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9권 6화
김재범, 윤태원과 만남 이후 진호는 제법 바쁘게 움직였다.
네드 시런과 매니저 존의 초상화나 '웨식스의 주방'도 모두 완성시켜 제 주인에게 보냈고, '우리들의 1987' 촬영도 무사히 끝냈다.
촬영이 끝나는 날, 최은수 작가가 대본 한 권을 내밀며 새해에 보자고도 했다.
♩♪♬♩
"좋다."
커다란 거실 한가운데에 놓인 코타츠 속에 앉은 정 실장이 귓가를 달달하게 자극하는 김대원의 목소리에 미소를 지었다.
"크. 역시 1위를 한 곡 답네."
김대원뿐만 아니라 얼마 전에 앨범을 발매한 나이열도 1위를 달성 했다.
그는 귤을까 입안에 집어넣으며 다시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귤은 제주 감귤이지. ……그런데 진호야."
"네."
진호는 거실 소파에 앉아 테블릿을 통해 일본 드라마를 시청하고 있었다.
"코타츠 너무 좋다. 어흐, 몸이 녹는다. 녹아. 어머님이 사 오셨다고?"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친구분께서 그거 판매하세요. 이번에 창업하셨데요."
"한국에서? 코타츠를?"
"네. 인터넷으로."
"……건물 한 채 정도 가지신 분 이야?"
"전업주부세요."
"음……."
진호는 우물쭈물거리는 정 실장을 보며 피식 웃었다.
"걱정 마세요. 매출이 제법 나온 데요."
"……거짓말."
"스무 살 이상의 싱글족 여성들에겐 1인용 텐트와 함께 필수 아이템으로 불린대요. 가스비를 아낄 수 있으니까."
"헐? 거짓말!"
"창업하실 생각이면, 매니저 그만 두신 후에 하세요."
"……떠글. 그런데 어머님은 어디 가셨어? 안 들어오시네?"
평소였다면 운동을 갔다가 1시간 전에 돌아와야 했다.
진호의 집을 자주 들른 정 실장은 나진희의 스케줄도 꿰고 있었다.
"동네 이모들이랑 푸켓 가셨어요."
"럭셔리 라이프를 제대로 즐기시는구나……."
"그동안 고생을 많이 하셨으니까요."
"아버님은?"
"출장 가셨어요. 아, 맞아. 하양아."
그동안 살이 제법 빠진 하양이가 소파 밑에서 슬금슬금 기어나왔다. 하양이가 너무 살이 쪄서 동물 병원에 데려간 나진희는 고혈압과 당뇨 위험이 있다는 진단을 받은 뒤 다이어트를 시키고 있었다.
하양이를 안아든 진호는 몸을 일으켰다.
"냥?"
"엄마랑 아버지 없으니까 오늘부터 넌 나랑 다닌다."
"냐앙!"
하양이가 싫다며 발버둥을 쳤다.
"굶을래, 추울래?"
"캬악!"
"안돼. 둘 중 하나만 택해야 해."
"……냥."
"그래, 넌 굶는 것보다 추운 게 낫지? 가시죠. 시간 됐어요."
"……벌써 이렇게 됐나. 어그그그그."
진호의 집에 올 때마다 언제나 보는 광경.
'하양이가 참 똑똑해. 저런 고양이 있으면 정말 잘 키울 자신 있는데…….'
정 실장은 입맛을 다시며 현관으로 향했고, 진호는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아파트를 빠져나온 둘은 서울에 있는 어느 모처로 향했다.
5층의 작고 허름한 건물. 엘리베이터도 없어서 계단을 걸어 올라 간 진호는 5층의 문을 거침없이 열었다.
"아아-!"
'오?'
나키시마 유카가 장구와 북, 가야금이 쌓인 벽을 보며 애절한 고음을 내뱉고 있었다.
'제법?'
아직은 낮은 옥타브의 고음이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아니, 필사적이었다.
"또 귀로 듣는다! 몸으로 들으라니까! 몸 밖으로 내뱉는 순간 그건 네 목소리가 아니야!"
70대의 노파가 나키시마 유카의 뒤에서 일본어로 카랑카랑하게 외치자 그녀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아아아-!"
섬칫!
진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1초, 아니 0.1 초였지만,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한으로만 이뤄진 파도가 전신을 때렸기 때문이다.
'이, 이건 대체?'
"그래, 그거야! 넌 몸의 모든 소리가 들린다는 축복을 받은 년이야! 귀로 들리는 소리 따위 모두 무시해!"
마른침을 삼킨 진호는 노파의 옆으로 다가갔다.
"선생님."
"왔어? 고양이네?"
"……고양이는요. 돼냥이에요. 안아 보실래요?"
노파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호는 하양이를 넘겨 주었다.
"어머머. 얘 좀 봐라. 왜 이렇게 얌전해?"
"영악해서 자기 밥 줄 사람은 기가 막히게 잘 알아차리거든요."
"그래?"
"네. 유카 씨는 좀 어때요?"
"들었잖아. 겨우 걸음마 땐 수준이야. 아직 한참 멀었어."
"그래도 음정이 많이 안정됐는데요?"
진호도 노파의 말에 동감이지만, 그래도 정말 음정이 안정되었다.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진호는 존경을 담아 노파를 보았다.
그녀는 현재 이런 허름한 건물에서 후학을 양성하는데 남은 생을 보내고 있지만, 일본이나 중국에서 도 비행기를 보내어 초청을 했을 만큼 그 목소리가 한국의 국보라 부를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한이 더 깊어졌어.'
진호는 나키시마 유카를 보았다.
분명 서늘한 공간임에도 그녀의 뒷목이 땀으로 번들거렸다. 필사적으로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살도 많이 올라왔어.'
스트레스가 상당히 감소되었다는 뜻이다.
"흥. 나한테 한 달 반을 배웠는데 이 정도도 못하면 가수든 뭐든 때려치워야지."
"또 마음에 없는 말하신다."
"……쯧. 그래, 그래도 왕년에 잘 나갔던 가수라서 그런지 기본적인 감은 있더라. 그보다 네놈은 이쪽에 언제 올 거야?"
그녀가 유카를 교육시킬 때 옆에서 따라 부른 적이 있는데, 이후 계속 이렇게 꼬드기고 있었다.
"창법을 바꾸고 싶은 생각은 없어서요. 대신 해외 나가면 국악에 대해 자주자주 알릴게요."
"헛소리. 그따위 실력으로 뭘 알려? 나라 망신시키려고?"
"……."
진호는 입맛을 다셨다. 그녀의 말이 정답이었기 때문이다.
다시금 코웃음을 친 노파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 유카를 보며 따스한 눈으로 보았다.
"잘해 줘."
"예."
"한이 가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맺힌 사람이야. 가지고 놀지마."
"제가 그러면 지팡이 들고 쫓아 오실 거잖아요."
"흥! 그래도 이 정도면 어디 가서 망신은 당하지 않겠네. 데려가."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진호는 진심을 담아 최대한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가르치는데도 명인인 그녀는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수고는 무슨. 돈을 많이 받았으니 그 값을 한 거지."
손을 저은 그녀는 하양이를 내려 놓으며 안쪽의 문으로 향했고, 진호는 그 문이 닫히고 나서야 나키시마 유카를 건드렸다.
"아, 왔어요? 선생님은요?"
"이제 그만 돌아가시래요."
"예? 아직 수업 시간이 안 끝났는데요?"
"아뇨. 이제 더 이상 오실 필요가 없대요. 졸업 축하드려요."
"……네?"
나키시마 유카는 다급히 안쪽 문을 보았다.
진호는 그쪽을 향해 발을 떼는 그녀를 잡아 세우며 고개를 저었다.
"하, 하지만……."
당황해 안절부절못하던 그녀는 이내 입술을 깨물고는 안쪽 문을 향해 무릎을 꿇으며 절을 깊게 했다.
일어선 그녀는 가져온 짐을 챙겨 밖을 향해 발을 뗐다.
진호는 말없이 하양이를 안아 들며 그 뒤를 따랐다.
터벅터벅!
그녀는 건물을 나서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이제 어디 가야 해요? 재범 씨에게 수업을 받는 시간까진 아직 많이 남았는데……. 아, 이 근처에 좋은 카페 생겼던데!"
"일본에 갈 겁니다."
"……네?"
진호는 환하게 웃었다.
"이 정도면 된 것 같네요. 이제 2차 가공을 시작하죠."
동그랗게 떠진 나키시마 유카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 * *
12월 초까지만 해도 따뜻했던 날씨는 중순에 접어들자 언제 그랬냐는 듯 살을 자르듯 추워졌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목깃을 잔뜩 추켜세웠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건 대학생인 아사다 유에도 마찬가지였다.
"추워! 추워! 추워!"
"그렇게 말하면 안 추워?"
그녀의 옆에서 같이 걸음을 재촉 하던 남자가 묻자, 아사다 유에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더 추워! 옷 벗어 줘!"
"나도 추워."
"남자 친구잖아!"
"큰일 날 소리 하지 마! 너 여자 친구로는 정말 최악이거든?"
"……우리 바꿔입을까?"
"그거 8만 엔이나 주고 샀다고 하지 않았어? 찢어져도 괜찮아?"
"……켄타, 한국 드라마 좀 보고 배워."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야."
유에는 눈앞의 남자가 남자 친구가 아님을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 했다.
'이 매너 없는 놈! ……응?'
아사다 유에는 귀를 자극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음반 레코드 가게에서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흘리듯 그곳으로 향했다.
"왜 또! 술 마시러 가는 거 아니었어?"
"쉿. 조용."
친구가 입을 다물자 유에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녀의 친구도 이내 곧 입을 다물며 스피커를 보았다.
절로 눈물이 솟구치는 호소력 짙은 목소리. 마치 상처 입은 짐승이 인간에게 다가오지 말라는 듯 낮게 우는 것 같아서 귀가 절로 붙잡혀 버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생의 끝을 알리는 듯한 울부짖음이 그의 온몸을 강타했다.
아니다. 다 나았다고 세상을 향해 표효하는 짐승 같았다.
'미쳤다!'
분명 높지만, 낮았다.
낮은데도 아주 높은 고음처럼 느껴졌다.
옷을 따뜻하게 입었음에도 소름이 오돌토돌 돋았다.
"……좋다.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내용인가?"
친구가 한참을 침묵하다가 꺼낸 말에 팔을 쓸어내린 유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분명 어디선가 들어 본 목소린데…… 나키시마 유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나키시마 유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올라가지 않은 고음에, 혹여 올려도 음정 박자가 엉망이었던 그녀의 처절했던 마지막 무대.
한때 아사다 유에의 워너비 스타는 그렇게 몰락했다.
이후 간간이 모델 활동을 하며 SNS에 근황을 알렸지만, 유에는 더 이상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한때 사랑했던 스타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행동하는 모습을 도저히 지켜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앨범을 낸다는 말도 없었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달 1 위 곡은 이거 같다."
유에는 친구의 말에 적극 동의했다.
이런 상황이 아니라 힘들 때 들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은 곡.
"근데 대체 누구야, 이사람?"
"물어보면 되지. 들어 가 보자."
유에는 재빨리 가게 안으로 들어가 외쳤다.
"사장님! 지금 나오는 곡 가수가 누구예요?"
"그렇죠? 노래 좋죠? 잠깐만요. 제가 이런 걸 다를 줄 몰라서. 사이토!"
진열대 사이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젊은 청년이 사장에게 다가갔다.
"나키시마 유칸데요?"
"아, 그래? 손님, 나키시마 유카 예요!"
"네?"
"응?"
사장도 화들짝 놀라 다시 노트북을 보았다가 다시 유에를 보았다. 그녀도 멍하니 사장을 보았다.
이후 둘은 똑같은 소리를 냈다.
"……에엑!"
* * *
여제의 조용한 귀환! 그러나 결코 조용하지 않은 반응!
국보급 가수가 다시 복귀했다! 돌아와 줘서 고맙다! 유카 짱! 모두가 외면했던 그녀에게 12개의 명곡을 준 작곡가 이진호는 누구인가!
이진호! The J의 주인공?
일본 언론이 시끄럽다.
그와 함께 오리콘 차트에도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혹시 모를 조롱을 피하기 위해 음원을 조용히 발표한 후 며칠 동안은 90위권 언저리에 안착했던 그녀의 컴백 앨범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쭉쭉 치고 올라가더니 결국 2주일 만에 1위에 등극했다. 이게 방금 전의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나키시마 유카가 진호의 손을 꼭 잡은 채 눈물을 펑펑 흘렸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좀 부담스러웠지만, 진호는 수고했다며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며 몸속에서 일어나는 묘한 감각에 집중했다.
'얻었네.'
그녀의 곡이 1위에 안착하면서 [스킬: 재생사]를 완전히 얻게 되었다. 3차 해금 조건인 '몰락한 스타 복귀시키기'를 지나 4차 해금 조건이자 온전한 습득 조건인 '몰락한 스타 성공시키기'를 모두 해제시킨 것이다.
'사실 이번에는 치트키를 쓴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현재 브론즈 계급 이상의 회원만 집계해도 약 38만 명이나 되는 지니어스 일본 지부가 움직였다.
그동안 진호가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아서 지갑이 빵빵해졌던 진호의 일본 팬들은 나키시마 유카의 곡이 5위안에 랭크되자마자 돈다발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렇지 않아도 역행하던 속도가 범상치 않았던 나키시마 유카의 앨범은 5위에 랭크가 된 지 단 1시간 만에 1위에 등극했다.
진호는 나키시마 유카를 보았다.
'……끙.'
스킬을 온전히 얻으니 그녀의 새로운 단점이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직 완전히 완성된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목소리뿐만 아니라..... 에휴. 아니다. 이제 알아서 잘하겠지.'
고개를 끄덕인 진호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만 우세요. 그러다 애써 만든 목 쉬어요."
"……으헝헝헝형! 가, 감사, 흐어어어엉!"
'아차.'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은 것을 알게 된 진호는 이마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