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8권 8화
3. 우리들의 1987
스무 살의 청년, 마사토의 콧등을 타고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바둑판 위의 형세는 어지럽지 않았다. 일방적이었다. 진호의 새하얀 백돌이 마치 시리도록 날카로운 칼처럼 흑돌의 형세를 모두 잘라 먹고 있었다.
어딜 보아도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형세였다.
'이, 이건 대체?'
마사토는 불신이 가득한 눈으로 바둑판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는 진호를 보았다.
첫판엔 분명 마사토가 우세였다.
무려 7집 하고도 반집 차이로 이겼다.
그런데 두 번째 판에서 반집 차이로 따라 붙더니, 세 번째 판인 지금은 압도적으로 지고 있었다.
'두번째 대국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었다!'
베시시 웃는 그 미소에 속는 게 아니었다.
진호는 거대하고도 절망스런 포식자였다.
인솔자인 겐조 7단과 저우양이 어느새 다가와 진지한 눈으로 대국을 관전하고 있기에 더 비참하고 억울했다.
'이건 초단의 실력이 아냐!'
초단이 아니라 최소 5단은 될 법 한 실력이었다.
마사토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진호를 노려봤다.
"……졌습니다."
손등으로 눈가를 거칠게 훔친 마사토는 결국 돌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진호는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짝짝짝짝짝!
사람들은 환호성 대신 박수를 쳤다.
겐조 7단도 수고했다며 마사토의 어깨를 두드렸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그래, 너무 빨리 포기했구나."
"……네?"
겐조 7단이 진호를 응시했다.
"내가 몇 수 둬도 되겠나? 제자에게 끈기를 가르쳐 주고 싶군."
사람들은 깜짝 놀라 겐조 7단을 보았지만, 진호는 활짝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활로가 있는데 포기해 버린 마사토의 행동에 의아하던 참이었다. 마사토가 그 활로를 쫒아 돌을 계속 이어 갔다면, 결과는 어떻게 됐을지 몰랐다.
"네, 얼마든지요."
"그럼 실례하겠네."
"……아, 저걸?"
"완전히 망했는데."
사람들은 회의적이었지만, 겐조 7 단의 눈빛은 담담했다.
마사토가 앉았던 자리에 앉은 겐조 7단이 진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진호도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서로 인사가 끝나자 소매를 걷은 겐조 7단이 흑돌을 들어 진호의 영역 안에 내려놓았다.
탁!
진호의 미소가 짙어졌다.
살아날 가능성이 있는 활로 중 가장 공격적인 수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이미 상정 내의 수였다.
진호는 생각할 것 없다는 듯 바로 겐조 7단이 둔 흑돌의 옆에 백 돌을 붙였다.
탁!
그때부터 둘의 속기 바둑이 시작 되었다.
어느새 기원 내에서 소음이 사라졌다.
오늘 기원에 들린 모든 이들이 진호와 겐조 7단의 대국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러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누가 이기고 있는 거야?'
'글쎄?'
누군가의 우세를 따지기 힘들 만큼 복잡하게 엉켜 있는 형국이었다. 다만 알 수 있는 건 둘이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라는 것이었다.
마치 철천지원수처럼 서로를 난도질하는 상황이었다.
일찍이 포기했던 마사토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대국을 노려보았다.
탁!
흑돌을 둔 겐조 7단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 그 형국에서는 여기까지가 최고인 것 같군."
'응?'
일본어 능력자들이 통역해 준 말에 사람들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열 수 전에 시작했다면 아마 제가 졌을 거예요."
'잉?'
사람들은 급히 진호를 보았다.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는군."
"하핫.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했네. 오랜만에 즐거운 바둑을 뒀어. 역시 이 선생께서 수제자라 부를 만하군."
사람들이 경악해 진호를 보았다. 마사토도 마찬가지였다.
진호는 급히 손을 저었다.
"수제자라뇨. 그럴 만한 실력이 못 됩니다."
"이 선생에게 배우기 시작한 건 얼마나 되었나."
"……40일정도 됐죠? 아마."
대한 기원 내 사람들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
마사토는 경악하며 진호를 보았다.
"하하핫. 불세출의 천재였군."
웃으며 일어난 겐조 7단은 마사토의 어깨를 다시 두드렸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거라. 네가 아니라 네 상대의 모든 것을 훔치기 위해서라도. 너보다 더한 천재의 것을 훔쳐 너 역시 더한 천재가 되어라."
진호는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마사토는 이를 악물었다.
"……예!"
'졌다. 모든 면에서 졌다.'
실력부터 시작해 배경, 끈기, 처음 만난 겐조 7단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는 담력, 겸손함까지 모두 진호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마사토는 패배를 진정으로 받아 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왠지 분한 마음에 화장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상황이 끝나자 사람들은 해산했고, 진호는 바둑돌을 정리했다.
그런 그의 맞은편에 저우양이 앉았다.
"응? 한판 두시게요?"
"형님!"
"……네?"
"정말 실력과 인품에 반했습니다. 아우로 받아주십시오!"
"어……. 네?"
진호는 눈앞의 청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분명 진호 자신이 현지인처럼 말하는 중국어인데도 말이다.
저우양이 저돌적으로 들이대니 진호도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크. 역시 한국. 드라마의 수준이 다릅니다. 그래도 좀 아쉽습니다. 순수하게 바둑만 나오는 드라마였다면 본국에서도 볼 가능성이 높았을 텐데요."
"오, 중국도 바둑이 인기 많나 봐?"
"신분 상승의 수단 중 하나이자, 소위 있는 자들의 스포츠니까요. 중한, 중일, 삼국 대회가 열릴 땐 생방송으로 송신할 정도로 인기가 많습니다."
"그래?"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당 서열이 높은 어르신들도 바둑 지도를 받을 때는 꼬박꼬박 선생이라고 부르며 스승으로 대우할 정도입니다."
이 역시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렇구나……. 그런데 당 서열 높은 분들에게 어르신이라 칭하는 걸 보면 너도 그쪽이야?"
저우양은 흠칫 놀랐다가 이내 머리를 긁었다.
"하하, 예. 제 할아버지와 아버지 께서…….. 아, 그러고 보면 형님과 저도 완전히 남이라고는 볼 수 없겠네요. 웨이양 어르신과 제 할아버지가 같은 곳에 몸담고 계십니다."
'파벌은 좀 다르지만.'
진호는 웨이양이 사사로이 의손자로 부르는 인물이다.
서열로만 따진다면 저우양 자신의 조부가 당 서열이 높지만, 그렇다고 웨이양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아니, 무시했다가는 어마어마한 역풍이 불 수가 있었다.
'그분은…….'
저우양은 이 교우가 자신에게도, 자신의 조부와 아버지에게도, 또 웨이양에게도 좋은 일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와 웨이양 어르신이 의견을 합치게 되면?'
저우양은 속으로 전율했다.
'역시 그랬구나.'
일반적인 고위 공무원치고는 너무 좋은 곳에서 산다 싶었다. 그러나 웨이양은 웨이양 할아버지일 뿐이었다.
"오, 그래? 그럼 우린 한 식구인가?"
"……그 식구는 저하고만 하시죠. 당에 제 또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욕심쟁이네."
"크흠흠."
저우양은 헛기침을 하면서도 놀랐다.
'이 정도면 내가 누군지 알았을 텐데도 이리 태평하다니! 웨이양 어르신께서 주의해야 할 권력자 정도는 알려 주셨을 텐데!'
저우양은 진호가 권력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 너무 자신이 있기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라 판단했다.
이건 큰 착각이었지만, 그걸 모르는 저우양은 중국으로 돌아가면 자신의 할아버지께 할 말이 무척이나 많아 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뭔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복잡 해지다가 갑자기 존경이 가득 들어차는 저우양의 두 눈에 의문을 가지던 진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왠지 물으면 골치가 아파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다시 하던 이야기로 넘어와서, 바둑 이야기만 나오면 재미없잖아. 연애도 나오고, 삼각관계도 나와야 드라마답지."
"그건 맞습니다. 예쁜 여배우가 나오지 않으면 드라마를 보기 싫더라고요. 흐흐흐. 그런데 혹시……. 프로미스 세븐도 나오는 겁니까?"
"……여자 아이돌은?"
"사랑이죠."
진호는 왠지 저우양과 깊이 친해 질 수 있을 듯했다. 그건 저우양도 마찬가지였다.
"저……"
둘은 옆을 보았고, 저우양은 미간을 찌푸렸다.
마사토는 콧방귀를 뀌었다.
"너 보러 온 거 아니니까 신경 꺼."
"내 형님한테 다가오지마."
흠칫!
"……형님?"
"방금 형 동생 하기로 했어요."
마사토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완벽한 패배를 안겨 준 진호는 '괜찮으냐'라며 적이었던 이를 동정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으며 다시 한번 자신을 굴복시켰다. 외모까지 모든 면에서 본받을 만한 사람인데, 사사건건 참견하고 이죽거리는 저우양이 형으로 삼았다.
원래부터 친해지고 싶었지만, 저우양에게는 지기 싫었다.
"그럼 저도 동생을 하고 싶습니다."
표정이 오묘하게 굳어지기에 설마 했던 진호는 그대로 얼어 버렸다.
"형이라 부르게 해 주십시오."
"야!"
"형!"
"이자식이-! 내 형님이야!"
"좋은 건 나눠 쓰는 거다! 그리고 너에게는 너무 과분하신 분이다!"
"분이라니! 미쳤냐! 시끄러워-!"
"너나 시끄럽다!"
'이건 뭐 견원지간도 아니고 …….'
진호는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머리를 붙잡았다.
한 명은 중국어로 말하고, 한 명은 일본어로 말해서 더 머리가 아팠다.
* * *
"진호야."
"네……."
진호는 눈을 시퍼렇게 뜨는 최은수 작가의 모습에 어깨를 움츠렸다.
"진호야."
"네."
"예쁜 진호. 이렇게 스태프 먹을 쿠키까지 손수 만들어 주는 마음 씨 착한 진호야."
분명 칭찬이었지만, 온몸의 털이 곤두설 만큼 오싹해졌다.
'무, 무서워!'
"……."
"분명 근육 좀 빼라고 요구했을 텐데 왜 몸이 그대로니?"
'스킬 때문에요?'
[스킬: 사상 최강의 제자]로 만들어진 근육은 작정하고 굶고 방안에서 1년을 굴러다녀도 빠지지 않을 최고의 근육이다.
다리를 지탱하는 케이블 같은 근육.
"사랑합니다!"
"옷 입었을 때 울퉁불퉁했다면, 정말 죽었을 거야."
"예, 옙!"
"……쯧. 선호가 은택이를 억지로 운동시켰다는 설정을 넣어야겠네. 얘 코디 다시 짜 주세요. 품이 좀 넓은 걸로!"
선호는 '우리들의 1987'의 배역 중 하나로 용문동에서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은택의 친구인데, 만능 스포츠맨에 공부까지 잘하는 인물이다.
"네!"
"흥!"
두고 보자는 듯한 눈빛을 지으며 물러서는 최은수 작가의 모습에 진호는 속으로 만세를 외쳤다.
'사, 살았다!'
진호는 저 멀리서 눈이 마주치자 외면하는 또래 배우들을 보며 이를 갈았다.
'이 배신자들!'
"그러게 내가 적당히 운동하라고 했냐, 안 했냐."
"그래, 인마! 우에 그리 말을 안 듣는데!"
어느새 다가온 대배우 성동인과 김정균의 질책에 진호는 억울함을 피력했다. 두 대배우 모두 주연이 라 말할 수 있는 주조연급 배역들을 맡았다.
"운동 안 했어요. 진짜 아무것도 안하고 바둑만 뒀습니다. 두 달 동안 하루 한 끼 샐러드만 먹고!"
"시끄러! 잘못한 놈이 어디서 눈을 부라려!"
맞는 말이라서 할 말이 없었다.
"끄응."
"……아따 그래도 젊음이 좋긴 좋나 보다잉. 우째 그렇게 먹었는 디 살이 안 빠질까잉."
"또 자기 특제 레시피로 맛나게 만들었겠지요. ……알려 줄 거지, 진호야? 애들이 요새 야채를 안 먹는다."
"아, 네. 그럴게요. 지금 불러 드릴까요?"
"그럴까?"
김정균이 핸드폰을 꺼내어 적을 준비를 하자 성동인이 진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무 기죽지마.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안 됐으면 어쩔 수 없는 거야."
"……감사합니다."
"아, 형님. 칭찬할 거면 절로 가서 하소, 마! 레시피 적어야 한다 안 합니까!"
"이 육시랄 놈이! 네가 형이여? 내가 형이여! ……엄마──!"
"아, 또 와 울고 그러는데요! 형님이라고 했잖아요!"
배역에 몰입한 두 사람의 콩트에 고개를 저은 진호는 슬그미니 일어나 배우들에게 다가갔다.
그러며 부산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 사이에서 진지한 얼굴로 신 연호 피디와 이야기를 나누는 나연석을 보았다.
'역시 진지할 때는 진지하다니까. 그렇다면 나도…….'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최고의 연기를 해야 했다.
나연석의 도전이 헛된 경험이 되지 않도록 말이다.
"……어흠. 진호야."
진호는 젊은 배우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남자 배우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누구세요? 전 다이어트하는 사람 앞에서 치킨 피자 족발 시켜서 드신분 따위 모르거든요?"
눈앞의 남자배우들뿐만 아니다. 다른 배우들 모두 미팅과 대본 리딩 때 맛있는 것만 시켜 먹었다.
움찔!
"……야! 째째하게 이럴래!"
허리에 양손을 얹은 김세연의 행동에 진호의 눈이 번쩍 떠졌다.
"째째하게? 네가 제일 나빠! 어떻게 라면에 밥까지 말아"
"슛 들어가기 15분 전! 배우들 감정 잡아주세요-!"
"……좀 이따 가 보자."
장난은 이제 끝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배우들 모두 흩어져 감정을 잡아 갔다.
진호도 평소엔 어리바리하고 어떤 일이든 예스를 외치지만, 바둑에 관해서는 절대 타협이 없는 최은택에 몰입되어 갔다.
"은택, 영선, 선호, 성환, 등용! 각자 집 앞에 서고! 자, 그럼 슛 들어갑니다! 신 넘버 6-1!"
……따악!
슬레이트가 쳐지는 소리와 함께 용문동 한 골목에서 자란 다섯 친구의 사랑과 우정 이야기가 시작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