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8권 20화
7. 영국에서
올드하고도 클래식한 새빨간 페라리 테스타로타가 전시되는 등 1980년대 파리의 길거리처럼 꾸며진 야외 쇼장에 쿵쿵쿵 격렬한 비트가 울린다.
"멋지군."
쇼가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앉은 아르노 베르베우는 주위를 둘러보며 놀라고 있었다.
1980년대를 나타내는 아이템을 하나씩 갖춘 관객들이 객석을 넘어 시야가 닿는 모든 곳에 몰려 있고, 기자들도 바글바글했다. 어림잡아도 5천 명은 되어 보였다.
"이런 광경을 보는 게 대체 얼마 만이지?"
이번 패션위크를 위해 파리를 찾은 모든 패션 종사자들이 이곳에 온 듯한 모습이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옛날엔 자주 봤던 풍경.
이쪽을 보며 놀라 엉덩이를 들썩 거리는 사람들의 모습 따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최소한 제가 LVMH에 들어온 이후로는 없었습니다, 아르노. 그래도 당신이 있기에 이 자리가 더 빛을 발하는 것 같군요. 아르노가 이렇게 산하 브랜드의 패션쇼에 오는 게 얼마 만이죠?"
아르노의 옆자리에 앉은 피에트로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마음에 없는 소리는 하는 게 아니라고 했을 텐데?"
"진심입니다."
"……흥. 그래도 큰일을 해줬어. 역시 자네를 그 자리에 앉힌 게 최고의 선택이었던 것 같군."
"모두 뮤즈 덕분입니다."
피에트로는 공을 진호에게 전가 했지만, 아르노는 콧방귀를 뀌었다.
"뮤즈의 영역과 자네의 영역은 달라."
"하하. 그렇게 말해 주시니 감사 합니다. 아, 시작됐군요."
"음? 호오."
런웨이에 진호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아르노는 눈을 가늘게 떴다.
"……흡입하고 있군."
시선이 강제적으로 진호가 걸친 옷에 고정되고 있었다. LVMH를 여기까지 키워 오며 산전수전 다 겪은 늙은 사업가의 눈이 말이다.
'이런 경험도 대체 얼마 만이지?'
기억상 아주 먼 옛날 어느 모델의 워킹을 본 이후로 처음이었던 것 같았다.
"흔들리지도 않는군."
아르노 자신과 눈이 마주쳤음에도 진호는 눈동자 하나 흔들리지 않고 턴을 했다.
"진에게 관객은 관객일 뿐이니까요. 그래도 무척이나 놀라고 또 기뻐하고 있을 겁니다. 아마 쇼가 끝나면 바로 전화를 해 올 겁니다."
그 말에 아르노의 입꼬리가 꿈틀 거렸다.
"큼. HU에서 경비 일체를 부담 하는 이유가 있었군."
LVMH 산하 6개 하이패션 브랜드 때문이 아니라도 진호는 빛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현장에서 직접 워킹을 보니 확실히 알 수가 있었다.
사적인 관계를 떠나 생각해도 절대 놓칠 수 없는 모델.
"지금은 왕처럼 대우받고 있습니다."
"자넨 뮤즈의 대변인인가?"
"친구입니다."
"……쯧. 브랜드 3개, 아니 4개를 더 붙여."
"음? 그렇게 되면 뮤즈에게 10개의 브랜드가 붙는 것입니다만?"
이는 LVMH라는 거대 그룹의 약 7분의 1이 진호를 메인 모델로 삼고 또 후원한다는 뜻이다.
"그만한 자격을 갖췄기 때문에 주는 것뿐이야. 그리고 왕처럼 대우라니, 진짜 왕도 아니고."
"……큽!"
만약 여기가 패션쇼장이 아니었다면, 피에트로는 체면도 잊은 채 바닥을 굴렀을 것이다.
"난 이만 일어나지."
"피날레까지 보지 않으시려는 겁니까? 진이 굉장히 서운해할 텐데요."
"……."
아르노가 됐던 엉덩이를 다시 붙이자 피에트로는 배를 잡으며 몸을 숙였다.
들썩들썩!
"쯧."
아르노는 억지로 런웨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 * *
LVMH 산하 6개 하이패션 브랜드의 쇼가 끝나고 아르노 베르베우와 저녁 식사를 한 진호는 영국으로 향했다.
모피리처드의 광고를 찍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성공리에 패션위크 데뷔를 마친 모델들은 한국으로 향했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모델 2위가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뮤즈."
"영향력이 아니라 돈을 많이 버는 모델이죠."
아르노가 뜬금없이 선물을 안겨 준 이후 포브스가 선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모델의 순위에 변동이 생겼다.
2위. 그것도 3위를 십억 원 단위의 격차로 따돌린 2위였다.
1위도 가시권 내에 있었다.
물론 이 내용은 아직 포브스에 명시되지 않았지만, 관계자들은 모두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게 그 말아니겠습니까?"
진호는 능글맞게 웃는 노인, 모피 리처드의 CEO 홀트를 보며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앨리스 씨가 보이지 않네요?"
"허헛. 하긴, 지니도 한참 이성에 관심이……."
"아뇨, 아뇨."
진호는 식겁하며 손을 저었다.
"임원이었잖아요."
진호는 모른 척 툭 던졌다.
"흠? 앨리스 루이스 양이 말입니까?"
"거봐요. CEO가 이렇게 이름을 기억하시잖아요."
앨리스 루이스는 당시 모피리처드를 대표해 심사위원이 됐다고 하지만, 일개 직원의 이름을 CEO가 기억할 리 없었다.
영국 가전제품 기업 1위, 가전제 품계의 국민기업이라 불리는 거대한 회사의 CEO라면 더더욱.
CEO 홀트는 아차하며 입맛을 다셨다.
"현재 학생 인턴직을 마치고 대학에 복귀했습니다."
진호는 뜨악했다.
"역시 고위 귀족이었나 보네요."
그렇지 않고는 고작 인턴 따위가 모피리처드를 대표해 심사위원이 될 순 없었다.
'루이스라는 성을 지닌 고위 귀족이 누가 있지?'
진호는 기억을 더듬다가 관두었다. 생각해 보니 영국 왕실의 성만 겨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CEO 홀트는 다시 아차 싶었다.
"이런…… 허헛. 역시 지니는 당해 내지 못하겠군요."
"당시 스튜디오에 경호원들이 많았기에 넘겨짚어 본 거예요."
"……호?"
"제 경호원이 PMC인 다인코프의 용병이었거든요."
"아, 기억나는군요. 노란색 셔츠가 참 귀여웠던 경호원이었죠. 오늘은 분홍색 셔츠군요. ……허헛.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민감한 이야기였다는 듯 급히 대화를 종료하려는 모습에 진호는 궁금증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든든한 말이군요."
고개를 끄덕인 CEO 홀트는 몸을 돌렸고, 그제야 스튜디오의 숨통이 트였다.
진호는 낯빛이 하얀 감독과 스태프들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시작하시죠!"
촬영은 밤새도록 진행되었다.
진호의 연기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광고는 한두 시간 안에 찍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새벽까지 촬영에 임한 진호는 몇 시간 자지 않고 일어나 호텔의 카페에 앉아 창밖으로 추적추적 내리는 아침 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놈의 영국은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리네."
곽종훈과 제과제빵의 천재인 세 아이들과 함께했던 영국 생활이 떠오르자 진호는 낭만적으로 내리는 비를 곱게 볼 수 없었다.
"기상 예보보다 노인의 아픈 무릎이 더 신뢰가 가는 곳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의 멋이 있어."
드르륵!
진호의 맞은편 의자에 네드 시런이 앉았다.
그가 올 것을 알고 있었던 진호는 기지개를 켰다.
"어흐으!"
"잠을 제대로 못 잔거야?"
"패션위크에 참가하기 위해서 촬영 스케줄을 타이트하게 잡았거든요."
"이야기는 들었어. 그 아르노 베르베우가 참석했다면서? 여기 영국까지 떠들썩하던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모르지만, 뭐……."
어깨를 으쓱인 진호는 눈에서 졸음을 몰아냈다.
"그보다 앨범은 좀 어때요? 발매일이 아직도 안 잡힌 걸 보면……."
"아, 오늘이야."
"네?"
"오늘이 발매일이라고. 서프라이즈?"
"……어, 음. …… 돌았어요?"
"그만큼 자신 있는 거지. 너와 나의 노래잖아."
"그거 굉장히 오해를 불러일으킬 말인데요……."
"푸흐흐흐흐."
"……부디 매니저 존의 병원비가 적게 나오기를."
네드 시런은 테이블을 치며 웃었고, 진호는 아파 오는 머리에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네드가 음악 프로그램에 같이 출연하자고 한 거군요."
그랬다. 진호가 네드 시런과 만난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호는 지금쯤 한국행 비행기를 탔을 것이다.
"응. 바쁜 널 미국으로 부를 순 없잖아."
"이런 상황이면 미국이나 영국이나 거기서 거긴데요……."
"시간 낭비를 할 순 없잖아. 서프라이즈는 타이밍이 재미인데."
맞다. 서프라이즈는 타이밍이 재미다.
이렇게 당하고 나니 자신의 서프라이즈에 놀랐던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가 되고 있는 게 약간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키고 있지만 말이다.
"어? 잠깐, 타이밍?"
고개를 모로 기울이던 진호는 기겁하며 네드 시런을 보았다.
"바, 발매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데요? 서, 설마 오늘 낮인 건 아니죠?"
"그럼. 당연히 낮은 아니지. 아침이야."
"……네?"
"음."
손목시계를 보는 네드 시런의 모습이 왜 이렇게 불안하게 느껴지는지 몰랐다.
"이제 2시간 남았네."
"9시?"
"응."
"그 시간이면 우리 그 프로그램 촬영 중이잖아요."
"그러니까. 30분 안에 이동해야지."
그제야 진호는 확신할 수 있었다.
"돌은 거 맞네."
"……푸하하하하하하!"
'아, 때릴까?'
주먹을 꽉 쥔 진호는 정말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 일 덕분에 진호 자신은 영국 언론, 아니 세계 언론에 또라이로 찍힐 확률이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진호와 네드 시런이 출연하는 음악 프로그램은 나이열의 드로잉북 처럼 음악과 토크를 동시에 진행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시청률도 드로잉북처럼 준수하게 나왔다.
다만 다른 점은 스튜디오가 아니라 길거리 공연 형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와, 여기가 그 옥스퍼드 대학교 구나."
세계 최고의 대학을 꼽을 때 꼭 상위권 안에 드는 명문 대학교는 대학이라기보다는 옛 영국의 어느 상류층 구역을 보는 것처럼 고풍 스런 건물들이 즐비했다.
"도서관가 보고 싶다. 교내 식당도."
천막을 쳐 간이로 만든 대기실로 들어서는 진호는 뒤를 따르는 월터에게 들으라는 듯 영어로 말했고, 안에서 화장을 받고 있던 네드 시런과 스태프들이 질겁하며 진호를 보았다.
"진, 네 학창 시절 성적은 어땠어?"
네드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당연히 올 A플러스였죠. 아, 외국 대학은 A가 최고라고 했지, 참. 그냥 올 A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너도 공부를 좋아하는 변태였구나. 아버지가 좋아하시겠네."
공부를 좋아하는 게 왜 변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반박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단어가 있었다.
"네드의 아버지요?"
"아버지가 여기서 미술을 가르치 시거든."
"와! 교수님이라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 옥스퍼드에서 가르치실 줄이야. 아, 그런데 교수직을 그만 두시고 회사를 운영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네드 시런은 그의 가족 중 유일한 예술인이 아니고, 또 개천에서 용 난 케이스도 아니다.
그의 아버지는 대학에서 뛰어난 미술 큐레이터이자 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교수였고, 어머니는 유명한 보석 세공사였다.
둘은 현재 쉬런 락이라는 예술 자문 회사를 운영 중이었다.
'미술과 보석 세공. 둘 다 관련 스킬이 있는데…… 흠.'
"가르치는 걸 좋아하시다 보니 다시 복직하셨어. 물론, 파트 타임이지만."
"음, 취미 삼아서 하시는 거예요?"
"그런 게 없잖아 있지."
진호는 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런 훌륭한 아버님을 보며 자란 사람이 왜 공부를 좋아하는 걸 보고 변태라고 해요?"
"그럼 정상일까? 언제나 공부만 생각한다는 게?"
"네드도 만날 음악만 생각하잖아요."
"그러니까 나도 변태지."
그렇다면 할 말은 없었다.
"……아, 당연한 말이겠지만 사람들이 많이 몰렸더라고요."
"그래? 오늘도 노래할 기분이 나겠는데?"
"시작 3분 전입니다! 준비해 주세요."
천막 입구에서 있는 스태프의 말에 네드 시런의 스태프들이 다급히 그의 화장을 마무리했다.
"미스터 시런! 이제 올라가야 합니다!"
"그럼 무대에서 봐."
"넵."
그렇게 네드 시런이 천막을 나서 고 몇 초의 시간이 흐르자 진호는 다급히 귀를 막았다.
"꺄아아아아아악!"
"와아아아아아악!"
귀와 몸이 터져 버릴 것 같은 함성이었다.
"와우."
"꼭 네가 한국이나 중국에서 공연할 때 함성 같다, 그치?"
이 스케줄을 위해서 영국으로 넘어온 최 실장의 말에 진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곧 유럽에서도 이런 함성을 들을 수 있겠죠."
'그 이후에는 빌보드.'
네드 시런과 공동작업을 하면서 UK 차트와 빌보드에 한 발 걸치게 됐다.
동양인에게는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네버랜드, UK와 빌보드를 휘저을 날도 이제 멀지 않았다.
'물론 레오 형의 더 원이 먼저 UK와 빌보드를 휘저어서 최초라는 타이틀은 놓쳤지만…….'
최초의 1위 타이틀은 어쩔 수 없이 더 원에게 넘겨줬지만, 그 외의 타이틀은 모두 독식해 볼 참이었다.
그리고 오늘 출연할 이 프로그램은 그 긴 여정의 첫 발걸음이 될 터였다.
"미스터 리! 갈 시간입니다!"
"……그럼 다녀올게요."
"그래, 파이팅!"
진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