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권 15화
전화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 웨이양이 맞았다.
진호는 자신이 섭섭하게 한 게 있나 곰곰이 생각해 봤다가 아차 싶었다.
"죄송해요. 제가 많이 늦었죠? 진짜 조만간 제 친할아버지와 할머니, 외할아버지 모시고 중국으로 넘어갈게요."
-맞아. 그것도…… 어흠, 그거야 누구 한 명 관에 못 박히기 전에 만나면 되는 거고.
"음, 그것 말고는 제가 섭섭하게 대한 게 없는 것 같은데요……."
-일본 드라마는 출연하면서 왜 중국 드라마는 출연하지 않느냐고 주책을 부리는 거다.
이 목소리의 주인은 장칭이었다.
아무래도 둘이 함께 있는 듯 싶었다.
-내가 통화하고 있잖나!
-늙은이 주책은 그만 부려. 전화하자마자 대뜸 섭섭하다고 하면 진호가 어떻게 알아듣겠나?
-……어흠흠. 그래! 말이 나와서 하는데, 왜 중국 드라마는 출연하지 않는 게냐? 텔레비전을 틀어도 널 찾을 수가 없어.
-지금 텔레비전에서 볼 드라마가 없다고 이러는 거다.
-아, 거참! 정말 이럴 거야? 손자 앞에서 계속 내 체면 깎을 게야?
진호는 터지려는 웃음을 어떻게든 참아 내려 했지만 결국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푸흐흐. 중국에서 대본이 와야 보고 찍을 작품을 정하죠."
-잉? 안 가?
"네. 안 오던데요?"
-왜?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럴 리가 없긴요. 중국에 잘생긴 배우가 얼마나 많은데, 굳이 한국 배우까지 찾아 쓰겠어요."
-……허허허.
'응?'
진호는 의아해했다.
웨이양의 웃음에 불쾌함과 짜증이 담겨 있었다.
-거봐! 사람이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말이야. 내가 이 사람 대신해 사과하마.
"아뇨, 아뇨. 사과는요. 제가 먼저 신경 쓰지 못해서 죄송한걸요. 이번에 한국 드라마 찍고 나면 중국쪽에 한번 알아볼게요."
-그래. 그건 알아서 하거라. 그보다 어릴 적 진호 너는 왜 이렇게 영악한 게냐?
"……설마 할아버지도 그 게임을 다운받으셨어요?"
-나만 받았을까. 아주 이놈이 선물 줄 때만 웃어. 아니, 이제는 선물을 받아도 시큰둥하다.
"푸하하하핫! 너무 오냐오냐 키우셔서 그래요. 때론 혼을 내고, 엄하게 해야 예쁘게 자라죠."
-그런 게냐?
"네. 안 그러면 중학교 2학년 때 쯤부터 가출할 거예요."
-가출도 해? 내가 부족하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탑재시킨 인공지능이 진짜 인간처럼 섬세하거든요. 아직 늦지 않은 것 같으니까 지금부터라도 바르게 키우겠다 생각하시고 대해 주세요."
-끙. 그래야겠구나. 그래, 알았다. 들어가거라. 여기 노인네 말은 그냥 주책으로 흘려듣고.
"할아버지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웨이양 할아버지도요!"
전화를 끊은 진호는 전화가 너무 길었다며 양진혁에게 사과를 했다.
"아냐, 아냐. 그런데 진호 너, 이 게임에 인공지능도 탑재시켰냐?"
"그러니까 그 가격을 불렀죠."
"……그렇다고 해도 싼 가격 아니야?"
인공지능이란 엄청난 무게를 가진 단어에 양진혁은 조심스러워졌다.
"아, 푸훗. 말이 인공지능이지, 요즘 전자제품에는 흔히 쓰이는 기능 정도예요. 다음에 버전2를 만들 때는 조금 더 개량해 보려고요."
"또 육성?"
"아마도 그렇겠지만, 테마를 좀 다르게 하려고요."
'진호 키우기'의 목표는 최고의 연예인이다.
다만 어떻게 키우냐에 따라 해피엔딩, 베드 엔딩, 새드 엔딩이 될 수 있다. 정말 잘못 키우면 연습생 생활에서 벗어날 수조차 없다.
"이를테면 낚시? 모델이 되는 것도 괜찮고요."
"낚시꾼을 어렸을 때부터 육성시킨다라……. 괜찮은데?"
"그래요?"
"응. 요새 나오는 낚시 게임들이 다 거기서 거기라 말이야. 현질 할 맛이 안 난다. 그런데 네가 만들수 있다는 그건 내가 원하는 이상향의 낚시꾼으로 육성할 수 있다는 거잖아. 난 무조건 산다."
"……사모님이 현질 하는 건 아세요?"
"한 달에 열 장 허락 받았어, 인마! 날 뭘로 보고!"
"10만 원?"
"100만 원! 대표 이사를 뭘로 보고!"
"헐?"
"……대신 실제로 낚시는 가지말래."
그건 당연한 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업무 때문에 집에 잘 들어가지 못하는 양진혁이다. 여기서 낚시까지 하면 백 퍼센트 이혼당한다.
띠리리! 띠리리!
양진혁이 앉은 소파 옆에 놓인 전화기가 울렸다.
양진혁의 눈이 빛났지만, 진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 왔나 보다."
삑!
"무슨 일입니까?
-이진아 씨께서 오셨습니다.
그랬다. 진호는 오늘 이진아와의 작업을 위해 JH에 들렀다.
"알겠습니다. 들여보내세요."
전화가 끊기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이진아가 들어왔다. 그리고 진호를 발견하곤 성큼성큼 다가와 다소곳 한쪽 무릎을 꿇으며 절을 했다.
"소녀, 이진아. 이진호 님께 인사올립니다. 그간 무탈하셨는지요."
대표 이사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양진혁은 조용히 얼굴을 쓸어내렸고, 진호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안 본 사이에 똘끼가 더 진화했네.'
그렇지 않아도 4차원인 이진아가 더 진화해서 나타났다.
* * *
벚꽃이 피는 봄이 왔지만, 아직 날은 쌀쌀했다.
작은 공원, 바둑판을 앞에 두고 앉은 장칭도 옷깃을 추몄다.
"……허허헛."
장칭은 깊은 고심 끝에 헛웃음을 터트리는 웨이양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쯧쯧쯧.'
왠지 짙은 피바람이 불 것 같아서 장칭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왜? 부하 직원들이 일부러 무시했다고 생각하나?"
"……집안일일세, 칭."
웨이양의 눈빛은 무척이나 싸늘하고 광폭했다.
그러나 장칭은 흔들리지 않은 채 장기짝을 옮겼다.
탁!
"그것도 병이야. 말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해 줄 거라고 생각하는거."
"말을 했으니 문제 아닌가. 진호가 내게 손자 같은 아이라고도 말했어! 이 웨이양이 직접!"
쿵!
웨이양이 돌로 만들어진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렇다면 그 다미앙이라는 아이가 커트했거나 쏟아지는 돈에 무서운 게 뭔지 잊은 기획사 놈들이 무시한 거겠지. 왜 일 잘하는 자네 수족들을 때리려고 해? 광전총국을 그렇게 허술하게 장악했어?"
"……무서운 게 뭔지 잊었다?"
"배우, 가수 탈세 사건 이후 벌써 몇 년이 지났나? 자네 작년 이맘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나 해?"
"……."
"현명하게 대처하게. 후에 진호가 이 대륙에 진출했을 때, 그 배부른 것들이 이상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 진호 눈치 빠른 거 알지?"
"끄응."
"자네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냐마는 이럴 때일수록 확실한 명분을 가지고 움직여야 해."
"……그냥 자네가 정치하게나."
"다 자네 보고 배운 거야."
"……후우, 고맙네. 역시 내게 이런 조언을 해 줄 사람은 자네밖에 없구만."
"그거야 당연한 말이고."
그렇게 말한 장칭은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기획사 몇 개는 날아가겠구만.'
기획사뿐만 아니라 소문이 좋지 못한 영화 감독이나 드라마 감독, 작가도 몰락할 것 같았다.
제법 진한 피바람이 불 터였다.
-할아버지, 나 간식 주세요!
"잉?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핸드폰에서 울리는 어린 진호의 목소리에 장칭은 재빨리 핸드폰을 켰다. 그건 웨이양도 마찬가지였다.
핸드폰 화면에서 침울한 표정을 한 어린 진호가 모습을 드러내자 둘은 흐뭇하게 웃었다.
* * *
'최은수 작가의 신작! 여주 확정!'
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포털 사이트 연예란을 살짝 달구었다.
벌컥!
"진호야!"
회사 연습실에서 한쪽 벽면을 모두 채운 거울을 보며 연기 연습을 하던 진호는 화들짝 놀라서 문을 보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재준이었다.
"……깜짝아! 왜!"
"이 뉴스 봤냐? 너 출연하는 드라마 여주인공이 확정됐대!"
진호는 눈을 껌뻑였다.
'진심인가?'
진심이었다.
재준은 진심으로 흥분해 있었다.
"야,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그 사실을 내가 먼저 알았겠냐, 아님 기자님들이 먼저 알았겠냐?"
"……너요?"
"이건 뭐 바보도 아니고……. 안 그래도 최 작가님이 단단히 준비해 오라고 해서 골치 아파 죽겠는데 너까지 난리냐?"
진호는 얼른 가서 방송하라는 듯 손을 저었다.
"쉬엄쉬엄해, 인마. 강남에 빌딩 세울래?"
문을 닫고 진호에게 다가간 재준이 뒷주머니에 꽂아 넣었던 차가운 캔음료를 내밀었다.
치익!
캔음료를 건네받은 진호는 피식웃고 말았다.
"그래, 강남에 빌딩 세우련다. 넌 경비 자리 줄게. 이백이면 되지?"
"짜다! 물가 상승을 고려해서 오백은 줘야지!"
"그래! 오케이 콜! 연 오백!"
"월 오백, 인마! 월!"
"월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너 두고 봐! 내가 먼저 빌딩 세울 테니까!"
"그럼 내가 완공식 사회 봐 준다! 공짜로!"
"오케이 콜!"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왜? 일이 잘 안 풀려?"
움칫 몸을 굳힌 진호가 머리를 긁었다.
"티 났냐?"
"더럽게. 뭔 일이야?"
"그냥 부모님은 재밌게 여행하고 계시는지, 멀미는 안하시는지 걱정돼서."
"어련히 잘 놀고 계실까 뭔 쓸데 없는 걱정을 하고 있어? 왜, 집에 아무도 없어서 쓸쓸해? 오빠가 같이 자 줘?"
"꺼져. 오면 죽여 버린다."
둘은 다시 웃었고, 진호는 일단 털어놓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진것 같아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보다 여주 실화냐? 진짜 이분이야? 워-! 이진호, 성공했어?"
'성공했지.'
대한민국의 대배우라고 할 수 있는 여성과 동등하게 연기를 할 수 있게 됐다.
"아, 근데 유부녀지 않아?"
"성격이 완전 딱이야. 난 대본 받았을 때, 최 작가님이 누굴 생각하고 여주를 쓴 건지 알겠더라."
'솔직히 이 사람 아니면 이 역할을 소화할 사람도 없고.'
아니다. 몇 명 있기는 한데, 나이 대가 다 비슷해서 큰 의미가 없다.
1화가 방영되는 날 대중들은 그녀가 유부녀임을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아, 그래서 네가 예민했던 거구나? 그 첫……."
진호는 재빨리 재준의 입술을 때렸다.
"미쳤냐? 아니거든?"
"맞잖아?"
"……빌어먹을."
"크크크. 그래서 OST는 하냐?"
"그쪽에서 부탁하더라고. 그리고 내가 부를 건 아니고, 김진아 씨가 한 곡 부르기로 했어."
"오. 김진아 씨 좋지."
김진아와 하려고 했던 듀엣도 이걸로 대체했다. 진호는 더욱 진화된 그녀의 똘끼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똑똑.
문이 열리며 정 실장이 들어왔다.
"리딩 갈 시간이야."
"아, 네."
"이진호 파이팅!"
"오냐. 다녀오마."
그렇게 회사를 나서 리딩 장소로 향한 진호는 먼저 와있는 최은수 작가와 담당 피디에게 인사를 한 후 주위를 둘러봤다.
'1차 리딩 장소는 다 비슷비슷하네.'
좁다며 좁다고 할 수 있는 회의실.
두세 명이 대본 리딩을 하기에는 딱 알맞다.
오늘은 남주, 여주 단둘만 리딩을 하는 날이었다.
"연습 많이 했니?"
최은수 작가가 날카로운 눈으로 물었다.
"혼나지 않을 정도로는요?"
"캐릭터 헛갈리지 않을 거지?"
진호가 현재 일본에서 찍고 있는 드라마 주인공 배역을 말하는 것이었다.
"걱정 마세요. 내일이 마지막 촬영이에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똑똑! 벌컥!
'아, 왔네.'
"안녕하세요-! 어머, 최 작가님! 오랜만이에요! 피디님, 안녕하세요!"
"어서 와. 우리 같이 작품 하는건 처음이지?"
"그래서 제가 바로 콜 했잖아요."
배시시 웃은 그녀는 진호를 보며 눈을 빛냈다.
"어이구, 우리 진호 잘 있었졍? 그 입술도 잘 있었고? 이번엔 잘해 보자잉?"
"……하. 진짜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왜 이런 아줌마일까."
"아줌마 아니고 누나! 누나-!"
진호는 정말 진지한 눈으로 피디를 보았다.
"피디님, 정말 진지하게 건의하는 건데, 여기 주아 이모 말고 다른 여배우로 하시죠? 예쁘고 성격 톡톡 튀고 아름다우신 30대 여배우 많으시잖아요. 예?"
"이모라고 하지 말랬지-!"
그랬다. 이번에 진호와 함께할 여주인공은 대한민국 대배우 중 한 명이자 더 씨프에서 호흡을 맞췄고, 진호의 첫키스 상대였던 옛날 국민여배우, 국민여친 김주아였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