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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181화 (181/424)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8권 6화

"안녕하십니까."

"어서 와요."

커다란 저택.

현관문을 열고 맞이해 주는 수더 분하게 생긴 왜소한 중년인을 향해 진호는 정중히 목을 숙였다.

진호의 몸은 잔뜩 경직된 상태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중년인은 한국을 대표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이제돌, 그 누구도 이기지 못했던 인공 지능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바둑 기사였다.

진호가 이제돌을 찾은 이유는 드라마 우리들의 1987에서 맡은 배역 때문이었다.

극 중 그 당시 국민의 자랑이었던 천재 바둑 기사 최은택.

가상의 인물이지만, 최은수 작가는 이제돌을 모티브로 해서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했다.

"이렇게 허락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건 변변치 않지만 ……."

"어머머. 뭘 이런 걸 다……."

진호가 온다는 소식에 화장을 한 이제돌의 부인이 진호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느릿하게 선물을 받아 들었다.

진호는 그녀의 뒤에 숨은 소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소녀는 이제돌과 그의 부인을 반반씩 닮은 아주 귀여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안녕?"

"저, 정말 진호 오빠예요?"

"나 알아?"

"당연하죠! 저 완전 팬이에요! 지니어스 플래티넘 계급이에요! 꺄 아악! 진호 오빠가 우리 집에 왔다!"

소녀는 방방 뛰었다.

그러다 이제돌을 보며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와, 아빠 진짜 유명하구나."

빠직!

이제돌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의 부인이 화들짝 놀라며 딸을 달랬다.

"얘, 아빤 원래 유명했어. 아, 알잖아."

"알긴 아는데, 진호 오빠가 찾아올 정도로 대단한지는 몰랐지! 우와아."

이제돌은 딸의 존경스럽다는 시선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자식을 키워 봤자 다 헛것이라는 생각만들었다.

"하하하, 아마 세계에서는 이제돌 기사님이 나보다 훨씬 더 유명하실 거야. 한 분야를 말했을 때, 바로 누군가가 떠오른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거든."

어색하게 웃은 진호가 재빨리 말했다.

"진짜요? 와아."

이제돌은 더 진해진 딸의 존경에 슬그미니 어깨를 폈다.

"호호. 손님을 계속 현관에 세워 뒀네요. 어서 들어오세요."

"실례하겠습니다."

안내 받은 거실엔 특이하게도 소파가 없었다. 대신 제법 큰 다도 테이블과 등받이가 있는 앉은뱅이 의자가 있었다.

차가 테이블 위에 놓이자 이제돌이 입을 열었다.

"바둑에 대해 알아요?"

"아뇨. 잘 모릅니다."

진호는 진실 되게 답했다.

'인사동에서 2백 년 된 바둑판을 구하면서 스킬을 1차 해금하기는 했지만…….'

스킬의 1차 조건이 해금되면서 바둑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이 생기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제돌을 앞에 두고 바둑을 안다고 자부할 순 없었다.

"흑돌과 백돌이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 지키면서 상대의 영역을 침범해 내 것으로 만든다는 개념 정도밖에 모릅니다."

살짝 놀란 이제돌이 미소를 지었다.

대마가 어쩌네, 미생이 어쩌네하며 어설프게 습득했을 지식을 늘어놓지 않는 모습이 마음에 든 것이다.

"그 정도면 다 아네요."

진호가 말한 건 바둑의 본질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오실 이유가 있나요? 제 모든 건 이미 최은수 작가님에게 말해 드렸는데."

"바둑 기사들이 다른 이의 기보를 보며 그 사람의 성향과 습관을 연구하듯 연기자도 사람을 보며 맡은 캐릭터를 연구하거든요."

"……젊은 분이 대단하시네요."

진호의 외모라면 대충 그럴듯하게 연기를 해도 대중은 열광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찾아와서 맡은 캐릭터를 완성시키려 하고 있었다.

이제돌은 그 모습이 썩 마음에 들었다.

'젊은 사람이 생각이 박혔네.'

"그래서 저는 좀 연구하셨나요?"

"영상들을 찾아보며 일단 어느 정도 흉내는 낼 수 있게 됐습니다만……."

그렇게 말한 진호는 표정을 굳히며 등을 살짝 굽혔다.

그러며 턱을 괴며 다도 테이블을 보았다.

그러자 진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질 변했다.

마치 날카롭게 갈린 칼을 보는 듯 예리하게.

이제돌은 살짝 놀랐다.

"응?"

"어?"

부엌에서 과일을 담아 나오던 이제돌의 부인과 그의 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보?"

"아빠?"

이제돌은 둘과 진호를 번갈아 보며 깜짝 놀랐다.

"이 모습이 나라고?"

그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진호를 보았다.

'이게 내가 바둑 둘 때 모습이라고? 그럴 리가.'

그러고 보면 모니터링을 할 때도 상대편의 모습과 바둑판만 보았지 정작 자신의 모습을 연구한 적은 없었다.

눈을 껌뻑거린 그는 진호의 모습을 자세히 살폈다.

그러자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진호는 혼란스러워 하는 그의 모습에 몰입을 풀었다.

"하하. 원래 본인은 본인이 어떤 지 잘 모르는 법이죠."

"우와! 진짜 아빠인 줄!"

"아니, 어찜 그렇게 똑같이 따라해요?"

"제 직업이 연기자인데 이 정도는 해야죠."

"……연기자도 쉬운 직업은 아니네요."

"그래서 제 팬들에게는 자신이 정말 원하는 직업을 선택하라고 계속 말하죠. 아, 맞아. 혜린이 너 평균 몇 점이야?"

"93점! 반에서 7등! 오빠 팬인데 이 정도는 기본이죠!"

"오! 그래, 앞으로 뭘 하든 일단 공부는 중요한 거야."

이제돌은 서슴없이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딸과 진호의 모습에 하나의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머리는 좋지만, 사춘기 때문에 공부를 손에서 놓았던 딸이 다시 공부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진호 때문이란 걸 말이다.

'멋진 아빠가 되어 볼까?'

"진호 씨."

"아, 예,

"혜린이랑 바둑 한 판 둬 보실래요? 제 모습을 판박이처럼 복사한 것 같아도 대국에서는 대국만의 분위기가 있거든요. 아마 연기를 하는데 도움이 될 거예요."

"아, 아빠?"

"싫으면 말고."

"아니! 하지만…… 진호 오빠가 불편해 하진 않을지."

아버지의 마음을 눈치첸 진호는 옅게 웃었다.

관전하는 이제돌의 모습도 훌륭한 교보재가 되어 줄 것이다.

"혜린아, 살살 봐주면서 해 주라. 나 진짜 초보야."

"……네!"

이제돌은 혜린에게 윙크를 하며 일어났고, 사춘기 이후 처음으로 아빠를 최고로 존경하게 된 그녀는 재빨리 이제돌이 앉았던 자리에 앉으며 다도 테이블 아래서 바둑판과 돌을 꺼냈다.

'오?'

혜린이 정좌를 한순간 그녀의 기질이 바뀌었다.

방금까지 발랄 그 자체였던 평범한 십 대 소녀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진지하고 묵직했다.

그녀가 진지해지자 진호도 생각을 조금 바꿨다.

"음, 원래 바둑의 정석은 이 네 개의 귀에 돌을 두는 것으로 시작 해요. 그리고……."

"점점 중앙으로 영역을 넓혀 간다."

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바둑판의 정중앙인 천원에서 부터 두는 방법도 있기는 한데, 웬만해선 추천하고 싶지 않아요. 오빠가 먼저 두세요. 아, 접을 잡아 드릴까요? 아홉 점?"

그녀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잘 보이기 위한 치기 어린 소녀의 허세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음, 괜찮아. 일단 한 판 두고 생각해 보자. 서로의 실력을 모르잖아."

바둑 관련 스킬의 해금 조건 중 일부가 해금됐고, [스킬 : 전국수석]이 있다. 솔직히 아직 프로가 아닌 그녀에게 처참하게 진다고 볼 수 없었다.

"역시 진호 오빠, 승부욕 넘치네요. 하지만 바둑은 그런 욕심으로 할 수 있는 스포츠가 아니랍니다."

"하하하."

진호는 통 안에 든 흑돌을 만지 작거리며 바둑판을 보았다. 그러며 2차 해금 조건 때문에 그동안 외운 수많은 기보를 생각해 갔다.

사그락. 사그락.

'좋은 돌이네.'

1차 해금 때문인지 바둑돌이 손에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어디가 좋을까.'

이제돌은 딸의 즐거움을 위해 이 상황을 만들었지만, 진호는 생각 없이 허투루 두기 싫었다.

그건 혜린도 마찬가지처럼 보였다.

자신의 생업을 누군가 펌훼하면 기분이 나쁜 것처럼 바둑이 인생인 이제돌과 그런 아빠를 보며 자란 딸이다.

그들만의 영역과 프라이드를 가볍게 볼 수 없었다.

이런 진호의 진심은 세 사람에게 전해졌다.

그들은 좀 더 진지해졌고, 공기는 조금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서 잡념을 지워 가던 진호는 장고 끝에 돌을 두었다.

탁!

그런 진호의 신중한 모습에 히죽 웃은 혜린이 바로 착수를 두었다.

"음?"

"히히. 바둑은 어려워요?"

귀엽게 웃는 모습은 참 좋았지만, 그게 승부욕을 다시 한번 자극했다.

'흐응…….'

진호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탁탁탁!

바둑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둘의 대국을 보고 '장난을 하는 건가?'라고 생각할 만큼 둘이 바둑돌을 놓는 속도는 빨랐다.

상대가 돌을 두면 바로 둘 정도로 빨랐다.

마치 그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두는 것 같았지만, 바둑판 위에 그려진 형세는 결코 난잡하고 가볍지 않았다.

뒤로 물러나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던 이제돌이 어느새 다가와 진지하게 지켜볼 만큼 복잡하면서도 심오했다.

그리고 공격적이었다.

그들의 팽팽한 싸움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건 진호가 흑돌을 천원에 내려놓은 순간이었다.

진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는 건 이제돌의 부인만 알아차렸다.

'어머?'

남편 이제돌이 결정적인 수를 둘때의 습관을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타악!

……꿀꺽!

"끄응."

혜린은 이제 통에 3분의 1만 남은 바둑돌을 빠르게 만지며 살길을 찾았다.

그녀는 장고에 접어들 준비를 했지만, 이제돌은 고개를 저었다.

"딸, 이건 졌어. 이만 포기해."

"아냐! 있을 거야!"

"어떤 수를 둬도 이 형국에선 대마 잃는다. 102수부터 잘못 뒀어."

"……아앙! 이게 뭐야! 오빠, 초보라면서요!"

"후와! 질 뻔했다!"

진호는 한숨을 길게 내뱉었고, 혜린은 억울함에 엉덩이를 들썩였다. 프로가 될 생각이 없지만,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 이제돌과 바둑을 둬 왔다. 그런데 너무 가볍게 져 버렸다.

"뭐긴 뭐야, 큰코 다친 거지. 내가 또래 남자애들 바둑으로 깔아뭉갤 때부터 알아봤다."

"아빠!"

"씁."

혜린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며 토라진 모습을 보였지만, 그 이상의 반항은 하지 않았다.

바둑 좀 둘 줄 안다고 잘난 척하는 바둑부 애들을 실력으로 깔아 뭉갠 건 사실이니 말이다.

이제돌은 그런 혜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놀란 얼굴로 진호를 보았다.

"잘 두시네요."

"아뇨. 그저 기보를 많이 외운 것 뿐입니다."

그동안 외운 기보만 모아도 작은 책장의 반절은 채울 수 있었다.

"연기를 위해서 그런 것까지 했어요?"

"그래야 한층 몰입할 수 있으니까요. 배역이 배역이다 보니…… 하하."

진호가 맡은 최은택은 바둑만 잘 둘 뿐, 그 외에는 셔츠의 단추조차 제대로 잠그지 못하는 바보 같은 소년이다.

이제돌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쉽게 생각하지 않으시는군요."

주어가 생략된 말이었지만, 진호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있었다.

"제 입장에선 당연한 일을 한 건 데요. 저보다 더 심하게 하시는 분도 많으세요. 하나의 캐릭터를 연구하는데 연습장 한 권을 쓰시는 분도 계신걸요."

그 대표적인 예가 김윤식이다.

그는 배역을 맡으면 머리부터 발 끝까지 치밀하게 연구하고, 분석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든 후에야 카메라 앞에서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 정도도 하지 않으면 작가님과 모티브가 되신분께 죄송해서라도 카메라 앞에 서지 못합니다."

이제돌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그럼 이제 저와 둬 보시죠. 압도적인 상대와 겨룰 때는 또 다른 느낌이 드니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눈앞의 중년인은 한국이 낳은 천재 바둑기사 이제돌.

조운연 9단, 이장호 9단의 뒤를 잇는 세계 최강의 바둑기사다.

"실력은 대충 봤으니까 12점 깔고 갈게요."

진호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호승심이 강하게 치솟았다.

'내 스킬은 과연 세계 최강에게 얼마만큼 통할까?'

일단 목표는 깔아 둔 12점을 오늘 안에 7점까지 줄이는 것이었다.

'3차 해금 조건이 프로 바둑 기사와 100국 두기니까…….'

어차피 시간은 많았다.

이제돌은 호승심이 불타는 진호의 눈을 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재밌는 청년이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심호흡을 한 진호는 12개의 흑돌이 깔린 바둑판 위에 흑돌을 두었다.

타악!

[스킬: 신의 한 수]

[인생은 B와 D 사이의 C의 연속이다. 바둑도 마찬가지다. 낙장불입! 그러니까 한 수만 물러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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