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8권 10화
미세 먼지로 뿌연 하늘 아래 매끄럽게 빠진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고, 세련된 패션으로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낸 사람들이 지나는 거리에서 딱 코너 하나를 돌았을 뿐이었다.
그 순간 타임워프를 하듯 1980년 도의 골목이 눈앞에 펼쳐졌다. 무엇을 찍는지 나팔바지를 입는 등 한껏 멋을 낸 사람들이 한곳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밀고 있고, 그 중앙에 1980년도와 현대를 동시에 사는 세 남자가 있었다.
그들 모두 이쪽을 보며 놀라고 있었다. 마치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을 보듯 말이다.
그건 엄청난 충격이었고, 팀 존스와 마리나 그라치아 치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디자인 노트를 꺼내 들었다.
영감이 폭발했기 때문이었다.
슥슥슥슥슥슥슥슥슥슥슥!
이십여 분 동안 정신없이 스케치 하던 손을 멈춘 그들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서로를 보았다.
"9월 패션위크. 함께하시죠. 아니면 무리해서라도 8월에 제 개인의 이름으로 컬렉션을 발표할 겁니다."
"……쯧. 좋아. 반씩 담당하기로."
팀 존스와 마리나는 악수를 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뜬 팀 존스는 촬영을 시작한 사람들을 보며 눈을 빛냈다. 영감을 준 고마운 사람들이니 그에 합당한 선물을 줘야 했다.
"팀. 마리나."
진호는 그들을 끌어안으며 그들의 볼에 뽀뽀를 했다.
사람들은 그 낯 뜨거운 인사에 화들짝 놀랐다.
진호는 둘을 이끌고 사람들을 소개시켜 주었다.
사람들은 팀 존스와 마리나의 정체에 다시 한번 놀라야 했다. 그리고 조심스러워했다. 크리스찬 디올은 '우리들의 1987'의 최대협찬사 중 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팀 존스가 나연석의 손을 덥썩 잡았다.
"감사합니다, 디렉터 나."
"네? 예?"
"스태프에게 복고풍의 옷을 입힌 건 모두 디렉터 나의 명령 때문이 있겠죠. 덕분에 올해와 내년 패션은 저희 디올이 선도할 수 있게 됐습니다."
팀 존스는 확신했다.
올해 9월 이후부터 내년까지는 다시 복고의 시대가 될 것이란 걸 말이다.
"그 감사의 의미로 모두에게 디올 자유 이용권을 드리고 싶은데, 디렉터 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예?"
나연석은 너무 빠른 영국식 영어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진호는 아니었다. 그는 재빨리 나연석의 옆구리를 찔렀다.
"디올 자유 이용권을 주고 싶대요. 여기 있는 분 모두에게. 초고가의 백이든 시계든 가격 상관 없이 아무거나 가져갈 수 있는!"
"……뭐어!"
이쪽을 향해 귀를 기울이던 제작진과 출연진은 모두 경악했다.
"어서 허락하세요. 어서!"
"으, 응!"
정신을 차린 나연석은 푸근히 웃으며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고, 팀 존스와 마리나는 흡족히 웃었다.
"그렇지!"
"와아-!"
"여보! 크리스챤 디올 백 가지고 싶은 거 있어?"
사람들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해서 방방 뛰었고, 팀 존스와 마리나는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진호를 보았다.
"오- 뮤즈. 나의 뮤즈."
"고마워, 뮤즈."
"제가 한 게 있나요. 영감의 신이 때마침 두 분을 찾은 것뿐이죠."
둘은 역시 진호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촬영이 끝나면 말해 주세요. 저흰 차에서 디자인을 마무리 하고 있겠습니다."
"더 안 보셔도 돼요?"
"이제부터는 저들이 저희를 의식 할 테니까요."
"……아, 그렇겠네요. 자연스럽지 않겠어요."
"바로 그겁니다."
진호의 어깨를 두드린 팀과 마리 나는 잰걸음으로 촬영장을 빠져나갔고, 나연석이 슬그미니 다가왔다.
"그런데 진호야."
사람들이 나연석의 뒤에서 '파이팅'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크흠. 그 자유 이용권 말이야……."
"아, 말 그대로 자유 이용권이에요. 놀이공원의 자유 이용권 같은."
"어, 그럼?"
"열 개든 스무 개든 상관없이 그냥 원하는 거 다 가져가시면 돼요. 그게 얼마든 저 두 분이 방금 디자인 한 것과 비교하면 해변의 모래 한 톨보다 못할 테니까요."
"……우아아아아악!"
"꺄아아악!"
"여보! 장모님 백 있으셔? 장인 어른 정장은!"
"엄마! 옷 사이즈가 어떻게 돼? 신발사이즈는?"
이젠 제어를 할 수 없을 만큼 날 뛰는 사람들을 보던 진호는 핸드폰을 들었다.
"네, 지점장님. 저 진호예요. 오늘 문 닫지 말아주세요. 팀과 마리나에게 자유 이용권을 받은 분들이 들를 예정이거든요. 상품들도 최대한 확보해 주시고요."
'우리들의 1987'의 스태프 숫자만 50명이 넘었다.
잘못하면 크리스챤 디올 매장 안에 있는 모든 물품이 동날 수도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진호는 다 죽어가는 팀과 마리나를 데리고 그들이 머무는 호텔 근처의 곰탕집으로 향했다.
"어흐으."
"후우."
둘은 땀을 뻘뻘 흘리며 국물을 연신 들이켰고, 그럴수록 둘의 눈은 점점 초점을 잡아 갔다.
진호는 그들이 터트리는 감탄사에 키득키득 웃었다.
'완전 한국 사람이네.'
텅!
둘은 깔끔하게 한 그릇을 비워냈다.
"크흐. 역시 한국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나라입니다, 진. 정말 이 국물 맛이 그리웠습니다."
"프랑스 요리에선 고작 육수로 쓰일 뼈 끓인 물을 여기까지 표현 해 내다니……. 한식은 섬세함이 남다르네."
둘은 휴지로 얼굴에 가득한 땀을 닦으며 기분 좋게 웃었다.
"휴. 이젠 저도 나이가 들었나 봅니다. 겨우 몇 시간 클럽에서 놀았다고 이렇게 힘이 드니 말입니다."
"팀, 지금 내 앞에서 나이를 들먹이는 거야?"
"풋. 그 먼 시간을 날아와 일을 한 것도 모자라 클럽에서 날을 샜는데, 힘들지 않은 게 이상하죠. 아직 늙으시려면 멀었어요."
어젯밤 둘과 함께 들린 클럽은 광란의 파티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둘의 입국 소식을 들은 모델들과 연예인들이 클럽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역시 뮤즈. 넌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적재적소에 할 줄 알아. 그래서 오늘 돌아볼 곳은 어디야? 뻔한 곳은 거부하겠어."
"원래 팀과 가려고 했던 곳이 민속촌이라고, 옛 한국을 볼 수 있는 관광지예요. 일단 거길 갈 거예요."
마리나의 눈이 호기심을 머금었다.
"옛 한국? 한복? 확실히 한복이 아름답기는 하지."
"모든 나라의 전통 의상 중 한복이 제일 아름답죠."
팀의 말에 마리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세계에서 차용하는 건 기모노지."
"그건 홍보."
"아, 그런 복잡한 이야기는 됐어, 팀. 여기까지 와서 일 이야기야?"
"아니, 마리나가 먼저 말을……."
"진, 한복 파는 곳으로 가 줘. 거기서 사 입어야겠어."
진호는 입을 떡 벌린 팀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마리나를 말로 이기려 했던 것 자체부터가 잘못된 일이었다.
화려하고도 예쁜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머리까지 틀어 올린 마리나와 청색 장포를 입은 팀은 이목을 끌어모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진호의 외모가 가장 큰 몫을 했지만 말이다.
일단 처음 본 것은 해 보거나 맛 봐야 직성이 풀리는 마리나는 민속촌에서 날아다녔다.
여름이 되며 다시 개장한 수박서리 코너에서 한복 치마를 휘날리며 수박을 서리하다가 잡혔는데, 영어를 다다다 쏟아 내며 알바생을 멘붕시키거나 관아를 찾아가 나쁜 사또를 곤장에 묶어 곤장을 때리는 등등.
이날 마리나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끄아. 개운하다."
"쿡쿡. 재밌게 노셨어요?"
"아주 멋진 하루였어, 진. 그러니 이제 인천 공항으로가 줘."
"……네?"
진호는 운전하는 것도 잊은 채 뒤를 보았다. 보조석에서 꾸벅꾸벅 졸던 팀도 식겁하며 뒤를 보았다. 그러나 마리나의 표정은 단호했다.
"인천 공항으로."
"마리나!"
"이 정도 쉬었으면 이제 돌아가야지. 난 치프잖아."
진호는 맑게 빛나는 그녀의 눈을 보니 더 이상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쉽네요."
마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제 오늘 경험한 게 너무 많아서 그래. 재료라는 본질은 같지만, 결과물은 확연히 다른 음식부터 시작해서 한복의 유려하고도 화려 하면서 절제된 라인. 늙은 나는 이 이상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하. 그런가요?"
'이번 패션위크. 기대해도 되겠네.'
한국에 대해 좋게 평가해 줘서 뿌듯하면서도 어떤 결과물이 나올 지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패션위크가 끝나면 다시 올 테니까 그땐 오늘 못다 한 것들을 경험시켜 줘."
"알았어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고마워, 뮤즈. 팀, 너는 어떻게 할 거야?"
"저 역시 가야죠."
"팀!"
팀 존스가 기어스턱을 잡은 진호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어제 들었잖아요. 이번 패션위크는 마리나와 저의 합작이에요."
"……정말 다들 제멋대로예요."
"하하핫!"
마리나도 웃음을 터트렸다.
픽 웃은 진호는 인천 공항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렇게 둘은 다시 파리로 떠났다.
* * *
'우리들의 1987' 제작진과 출연자들이 얻은 디올 자유 이용권은 엄청난 이슈를 끌었다.
제작진과 출연자들은 SNS를 통해 '통 큰 협찬사'라며 자랑을 했고, 사람들은 굉장히 부러워했다.
초롱초롱! 반짝반짝!
'그때 그 시절'의 촬영장을 찾은 진호는 쏟아지는 눈빛에 입맛을 다셨다. 사람들은 진호의 어깨 너머를 살폈다.
"가셨어요. 파리로 돌아가셨습니다. ……대신!"
아쉬워하려던 사람들이 눈을 빛냈고, 진호는 슬쩍 옆으로 비켜섰다. 정 실장과 박 대리가 커다란 박스들이 쌓인 손수레를 끌고 오고 있었다.
"디올 손수건과 스카프를 가져왔습니다!"
"…….오오오!"
"와아아!"
"역시 이래야 우리 진호지! 뭐해, 어서 가서 받지 않고!"
"진호야, 잘 쓸게!"
진호는 우르르 달려와 박스를 여는 사람들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이건 진호 자신이 주는 게 아니었다. 어젯밤 팀과 마리나가 파리로 떠나기 전 부탁한 일이었다. 영화 촬영장을 들르지 못해서 미안 하다는 의미로 말이다.
진호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둘은 재빨리 출국 게이트를 넘어 버렸다.
"뭘 이렇게 자주 오냐? 네 분량만 신경 써."
김정우가 투덜거리며 다가왔다.
"그러는 삼촌도 오늘 출연 분량 없는데 오셨잖아요."
"나야…… 인마, 너무 성실해도 못 써. 그 나이면 클럽도 다니고, 어? 왜 계속 공부를 하려고 해?"
"제 연기가 얼른 늘어야 삼촌이 미련 없이 은퇴하시니까?"
"이 자식이? 누굴 은퇴시키……."
"여기 있습니다! 삼촌 건 특별히 고심해서 골랐어요."
"……땡큐. 오, 예쁘다. 어울려?"
진호는 정장 앞주머니에 손수건을 행커치프처럼 꽂은 김정우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러곤 배우들을 찾아다니며 손수건과 스카프를 나눠 주었다.
사람들은 당연히 좋아했고, 진호는 그들이 원하면 사진도 찍었다. 그 후 대기실로 돌아온 진호는 경찰 제복을 입은 김윤식을 향해 박수를 쳤다.
"와, 진짜 사악하게 생기셨네요."
"……풋!"
"파하하하하!"
김윤식은 안기부 대공분실 최 처장 역할을 맡았다.
'그때 그 시절'의 최고 악당이었다.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리자 김윤식도 피식 웃어 버렸다.
"4일 전에 첫 분량 찍었다면서? 어땠어?"
진호는 쓸쓸히 웃었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방식이 좀 비겁하달까? 그랬죠.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행동이 이해되었고."
김윤식도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지."
"한 명이라도 더 깨우쳐 주길 바랐으니까."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고 키가 작은 배우 김우현이 다가왔다.
김우현은 신문에도 사진이 나올 만큼 민주화 운동의 최전방에 있던 인물이었다.
대기실이 잠시 조용해졌다.
"그때 한참 정권과 싸우던 내가 이렇게 경찰 총장이 됐으니 참……."
"난 어쩔 것 같소, 우형이 형?"
김윤식의 말에 김우현은 진저리를 쳤다.
"어라? 어디서 최고 나쁜 놈이 말하는 것 같은데? 아이쿠, 대마왕님. 여기 계셨군요!"
"……푸하하하핫!"
대기실에 있던 사람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촬영이 시작되자 그 누구도 웃지 않았다.
배우들은 모든 역량을 끄집어내며 열연을 펼쳤고, 오케이 사인은 쉽게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배우들은 불만 하나 내 보이지 않았다. 구경 온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였다.
"컷! 음……."
사람들은 감독의 입을 집중하기 보다 재촬영을 준비했다.
김윤식과 김우현 등 배우들은 모니터 앞에 몰려들었다.
'흠. 이 정도면…….'
'오늘 최고로 잘 나온 것 같은데?'
"진호, 넌 어때?"
김윤식이 묻자 배우들의 시선이 모였다.
몸짓의 디테일은 진호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고, 배우들은 조금이라도 더 훌륭한 연기를 하기 위해 기꺼이 진호에게 조언을 구했다. 뭔가 미묘하게 걸려서 오케이를 외치지 못한 감독도 진호를 보았다.
방금 찍은 분량이 다시 재생되는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진호가 '스톱'을 외쳤다.
"이 부분이요."
"나?"
진호가 가리킨 건 돌아서 공간을 빠져나가는 김윤식이었다.
"최 처장이 아니라 다른 인물 같지 않아요? 보폭과 어깨 흔들림이 최 처장과 완전히 달라요."
"……아! 그래, 맞아!"
감독과 배우들은 탄성을 터트렸고, 방금 전 돌아설 때 무슨 생각을 했나 되짚던 김윤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확실히 이땐 아무 생각이 없었네……. 감독님, 다시 가시죠."
"당연히 그래야죠. 자, 기자 역 배우들…… 벌써 앉아 계시네."
사람들은 실소를 터트렸고, 진호는 김윤식의 워킹을 봐주었다.
김윤식은 십여 분을 워킹하고 나서야 진호에게 오케이 사인을 받았다.
"……오케이 컷-! 최고야! 더 이상 안 찍어도 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후우."
사람들은 진이 모두 빠진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으며 한숨을 내쉬었고, 배우들은 고맙다는 듯, 수고했다는 듯 진호를 툭툭 두드렸다.
단역과 엑스트라들은 진호의 손을 잡으며 고마움을 표했다. 진호 때문에 연기의 디테일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고맙다."
"뭘요. 제가 여기서 배우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짜식."
진호의 머리를 헤집은 김윤식이 기지개를 켰다.
"술 한잔할까?"
"좋죠. ……안주는 못 먹지만."
"하핫! 너도 고생 많다. 우현이 형! 정우야! 해준아! 갈비 먹으러가자! 진호 안주 못 먹는다!
"……아, 진짜!"
"푸하하하핫!"
"크하하하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