216/424)

9권 16화

리딩은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이뤄졌다.

"바로 촬영 들어가도 되겠네."

"흐흐흐."

"그럴까요? 나 시간 괜찮은데?"

진호가 쑥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고, 김주아가 눈을 빛냈다.

김태유 피디와 최은수 작가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쉬는 시간이 되자 진호는 김주아를 빤히 바라봤다.

"나 유부녀다. 엄한 생각하게 만들면 안돼요."

진호의 표정이 순간 짜게 식었다.

"아니, 그렇다고 그렇게 경멸하지는 말고. 이게 누나한테!"

"관리 열심히 받았나 봐요?"

"그렇지? 티 나지?"

"주름이 거의 안 보이는데요?"

"그렇지? 그렇지? 아오, 진짜 남편이라서 때릴 수도 없고!"

진호는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언젠가 만난 김주아의 남편은 꽤 점잖으면서도 장난기가 많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아으. 그래도 이거 잘되면 애들 먹일 간식값 좀 벌겠다."

"광고?"

"그렇지. 이 누나가 또 CF퀸아니겠니?"

"언제 적 이야깁니까?"

"……진짜 때릴까?"

"흐흐흐."

입술을 이죽거리던 김주아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런데 너 국내 대기업 광고는 안 찍더라? 왜 그러는 거야? 그쪽에서 연락 안 와?"

진호는 여태껏 국내에서 대기업이라 불리는 곳의 광고를 찍지 않았다. The J로 성공한 이후에도 말이다.

"페이가 안 맞아서요."

"그쪽에서 약하게 불러?"

"좀?"

분명 그들 입장에서는 부를 수 있는 맥시멈일 테지만, 진호로서는 그 돈을 위해서 시간을 투자 할 의미를 찾지 못했다.

"너 화보 찍을 때 시간당 얼마받는데?"

진호는 그녀에게 액수를 말했다.

"히엑! 그, 그렇게나 받아?"

김태유 피디와 최은수 작가도 혀를 내둘렀다.

"세계에서 가장 돈 잘 버는 모델이 그 정도구나……."

"아직은 2위입니다."

작년 하반기부터 작곡에 주력하며 활발히 활동하지 않아서 그런지 결국 1위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럼 1위는 얼마나 버는 거야?"

"저랑 그렇게 큰 차이는 안 나요."

그렇게 둘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김태유 피디는 웃고 있는 진호를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분명 장난이란 걸 알았지만, 진호가 여주인공을 바꾸자고 했을 때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었다.

최은수 작가는 그런 김태유 피디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이구, 그렇게 놀랐어요?"

"그럼 안 놀라? 패션 기업 10개와 LVMH가 협찬 및 후원사로 붙었는데?"

이들이 편당 지원하기로 한 제작비가 무려 3천만 원이었다.

오직 제작을 위해서만 써야 한다는 조건이 붙긴 했지만, 편당최소 3억 3천만 원의 제작비가 형성된 것이다.

웬만한 대배우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뿐이야? 일본에서도 콜이 들어왔어. 동시 방영하자고."

이 정도 영향력을 가진 배우의 말이다. 아무리 장난이라도 허투루 들을 수가 없었다.

"중국은요? 우리들의 1987과 진호의 The J 때문에 그쪽에서도 콜을 해 올 확률이 높은데?"

"거긴 요새 좀 시끄럽던데? 난리도 아니야."

"그래요?"

"일단 굵직한 기획사 15개가 이미 날아갔고, 중국 모든 방송국에 내부 감사 떴대. 연예인, 감독, 작곡가 등 잡혀 들어간 사람들도 많고. 거기 지금 피바람, 아니 태풍이 불고 있어."

"……광전총국?"

"그래, 거기가 움직인 거지."

최은수 작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중국 모든 미디어를 관리 감독하는 그곳은 한국의 방송통신위원회와는 차원이 다른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좀 아쉬워. 그렇지 않아도……."

잠시 말을 멈춘 김태유 피디는 힐끔 대화가 한창인 진호와 김주아를 보곤 씁쓸히 웃었다.

최은수 작가도 그 미소를 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직 이슈화가 된 건 아니지만, 수면 저 아래에서 이번 드라마캐스팅에 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었다.

이제 20대 중반인 진호가 정말 지상파 3사 드라마의 주연을 맡는 게 옳으냐, 40대 애엄마인 김주아가 여주인공을 맡는 게 옳으냐, 이건 무슨 비리가 있는 게 아니냐는 둥 온갖 추악한 추문들이 수면 아래에서 휘몰아쳤다.

이런 이야기를 생산시킬 만한 주인공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빌어먹을 기획사 새끼들! 방송국 놈들! 부러우면 그럴 시간에 저런 배우를 키우던가!'

그녀는 뜨거워지는 머리에 진호가 가져온 초콜릿을 입에 넣었다. 순간 분노를 잊게 만드는 황홀한 맛이 머릿속을 차갑게 식혔다.

"……후, 그냥 접을래요? 난 이거 들고 영진이 오빠 찾아가면 돼요. 영진이 오빠 연출력이라면 내 거 충분히 살려요."

출연자를 단단히 단속하더라도 모든 배우들이 모여 하는 1차 총리딩이 끝나면 슬금슬금 의혹들이 불거질 것이다.

"알지. 장영진 감독님 영상미를 내가 왜 모를까. 하지만 피디로서 마지막 작품이니만큼 이딴 일로 포기하고 싶지 않아."

김태유 피디는 내년에 드라마국 부국장 승진이 확정되어 있다.

이제 내년이 되면 더 이상 현장에서 작품을 만들 수 없다는 뜻이다.

"암튼 고집은……."

"그러니까 부국장 확정이지. 안그랬으면 진즉에 때려치웠어."

피식 웃은 최은수 작가는 기지개를 펴는 진호를 보며 눈을 빛냈다.

"일단 기다려 봐요."

"응?"

"진호 쟤가 이 바닥에서 뭐라고 불리는지 알죠?"

"천사?"

"그거 말고요."

"아, 행운의 사나이. 행운의 천사. 이슈의 천사."

찍는 모든 작품마다 이슈몰이를 해서 그렇게 불리고 있다.

"……에이, 이번엔 진짜 없잖아."

"만약 디올의 두 수석 디자이너가 다시 한국을 방문하면요? 진호가 이번에도 특출한 재능을 선보이면요?"

움찔!

몸을 굳힌 김태유 피디는 입맛을 다셨다.

"그렇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 허튼소리들이 수면 위로 튀어나오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에이…… 그럴 리가."

사람의 운이라는 게 그렇게 자주 찾아올 수가 없었다.

"됐어. 그냥 실력으로 승부 보면 돼. 막말로 이 진호 배우의 한국 팬이 몇 명이야? 50만 명이 넘잖아."

"……그게 실력이에요?"

"아군은 써야지. 어후, 생각만 해도 든든하네."

결집력이 대한민국 최고라고 정평이 난 50만 명이 넘는 진호의 팬들이 기사마다 반박을 하고, 이쪽을 옹호해 준다면 그 어떤 힘든 상황이라도 이겨 낼 수 있었다.

"암튼……."

"흐흐흐."

서로를 보며 웃은 둘은 김주아에게 멱살이 잡혀 흔들어지는 진호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런 그들은 몰랐다.

진호가 지구 반대편에 뿌린 씨앗이 자라 꽃을 피우고 있다는 걸 말이다.

* * *

영국, 웨식스 백작가가 새벽부터 소란스럽다.

집사장을 비롯한 모든 고용인들이 웨식스 저택을 쓸고 닦고, 조이며 저택 전체를 손질했다.

웨식스 백작인 에드워드를 비롯한 그의 일가도 새벽부터 일어나 머리와 피부 손질 등 꽃단장을 했다.

"정문을 넘으셨다고 합니다."

웨식스 백작가를 뒤집어 놓은 주인공이 도착했다는 소리에 웨식스 백작 일가는 낯빛을 굳힐수밖에 없었다.

"나가지."

이제 16살 정도 되어 보이는 훤칠한 소년까지 입을 꾹 다문 채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눈에는 미약한 공포가 서려 있었다.

그렇게 저택 입구로 나간 그들을 맞이한 건 2열로 서 있는 웨식스가의 고용인들이었다.

그들은 가까워지는 롤스로이스를 보며 숨을 골랐다.

이윽고 차가 멈추고 문이 열리며 등이 굽은 노파가 걸어나오자 그들은 깊게 허리를 숙였다.

당장 숨을 멈춰도 이상치 않을 외모의 노파지만, 그들 눈에 서린 공포는 더욱 짙어졌다.

"오셨습니까, 여왕 폐하."

노파의 정체는 영국 모든 권력의 정점인 여왕 엘리자베스 2세였다. 그녀가 오랜만에 아들 부부가 사는 곳을 보고 싶다며 찾아온 탓에 웨식스 백작가는 새벽부터 부산을 떨었던 것이다.

그녀는 왕궁과 비교하면 소박한 크기의 저택을 둘러보며 푸근히 웃었다.

'이곳도 오랜만이군.'

추억을 더듬던 그녀의 눈이 아직도 허리를 숙이고 있는 아들을 보았다.

"깔끔하게 관리하고 있구나."

짧은 말 한마디였지만,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감사합니다."

"그래, 사람이 깔끔하게 하고 살아야지. 알텍스, 날이 갈수록 잘생겨지는구나. 앨리스도 예뻐지고 있고."

소년, 알렉스 새넌 자작과 앨리스가 허리를 더 굽혔다.

"감사합니다, 폐하."

"감사합니다, 폐하."

낭랑하게 울리는 대답에 그녀는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에드워드 백작이 허리를 펴며 입을 열었다.

"저택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부탁하마."

그는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를 부축하며 저택을 안내했다.

"내부도 깔끔하구나. 고용인들이 고생했겠어."

"언제나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그래, 응당 그래야지. 다스리는 자가 그 힘에 취하면 가문을 무너트리는 법이다."

이는 아들이 아니라 손자인 새넌 자작에게 하는 말이었다.

왕실 서열 11위이나 어쩌면 영국의 차차기 왕이 될 수도 있는 어린 손자를 향한 할머니의 훈육이었다.

영특한 새넌 자작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알렉스."

"예, 폐하."

"성적이 어떻게 되는지 이 할미가 물어도 되겠니?"

"A-인 승마를 제외하면 모두 A 입니다."

"호-. 네 아빠보다 운동 신경이 좋구나. 나머지도 잘 하고 있다. 자랑스럽구나."

"감사합니다, 폐하!"

칭찬이 너무도 인색한 그녀의 칭찬에 새넌 자작의 입가에 미소가 피었고, 에드워드 백작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어흠. 이곳이 웨식스의 식사를 책임지는 곳입니다."

에드워드 백작의 말에 그녀는 눈을 빛냈다.

"그래, 이곳이 요새 내 입을 즐겁게 해 주는 고마운 디저트들이 탄생한 곳이구나. 안에 들어가도 되겠니?"

"영광입니다. 하나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당연하지."

에드워드 백작의 시선을 받은 집사장이 안으로 들어가자 주방이 부산해졌다가 조용해졌다.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모든 쉐프들이 2열로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주방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들을 둘러본 엘리자베스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구나, 롤랑. 체셔."

"폐하를 뵙습니다."

총괄 주방장 존 제임스 롤랑과 치프 파티쉐 아스터 체셔는 웨식스 백작가로 오기 전 영국 왕궁의 주방에 있었다.

"특히 체셔는 여전히 열정적인것 같고. 덕분에 즐거운 티타임을 보내고 있어."

흠칫 몸을 굳힌 체셔는 그제야 엘리자베스 2세가 왜 이곳을 찾았는지 알 것 같았다.

'백작님만 보러 온 게 아니었어.'

아스터 체셔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엘리자베스 2세는 이렇게 사소한 것에도 감사를 표할 줄 아는 자였다.

"제가 아닙니다, 폐하."

"음?"

"전 그저 한국에서 온 한 천재가 알려 준 레시피대로 만든 것밖에 한 게 없습니다."

몰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엘리자베스 2세는 사람들을 둘러봤다. 쉐프들과 아들 부부와 손자, 손녀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내 사정을 이해한 엘리자베스2세는 크게 기꺼워했다.

'속여도 될 일 일 텐데…….'

정직한 모습을 보니 참 기뻤다.

"호호, 그렇다면 그 천재에게 감사를 표해야겠군. 나중에 누군지 알려 주게. 일단 주방 안내를 부탁해도 되겠나."

"영광입니다, 폐하."

총괄 주방장이 주방을 안내하며 어디서 무슨 요리가 만들어지는 지를 설명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주방을 둘러보던 엘리자베스 2세는 한 곳을 보곤 시선을 뺏기고 말았다.

"저건……."

어떤 단어로 이 감동을 표현해야 할까.

"웨식스의 주방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말 어울리는구나. 저 그림만 보아도 웨식스의 주방이 얼마나 열정적이고 역동적인 줄 알겠어. 이렇게 혼신을 다해요리를 만드는 건가?"

"저 그림을 그린 천재의 눈에는 그렇게 비춰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천재는 폐하께서 드신 디저트를 창작한 천재와 동일 인물입니다. 그리고 훌륭한 배우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진심으로 놀라 총괄 주방장을 보았다.

"그런 천재가 현대에도 존재할줄이야……."

엘리자베스 2세는 다시 그림을 보았다.

오랜 세월에 마모 되어 삭막해진 마음에 꽃이 피고 있었다.

"자네들의 긍지라고 해도 손색이 없군."

"저 그림을 볼 때마다 그런 감정이 솟구치긴 합니다."

"호호호."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주방을 나섰고, 쉐프들은 모두 허리를 숙여 배웅했다.

그렇게 손자, 손녀의 방까지 모두 둘러본 그녀는 저택을 나섰다.

그에 에드워드 백작을 비롯한 백작 일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스케줄이 있으신 겁니까?"

당황하고 서운해하는 아들의 모습에 엘리자베스 2세는 푸근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아이인 줄 알았다면…….'

먼 옛날에 했던 결정을 달리 했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무척이나 일을 하고 싶어졌기 때문이란다. 그러니 서운해하지 마렴."

"폐하."

"훌륭한 왕족으로 자란 것 같아서 참 기쁘구나. 앞으로도 부디네 사람들과 국민들에게 긍지를 심어 주어라."

에드워드는 깜짝 놀랐고, 그녀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왕궁에서 보자구나."

그렇게 말한 그녀는 차를 타고 웨식스 백작가를 빠져나갔고, 에드워드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 보다가 턱을 쓰다듬었다.

'이렇게 칭찬을 받은 게 얼마만이더라…….'

"분명 웨식스의 주방 때문이겠지?"

누구도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에드워드는 답을 내렸다.

'은혜를 입었군.'

그저 어머니의 칭찬이 아니다.

영국 여왕으로서의 칭찬이다.

영국의 차기 왕을 정할 권리가 있는 그녀의 칭찬.

"……현재 진호 리는 무얼 하고있나?"

모두가 화들짝 놀라 그를 보았고, 집사장은 얼른 입을 열었다.

"현재 진호 리는 일본에서 드라마를 찍고 있고, 모바일 게임을 개발했으며, 한국에서는 드라마 출연을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모두 진호 리와 연락을 주고받는 주방에서 나온 정보입니다."

"바쁘게 사는군. 흠……."

잠시 고민을 하던 그는 몇 가지 말을 꺼냈고,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건 집사장도 마찬가지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지시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에드워드 백작은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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