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9권 2화
진호는 눈을 끔뻑였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형이 왜 여기 있어요?"
"나야 이번 앨범 재킷에 그림 좀 그려 넣을까 해서. 넌?"
"전 그림 그리려고요."
"그림도 그릴 줄 알았어?"
"그러는 형도 그림 그릴 줄 알았어요?"
둘은 침묵했다.
둘 모두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모르는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아, 그런 거구나. 둘은 친하지 않은 거구나. 쇼윈도 형제였구나."
"누가, 인마! 누가!"
"이 자식이 어디서 정치질이야? 내가 오늘 네 흑역사 한 번 뿌려줘? 형님들, 누님들, 지니어스! 이 자식이 초딩 때 뭔 짓을 했냐면요!"
재준이 기겁하며 진호의 입을 막았다.
"형님아!"
재준의 손을 잡아펜 진호는 안절 부절못하는 재준을 하찮게 보았다.
"잘해라. 나 입 열면 너 결혼은 커녕 연애도 못한다."
"그건 너님도 마찬가진데? 나 입 열면 너 연예인 생활 못할걸? 너 게임할 때 썰만 풀어도 그냥 개 상또라이 당첨이야."
"……서로 잘할까?"
"응. 원래 과거의 일은 무덤까지 가지고 가는 거지."
"에휴. 너희는 어떻게 변하는 게 없냐."
진호와 재준은 한심하다는 듯 보는 레오의 시선을 피해 먼 산을 응시했다.
채팅창이 ㅋㅋㅋㅋ로 도배되었다.
"아, 그런데 그림은 언제부터 그릴 줄 알았던 거예요?"
"중학교 때부터. 미술부였어."
"……언제는 밴드부였다면서요. 아니, 그 전에 초등학생 때부터 연습생 생활 했잖아요?"
"당연히 하교 시간을 속였지. 만날 춤춤춤. 아무리 춤이 좋다지만 만날 추는 건 좀……."
'그러고 보면 이 형도 참 만능이란 말이지.'
노래에 작곡, 연기까지. 레오도 못하는 게 없는 천재였다.
"그리고 원래 잘난 사람은 인기가 많은 법이야."
"그건 맞죠. 인정."
진호와 레오, 재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시청자들이 'ㅡㅡ' 글자를 채팅창에 도배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진호 넌 그림 그릴 줄 알아? 아니, 아는 거야 아님 배우려는 거야?"
"보여 드릴까요?"
진호는 핸드폰과 함께 들고 있던 수첩의 내용을 보여 주었다.
웨식스의 주방 사람들이 레오의 망막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 이걸 네가 그렸다고?"
"지금은 고작 스케치일 뿐이지만요. 형은요? 형 그림도 보여 주세요."
"아, 여기."
레오의 핸드폰을 본 진호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2등신의 귀여운 레오가 힙합 복장을 한 채 포즈를 잡고 있었다.
"아, 얘 왜 이렇게 귀여워요? 가지고 싶게?"
"그렇지?"
둘은 그렇게 시시덕거리며 화구를 고르기 시작했다.
"아, 맞아."
레오가 진호의 옆구리를 툭 치며 대견하다는 듯 웃었다.
"네드 앨범, 제대로 터졌더라?"
"……흐흐흐."
"곡 의뢰 많이 들어오지 않아?"
"많이 들어오죠."
그냥 많이 들어오는 게 아니라 쏟아진다. 대한민국 모든 가수들이 연락해 오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PJY의 박 대표는 생각나서 샀다는 등의 이유로 매일 매일 선물을 보내고 있었다. 그 속내가 빤히 보였지만, 음식은 죄가 없기 때문에 직원들끼리 잘 나눠 먹는 중이었다.
그래도 직원들 사이에서의 박 대표 주가는 올라가지 않았다. 넘사벽인 진호의 수제 간식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건 형도 똑같지 않아요?"
네드 시런의 앨범엔 레오도 프로듀서로서 이름을 올렸다.
"그렇지. 나도 사장님도 프로듀싱 의뢰가 쏟아지지."
양진혁뿐만 아니라 김대원과 나이열도 프로듀서로서 이름을 올렸다.
"그보다 빌보드나 UK 쪽은 조용 해?"
레오가 작은 기대감을 가지며 물었다.
그도 가수 겸 작곡가인지라 빌보드와 UK를 노리는 것이었다.
"겨우 한 번 성공한 거 가지고, 그들이 움직이겠어요?"
"중위권 이상 치고 올라가지 못하는 애들은 움직이지 않을까?"
충분히 가능한 말이었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전제 조건이 빠져 있다.
"그들이 형이나 제 몸값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못하지."
진호는 삼타석 홈런에 성공한 것도 모자라 내놓은 곡 모두 밀리언을 돌파한 작곡가다.
그것이 혹여 지니어스라는 150만 명을 넘기는 팬들 때문이라고 해도 진호의 몸값은 어마어마했다. 그건 레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혹여 감당한다고 해도 제 마음에 드는 사람 아니면 같이 작업할 생각 없어요. 형도 그렇잖아요."
진호는 레오에게 말하는 척하면서 인터넷 방송에 대고 경고했다. 정확히는 인터넷 방송을 시청하고 있을 기자나 가요계 사람들에게 말이다.
그걸 알아차린 레오도 코웃음을 치며 지원 사격을 했다.
"그거야 당연하지. 너나 나나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요."
우우웅!
"음? 무슨 일이지? 잠시만요?"
재준과 레오에게서 약간 떨어진 진호는 전화를 받았다.
"네, 장 실장님. 네? 누구한테 연락이 와요? 나키시마 유카?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
-예, 그녀가 같이 작업을 하자고 연락해 왔습니다.
"……헐?"
진호는 멍하니 레오를 보았다.
빌보드, UK가 아니라 오리콘 차트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 * *
'우리들의 1987'도 촬영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출연자와 제작진 모두 느긋해졌다.
덕분에 진호도 느긋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슥슥슥!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베란다.
진호는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한 채 붓을 움직이고 있었다. 한참 동안 붓을 놀리던 진호는 잠시 붓을 내려놓으며 어깨를 돌렸다.
"후우. 붓 칠도 제법 힘드네."
"분명 내가 배 아파 낳은 자식이 맞는데……."
"응? 엄마?"
"그건 뭐니?"
"보다시피 엄마랑 아버지랑 나. 우리 세 가족."
네드 시런의 초상화도 그리고 싶고, 웨식스의 주방도 그리고 싶지만, 그보다 먼저 그려 내고 싶은 건 부모님과 진호 자신이었다.
'그리고…….'
"아빠를 너무 미화한 거 아니니?"
"똑같이 그렸는데?"
"머리가 너무 풍성하잖아."
"풋. 그림이니까 이해해 줍시다.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아, 연석 씨에게 전화 왔어."
"나 피디님이? 그냥 나한테 핸드폰……아, 방에 있지 참."
고개를 끄덕인 진호는 몸을 일으켜 자신의 방으로 향했고, 나진희는 남편 이형만의 십 년 전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발그레 볼을 붉혔다.
"이때도 못생긴 건 똑같았네."
낯빛과는 상당히 다른 말이었다.
한편 방으로 들어온 진호는 나연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피디님."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술 마시자. 내가 쏜다!
"……댁에서 쫓겨나셨어요?"
오늘은 출연자와 제작진 모두 휴가다.
-쫓겨나긴 누가! 내가 가장인데 어?
"설마…… 집에 혼자 남겨지신 거예요?"
-…응. 여보가 애들 데리고 어제 온천 여행 갔더라.
'저런…….'
"어제 말하시지."
촬영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최은수 작가에게 술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그동안 술을 안 마신 건 아니지만, 공식적으로 술이 허락된 것은 또 다른 의미였다.
-나도 늦은 저녁 돼서야 알았어. 왜 안 들어오나 싶었지.
"에휴, 어디신데요?"
-어디 갈까? 낮이니까 양평가서 닭에다가 소주 한잔할까?
"그 집 말이죠? 네, 거기서 봬요."
* * *
"여기야. 여기."
산속에 있는 가든이라서 그런지 늦여름과 함께 초가을을 알리는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가볍게 차려입은 채 테이블에 앉은 나연석이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테이블에 있는 사람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러게, 집에 좀 잘 들어가시지."
유부남과 유부녀 경력 5년 차 이상의 남녀들이 있었다. 소위 나연석 사단의 스태프들과 배우들 모두 말이다.
거의 회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난 들어가려고 했다!"
"모두 저 인간이 일을 열심히 해서야!"
"야, 이 나쁜 인간아!"
"아니, 또 왜 내가 욕먹는데?"
"시끄러워! 네놈이 사탄이다! 이 악마야!"
고개를 저은 진호는 빈자리에 앉았다.
얼굴이 불과한 성동인과 김정균, 나연석이 앉아 있는 테이블이었다. 진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저 이 구도를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요……."
성동인이 코웃음을 쳤다.
"넌 아직도 이 삼촌을 모르냐? 1 억을 줘 봐라……아, 1억이면 하겠구나, 참."
"그럼. 그 정도 돈이 아니면 이 형님 예능은 출연 안 하지."
"그렇게 말하면 내가 너무 나쁜 사람 같잖아요……."
"아니었어?"
"형님, 가슴에 손을 얹고 다시 말 해 보세요."
"그래요. 내가 나쁩니다."
다시 고개를 저은 진호는 그들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그러며 작게 안도 했다.
'속이는 건 아냐.'
배우들이 아니라 스태프들을 보니 알 수 있었다. 휴가지만, 정말 할 일이 없어서 이렇게 모인 것이었다.
"그런데 따님은 어떻게 하시고 이렇게 나오신 거예요?"
진호는 성동인을 향해 물었다. 그의 딸 사랑은 한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알려진 상태였다.
"……이제 안 놀아 줘."
"아, 예……."
진호는 김정균을 보았다.
"나도……."
이 테이블뿐만 아니라 다른 테이블들도 조용해졌다.
'그냥 돌아갈까?'
참 불쌍하기도 했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이들의 우울함이 전이될 것 같았다.
"에잇! 자, 마셔! 위하여!"
"위하여!"
타이밍을 놓친 진호는 결국 잔을 들 수밖에 없었다.
모두 어느 정도 술이 취하자 마치 단체 야유회를 온 것처럼 족구나 농구, 축구를 하며 몸을 움직였다.
여성들도 남자처럼 몸을 날리며 함께했다.
"잡아!"
"자빠트려!"
"미래야, 그냥 잡고 늘어져!"
친한 사람들끼리 하는 놀이다 보니 당연히 룰 같은 건 없었다. 그러나 진호는 그 사이에 끼지 못했다. 너무 치트키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뭐하고 있었어?"
입이 댓발 나와 있던 진호는 눈이 살짝 풀린 나연석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작곡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그냥저냥 뒹굴고 있었죠."
"응? 어디 안 나가고? 너 활동적이잖아."
"맨날 어디 나가야 하나요. 집에서 쉬는 것도 좋아해요."
"……그래? 의외네?"
"맞아. 피디님도 꽤 활동적이셨죠."
나연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방송을 위해 여기저기 쏘다니다 보니 이젠 오히려 집에 가만히 쉬는 게 더 힘들었다. 아니, 괜히 불안하고 초조했다.
"확실히 여행 가면 숙소에 가만히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지. 그게 힐링이라고."
"사람마다 힐링하는 방식은 다르니까요."
"흐으음……."
나연석이 눈을 가늘게 뜨자 진호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내가 지금 내 무덤을 팠구나!'
"잠시만요."
"응? 왜?"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그 생각 그만두세요."
"응? 뭘?"
"다음 예능 컨셉! 좀 쉬세요, 피디님. 그러다 진짜 퍼져요."
"……쳇."
"뭐여. 지금 대화 어디에서 예능 컨셉이 나온 겨?"
성동인이 눈을 껌뻑이며 김정균을 향해 묻자 김정균도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 글쎄요? 집에서 쉬는 거?"
"숙소에서 쉬는 거면 좋지 않아? 뒹굴면서 돈 벌 수 있으면, 난 하고 싶은데?"
"이 형님이 괜히 악마 피디겠습니까? 맘 편히 못 쉬게 하겠죠."
"아……."
"쉿. 쉿. 더 말하지 마세요. 코꿰입니다."
진호는 둘의 대화를 무시하며 나연석을 노려봤다.
나연석은 어느새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진호, 그림도 그릴 줄 알았어?"
"꿈도 꾸지 마세요. 진짜 출연 안 할 거예요. 정글 갈 겁니다."
"끙. 너무한 거 아냐?"
"드라마 끝나자마자 바로 시작하면 정말 안 갈 거예요."
"……알았다, 알았어. 그래도 나 생각해 주는 건 우리 진호밖에 없네. 그리고 나도 이번엔 너 안 데리고 가려고 했어. 너무 너만 나오면 사람들이 질려 해. 오래가야지. 내 마음 알지?"
'아, 그래서 아무 말 안 했구나……. 하지만…….'
진호는 따뜻하게 웃는 그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연석의 두 눈은 벌써부터 진호의 다음 예능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