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8권 25화
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올수록 웨식스의 주방은 조금씩 바빠졌다.
"87. 7도에서 2분 17초 동안 시계 반대방향으로 22 바퀴."
"87. 7도에서 2분 17초 동안 시계 반대방향으로 22 바퀴."
디저트 파트의 파티쉐들이 진호의 선창에 복창을 하며 수첩에 오중주 치즈 스콘의 레시피를 적어 갔다. 진호는 오븐의 온도와 시간 까지 세밀히 알려 준 뒤에야 그들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다.
진호는 곧바로 연습에 들어가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슬쩍 물러나 주머니에서 수첩과 연필을 빼들었다.
줄이 없는 수첩에 곡선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오늘 메인은 어린 양고기 스테이크와 연어 스테이크인가 보네. 와, 연어 때깔 봐라. 밑간에 들어가는 건…… 오, 핑크 소금. 응? 저게 들어가? 저게 이 집 비법이구나!'
진호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왕실 비법이다. 심장이 거세게 될 수밖에 없었다.
"도둑질 중이십니까?"
흠칫!
"아, 아뇨? 주방을 그리고 있는데요? 보세요."
허락을 구하지 않고 남의 조리법을 훔쳐보는 건 무척이나 실례인 행동이다. 같은 주방의 소속원이라도 걸리면 죽빵을 맞아도 항변을 할 수 없는 행위.
진호는 볼을 들고 움직이는 한 사내가 그려진 수첩을 재빨리 보여 주었다.
"호오. 샐러드 파트의 조쉬군요."
아스터는 눈을 빛냈다. 크로키처럼 빠르게 그린 듯하지만, 인물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표정이나 행동 모두에서 역동감이 느껴졌다.
'그림에도 재주가 있을 줄이야…….'
"여기 다른 분들도 그렸어요."
아스터는 넘겨지는 수첩을 보곤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나 많은 인물을 그리다니…… 그것도 이렇게 세밀히.'
평범한 재능이 아니라고 봐야 했다.
"이 그림이 완성되면 보내 드릴 게요."
"……서, 설마 초상화가 아닌 겁니까?"
"에이. 이렇게 역동적이고 뜨거운 주방을 보고 초상화를 그릴 수는 없죠."
이미 색감과 구도를 정한 뒤였다.
"그래, 천재 파티쉐께서는 잘 훔치고 계십니까?"
나이가 지긋이 든 쉐프들이 능글 맞게 웃으며 다가왔다. 밑 준비가 모두 끝났기 때문에 잠시 쉬려는 것이었다.
진호는 이번엔 당당히 수첩을 보여 주었고, 그들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런 그들의 반응은 쉬고 있는 다른 쉐프들을 불러들였고, 곧 모든 쉐프들이 진호의 주위에 모였다.
"오오오!"
"와, 나다!"
사람들은 기뻐하고 좋아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인 듯 신기해하기도 했다.
"정말 우리들을 위해 그림을 그려 준다는 겁니까?"
총괄 주방장이 물었다.
"네. 제목은 웨식스의 주방……아, 실례일까요?"
모든 쉐프들이 총괄 주방장을 노려보았고, 흠칫한 그는 이내 따뜻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런 실력이라면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군요."
주방 구성원들에게 동기 부여를 해 줄 것이고, 긍지도 줄 터였다.
"그런데 그림에도 이렇게 조예가 깊을 줄은 몰랐습니다. 하늘이 불공평하다는 걸 오늘 다시금 깨닫게 됐습니다."
사람들은 맞다는 듯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고, 진호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하하."
총괄 주방장은 머리를 긁는 진호를 보며 눈을 빛냈다.
'사람이 참 착하군. 공주님께서 남자를 제대로 보셨어. 언제 이렇게 자라셨는지…….'
앨리스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모든 성장사를 옆에서 지켜본 총괄 주방장은 속으로 합격을 외쳤다. 그건 다른 쉐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웨식스의 모두가 반대를 해도 자신들만은 찬성을 하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혹 필요한 게 있습니까?"
"음. 저를 의식하지 말아주시는 거? 저기 저분처럼 어깨에 힘이 들어가시면 안돼요."
"……푸하핫!"
"으하핫!"
"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총괄 주방장은 사람들을 해산시켰고, 그들은 입가에 미소를 달며 각자의 파트로 복귀했다.
진호는 다시 레시피를 눈으로 훔치며 그림을 그렸다.
그런 그를 보며 아스터가 눈을 빛냈다.
"고맙습니다."
아스터는 진호가 알려 준 레시피가 적힌 수첩을 툭툭 두드렸다. 진호는 손을 저었다.
"뭘요. 레시피야 얼마든지 알려 드릴 수 있죠."
"그래도……."
레시피란 요리사의 근본이자 자산이다.
진호는 그걸 작은 망설임도 없이 공유해 주었다.
"괜찮아요. 한국에만 오시지 않으면 돼요."
"……허헛."
'세상엔 이런 사람도 있군.'
"그러면 저녁 식사 디저트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이 치즈 스콘을 내갈 생각입니까?"
"당연히 아니죠. 이건 여러분께 제 실력을 보여 드리기 위해 만든 거예요. 그러니 기대하셔도 좋을 거예요. 음…… 이름을 붙이자면 되새김이겠네요."
"되새김?"
아스터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진호는 그런 그를 보며 더욱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초대를 받아 왔으니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해 봐야지.'
* * *
오늘 웨식스 일가의 저녁 식사는 꽤 시끌벅적했다. 앨리스 루이스의 활기찬 친구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웃지 않았다.
"인상 펴요, 에드. 그러다 미움 받아요?"
금발의 중년 여성이 손등을 어루 만지자 에드워드는 혀를 찼다. 이 식당의 문을 힐끔힐끔 응시하는 보석 때문이었다.
'저렇게 예쁘게 꾸미다니! 파티나 연회를 제외하면 언제나…… 큭!'
"디저트를 들여 주게."
움찔!
앨리스 루이스와 그의 친구들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그 모습에 에드워드의 억장은 다시 무너졌고, 그의 부인이자 앨리스의 모친인 소피아는 눈을 빛냈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하얀 조리사 복장을 입은 진호가 카트를 끌고 들어왔다.
'어머나!'
'와!'
사람들은 조리사 복도 패션으로 만들어 버리는 진호를 보며 감탄을 토했지만, 진호는 테이블에 앉아 이쪽을 향해 손을 붕붕 흔들다가 친구에게 제지당하는 앨리스 루이스를 발견하곤 놀라야 했다.
'아, 이래서 날 파티쉐로 초대한 거였구나! 어쩐지…….'
이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에드워드의 못마땅해하던 반응조차도 말이다.
'하긴 딸이 아빠한테 남자를 초대해 달라고 하는데, 어떤 아빠가 좋아하겠어? 그것도 저렇게 예쁜 딸 이.'
가슴의 반을 드러낸 자주색 드레스를 입은 채 곱게 머리를 틀어 올려 잔털 하나 없는 새하얀 목선을 드러낸 그녀는 주관적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봐도 아름다웠다.
'그런데 왜 자기 집에서 저렇게 꾸미고 있는 거지? 약속 있나? 텐션도 높고…….'
이쪽을 보며 엉덩이를 들썩이는 게 약간 범상치 않았다.
'뭐, 나랑 상관없는 일이니까 신경 끄자.'
어차피 파티쉐로 초대받은 것도 있지만, 이 저택을 구경하고 웨식스의 조리 비법 중 일부를 훔쳐 배운 것만으로도 소기의 성과는 충분히 이뤘다고 봐야 했다.
"디저트를 오픈하겠습니다."
달그락!
진호는 카트를 덮을 만큼 큰 사각 뚜껑을 열었다.
"……."
사람들은 감탄을 터트리는 것조차 잊은 채 카트 위에 펼쳐진 작은 자연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작은 양들이 풀을 뜯는 풀잎 가득한 작은 동산 위에 올라간 한 그루의 귤나무와 동산 아래 고인 작은 연못, 그리고 그 속의 작은 물고기들.
마치 진짜 자연을 축소시켜 놓은 것 같은 생동감은 그들로 하여금 순간 자신들이 거대한 거인이 된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어머머!"
"너, 너무 예뻐!"
사람들은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건 왕자비이자, 백작 부인인 소피아도 마찬가지였다.
찰칵, 찰칵, 찰칵!
진호는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3시간 동안 공들인 보람이 있네. 참 쉽죠? 를 얻어서 다행이야.'
제아무리 [스킬: 태양 여왕의 황금손]이라고 하여도 참 쉽죠? 의 영향이 아니었다면 최소 5년 안에는 이런 예술 작품에 도전해 볼 수 없었을 터였다.
"이, 이 아름다운 디저트의 이름이 뭔가요?"
양 볼이 붉게 달아오른 앨리스가 외치듯 말하자 식탁엔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 남성을 제외한 모든 여성들의 눈이 음흉하게 빛났다.
'정말 디저트류를 좋아하나 보네.'
"되새김입니다, 루이스 씨."
"되새김…… 아!"
사람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름을 듣고 보니 정말 그래 보였다.
샐러드부터 시작해 물고기인 연어까지. 오늘 먹은 요리 전부가 눈 앞의 작품을 이루고 있었다. 여성들의 볼이 한껏 달아오르고 그 두 눈이 몽롱하게 풀렸다.
"디저트로 너무 많은 게 아닌가 싶군."
이젠 체리처럼 붉어진 딸의 얼굴을 본 에드워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젠 감정을 숨기지 않는 그를 보며 진호는 다 안다는 듯 옅게 웃었다.
"결코 과하다 생각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럼 나눠드리겠습니다. 처음은 푸딩 입니다."
"푸딩?"
진호는 나무칼을 들어 언덕 아래, 물고기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듯 한 연못을 6등분하였다.
"아……."
"아, 안돼."
여성들은 아름다운 디저트가 해체되는 걸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굴렸지만 진호는 무시했다. 아무리 보기 좋은 음식이라도 입에 들어가야지 음식으로써의 의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푸딩을 더 맛있게 드시려면 한 번 스푼을 뜰 때, 물고기를 한 마리씩만 담으시면 됩니다."
"……서, 설마?"
진호는 먹으면 안다는 듯 제스처를 취했고, 사람들은 얼른 디저트 용 스푼을 들어 푸딩을 작게 갈랐다.
"사과?"
"제가 먹은 건 딸기예요!"
입안에서 푸딩이 뭉개지는 순간, 은은한 바닐라 향과 함께 새콤한 과일의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다시 접시 위의 푸딩을 작게 갈라 입안으로 가져간 사람들은 경악하며 진호를 보았다.
진호는 물고기 한 마리마다 각기 다른 과일즙을 쓴 것이었다.
"어,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 거죠?"
손톱보다 작은 크기의 물고기, 아니 과즙이 입안에서 그 자신의 존재감을 뚜렷하게 드러냈다.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새콤하지만 결코 저급하지 않고, 오히려 너무도 고급스런 그런 맛.
이 자리에 부모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그대로 주저앉아 가슴속에서 끓고 있는 모든 탄성을 내질렀을 것이다.
친구들이 야하다고 말하는 그 탄성을 말이다.
아니, 진호의 목에 족쇄를 채웠을 터였다.
"비법입니다, 루이스 씨."
"아읏! 너, 너무해요!"
진호는 제발 알려 달라는 듯 간절해지는 그녀의 시선을 외면하며 다시 나무칼을 들었다.
"다음은 케이크입니다. 스펀지는 녹차 베이스고, 크림과 풀잎은 살구를 베이스로 한 화이트 초콜릿. 데코레이션인 양은 산양 젖을 베이스로 한 밀크 젤리입니다."
진호는 거침없이 동산에 칼질을 시작했고, 여성들은 다시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마지막은 동산의 꼭대기에 솟아 있던 귤나무의 귤이었다.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귤이 입 안으로 들어가 뭉개지자 그들은 그대로 얼어 버렸다.
"……하아."
"후아."
'와, 야해라.'
여성들 모두 마음이 무장해제된 듯 달뜬 표정을 지었다.
진호는 그때 보았던 앨리스의 야한 신음 같던 감탄사가 누구에게서 비롯된 것인지 알게 되었다.
'이, 이것도 위험하구나. 전력을 발휘하는 건 자제해야겠다.'
"은은하면서도 진하다는 상반된 감정이 이해될 줄이야....."
"귤과 초콜릿의 존재감이 오늘 뭘 먹었는지 잊게 만들고 있어요."
"이렇게 초콜릿을 먹었는데 거북 하지 않아. 산뜻해."
"변변치 않았습니다."
"변변치 않기는요! 저는 정말…… 정말!"
사람들이 앨리스의 입에 집중했다.
'어? 잠깐?'
진한 홍조에 두 눈이 풀린 앨리스를 본 진호는 순간 왜인지 불길해졌다. 그녀를 소리 없이 응원하는 그녀의 친구들과 백작 부인의 모습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졌다.
'에이, 아니지?'
그렇지만 남자인지라 기대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당신을 제 전속으로 고용하고 싶어요! 평생토록! 제 것이 되어 주세요!"
삐끗!
진호뿐만 아니라 식당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 몸을 휘청였다.
"……야, 이 바보야! 거기서 할 말은 그게 아니잖아!"
"아, 진짜!"
"하아, 진짜 얘를 어쩌지?"
백작 부인 소피아도 이마를 꾹꾹 누르며 반성했다.
딸의 연애에 너무 신경을 쓰지 않은 스스로를 말이다.
'하하, 역시.'
진호는 어리둥절해하는 앨리스를 보며 약간 아쉬워했다.
'쩝, 나도 도끼병은 어쩔 수 없구나.'
그러나 애초부터 그녀의 두 눈에 어려 있던 호감은 사랑과 먼 감정이었다. 입맛을 다신 진호는 에드워드를 보았다.
그의 얼굴은 태양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안심이 되시나요, 아버님.'
아버지란 것도 참 힘든 직업이다 싶었다.
진호와 눈이 마주친 그는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수습했다.
"허흠. 잘 먹었네. 아주 훌륭한, 아니 모차르트의 교향곡과 모네의 그림을 먹을 수 있다면 이럴까 싶을 정도였네."
"과찬이십니다."
"혹, 내일도 부탁할 수 있겠나?"
여성들의 눈이 번뜩였다.
그러나 진호는 정중히 거절했다.
"죄송합니다."
"왜죠!"
"그래요! 더 있으면 안 되나요?"
앨리스를 필두로 한 여성들이 다급히 묻자 진호는 은은히 웃었다.
"스케줄이 밀려 있어서 더 이상 시간을 낼 수가 없습니다."
당장 오늘 새벽 1시 비행기를 타야 했다.
"아아."
"큽!"
"그런가…… 아쉽군."
'얼굴은 전혀 아쉬워 보이지 않으신데요.'
"오늘 이런 진미를 맛보게 해 줘서 정말 고마웠네."
더 이상 말은 하지 않았지만, 대가는 제대로 치르겠다는 듯한 그의 표정에 진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맛있게 드셨다니 저도 만족합니다."
'내가 또 공짜는 거부하지 않지!'
진호는 그가 어떤 것을 해 줄지 미약하게 기대를 하며 더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다사다난했던 영국에서의 스케줄이 끝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