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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197화 (197/424)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8권 22화

네드 시런은 떨떠름한 기색을 보였지만, 결국 진호의 뜻을 따라 런던으로 향했다. 내셔널 갤러리가 런던에 있기 때문이었다.

'내셔널 갤러리에서는 화가 스킬을 1차 해금할 수 있지. 영국박물관에선 고고학자와 복원가 관련 스킬을 얻을 수 있고…….'

영국에서만 얻을 수 있는 스킬은 거의 예술 분야에 편중되어 있다. 진호는 그중 무얼 얻을까 하다가 결국 화가 스킬을 1차 해금하기로 했다. 다른 스킬들과 달리 화가 관련 스킬은 모든 해금 조건을 하루 안에 해금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써먹을 곳도 많고.'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부모님 초상화나 직원들 초상화, 특별한 날을 맞이한 팬들을 위한 선물이 있었다.

'아니, 팬들을 위한 선물은 패스 해야겠구나.'

팬 숫자가 150만 명을 넘겼다. 1 년 365일 내내 그려도 다 그릴 수가 없는 숫자였다.

'굿즈 디자인을 그려 볼까? 한정판으로? 아니면 사인회나 팬미팅에 오는 팬들만 한정으로 해서 초상화를 그려 줘도 되지.'

참가하는 팬에게 사진만 팬 사이트에 올려 달라고 하면 미리 그려 놓을 수 있었다.

"지노."

런던으로 향해 달리는 커다란 밴안, 월터가 굳은 얼굴로 말해 오자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미행이 붙었다. 사생 팬의 미행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은밀 했다.

"응? 뭐가?"

"파파라치가 따라붙은 것 같아요, 네드."

'파파라치치고는 좀…… 메마른 느낌이지만.'

추잡하거나 집요한 욕망이 아니라 CCTV가 사물을 보는 것처럼 무감정한 느낌이었다.

[스킬: 갓 오브 워]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거 분명 어디서 느껴 봤던 감각인데…… 아!'

정체를 알아차렸지만 그래서 더 의아해진 진호는 월터만 알도록 수신호를 보냈고, 화들짝 놀란 월터는 뒤를 보았다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도 의아해진 것이다. 그런 둘과 달리 네드와 매니저 존의 얼굴은 굳었다가 펴졌다. 생각해 보니 나쁜 짓을 하러 가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었다.

"빌어먹을 파파라치들. 대체 얼마나 찍어야 직성이 풀리려는지."

"음? 그냥 놔두면 알아서 사라지지 않아요?"

네드와 존이 무슨 헛소리냐며 진호를 보았다.

진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파파라치가 사진을 찍는다는 건 결국 네드의 사진이 귀해서라는 거잖아요."

"……아, 그건 아니야. 수십, 수백 만 장을 찍어도 만족하지 못하는 족속들이 파파라치야."

"특종을 노리니까요?"

네드와 존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네드 시런이 술에 취해 클럽에서 나왔을 때, 그의 앞에서 여자가 넘어진 적이 있었다. 네드 시런은 반사적으로 그걸 부축해 주었는데, 그날 수많은 삼류 일간지들이 '여자와 함께 클럽에서 나온 네드 시런'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덕분에 네드 시런은 스트레스의 해방구인 클럽에 한동안 가지 못했고, 넘어진 여성도 더 이상 부축해 줄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존의 설명에 진호는 안쓰럽다는 듯 네드를 보았고, 그는 이해 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너도 나와 같은 처지 아니야?"

"전혀요. 저에 대해 억측 기사를 냈다가는 엄청난 손해배상금을 물어야 하거든요."

"……그게 가능해?"

네드뿐만 아니라 그의 매니저 존도 화들짝 놀랐다.

진호는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수십억? 아니, 백만 유로? 천만 유로? 변호사 비용으로 내 모든 재산을 몰빵할 수 있다면 그 어떤 탐욕스런 자들이라도 꼬리를 말 수밖에 없죠."

"어……."

매니저 존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마냥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 언론을 적으로 만드는 게 무섭지 않은 거야?"

"그들도 사람인데, 모두가 저를 적개 할까요?"

"그건 맞는 말이지만…… 음."

매니저 존이나 네드는 생각에 잠겼고, 진호는 그런 그들을 보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하던 존중하려는 것이다.

차는 그렇게 달려 내셔널 갤러리에 도착했다.

웅성웅성.

내셔널 갤러리에는 입장을 하려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관광객부터 유모차를 미는 젊은 부부, 모던한 슈트를 차려입은 노인까지.

진호와 일행들은 그들 사이에 껴서 차례를 지켜 입장했다.

그렇게 입장을 한순간 진호의 몸에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아, 1차 해금했다.'

이 스킬의 1차 해금 조건은 아주 간단했다.

'영국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서 명화 감상하기'다.

'흐음. 이 주인공은 이런 감정을 느꼈구나.'

리셋라이프를 할 땐 텍스트로만 봤기에 깊이 공감할 수 없었던 주인공의 감정이 이제야 이해되었다.

그 순간 네드의 입이 트였다.

"여긴 렘브란트의 작품을 모아 놓은 곳이야. 그는……."

렘브란트가 누구인지, 그가 어떻게 살아오며 왜 이런 화풍을 가지게 됐는지 등 모네의 모든 것이 네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와, 의외네요. 네드가 이런 섹시 미를 가지고 있을 줄이야."

몽환적인 목소리 때문인지 귀에 쏙쏙 박혔다.

"……그거 편견이야."

"학창 시절에 인기 많았죠?"

"아니? 찌질이라고 질색하던데? 내가 인기를 얻기 시작한 건 기타 연주를 시작했을 때부터였어."

"아…… 미안해요."

"사과하지마. 추억 속의 내가 더 비참해지니까."

키득키득 웃은 둘은 다시 그림을 감상했고, 네드는 그림에 얽힌 이야기들을 말해 주며 혹여 심심할 수 있는 시간을 즐겁고 풍성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거장들의 그림들을 본 느낌이 어때?"

"똑같이 따라 그릴 수 있겠다?"

"……응?"

'아차차.'

"아, 아니에요."

진호는 속으로 혀를 찼다.

방금 전 똑같이 따라 그릴 수 있겠다고 말한 것도 거의 본능적으로 순화해서 말한 것이었다.

본심은 '이 정도 레벨의 그림은 시간만 주면 그릴 수 있겠는데?'였다.

'이 스킬의 주인공도 오만한 천재 스킬의 주인공처럼 오만하니까.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오만하지.'

최소한 [스킬: 오만한 천재]의 주인공은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같은 거장들의 실력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 스킬의 주인공은 제아무리 유명한 거장이라도 자신보다 못한 재능을 가졌다고 펌하하는 고약한 성격을 가진 존재였다.

'그래서 베드 엔딩을 맞이하지.'

새드 엔딩이 아닌 베드 엔딩. 리셋라이프에서 얼마 안 되는 베드 엔딩 중 하나가 이 주인공의 스토리다.

'그래도 신기하네.'

진호는 가까이에 있는 그림을 다시 보았다.

내셔널 갤러리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림에 대해서 터럭만큼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이해가 되었다.

이 작가가 왜 이런 색감으로 그림을 그렸고, 그걸 통해 어떤 마음을 투영하고 싶었는지, 그리고 네드 시런의 아버지가 왜 미술에 그렇게 광적으로 빠졌는지까지 말이다.

'그리고…….'

[스킬: 괴도 루팡]이 이게 진품인 지 아닌지를 읽어 내고, [스킬: 셜록의 후예] 이걸 얼마 만에 또 몇 번 붓칠을 하고 쉬었는지를 읽어 냈다.

'에브브.'

"진?"

"아…… 미안해요, 네드. 내가 생각을 오래했죠?"

"아냐. 그저 네가 미술적 감각이 있다는 것에 약간 놀랐을 뿐이야."

"하하. 감수성이 좋은 사람은 미술적 감각도 있다잖아요."

그러나 대부분 본능적으로 아주 단순하게 알아차릴 뿐이다. 감수성이라는 공통분모를 제외하면 미술 적 감각과 음악적 감각은 아예 다른 감각이니 말이다.

진호 자신이 여태 그렇게 생각해왔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스킬: 오만한 천재]와 [스킬: 위대한 언어]가 수많은 거장들의 작품들을 보며 수많은 음표들을 토 해 내고 있었다. 마치 극과 극은 통한다는 것처럼 머릿속에서 악상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전국 수석과 셜록의 후예 스킬의 기억력이 없었으면, 계속 악보만 그리고 있었을지도.'

"그건 맞는 말이네. 그래서 다음은 어딜……."

"네드."

"응?"

"우리 초상화 그려 볼래요? 내가 그려 줄게요."

아직 스킬을 온전히 얻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였다.

어서 스킬을 얻고 싶었다.

"……그림도 그릴 줄 알았어?"

'이제부터 잘 그릴 수 있는 거죠.'

"못 그리면 어때요. 이것도 재미인 거지. 공원에서 커피 한 잔 마시며 친구를 그려 주는 잠깐의 힐링, 좋잖아요."

네드 시런은 탄성을 토해 냈다.

"매일 반복되는 풍경에서 벗어날 수도 있고?"

"그렇죠."

네드 시런은 미소를 지었다.

왠지 생각만 해도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또 다시 영감이 폭발하고 있었다.

'길거리 화가의 짝사랑…….'

순간 떠오른 스토리가 머릿속에 비석의 글자처럼 새겨졌다.

네드 시런은 풀썩 웃고 말았다.

'넌 정말 뮤즈구나.'

"좋아! 초상화, 오랜만에 그려 보지 뭐. 존, 이 근처에 드로잉북을 파는 곳이……."

툭툭!

진호가 그의 팔을 두드리며 말을 끊었다. 그리고 관광용품 파는 곳을 가리켰다.

"저기서 팔더라고요. 드로잉북."

"……그건 또 언제 본 거야?"

'제가 본 게 아니라 셜록의 후예가 본 거예요.'

진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그는 스킬의 2차 해금 조건이자 스킬을 완전히 습득할 수 있는 조건인 '그림 그려 놀라게 하기'를 해금하기 위해 움직였다.

* * *

"……대체 네 눈에 비치는 나는 얼마나 착한 거야?"

내셔널 갤러리 근처 작은 공원의 벤치.

네드 시런은 진호가 10분 만에 슥삭슥삭 그린 초상화를 보곤 눈을 파르르 떨었다.

너무도 선하게 웃고 있어서 신성함마저 느껴지는 자신이 새하얀 드로잉북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왜인지 죄책감이 들었다.

'여태까지 너무 멋대로 살아온 건가?'

진호는 그런 그를 보며 옅게 웃었다.

몸속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얻었다.'

처음 [스킬: 위대한 언어]를 얻었을 때처럼 망막 안에 맺히는 풍광이 영감이 되어 폭발하고 있었다.

"보이는 대로 그린 것뿐이에요."

아니다.

진호는 보이는 그대로 그리고자 했지만, 손끝이 멋대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동안 봐 온 네드 시런의 모든 모습을 함축적으로 그렸다. 그의 말투, 그의 행동, 그의 음악까지 모든 걸 말이다.

거의 모든 스킬이 영향을 주었다.

"여기 커피 사 왔…… 뭐야, 이건!"

양손에 커피를 들고 오던 매니저 존이 드로잉북 속 네드 시런을 보곤 질겁했다.

"이게 나래요, 존."

"……정말 심각하게 말하는 건데 안과를 가 보는 게 어때, 지노?"

"아하하하하. 그래서 난 얼마나 그렸어요?"

겸연쩍어진 진호는 화제를 돌렸지만, 네드 시런은 슬그미니 드로잉북을 감췄다.

"아직 멀었어. 네 손이 너무 빠른 거야."

"음. 그럼 얼른 그려 주세요. 끝나면 작업하게."

"작업?"

"네드도 영감이 떠오르지 않나요?"

"……당연하지."

진호가 그려 준 자신의 초상화를 보자 스토리가 더 구체적으로 변했다.

'아마 이 초상화를 완성하면 더 구체적이 되겠지.'

네드 시런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펜을 들었고, 진호는 매니저 존을 보았다.

"존도 그려 드릴까요?"

"……이대로 서 있으면 되지?"

"그럼요. 월터와 최 실장님, 그리고 다른 분들은 존을 그린 다음 그려 드릴게요."

사람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 * *

네드 시런의 작업실에서 머릿속을 휘젓는 악상을 1차적으로 정리한 진호는 네드 시런의 부모님 집에서 식사를 하기 위해 움직였다.

아니, 움직이려고 했다.

우우웅!

건물을 나오자마자 다미앙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 다미앙 씨."

-진호 씨.

"네."

-대체 거기서 무슨 일을 한 겁니까?

"……음?"

진호는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오전에 있었던 일은 이미 모두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제가 또 무슨 사고를 쳤나요?"

-네. 엄청난 사고를 치셨습니다.

"하하…… 네?"

장난스럽게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이 너무 심각했다.

미간을 좁힌 진호는 곰곰이 생각 해 봤다.

"아뇨. 오늘은 얌전히 지냈는걸요."

-그런데 왜 윈저가 진호 씨에게 초대장을 보낸 겁니까?

"윈저는 술……자, 잠깐?"

되지도 않는 개그를 치려던 진호는 식겁했다.

"윈저요? 그 윈저? 영국 왕실?"

-예. 그 윈저입니다. 초대장을 보낸 가문은 웨식스지만.

입을 떡 벌린 진호는 옆을 보았다.

오전부터 자신들을 미행했던 검은색 슈트를 입은 남녀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스킬: 참 쉽죠?]

[이 간단한 걸 왜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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