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8권 7화
주말의 이른 아침. 누군가는 침대 안에서 침을 흘리며 자고, 누군가는 짧은 여행을 준비하는 시간에 진호와 그의 아버지 이형만은 부엌에서 밀가루를 치덕거리고 있었다.
"끄응! 끙!"
온 힘을 기울여 반죽을 치대 둥글게 만든 이형만은 한숨을 길게 내뱉으며 물러났다.
"후우."
진호는 아버지가 만든 커다란 반죽을 꾹 눌러 보고 또 냄새를 맡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형만의 눈이 빛났다.
"된 거냐?"
"네. 이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요."
[스킬: 불을 지배하는 자]와 [스킬: 태양 여왕의 황금손]이 이정도면 기본은 됐다고 말하고 있었다. 환하게 웃은 이형만은 식탁 의자에 앉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어이구야. 빵 한번 만들기 힘들다."
"고생하셨어요."
"고생은……. 이정도도 못하면 아예 가게 열 생각을 말아야지."
진호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그는 아버지 이형만의 어깨를 주 물렀다.
"어구구. 그래, 거기."
"아르바이트는 할 만하세요?"
이형만은 현재 주말마다 근처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따로 비상금을 만들려는 게 아니라 빵집의 시스템을 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지원한 것으로 진호가 추천했다.
아버지가 퇴직을 하면 언제든 빵집을 오픈할 수 있도록 말이다.
"진상이 좀 있는 것 빼고는 할 만하지."
"그런 것치고는 들려오는 소리가 범상치 않던데요?"
단팥빵 하나 사러 들어갔던 손님이 나올 땐 빵 한 봉지를 사 온다는 말이 동네에 파다했다.
"그래도 이 아빠가 영업맨 아니냐. 그냥 요새 애들 말로 패시브 같은 거야."
"푸하핫!"
"진호 넌 요새 어쩌니? 기원에 출근한다면서? 할 만해?"
다양한 방식의 바둑을 접해 보라며 이제돌이 권해서 다니게 된 기원. 한국 최고의 기원답게 프로 기사들이 많아서 3차 해금 조건인 '프로 바둑 기사와 100국 두기'를 빠른 시간 내에 해금시키며 [스킬: 신의 한 수]를 얻게 됐다.
"그럼요. 다들 좋은 분들이세요. 법 때문에 안에서 담배도 필 수 없고, 옛날처럼 수백만 원씩 오가는 내기 바둑도 못 해요."
그래도 간단한 식사 내기나 술 내기는 했다.
본디 기원은 바둑이 옛것으로 치부되면서 하락세에 접어들었는데, 이제돌이 인공지능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둔 후 다시 상승세에 접어들었다.
그에 힘입은 대한바둑협회는 어린아이들의 집중력 향상과 두뇌 발달에 좋다는 점을 홍보하면서 어린 회원들을 유치했다.
실제로 바둑은 두뇌 발달에 좋은 스포츠였다.
"그래? 세상이 진짜 많이 변했네. 아빠 때 기원하면 뿌연 담배 연기에 내기 바둑밖에 생각 안 나는데……. 흠, 그럼 나도 퇴근 때 한 번 들러 볼까?"
"어? 바둑도 둘 줄 아세요?"
"바둑만 할 줄 알겠니? 이 아빠 세대 때 영업맨은 뭐든 할 줄 알아야 했어."
"오!"
"계약 따내려 산도 타고, 갯바위낚시도 따라가고……. 지금 생각하면 당시엔 어떻게 그런 걸 했는 지……. 어휴."
"하핫."
뿌드득!
이형만의 어깨에서 기괴한 소리가 났다.
"큭! 어후우. 시원하다. 이제 됐다. 그만해도 돼. 기원 가야지."
"네. 아버지도 조심히 다녀오세요."
"네 엄마가 인정해 준 비상금인데 열심히 해야지."
"하하핫!"
"다녀와."
고개를 끄덕인 진호는 TV앞에 앉아 있는 어머니 나진희에게 인사를 하고는 집을 나섰다.
* * *
깔끔하고 현대적인 인테리어로 꾸며진 기원 안.
창가의 한 자리에 20대 후반의 청년과 20대 초반의 청년이 앉아 대국을 두고 있고, 제법 많은 사람들이 그걸 구경하고 있었다.
형세가 어지러운 바둑판 위에 탁, 흑돌이 놓이는 순간, 청년의 이마에 맺혀 있던 식은 땀이 콧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졌습니다."
"캬흐."
"아, 이걸 지네."
구경꾼이 아쉬워 할 때, 날카로운 외모의 청년이 고개를 숙였다.
"お疲れ様でした(수고하셨습니다)."
고개를 푹 떨군 청년은 몸을 일으켰고, 일본 청년은 주위를 둘러 봤다. 구경꾼들은 슬그미니 고개를 돌렸다.
벌써 여섯 판째 내리지고 있었다. 그중에는 기원에서 인정하는 프로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다.
구경꾼 중 젊은 축에 속하는 남녀들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이곳 기원이 낳은 프로들이자, 이번 세대를 이끌어 갈 젊은 기사들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청년은 몸을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좀 쉬고 싶습니다."
일본어는 다 알아듣지 못해도 '죄송합니다.'는 알아들은 사람들은 입맛을 다시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청년은 기원 안에서 음료와 간단한 음식을 파는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30대의 중년인이 그를 급히 따랐다.
그는 청년이 고른 캔 음료를 계산했고, 청년은 캔 음료를 마시며 입술을 비틀었다.
"최강 한국이라더니 별거 없네."
"마사토."
"흥. 어차피 제 말을 알아듣는 사람도 없고, 또 제 말이 맞잖아요."
"그래도 말 조심해. 네가 실수하면 저기 계시는 선생님께 피해를……."
"내가 알아듣는데?"
화들짝 놀란 둘은 옆을 보았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눈을 감은 것처럼 째진 눈고 있었다.
"……저우양."
"저 나이에 겨우 프로 1단이 된 사람이겨 놓고 으스대지마. 너 그러다가 큰코다친다."
"한국 최고라는 대한 기원의 수준이 낮은 것에 실망한 것뿐이다."
"겨우 하루 와 놓고 실망? 와우. 일본 언론들이 떠받들어 주니까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아?"
일본 청년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흥. 그렇게 말하는 너와 내 전적이 어떻지?"
중국 청년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에 '분하다'라는 감정이 맺혔다.
"어차피 취미로 하는 놈 따위에게 내가 뭔 말을 하는 건지. 뭐, 진심으로 해도 내가 이길 테지만."
"큭!"
캔 음료를 단숨에 들이켠 일본 청년은 다시 자리로 향했고, 중국 청년은 발을 동동굴렀다.
"아오. 중국에 오면 찍소리도 못 내는 놈이 입만 살아서!"
하지만 일본 청년 마사토의 말엔 반박할 수 없었다. 이번 세대의 바둑 최강국은 마사토 때문이라도 일본이 될 확률이 높았다.
저우양은 눈빛을 차갑게 가라앉혔다가 고개를 저었다.
바둑 외의 것으로 이기는 것은 진정으로 이기는 게 아니었다.
"누가 저놈 콧대를 눌러 준다면 평생 형님으로 따를 수 있을 것 같은데……."
끼익!
저 멀리서 열리는 문을 본 저우 양은 안으로 들어오는 미남을 보곤 경악했다.
"이진호?"
* * *
기원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내린 진호는 화창한 하늘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날씨 좋네."
미세먼지 지수도 낮음이었다.
진호는 콘크리트로 지어진 기원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이제 잘 들르지 못한다고 하면 아저씨들, 누나들이 뒤집어질 텐데…….'
기원에 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친해지게 되었는데, 이젠 곧 촬영 시작되기 때문에 잘 들를 수 없게 되었다.
"몇몇 아저씨들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질 게 분명해."
딸들에게 자랑하기 좋아하는 아저씨들 몇 명이 있었다.
그중엔 대한바둑협회의 임원도
있었다. 그는 진호에게 한국 바둑 홍보대사로 지정해 줄 테니 딱 프로 1단만 따자고 옆구리를 찌르고 있었다.
단단히 주의를 주지 않았다면 '이진호! 바둑계에서도 신성이 되고 파'라는 타이틀로 기사가 나갔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대한바둑협회는 홍보에 목말라 있었다.
'인공지능에게 승리를 거둔 이제돌'이라는 홍보 문구도 이젠 약효를 다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진호 자신도 [스킬: 신의한수]를 얻다 보니 트로피 하나 정도는 가지고 싶은 욕심이 생겨서 그 제의가 혹한다는 점이었다.
"……일단 촬영 시작 전까지는 숨기자."
괜히 먼저 말해서 곤란한 상황을 자초할 수는 없었다.
고개를 저은 진호는 기원 안으로 올라갔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간 진호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기원 내의 공기가 이상할 정도로 무겁고 뜨거웠다.
그러다 이쪽을 보며 눈을 빛내는 사람들 때문에 입맛을 다셨다.
'어이구.'
"우리 진호 왔어?"
"어젯밤 잠은 잘 잤고?"
"형, 식사는 맛있게 하셨어요?"
기원 안에 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가와 인사를 했다.
진호는 어색하게 웃으며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는 기원의 정중앙에서 누군가와 이야기 하는 이제돌에게 다가갔다.
"선생님."
"왔어요? 아, 인사해요. 이쪽은 올해 정기 합숙을 위해 중국에서 온 티앙우밍 씨. 이쪽은 일본에서 온 겐조 타다키 씨."
진호는 40대의 중년인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티앙우밍이 진호를 보곤 놀랐다.
"혹시 배우 이진호……."
진호도 놀랐다.
"아, 네. 이진호입니다."
티앙우밍이 벌떡 일어나 손을 내 밀었다.
"허헛.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티앙우밍 6단입니다."
진호는 의아해했다. 티앙우밍의 인사가 지나치게 저자세인 탓이었다.
"저나 제 형님이 모두 웨이양 백부님에게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아!"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나 싶었다.
웨이양은 장칭의 친우로, 중국의 고위공무원이다. 진호는 그가 중국의 모든 미디어를 관리, 감독하는 광전총국의 기관장임을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그럼 저에게 삼촌이 되시겠네요. 다시 인사드릴게요. 이진호입니다."
티앙우밍은 급히 손을 저었다.
"그럴 리가요. 웨이양 백부님과는 아주 먼 친척에 불과합니다."
"그래도요."
진호는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고, 잠시 갈등하던 티앙우밍의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웨이양 백부님께서 유일하게의 손자로 삼은 존재! 떠밀리듯 한국에 왔다가 큰 선물을 얻어가는구나!'
원래 오기로 했던 이가 펑크를 내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와야 했던 한국행이다. 그런데 이런 인연을 갖게 되었으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나도 조카로 대하겠네."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허헛. 그런데 조카가 여기까진 무슨 일인가? 바둑에도 조예가 있었던가?"
진호는 사정을 설명했다.
"호. 한국에 바둑 열풍이 불겠군."
"하하, 과찬이세요."
"지금 당장 프로로 데뷔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실력도 좋습니다."
이제돌이 중국어로 말하자 티앙우밍은 경악했다. 옆의 겐조 타다키도 놀람을 금치 못했다.
"아니, 이 선생께서 그렇게 말하실 정도입니까?"
진호는 재빨리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선생님께서 과하게 칭찬하시는 거예요."
"요샌 저와 맞바둑을 두고 있습니다. 접바둑을 보름 만에 떼더군요."
"서, 선생님!"
"……허어."
"이거 한국에서 또 다시 용이 날아오르는군요. 이 선생님의 뒤를 잇는다면 대체 뭐라고 칭해야 할 지……."
진호는 발갛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노력을 해야 했다. 두 사람은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으면서도 부럽다는 듯 이제돌을 응시했다.
'역시 한국. 방심할 수가 없다.'
'이 선생의 후계자가 나타난 것인 가…….'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임에도, 같은 남자임에도 혼을 쏙 빼놓을 만큼 미남인 진호다.
한국에 다시 바둑 열풍이 불어 발굴되지 않았던 바둑 천재들이 모습을 드러낼 광경이 눈에 훤히 펼쳐지는 듯 보였다.
그들의 속내를 읽은 이제돌은 옅게 웃으며 진호의 등을 두드렸다.
"젊은 사람은 젊은 사람끼리 어울려야죠. 이 기회에 타국 기사들의 성향도 알아봐요."
"가, 감사합니다. 그럼 전."
더 이상 칭찬을 받았다가는 쥐구멍에라도 숨어야 할 것 같아진 진호는 양해를 구하고는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기원을 둘러보던 진호는 한 청년을 발견하곤 눈을 빛냈다.
'일본인이네. 타국의 바둑 성향이라…….'
거기다 묘하게 사람들이 저 일본인 청년만은 기피하는 것 같았다.
"형, 저사람 콧대 좀 뭉개 줘요."
성격이 서글서글해서 친해지게 된 10대 후반의 소년이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왜? 성격이 나빠?"
"그 정도는 아닌데……. 아무튼 지금 다 참패하고 있어요. 정한이 형도, 경진이 형도, 수애 누나도 졌다니까요?"
다가온 소년이 언급한 사람들은 대한 기원 소속 프로 기사들이었다. 어이가 없어진 진호는 소년의 이 마를 탁 쳤다.
"앗!"
"인마, 승부에서 이길 수도 있고 질수도 있는 거지. 그걸 가지고 콧 대를 뭉개네 마네. 씁. 혼날래?"
"하, 하지만 한일전……."
"씁!"
소년은 입을 다물었다.
진호는 그런 소년의 머리를 헝클인 후 일본인 청년에게 다가가 맞은편에 앉았다. 방어적 성향이 강하다는 일본. 합숙을 할 정도면 프로일 것이 분명하기에 기대가 많이 되었다.
"한 게임 청해도 될까요?"
진호는 일본어로 말했다.
흑돌과 백돌이 복잡하게 얽힌 바둑판을 보고 있다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든 청년이 진호를 보곤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 이내 낯빛을 굳히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누구시죠?"
"여기 기원 회원이에요."
스무 살의 청년 마사토는 주위를 둘러봤다.
자신에게 졌던 이들이 '너 이제 큰코 다칠 거다.'라는 듯 의미심장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흠. 이제 프로가 된 사람인가?'
그는 자신들의 인솔자이자 이제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겐조 7단을 보았다. 그리고 마침 이쪽을 보던 겐조 7단이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은 바둑판 위의 돌들을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오래 버텨 줬으면 좋겠네."
혼잣말하듯 작게 말한 말?
'……호오? 얘 봐라?'
진호는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