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9권 3화
오랜만에 우에토 유리에게서 연락이 왔다.
-진 짱!
"잘 지내셨어요? 아이는 잘 크고 있고요?"
-응! 아야 짱은 잘 크고 있지!
우에토 유리는 작년에 일본에서 만남 이후 아이를 가졌고, 얼마 전 순산을 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일본 열도가 한 번 뒤집혔고, 우에토 유리의 남편인 마츠다 히로는 다시 한번 국민 도둑 놈, 아니 국민 범죄자가 되었다.
-손가락 열 개, 발가락 열 개. 얼굴은 나 닮아 가!
"그건 정말 다행이네요!"
진호는 진심으로 말했다.
처음 마츠다 아야의 신생아 사진을 봤을 때, 얼마나 안타까워했는 지 몰랐다.
-히 짱은 아쉬워하지만.
"여자아이가 히로 씨 닮는 건 좀……."
-내 말이. 그래도 좋은 아빠가 되어가는 중이야.
소위 츤데레라 부르는 새침데기 같은 성격을 지닌 마츠다 히로. 그가 어떻게 아이를 돌보는지가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
"질투 나시겠어요."
-응. 그래서 바람 피우려고!
"풉! ……네?"
-나랑 드라마 찍자!
'아아…….'
- 진짜 재밌는 설정의 작품이 두 개 들어왔거든!
가슴을 쓸어내리던 진호가 눈을 빛냈다.
"어떤 건데요?"
-하나는 파견직으로 전전하던 여성이 냉철한 프로그래머의 가정부로 취직하는 이야기. 다른 하나는 스님과 시간 강사의 약혼 이야기!
"호?"
일본은 이래서 재밌다.
발상이 신선했다. 문화적으로 차이가 많기에 발상이 다를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일본 드라마는 언제나 신기했다.
"일본은 스님이 결혼도 하나 보네요."
-결혼만 해? 자식에게 절도 물려 주는 걸?
"오. 그런데 히로 씨가 허락하시겠어요?"
-응, 괜찮아. 히로는 지금 아야 짱한테 푹 빠져 있어.
일견 서운해하는 듯 보이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다. 몸 조리도 제대로 못한 상태임에도 작품에 대한 욕심을 부리는 것이 분명했다.
'유리 씨가 욕심을 낼 정도라…….'
우에토 유리는 얼굴만 믿고 나서는 그저 그런 연기자가 아닌, 뛰어난 연기력도 갖춘 일본을 대표하는 연기자 중 한 명이다.
진호의 작품 욕심이 고개를 들었다.
-하자. 유카 짱과도 작업할 거라면서?
진호는 미간을 좁혔다.
"제가요?"
-아니었어?
아니었다. 연락은 받았어도 아직 승낙을 하지는 않았다.
"흠……."
나키시마 유카는 일본에서 대가수라 불리는 여자 가수다.
한국의 박우신이라는 대가수가 리메이크한 '눈꽃'의 원곡자로 더 알려진 대가수.
그러나 현재는 추락해 버린 한때의 대가수에 불과했다.
가수로서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병인 양측이관개방증. 스스로의 목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목소리를 비롯해 음정과 박자를 조절 할 수 없는 병 때문이었다.
이런 그녀가 복귀를 위해 진호에게 러브콜을 보낸 것이었다.
"글쎄요……. 일단은 관망 중이에요. 일본에도 좋은 작곡가와 프로듀서들이 많을 텐데 왜 저한테 연락을 하신 걸까 싶기도 하고요"
-없어. 음, 정확하게 말하자면 유카 짱과 작업해 줄 좋은 작곡가와 프로듀서는 없다고 해야겠네.
단호하게 말하는 우에토 유리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진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들었어요."
나키시마 유카가 양측이관개방증 이라는 희귀한 병에 걸렸을 때만 해도 수많은 작곡가와 프로듀서들이 달려들었다.
그녀가 그럴듯한 노래를 부를 수 있게만 해도 인생역전 스토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 그들의 불같은 욕심에 나키시마 유카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호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절망했다.
그녀의 음정 박자는, 아니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애절한 저음 가성은 다시 한번 사형 선고를 내린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 절망감을 이겨 내기 위해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을 불러 이슈를 모았지만, 그때만 반짝했을 뿐이었다.
대중은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가수에게 흥미를 주지 않았다. 그건 작곡가와 프로듀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그녀가 기나긴 공백을 깨고 앨범을 내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로서는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어요."
-망가진 스타의 돈벌이 수단이 될까 봐?
역시 우에토 유리는 날카로웠다.
"네. 제 오리콘 차트 데뷔 타이틀이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이었다고 해도 말이죠."
-확실히 네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겠네. 알았어. 그렇다면 나도 억지를 부릴 순 없지.
"고마워요."
-아니야. 유카 짱이 친구라지만, 진 짱도 내 친구인걸?
역시 그녀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일단 대본부터 보내 주세요. 진지하게 생각해 볼게요."
-오케이! 진 짱이 연락 줄 때까지 홀딩시켜 놓을게!
"네.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은 진호는 어두운 회의실의 테이블을 검지로 툭툭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흠."
나키시마 유카가 등장하는 영상을 투영시키고 있는 스크린 앞에서 있던 장경아 실장이 입을 열었다.
"최근 영상을 다시 틀어 드릴까요?"
그동안 나키시마 유카에 대해 조사를 하느라 이제야 소집하게 된회의. 오늘 가부가 결정될 터였다.
"……네. 부탁드릴게요."
장경아 실장은 프로젝터에 연결된 노트북을 조작해 영상을 하나 틀었다. 트레이닝복을 입은 나키시마 유카가 연습실 같은 장소에서 노래를 부르는 영상이었다.
이는 나키시마 유카 측에서 보내 온 것이었다.
"음정이 불안하네요."
저음은 그럭저럭 들을 만했다. 그러나 고음이 문제였다. 음 이탈은 기본이고, 고음을 올린 후에는 음정 박자도 흐트러졌다.
가수가 아니라 끔찍한 음치 같았다.
'그러나…… 흐음…….'
진호는 약간 망설였다. 그녀를 컴백시키게 되면 하나의 스킬을 얻기 때문이다.
"이 역시도 지난 수년간 지독히 노력한 결과라고 합니다."
장경아 실장의 말에 진호는 다시 미간을 좁혔다.
"팩트인가요?"
"아시아 총괄지사에서 조사했습니다."
"그래요?"
진호는 다시 영상 속의 나키시마 유카를 보았다.
짙은 독기가 서려 있는 눈은 결코 포기한 자의 것이 아니었다.
"일단 미팅을 잡아 보죠."
진호는 언제든 사람을 속일 수 있는 영상이 아니라 직접 만나서 판단하고 싶었다.
'유리 씨의 친구기도 하니까.'
스킬을 얻을지 말지는 그녀를 만나 보고 정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진호의 일본 스케줄 하나가 정해졌다.
* * *
방송에서 웃었다는 이유로 그날 최고의 이슈가 됐을 만큼 쿨뷰티의 상징이라 불렸던 나키시마 유카.
그녀가 손톱을 질겅질겅 씹은 채 집안에 마련된 연습실에서 방황 하듯 움직이고 있다.
"사쿠라, 그가 내 제의를 받아들일까?"
사쿠라라 불린 20대 후반의 여성이 옅게 웃었다.
"그 부분은 확신할 수 없지만, 아시아에서 편견 없이 언니를 봐 줄 사람은 그 사람뿐이에요. 그분은 천사라고 불리니까."
"……팬이라고 너무 좋게 보는 거 아냐?"
"아니라고 치기에는 증거가 너무 많은걸요?"
"그건 그렇지만…… 음."
"그렇다고 일본인과 작업하기는 싫으시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그녀는 차라리 가수를 포기했으면 포기했지, 일본인 작곡가나 프로듀서와는 결코 작업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설혹 이제 막 연예계에 데뷔한 작곡가라고 해도 말이다.
"그보단 지금 언니와 진호 님이 작업을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퍼지는 게 문제예요."
"그게 왜?"
"진호 님은 그런 걸 끔찍이도 싫어하니까요."
"그건 누구나 싫어하잖아."
"그분은 그게 좀 심하세요."
"……그래?"
순간 나키시마 유카의 낯빛이 흔들렸다.
매니저 사쿠라는 포기란 감정이 눈에 어리는 그녀를 보며 이를 악 물었다.
'개자식들!'
사쿠라는 이 소문의 발원지가 어딘지 알고 있었다.
바로 소속사 사장을 비롯한 임원들이었다.
계약 기간이 이제 1년 남은 나키시마 유카를 어떻게든 뽑아 먹으려는 수작들.
"이토 사장을 너무 미워하지마. 그분도 할 만큼 해줬어."
"하지만……!"
"몰락한 스타를 수년 동안 보호 해줬어. 아마 나보다 더 내 재기를 바라는 사람이 이토 씨일 거야."
그렇기에 이를 악물고 노력을 했다.
음색이 망가지고 음정 박자가 바로 잡아질 생각을 안 하는데도 계속 노력을 했던 것은 이런 이토 사장의 믿음 때문이었다.
"나가 줄래? 나 연습해야겠어."
"20분 안에 그분이 도착할 건데요?"
"……그러니까 목 풀어야지. 작곡가시잖아. 그것도 밀리언셀러를 연속으로 달성한."
'우리들의 1987'의 OST는 현재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사쿠라는 연습실을 나섰고, 목을 가다듬은 그녀는 손에 든 인형을 꽉 쥐며 입을 열었다.
'부디…….'
띵동!
'왔다!'
심장이 순간 철렁 내려앉은 사쿠라는 재빨리 현관을 향해 달렸다.
'부디 성사되기를…….'
신색을 가다듬으며 간절히 소망한 그녀는 문을 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렇게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나키시마 유카 씨의 매니저인 미야모토 사쿠라입니다."
진호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오, 미인이다.'
이제 서른이나 됐을 법한 매니저는 전형적인 일본 미녀였다. 매니저를 하는 게 안타까울 만큼 말이다.
"마침 일본에 스케줄이 있었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만나기로 한 것은 제가 먼저 제안한 거잖아요. 처음 뵙겠습니다. 이진호입니다."
"매니저 정구호입니다."
"감사합니다. 이쪽으로."
진호는 매니저 사쿠라의 뒤를 따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집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 했다.
'오, 아파트 외관만큼이나 좋은 인테리어네.'
도쿄 한복판에 있는 아파트니 만큼 집값도 어마어마할 것 같았다.
'그런데 취향이 좀 편향적인데?'
거실로 향하는 복도에 그림이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분명 모두 다른 양식의 그림이었지만, 모든 그림이 한 가지 감정만 말하고 있었다.
그 점이 진호의 흥미를 강하게 자극했다.
'오호라?'
진호의 눈이 번쩍 떠졌다.
'역시 이곳을 약속 장소로 잡길 잘했어!'
"나키시마 유카 씨께서 그림이나 사진을 좋아하시나 보네요."
"네! 유카 씨는 직접 그리시는 것도 좋아하십니다."
자부심 넘치는 그 미소에서 그녀가 나키시마 유카를 얼마나 좋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스킬: 셜록의 후예]와 [스킬: 괴도 루팡]이 그녀가 진심인지 아닌지를 읽어 냈다.
'인성이 좋다는 거네.'
"와, 그래요? 설마 이것과 이것, 이 작품인가요?"
진호는 복도에 걸린 작품들 중 몇 개를 찍었고, 사쿠라는 화들짝 놀랐다.
"그, 그걸 어떻게?"
"한 사람이 그렸으니까요."
'레벨도 현저히 떨어지고.'
진호가 지목한 그림들은 미술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미술을 아는 사람들이 보면 중학생 수준의 그림이었다.
'그래도 재능이 있네. 감정을 표현해 내는 건 쉬운 게 아닌데.'
"그림에도 조예가 있으신지 몰랐습니다."
"최근에 얻은 취미랄까요."
싱긋 웃은 진호는 다시 고개를 이리저리 둘러봤다.
'의외로 귀여운 면모도 있으시고.'
곳곳에 인형이나 작은 화분 같은 물품들이 있었다. 색상은 핑크 계열이었다.
'분명 쿨뷰티라고 불릴 만큼 쿨한 성격을 가진 분이라고……아, 매니저 취향이구나.'
매니저 사쿠라의 핸드폰 장식이 꽤 귀여웠다.
'확실히 성격이 쿨한 사람은 주위에 신경을 잘 쓰지 않지…….'
"이곳입니다."
똑똑.
"들어가겠습니다."
"아-."
탁한 목소리가 귀를 헤집었다가 멈췄다.
그러나 진호는 그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쓰지 아, 않는데?'
나키시마 유카가 만화 캐릭터 인형을 꽉 쥔 채 멍한 눈빛을 보내고 있다. 매니저 사쿠라가 기겁을 하며 그 모습을 가렸지만 늦었다.
"……건담?"
진호의 작은 혼잣말이 들린 것인 지 흠칫한 나키시마 유카는 마치 몰래 산 불량식품을 부모님께 걸린 아이처럼 하얗게 질려 인형을 연습실 구석으로 던져 버렸다.
'와, 깬다.'
그녀가 갑자기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에 진호는 싱긋 웃었다.
'얻자!'
"우리 작업하죠. 아니, 하게 해 주세요."
"네. 나키시마 유카입…… 예?"
작은 연습실은 태풍이 휘몰아쳤다 사라진 자리처럼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무, 물론 그러기 위해 의뢰한 것이지만, 어째서?"
매니저 사쿠라뿐만 아니라 정 실장까지 고개를 끄덕였다.
"노래를 포기하지 않으셨으니까요."
그림과 사진들 모두 갈망, 갈증 같은 간절함을 담고 있었다.
몰락한 스타가 돈을 벌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 그건 맞지만……."
"그리고 그 목소리가 마음에 드네요."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애절한 저음 가성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지만, 대신 마음을 찢듯 울리는 쇳소리가 있었다.
잘만 쓴다면 그 누구라도 눈물샘을 터트려 버릴 한이 가득한 목소리.
진호는 이걸 가공해 보고 싶었다. 그렇기에 이 미팅을 제안한 것이었다.
우에토 유리의 친구라는 점은 둘 째 문제였다.
이런 진호의 설명에 나키시마 유카의 두 눈이 크게 흔들렸다.
"이, 이 목소리가요? 이 망가진 목소리가?"
"네. 창이라는 발성법이 있는 한국에서도 엄청 희귀한 목소리거든요, 그거. 아, 사람 목소리를 그거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희, 희귀하다니……."
그 누구도 말하지 않았던 말, 아니 최고의 후원자나 다름없던 사장 이토조차도 하지 않았던 말. 그래서 거짓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진심이야, 이 남자!'
그녀는 맑은 진호의 눈을 보며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진호는 그런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떻게 하실래요?"
"……할게요. 하겠습니다. 하게 해 주세요."
진호는 자신의 손을 꽉 잡아 오는 그녀를 향해 활짝 웃었다.
[스킬: 재생사]
[그들은 결코 몰락한 게 아니다. 새로운 도약을 위해 잠시 쉬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