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9권 1화
1. 나키시마 유카
환한 비행기 안, 젖은 머리를 털며 자리로 복귀하던 진호는 아침 부터 노트북을 두드리며 일하는 다미앙의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일어나자마자 일하시는 거예요? 몇 시간 주무시지도 않았잖아요."
"아, 다 씻으셨습니까?"
진호는 다미앙의 노트북을 힐끔 보았다.
"무슨 일인 거예요?"
"아시아 총괄지사의 일입니다."
진호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미앙은 아시아 총괄지사에 소속된 모든 캐스팅 디렉터의 수장이었다. 업무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힘드시겠네요. 보약은 챙겨 드시죠?"
"누가 주신 건데 감히 안 먹을까요. 끼니마다 챙겨 먹고 있습니다."
진호와 다미앙은 서로를 보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흠. 아쉽지 않으십니까?"
"뭐가요?"
"에드워드 왕자와 만났는데, 얻은 게 없잖습니까."
다미앙이 의뭉스런 시선으로 묻자 진호는 피식 웃었다.
"얻은 게 없긴 왜 없어요. 이 퍼스트 클래스도 그쪽에서 예약해준 건데. 그리고 좋은 분들과 사귀기도 했고요."
"주방의 사람들 말입니까?"
"조금만 꼬드기면 영국 왕실의 조리 비법을 낱낱이 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미 몇 개 훔쳐 배우기도 했고."
"푸하하하핫! .. 하아, 역시 진호 씨 다운 대답입니다."
"비즈니스를 위해 간 것도 아닌데, 큰 이득을 바라서야 되나요. 그리고……."
"그리고?"
"……아니에요."
에드워드의 호의가 이 퍼스트 클래스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웨식스의 저택을 나서기 전 의미 심장하게 웃던 집사장의 모습 때문이라도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확실한 건 아니니 입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었다.
"하하, 그렇습니까? 아, 그보다 공주님과는 정말 아무 관계가 아닌 겁니까?"
진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미앙 씨까지 오해하시는 거예요?"
"진호 씨 스타일의 여성이잖습니까."
"음. 그건 부정할 수가 없네요."
그녀의 외모는 진호의 이상형에 굉장히 부합했다.
"하지만 겨우 한두 번 본 것 가지고 무슨……."
"루이스 양은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것 같던데 말입니다."
앨리스는 저택 건물 밖까지 배웅 나오며 진호를 간절히 보았다. 아름답게 차려입은 그녀의 등을 떠밀던 그녀의 친구들의 모습에 다미앙은 당연한 짐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진호는 코웃음을 쳤다.
"아스터 씨에게 레시피를 알려 줬다고 하니까 냉큼 돌아섰죠."
"그래서 실망하셨습니까?"
"다미앙 씨."
"하핫!
"진짜……."
띠링!
진호와 다미앙의 시선이 다미앙의 앞에 놓인 노트북으로 향했다. 메일이 와 있었다.
"응? 장 실장님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의아해하며 매일을 열어 본다미앙은 풀썩 웃어 버렸다.
"왜 그러세요?"
"얻은 게 있군요."
다미앙은 그에게 노트북의 내용을 보여 주었고, 진호는 잠시 눈을 끔뻑였다.
"……누가 어디서 네드의 앨범을 구해요?"
"에드워드 앤드류 리처드 루이스 웨식스 왕자께서 영국 시간으로 오늘 아침 10시, 런던에서 가장 큰 음반숍에서 네드 시런의 앨범을 직접 구매했다는군요.
"……."
"아, 여기 좋은 노래라서 구매하러 왔다라는 인터뷰 내용이 있군요."
"……그러니까 영국인들이 일거수일투족 관심을 가지는 왕실의 왕자가, 그것도 계승 서열 7위의 왕자가 네드의 앨범을 샀다는 거죠? 기자까지 대동해서?"
"제대로 보신 게 맞습니다."
진호는 다시 눈을 끔뻑였다.
"그러면 3살짜리 어린아이부터 90세 노인까지 네드 시런을 알게 된 거네요?"
네드 시런이 제아무리 빌보드를 주름잡는 가수라지만, 10대 이하의 어린이와 50대 이상의 중장년 노년층들도 안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감성이 다르기에 듣는 음악의 장르도 다르기 때문이다.
"공동 작곡가이자 공동 제작자인 진호 씨까지 알려졌다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여기 영국 언론과 음악 관련 종사자들이 네드 시런의 앨범에 대해 파헤치며 진호 씨를 언급하고 있다는군요."
그리고 메일의 마지막 내용은에 드워드 왕자가 쉬런 락, 네드 시런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예술 자문 회사로 향했다는 거였다.
진호는 볼을 긁적였다.
"빵 한 번 만들어 준 것치고는 너무 과한 선물을 받았네요."
네드 시런은 진호와 친구라는 이유로 엄청난 이슈몰이를 했다.
'밥 사라고 해야겠다.'
그리고 웨식스의 주방에 몇 개의 레시피를 보내야 할 듯싶었다.
"음…… 최 실장님을 깨워야겠죠?"
그렇지 않아도 프랑스에서 만든 이슈 때문에 인천 공항의 입국 게이트가 시끄러워질 예정이었다. 때문에 착륙을 하기 전 간단한 메이크업을 받기로 했는데, 이젠 그걸로 모자랐다.
풀 메이크업이 필요했다.
"전 기자 회견을 준비하겠습니다. 아예 그 편이 낫겠군요."
"……최 실장님-!"
오직 그들밖에 없던 퍼스트 클래스가 부산해지기 시작했다.
* * *
짝짝짝짝짝!
팀 이진호의 모든 직원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진호를 향해 일어나 박수를 쳐 줬다.
"수고했어!"
"OST 다시 1위부터 줄 세우기 축하합니다!"
"캬! 알아서 다 하는 내 연예인! 잘한다!"
움찔몸을 굳혔던 진호는 이내 양팔을 번쩍 들며 그에 호응해 주었고, 박수 소리는 더욱 커졌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였다.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기 소리에 직원들은 다시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힘내라는 제스처를 취한 진호는 휴게실로 향했다. 국산 캔 커피의 달짝지근한 맛이 너무도 그리웠기 때문이다.
"음?"
"……쌤!"
"축하드려요, 쌤! 이번에도 사고 치셨다면서요!"
휴게실 안에 있던 팀 이진호 소속 모델 세 명이 환하게 웃었다. 함께 파리에 갔던 이들 중 일본 국적의 모델들이다.
진호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일본에 넘어간 거 아니었어?"
파리 패션위크 이후 일본에서의 스케줄이 폭발한 그들이다.
"장 실장님이 고급화 전략을 취한다던데요?"
"그래도 열심히 일하고 왔습니다."
진호는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는 셋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당 페이는?"
"엔화로 50만 엔이요!"
"저희 셋 모두요! 중국에 있는 릴리도 그 정도 수준이에요!"
한화로 치면 600만 원이 넘는 돈이었다.
"워후, 그 정도면 거의 상위 모델 대우잖아. 축하한다. 수고했어."
"이제부터 시작인데요, 뭘."
쑥스러워 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그래. 이제부터 시작이지. 그래도 너희들이 다른 친구들을 잘 이끌어 줘. 방송에 출연하면 자주 언급하고."
"옙!"
"당연하죠!"
고개를 끄덕인 진호는 냉장고에서 캔 커피를 꺼내 들고 휴게실을 나서 모델들의 연습실로 향했다.
"원투! 원투! 원투!"
"그게 아니야! 스즈키! 똑바로 해!"
투명한 문을 통해 안을 본 진호는 땀에 흠뻑 젖었는데도 이를 악 물고 워킹 연습을 하는 모델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자극제가 된 것 같네.'
마치 다음 패션위크에서는 사람은 나라는 듯 전의를 불태우는 모습은 정말 보기 좋았다.
옅게 웃은 진호는 캔 커피를 입에 가져가며 몸을 돌렸다.
우우웅!
"응? 여 피디님이시네?"
'리얼, 정글에 가다'의 여정호 피디였다.
진호는 피식 웃었다.
"네, 피디님. 정글 가자고요?"
-그렇지! 진호 너도 가고 싶었구나! 그래, 요새 많이 바빴지?
살살 달래는 모습이 누군가를 연상시키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진호는 속지 않았다.
"이번엔 제대로 마을을 만들어보자는 거겠죠?"
-그렇지! ……아, 아니? 이번엔 진짜 힐링이야. 자원이 넘치는 무인도에서 하고 싶은 거 다해. 도구도 다 가져가! 모기도 없는 탁 트인 에메랄드빛 바닷가! 키야-! 넘치는 해산물! 으아-!
움찔!
"……워. 순간 혹했네요."
약 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이분도 나 피디님 못지않게 약을 잘 쳤지.'
-혹한 김에 도장도 찍자.
"패션위크 때문에 스케줄을 좀 미뤄 놔서요. 지금 당장은 어려워요."
-너 바쁜 거 뻔히 아는데 설마 지금 가자는 거겠니. 드라마 이제 3화 분량만 촬영하면 되지? 그거 끝나면 가자.
진호는 다시 몸을 굳혔다. 이번에도 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는 말은 무조건 그 속내를 의심하며 들어야 하는 사람들이 나연석 피디와 여정호 피디였다.
"음. 생각해 볼게요."
-그래. 난 무조건 진호 네 편인거 알지? 출연자 속일 생각만 하는 연석이 형 따위와는 다른 사람이야, 내가.
순간 터질 뻔한 웃음을 겨우 누른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진짜 진지하게 생각해 볼게요. 들어가세요."
-그래, 파이팅!
전화를 끊은 진호는 고개를 저으며 캔 커피를 입에 가져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시지는 못했다.
우우웅!
"어디까지 먹힐까 피디님이시네."
진호의 입에서 다시 실소가 튀어나왔다.
의외로 나연석 피디는 조용했다.
이런 이슈가 있으면 언제든 어디 든지 가자고 하던 그가 이번만큼 조용했다.
굉장히 불길하게 말이다.
"뭘까……."
달리는 차 안, 운전대를 잡은 진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 말도 하지 않기에 더 불길한 존재가 나연석이란 인물이었다. 보조석에 앉은 재준이 코웃음을 쳤다.
"뭐겠어. 널 낚아채기 위해서 설계하는 중이겠지. 네가 한두 번 속았냐?"
"……역시 그런 거겠지?"
정신이 바짝 들었다.
비록 서로 간의 합이 잘 맞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속는 건 싫었다.
"……끄으으-!"
드디어 영화 '그때 그 시절'의 모든 촬영을 마쳤다.
하루를 바쁘게 했던 스케줄 중 하나가 완전히 사라지자 진호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시원섭섭했다.
만약 다른 배우들의 사정으로 뒤 풀이가 미뤄지지 않았다면, 촬영이 종료된 오늘 거하게 취했을지도 몰랐다.
"수고했다."
"잘되겠지?"
"그 배우들 데려다 놓고 안 되면 그게 더 문제 아닐까?"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윤식에 김정우, 천만 배우인 우해진에 설민구,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연기파 배우들이 참여한 작품이다.
정말 막장으로 편집하지 않는 이상 성공은 보장되었다고 봐야 했다.
'이번에도 천만 배우에 지분 좀 넣을 수 있으려나.'
주연으로서 천만 명을 동원해야 정말 천만 배우라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기대가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 저기다."
"너도 참 너다. 직원들이 사다 줄 텐데 왜 직접 사려는 거야?"
"내가 쓸 건데 내가 직접 확인해보고 사야지."
그 말이 맞다는 듯 재준이 입을 다물자 진호는 근처의 공용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킨 후 목적지인 화구 판매점으로 향했다.
딸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물감의 독특한 냄새가 진호의 콧속을 강하게 파고들었다.
"어? 헉!"
카운터에 있던 여성이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카메라를 찾는 듯했다.
"안녕하세요."
"아, 네네."
"유화 물감이 어디 있는지 물어도 될까요?"
"아, 예. 저쪽……아, 아니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괜찮아요. 그냥 알려 주시기만 하면 돼요."
굉장히 신중하게 고를 생각이었기에 옆에 누군가 있으면 오히려 방해였다. 아쉬워한 카운터의 여성이 가리킨 곳으로 걸음을 옮긴 진호는 눈을 빛냈다.
'와, 이 색깔들 봐.'
[스킬: 참 쉽죠?]의 영향 때문인지 온갖 물감들이 가득한 이 공간이 마치 천국처럼 느껴졌다.
"야, 나 방송 켠다."
"어."
대중 손을 저은 진호는 샘플로 쓰는 물감들을 짜고 둥개며 색감을 확인해 갔다.
"진호야?"
"응?"
시끄럽게 떠드는 재준이 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였다. 그것도 아주 익숙한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린 진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쪽을 보는 사내와 마찬가지로 놀라고 말았다.
"……레오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