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9권 7화
3.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연말도 어느덧 며칠 남지 않게 됐지만, 올 한 해 열심히 일한 진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아니, 열의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할래요."
"안 됩니다."
"정말 잘할 자신 있어요. 그분들 가능성 있다니까요?"
"절대 안 됩니다. 차라리 저와의 계약을 파기하시죠."
"……쳇."
헤어스타일을 만들고 있는 진호 뿐만 아니라 그 뒤에서서 방송 하던 재준도 시무룩해졌다. 채팅 창은 물음표 일색이었지만, 그 누구도 그들이 누군지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카라멜팝콘……. 하, 잠시나마 행복했다.'
"악! 처, 천천히!"
"어휴. 오늘 일어나서 빗질 안 했어?"
"네, 안 했는데요?"
"그래, 그러니까 머리카락이 이렇게 꼬였지. 아침에 일어나면 꼭 빗질 해?"
뚜둑! 뚜둑!
"악! 악!"
최 실장을 비롯한 여직원들은 잘한다며 최고참 헤어디자이너를 응원했고, 남직원들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분장실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오자 진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진태야! 어머님!"
"진호 형!"
그사이 키가 더 큰 진태가 맑게 웃자 사람들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진태는 분장실이 신기한 지 둘러보다가 재준을 보자 더 환하게 웃었다.
"재준 형!"
진호와 진태의 어머니가 깜짝 놀랐다. 진태가 붙임성이 좋아보이지만, 의외로 사람 이름을 잘 부르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너 언제 나 몰래 진태 만나러 간 적 있어? 아니, 그 전에 진태 집은 어떻게 알고?"
"하아. 그에 관해선 스토리가 길다. 하지만 그건 사나이들만의 비밀! 그렇지, 진태야?"
"네! 슉슉! 슉슉!"
진태가 입으로 낸 소리에 대충 상황을 짐작한 진호는 재준을 고맙다는 듯 보았고, 재준은 어깨를 으쓱였다.
"다 됐어."
진호는 빛나는 전구가 테두리를 따라 달려 있는 거울을 보며 만족스러워 했다.
"역시 성실장님. 삼고초려 해서 모셔 온 보람이 있어!"
엄지를 치켜든 진호는 진태를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 앉혔다.
"성실장님, 부탁드려요."
"그래. 나한테 맡겨. 진태를 오늘 최고의 미남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 자, 진태야. 멋있어지자. 여자들이 다 반해 버리게."
"유은하 선생님, 예뻐요!"
"이 바람둥이. 또 바뀌었어? 이번엔 어떤 여자야?"
"이히히히히."
여성 직원들에게 둘러싸여 꽃단장을 하는 진태를 흐뭇이 바라보던 진호는 이내 진태의 어머니와 함께 분장실을 나섰다.
"이 곡들이면 아마 한동안 심심 해하지 않을 거예요."
진호는 USB 하나를 내밀었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피아노 명곡도 있지만, 진호가 직접 작곡한 연주 곡도 있었다.
"…… 고마워요."
"아니에요. 진태보고 잘해 달라고 주는 뇌물인데요, 뭘."
진태에게 부탁할 일이 있었다.
"하지만……."
머뭇거리던 진태의 어머니는 이내 한숨을 내뱉었다.
"휴. 계속 신세만 지네요."
"진태는 제 동생이에요, 어머니."
옅게 웃은 진호는 오늘 참가할 시상식에서 입을 슈트를 입기 위해 움직였다.
"꺄아아아악!"
"와아아아악!"
입구에 몰려 있는 여러 가수의 팬들이 보내는 환호를 받으며 포토 존에서 사진을 찍고 안으로 들어온 진호는 혀를 내둘렀다.
"휘유. 대한민국 기자님들이 다 온 것 같네."
드라마와 예능을 자체제작 방영하는 케이블 방송국들끼리 합심하여 만든 연말 시상식. 이제부터 매해 연말 행사로 정착시킨다는 케이블 방송국들의 발언 때문인지 언론의 관심이 무척이나 높았다.
'진태는 자리에 잘 앉았으려나.'
"드레스 고마워, 진호야."
오늘 에스코트를 한 김세연이 마치 여신이 입는 것처럼 순결하면서도 과감한 하얀색 드레스를 조심스럽게 만졌다.
"뭘. 나보다는 팀과 마리나에게 감사하다고 해야지."
팀 존스와 마리나는 이번에도 '우리들의 1987'에 출연한 주연 급 출연자들을 위해서 드레스를 직접 만들어 주었다.
"당연히 그래야지! 편지 써서 보냈어!"
"올-."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자리로 향했다.
둥글고 커다란 테이블에는 이미 다른 출연자들이 앉아 있었다.
"고맙다, 진호야!"
"사랑해!"
먼저 와 있던 나연석과 신연호, 최은수 작가도 고마움을 표했다. 진호는 나연석에게 엄지를 치켜 들었다.
"멋진데요? 진즉에 그렇게 입고 다니시지."
만날 패딩 점퍼만 입은 채 시상식에 참여했던 나연석.
"……어휴. 이런 건 답답해서 못 입어."
"그래도 오늘은 입으셔야죠. 드라마 피디로서 처음 상 타는 건데."
'우리들의 1987'은 최종화를 시청률 21.8퍼센트로 마무리했다. 케이블 드라마시청률 사상 최고.
최우수 작품상은 확정되었다고 봐야 했다.
"어흐흐. 준다면 감사히 받아야지."
나연석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피식 웃은 진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저 빼고 이 형들만 데리고 여행 갔다 오셨다면서요!"
젊은 배우들이 어깨를 움츠렸고, 나연석이 급히 입을 열었다.
"내가 이번엔 너 빼고 간다고 했잖아!"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저만 쏙 빼놓고 가요."
'우리들의 1987'에 출연한 젊은 남자 배우들 중 진호만 빠졌다.
"그리고 너 바빴잖아! 일본 드라마에도 출연한다면서!"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놀라서 진호를 보았다.
"그걸 어떻게……."
"내가 일본에도 지인이 있거든. 10월부터 제의 들어왔다면서?"
입을 벌린 진호는 순간 온몸을 엄습하는 한기에 최은수 작가를 보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최은수 작가의 눈빛이 냉랭했다.
"너 일본 드라마 출연하니? 내 작품은?"
"작가님 신작은 4월에 첫 미팅이잖아요."
진호는 우에토 유리가 제의한 드라마 중 한 작품에 출연하기로 했다. 나키시마 유카의 목소리를 2차 가공하던 중 그쪽 제작진과 미팅을 하며 출연 도장을 찍었고, 내년 1월부터 촬영을 시작하기로 했다.
드라마 편수가 한국에 비해 적은 일본이라면 최은수 작가의 신 작 첫 미팅을 할 때쯤에는 촬영을 거의 마친 후일 것이다.
이후 나키시마 유카가 오리콘 차트에서 1위를 하자 그쪽 제작진은 축제를 벌였다고 했다.
"그리고 작가님도 좀 쉬셔야죠."
정확히는 드라마를 방영할 방송사와 PD까지 정해졌지만, 지상 파 3사 모두 연초와 2분기에 방영할 드라마 라인업이 모두 정해 진 상태였다. 덕분에 최은수 작가는 강제적으로 쉬게 되었다.
"그동안 일본에서도 이슈 만들고 돌아오겠습니다! 한류 스타 된 이진호, 최은수 작가 신작 출현! 탕탕탕. 뉴스의 헤드라인으로 좋지 않나요?"
"……칫."
그녀의 눈빛이 누그러지자 진호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 준혁이 형. 차기작정해졌다면서요. 혜연이 누나도."
둘뿐만 아니다. '우리들의 1987'에 출연한 주연급 배우들 모두 차기작이 정해졌다.
"…….흐흐흐. 벌써 거기까지 소문났어?"
"아, 거참. 이런 건 부담되니까 소문나면 안 되는데……."
"모두 축하해요. 이번에도 대박. 파이팅."
그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웃음꽃을 피워 갔고, 주위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그런 그들의 여유를 부러워했다.
이후 시간이 흘러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베스트 커플상! 우리들의 1987의 이진호, 김세연! 축하드려요!
스피커를 통해 쩌렁쩌렁 울리는 사회자의 멘트가 즐거운 잡담을 멈추게 했다.
"……헐?"
"……아, 씨."
진호와 김세연은 동시에 서로를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고, 그 모습을 스크린으로 본 사람들은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에휴, 가자."
"아, 싫다."
"푸하하하하하!"
"크크크크크크!"
"축하한다-!"
"결혼해! 워우우우우!"
그래도 일어선 순간부터 진호는 환한 미소를 지었고, 그건 김세연도 마찬가지였다.
어찌 됐든 연말 시상식의 영광된 상이었다.
무대에 오른 진호는 상패를 받아 들곤 김세연과 함께 마이크 앞에 섰다.
"음…… 왜일까요. 저희보다 더 달달하고 사랑스런 커플이 많았는데 말이죠."
"그러게요. 내가 할 말이네요. 저희 작품 안에서도 경호 오빠와 혜연 언니가 저희보다 훨씬 예쁜 사랑을 나누지 않았나요?"
카메라가 순간 경호와 혜연을 잡았고, 둘은 재빨리 숨었다. 그렇지 않아도 웃음을 터트리던 사람들은 이젠 배를 잡고 굴렀다.
"그래도 시청자분들께서 뽑아주신 영광된 상이니 기쁜 마음으로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시청자 여러분, 사랑해요!"
둘은 하나의 트로피를 같이 붙잡고 높이 쳐들며 수상 소감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다시 진행된 시상식에서 류준혁은 드라마 부문 남자 조연 상을 받았고, 류혜연은 여자 조연상을 받았다. 극 중 류준혁의 형으로 나왔던 염재홍은 시청자들이 뽑은 마스코트상을 받았다. 그리고 최우수 작품상 역시도 이변 없이 '우리들의 1987'이 되었다.
'우리들의 1987'이 드라마 부문에서 상을 싹쓸이하고 있었다. 진호는 무대에 멍하니 서 있는 나연석에게 커다란 꽃다발을 안겨 주었다.
"뭐하세요, 정신 차리셔야죠."
수상할 것이라고 거의 확신을 가지긴 했지만, 막상 호명이 되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 으응."
진호는 그가 정신을 차리는 듯 하자 안심하며 무대를 내려갔다. 그렇게 걸어 자리에 앉을 때쯤 정신을 온전히 수습한 나연석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생에 첫 도전이었습니다. 많이 불안했고, 무서웠습니다."
나연석의 목소리는 점점 담담해져 갔다.
"그럼에도 견디고 연출할 수 있었던 것은 화기애애한 현장 분위기와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 최은수 작가님의 탄탄한 대본. 스태프들까지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바 역할을 모두 잘 수행해 주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알아서 이슈를 만들어 주고 몸을 아끼지 않으며 연기를 해 준 우리 이진호 배우."
카메라가진호를 잡았다. 나연석의 발언과 그 따뜻한 눈빛에 순간 울컥한 진호는 눈물을 그렁거리고 말았다.
"사랑한다. 그리고 앞으로는 알아도 모른 척해 줘. 내가, 아니 우리 스태프 모두가 너 때문에 연기학원에 다니는 건 아니?"
입맛을 다시는 진호의 눈에서 결국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륵 흘렸다.
"……푸하하하하핫!"
"크크크크크크!"
"마지막으로 우리 아내님! 아들! 사랑해-!"
"와아아아아아!"
짝짝짝짝짝!
"드라마 부문 최우수상!"
진호는 스크린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곳엔 진호 자신의 얼굴과 다른 선배 배우들의 얼굴이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기라성 같은 배우들.
'대상이 없는 이 시상식에서 최 우수상이 곧 연기 부문 대상이나 마찬가지!'
후보들을 소개할 때부터 거세게 뛰기 시작한 심장이 이젠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받겠지? 받을 거야! 시청률도 탑을 찍었잖아!'
진호는 자신이 너무 흥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지만, 제어할 수가 없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애써 태연하려고 해도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이 영예로운 상의 주인공은!"
사회자와 눈이 마주친 진호는 알게 되었다.
그와 함께 뻥! 심장과 머리가 터져 버렸다.
"우리들의 1987에서 최은택을 연기한 이진호!"
"그렇지!"
"우아아아아아!"
사람들이 안겨 왔지만, 진호는 다미앙을 찾았다.
어느새 일어나 있는 다미앙이 이쪽을 향해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드디어!'
길다면 길었던 시간이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비록 많은 대중들이 진짜 상이라고 인정하는 지상파 시상식에서의 수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연기 부문에서 최고상이었다. 2018년 연예계 데뷔 이후 드디어 한 분야에서 인정을 받고, 족적을 남길 수 있게 됐다.
승진 기회를 버려 가며 전력으로 서포트해 준다미앙의 노력에 드디어 보답을 하게 되었다. 진호는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듯 떨리는 턱을 억지로 악물며 무대를 향해 걸어나갔다.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오는 길 박수로 축하해 주던 배우들이 다시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쳐 주었다.
진호는 왜인지 너무도 무겁게 느껴지는 트로피를 어루만지다 고개를 들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져 더 이상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는 울어 버릴 것 같았다.
진호는 다미앙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 순간 차올랐던 눈물이 울컥하며 쏟아져 내렸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