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8권 19화
일곱명의 모델들은 입국을 한 순간부터 긴장을 했다.
배경으로 들어온 모델들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빤히 알고 있기에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오! 진!"
스니커즈를 신었음에도 웬만한 남성보다 더 큰 장신의 늘씬한 여성 모델이 운동복을 입은 채 다가 와 진호의 한쪽 볼에 입을 맞췄다. 진호도 그녀의 볼에 입을 맞췄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공항이었음에도 그녀나 진호는 거침이 없었다.
"오랜만이야, 케이시. 이젠 너도 파리의 단골이 됐네."
4대 패션위크는 한 번 참가했다고 해서 계속 참가할 수 있을 만큼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세계 정상의 모델이라도 쇼를 앞두고 관리를 잘못한 순간 영원히 퇴출 되고 마는 냉혹하고도 냉정한 곳이다.
"이젠 나도 그럴 레벨이 됐다는 말씀!"
"하하. 축하해. 이제부터 날아오르는 일만 남았네."
"고마워! …….흠. 그런데 재들이 걔들이야?"
일곱 모델들은 마치 바비 인형처럼 생긴 여성이 푸른 눈을 마주쳐 오자 이를 악물며 억지로 가슴을 폈다. 무심한 푸른 눈이 어깨를 찍어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각오는 했지만, 막상 닥쳐 보니 상상을 초월하는 압박이 전해져 왔다.
차라리 경멸이라도 했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마치 무기질을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문제는 그들을 그토록 압박하는 상대가 겨우 한 명이라는 것이었다. RPG게임으로 치자면, 던전 초입에서 처음 만난 몬스터 한 마리에게 압도당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자 눈에 더욱 힘을 주었다.
"……호오. 기본은 됐는데?"
"당연하지. 누가 선별한 건데."
"어? 설마 네가 선별한 거야?"
"팀과 마리나의 쇼인데, 내가 허투루 할까. 다미앙 씨도 함께 골랐어."
"아, 그래?"
순간 일곱 모델은 흔들렸다. 케이시라 불린 여성 모델이 사방으로 내뿜던 아우라를 거둬들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뭐지? 뭔데?'
"더럽도록 깐깐한 너와 다미앙 디렉터가 선별했다면 기본은 갖췄다는 소리네. 하긴 네가 누군데 아무나 데려오겠어. 패션이 시작된 도시에 온 걸 환영해, 친구들! 뒤풀이 때 보자고!"
모델들은 어리벙벙한 눈으로 멀어지는 여성 모델을 바라보다가 진호를 응시했다. 변화가 너무 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진호는 슬그미니 굳은 표정을 푸는 그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너무 좋아하지 않는 게 좋을걸."
"하지만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은……자, 잠깐?"
뭔가를 알아차린 몇몇 모델들은 사색이 되었다.
"응. 방금 말 때문이라도 배경으로 들어왔다는 소리는 듣지 않겠지만, 대신 실력을 갖춘 경쟁자라는 걸 인식시켰으니까. 알지? 경쟁자는?"
"그런 거지.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잘해 봐. 아, 케이시 쟤 입 엄청 가볍다. 저 봐, 벌써부터 어딘가로 전화하고 있잖아."
"……쌤-!"
"아악! 미치겠네!"
차라리 실력 없는 주제에 배경으로 들어왔다는 프레임이 씌워지는 게 더 나은 상황이 되어 버렸다. 물론 그런 프레임은 절대 싫지만 말이다.
진호는 키득키득 웃으며 공항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패션위크 기간이라서 그런지 파리 곳곳엔 패셔너블한 사람들이 넘쳐 났다. 개중엔 일반인, 아니 패션에 자신 있는 사람들조차 이해하기 힘든 유니크함으로 온몸을 치장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터트릴 만큼 옷을 잘 차려입은 사람들뿐이었다.
그런 패션 피플들은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몸에 걸친 아이템 중 하나를 꼭 복고풍으로 맞추었다.
"오, 진! 나의 친구, 나의 뮤즈."
"인사가 너무 과해요, 피에트로."
크리스찬 디올의 본사 CEO룸, 끌어안은 둘은 서로의 양 볼에 네 번의 쪽 소리를 내며 격한 인사를 나눴다.
그 후 한 발 물러선 피에트로는 진호의 얼굴과 전신을 살폈다.
"흠. 아직 스탠바이에 들어가지 않았군요."
진호는 쇼에서기 위해 파리에 입국을 하여 숙소에 짐을 푼 순간 부터 무척이나 예민하고 날카로워진다.
"백스테이지까지 인솔해야 할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아, 덕분에 좋은 분들과 가족이 될 수 있었습니다. 좋은 보이차를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피에트로."
저우양의 집에 들를 때 들고 갔던 60년 된 보이차는 피에트로를 통해 구한 것이었다.
"하하, 아닙니다. 진의 부탁이라면 그 이상의 것이라도 구해 드려야죠. 전 그냥 제게 들어오는 뇌물 중 하나를 마침 중국에 출장 가는 직원에게 들려 보낸 것뿐입니다."
피에트로는 그 선물을 통해 진호가 누구와 연결이 되었는지를 아직 모르고 있었다. 저우지엔의 진정한 정체는 진호도 모르고 있지만 말이다.
진호는 손을 젓는 피에트로를 향해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고, 이런 이야기 말고도 할 이야기가 많은 피에트로는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그 후엔, 모델들을 백스테이지에 들여보낸 후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이겨 내든 도망을 치든 그 아이들의 몫인 거죠."
피에트로는 흡족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사자라면 제 자식을 절벽 아래로 떨어트려야죠."
"세계라는 무대는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으며 잔류할 수 있는 곳이 아니잖아요."
"하하하. 역시 진은 그대로군요. 아,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친구에게 자리를 권하지 않았군요. 어서 앉으시죠."
진호는 피에트로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음료를 시킨 피에트로는 진호의 맞은편에 앉으며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진."
단숨에 그가 말하고자 하는 걸 알아차린 진호는 급히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모두 팀과 마리나가 준비되었던 것뿐이죠. 제가 한 건 없어요."
"그러나 저희 디올이 당신에게 큰 빚을 졌다는 건 엄연한 사실입니다."
유행. 그것은 제아무리 크리스찬 디올이라도 힘든 일이다.
세상의 패션을 선도 하는 게 하이 패션 브랜드라지만, 모든 사람들의 입맛을 맞출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파리를 돌아다니는 패션 피플 가운데 복고풍 아이템 하나 가지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그 모습은 피에트로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했다.
크리스찬 디올이 드디어 저 샤넬, 구찌, 프라다처럼 유행을 창조해 냈다.
훗날 LVMH 그룹의 CEO 자리를 노리는 피에트로에겐 그 무엇 과도 바꿀 수 없는 광경이자, 그 무엇보다 값진 선물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진호가 팀 존스와 마리나를 한국에 초대했기 때문이었다.
"끄응. 계속 그러시면 전부 담스러워서라도 일어날 수밖에 없어요, 피에트로."
"하핫.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게 둘 순 없죠."
피에트로는 이 빚을 마음에 각인 시키며 화제를 돌렸다.
"티오를 받은 모델 중에 중국인도 있더군요. 설마 의도한 겁니까?"
"아."
진호는 피식 웃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우연이었기 때문이다.
다섯 자리를 채우고 남았던 2개의 티오는 중국인으로 채워졌다.
팀 이진호 연습생 2기가 성공리에 데뷔를 마치며 모은 3기 연습생과 HU 에이전시 아시아 총괄지사, JH 엔터테인먼트에서 치열한 오디션을 통해 선별했는데, 우연히도 둘 모두 중국인이었다.
PJY가 슬그미니 모델들을 들이밀었지만, 모두 자격 미달이라서 이 무리에 들어오진 못했다.
이런 진호의 설명에 피에트로는 웃고 말았다.
"정말 우연이지만, 아주 멋진 우연이군요. 중국에서 큰 이슈가 되겠습니다. 아, 몰랐다고는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이라면 몰랐어도 곧 알아차렸을 테니까요. 아닙니까?"
"……이런."
피에트로의 말대로다.
양국 패션계에서 자존심 싸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처음은 팀 이진호 소속의 연습생 1기인 일본인 모델들의 인지도를 키우기 위해 일본에 언론 플레이를 했던 것이다.
4대 패션 위크에 자국 모델이 서는 경험이 적은 일본 패션계는 당연히 난리가 났다.
마치 일본 국가대표 축구팀이 월드컵 4강에 진출한 것 같은 열풍이 불었다. 물론 패션계에 국한된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떠들썩했다.
'어떤 신문사에서는 이젠 중국도 한 수 아래라는 자극적인 기사도 냈지. 그러다 중국인 모델들이 합류한 순간…….'
중국 언론이 '역시 중국이 최고다'라는 기사 폭격을 쏟아 냈다.
그 순간 중국과 일본, 양국의 패션계에 자존심 싸움이 붙어 버렸다.
"저와 함께한 아이들 말고도 중국, 일본 소속 모델들이 4대 패션 위크 곳곳에 참가했을 텐데, 대체 왜……."
"HU 에이전시 본사 임원이 되고 싶어 진 당신이라는 끈을 꽉 잡은 아시아 총괄지사장과 광전총국의 기관장 웨이양 때문이죠.'
진호가 모를 사실을 알고 있는 피에트로는 침묵을 하기로 했고, 진호는 골치 아프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후우. 뭐 덕분에 애들 홍보는 제대로 되고 있는 상태죠."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들어온 물이지만, 팀 이진호와 JH엔터테인먼트, HU 에이전시 아시아 총괄지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력을 다해 홍보하는 중이었다.
"하하핫. 그렇습니까? 한국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진호는 다시 실소를 터트렸다.
"마치 다섯 살 꼬맹이들의 다툼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어른의 시선이 랄까요?"
진호 자신을 포함해 한국인 모델 이 4명이다.
국뽕 한 사발을 거하게 마신 한국 패션계는 그저 조용히 '이진호, 이번에도 세계의 톱에 서다'나 '후배를 이끌어 주는 선배의 귀감' 같은 제목의 기사만 내놓은 상태였다.
"하하하하핫! 멋지군요. 이러다 국민 영웅이 되는 거 아닙니까? 저 브라질의 지엘 번천처럼 말이죠."
진호는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한국은 그러기엔 너무 잘 살거든요. 그리고……."
"그리고?"
"이런 게 아니라도 저라는 사람을 보다 많은 대중들에게 각인시키고 있는 중이니까요. 이렇게 한 발 한 발 밟아 가다 보면 언젠가 한국 하면 이진호가 떠오를 날이 오겠죠."
탁!
피에트로가 무릎을 쳤다.
"훌륭합니다. 아주 멋진 목표군요."
"……아무튼 피에트로나 팀이나 다미앙 씨 모두 저에게 무르세요. 이런 허황된 목표를 말하면 현실 부터 보라는 등, 응?"
"하하하하핫!"
피식 웃은 진호는 고개를 저었고, 그렇게 둘의 대화는 점점 깊어져 갔다.
* * *
진호와 일곱 모델들은 새벽부터 움직여 크리스찬 디올의 쇼장을 찾았다.
펄럭!
백스테이지에 들어서는 순간 기분 나쁜 침묵이 엄습해 왔다.
그와 동시에 어마어마한 압박감이 전신을 찍어 눌러 왔다.
마치 하얀 가면을 쓴 것처럼 무기질적인 시선으로 이쪽을 보는 동서양의 모델들의 모습은 일반인이 들어왔다면 단숨에 주저앉아 실례를 해 버릴 만큼 공포 그 자체였다.
'이것들 봐라?'
본디 백스테이지에서는 배경으로 손쉽게 자리를 차지한 애송이를 상대할 때 철저하게 무시를 해 버린다.
마치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런데 오늘은 마치 백스테이지의 룰을 어지럽히는 망나니를 대 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것도 좋아. 애들을 인정한다는 거니까. ……하지만.'
하지만, 이 자리에는 진호 자신이 있었다.
'나한테도 시비 거는 거 맞지?'
기분이 상한 진호는 존재감을 드러내려다 멈추었다. 등 뒤에서 가시같이 날카로운 존재감이 덮쳐 왔기 때문이었다.
"으음."
"흠."
근처의 모델들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진호의 뒤를 따르는 일곱 모델을 보았다.
슬쩍 뒤를 본 진호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가르쳐 준 적도 없는데, 아우라로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고 있었다. 비록 그 간격이 크지 않다 하더라도 영역 안으로 들어오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날을 세우고 있었다.
피식 웃은 진호는 발을 뗐다.
"호오-."
"흠. 주제 모를 애송이는 아니라는 건가?"
백스테이지 안에 있던 모델들의 눈빛이 변하기 시작했다. 호의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인정을 하는 듯했다.
진호는 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런 건 대체 언제 배운 거야?"
"저, 저희도 런웨이를 걸어 본 모델이라고요."
"서, 선생님 제자인데 이 정도는 기본으로 해야죠! 말 시키지 마요. 힘드니까!"
세계 최고의 모델인 이진호를 스승으로 두었다.
그의 등을 보고, 그의 발자취를 따르며, 그처럼 되고 싶었다.
그런 목표를 마음에 품었는데, 그렇게 지내 오다 겨우 진호의 등이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상황이 왔는데, 드디어 진호와 같은 쇼에 서게 됐는데 이 정도의 압박에 무릎을 꿇을 수는 없었다.
이런 그들의 마음은 진호에게 절절히 전해졌다.
"하핫, 그래?"
역시 재밌고, 왠지 뿌듯했다.
자신의 자리에 선 진호는 숨을 내뱉으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여기까지."
"윽."
"음."
순간 진호의 몸이 산처럼 커지는 환각이 주위 모델들을 덮쳤다.
반경 10미터 내의 모델들이 주춤 물러서며 재빨리 기세를 거둬들였다.
그러나 진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점점 존재감을 키워 갔다.
"지, 진정해, 진. 다 죽일 셈이야?"
진호의 옆자리에서 속옷만 입고 있던 여성 모델이 다급히 말했다. 진호는 크리스찬 디올의 메인 모델이고, 뮤즈며, 왕이지만 그와 동시에 런웨이에서 상대의 아우라를 지워 버릴 수 있는 위험한 모델이다.
모델은 성격이 나빠도 일할 수 있지만, 자신의 존재감을 피력할 수 없게 된다면 영원히 퇴출이니 만큼 진호는 결코 적으로 돌려선 안 되는 존재였다.
진호는 싱긋 웃으며 존재감을 거둬들였다.
"자격 갖춘 신입들에게 장난치는 건 여기까지 하자. 리허설 준비해야지."
"에휴."
그 모습은 일곱 모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게 선생님…….'
'이게 왕…….'
짜악-!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몰렸다.
그곳엔 팀 존스와 마리나가 있었다.
"언제까지 놀고 있을 셈이지?"
"놀고 싶으면 내 쇼에서 꺼져."
그 두 사람의 말에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단숨에 잡혔다.
콧방귀를 뀐 팀과 마리나는 진호에게 윙크를 하곤 돌아섰고, 스태프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리허설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