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8권 2화
횡단 기차도 어느 덧 목적지인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와글와글
"지노. 언제 또 한 번 같이 여행 해!"
"덕분에 즐겁게 왔어! 네드도 같이 어울려 줘서 고마웠어요!"
"네드, 잘 가요!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거예요!"
진호와 같이 내린 사람들 모두 얼굴에 피로보다는 웃음꽃이 피어 있다. 티타니아와 까차에게도 인사 한 진호는 네드 시런과 악수했다. 네드가 아쉽다는 듯 표정을 지었다.
"내가 부르면 꼭 와야 돼?"
"시간이 되면요."
"남자가 너무 도도한 거 아냐?"
"그게 내 매력이죠."
"하핫. 작곡과 편집 비용은 곡이 완성되면 그 계좌로 보내 줄게. 그리고 대원과 이열, 내 친구들. 정말 행복한 여행이었어요."
"으하핫! 나 역시 마찬가지야, 네드."
"한국에 오면 술 한 잔 진하게 마시면서 록 스피릿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자고! 못한 이야기가 많아!"
"내쫓지나 말아주세요. 가요, 존!"
"네드의 출연료는 그 계좌로 꼭 보내…… 어, 그래! 꼭 보내 주셔야 합니다, 디렉터 나."
"방송국이 안 된다고 하면, 사비로라도 지불하겠습니다."
"존-!"
"알았어! 간다고! 그쪽으로 가지 마! 팬들이 모여 있대! 저쪽!"
그렇게 네드와 그의 매니저마저 떠나자 김대원과 나이열이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들은 아직도 믿기지 않았지만, 네드와 음악적 교류를 하며 술잔을 기울인 건 분명한 현실이었다. 나연석이 성큼성큼 다가와 진호를 와락 끌어안았다.
"윽?"
"평생 함께 가자, 진호야! 도장 찍을까?"
놀랐던 진호가 소리 죽여 웃었다.
"그건 나중에요. 가시죠."
"그래, 가야지! 진호가 가자는데 가야지! 자, 갑시다!"
아무튼 말은 잘했다.
고개를 저은 진호는 발을 뗐고, 김대원과 나이열이 옆에 섰다.
"아, 미치겠네. 어서 한국에 돌아 가야 하는데……."
"대원이 너만 그래? 나도 그래. 대체 6일 동안 작곡한 곡이 몇 개야?"
네드와 진호.
두 젊은 천재와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영감이 미치도록 폭발했다. 그 영감들은 곧 오선지 위의 음표가 되었다.
하지만, 그건 진호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진호는 6박 7일 동안 총 20개의 곡을 작곡했고, 그중 두 개를 네드 시런에게 주었다. 네드 시런도 진호에게 곡을 주었다.
나머지 18개의 곡도 퀄리티가 무척이나 좋았다.
둘은 경이롭다는 듯 진호를 보았다.
진호는 그 누구도 이견을 말할 수 없는 진짜 뮤지션이었다.
"진호야."
"예?"
진호가 나이열을 보았다.
"컴백하면 꼭 이 삼촌한테 먼저 말해 줘."
"아, 드로잉북에 출연해 달라고요? 당연하죠."
"아니, 그땐 피해서 앨범 내려고."
"나도. 꼭 말해 줘야 한다, 진호야?
"……하핫."
어색하게 웃은 진호는 저 멀리서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드는 스태프, 예산과 여러 문제로 인해 먼저 모 스크바로 출발했던 스태프들을 보며 밝게 웃었다.
김대원과 나이열이 키득키득 웃었다.
"쟤들은 그 네드 시런이 우리와 같은 기차를 탔다는 걸 상상이나 했을까?"
"어후, 우리 네드도 못 보고. 불쌍해서 어째?"
놀리려는 의지로 가득한 둘의 철 없는 모습에 진호는 못 말리겠다는 듯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 * *
러시아에서의 스케줄은 조심스럽게 진행되었다.
러시아는 독재국가와 다름이 없는 나라다 보니 알아서 조심을 하는 것이었다.
놀라운 점은 러시아 사람들이 의외로 정이 많다는 것이었다.
길거리 공연을 보며 연인과 사랑을 나눌 줄 알았다.
스킨헤드와 인종 차별 주의자들이 넘쳐 폭력이 난무한다는 이미지는 매체가 만든 선입관에 불과 했다.
물론 없지는 않았다.
실제로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도 있었지만, 공연에 매료된 사람들이 적극 말리면서 유야무야 해결되는 경험도 겪었다.
이 외에도 크렘린 궁전과 붉은 광장은 굉장히 이색적이면서도 이국적이었다.
한국인 관광객이 많은 지 한국어로 된 크렘린 궁전 안내 책자를 배부하고 있어서 그곳의 역사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고, 그만큼 뜻 깊은 시간이 되었다.
게임 테트리스의 배경이라 할 수 있는 성 바실리 성당이나 예술의 거리인 아르바트 거리 등등 모스크바에는 정말 볼거리가 많았다. 그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러시아의 마지막 경유지로 삼으며 러시아를 떠났다.
"끄으으-!"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켠 진호는 미소를 지었다.
[스킬 : 나는야 자연의 왕자]와 [스킬 :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때문에 베를린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도 잘 잤지만, 그래도 폭신하고도 햇살 냄새가 가득한 진짜 침대가 백배천배 나았다. 진호는 앞으로의 스케줄을 점검 했다.
"오늘 낮엔 관광 및 길거리 공연, 저녁엔 라이프치히에서 출발하고, 그다음엔……."
그렇게 중얼거리며 정신을 차린 진호는 화장실로가 씻은 후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 식사 테이블 위엔 양초 수 십 개가 놓여 있다.
"아, 다 굳었네."
팔뚝만한 굵기의 향초들, 어젯밤 제작진 몰래 나가 사 온 재료들로 만든 것이었다.
간이로 만든 틀을 벗겨 낸 진호는 한번 향을 맡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수면 관련 스킬인 [스킬 :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의 스토리에서 주인공이 만드는 온갖 향초들이 제대로 만들어졌다.
"괜찮게 됐네."
"지, 진호야. 그건 뭐냐?"
"아, 일어나셨어요?"
진호 자신을 담당하는 카메라 감독이었다.
"그래서 그건?"
"공연하면서 팔 향초들이요."
"……그걸 왜 팔아!"
"아니, 팔면 법에 저촉 될 수 있으니까 커플이나 나이 드신 분 한정으로 이 향초를 드리려고요."
"왜!"
"왜긴 왜예요. 성적이 좋지 않아서지."
카메라 감독은 입을 다물었다.
세 명 모두 분장을 하다 보니 조회수가 잘 오르지 않았다.
한 영상당 50만 언저리였다. 조회수가 10만을 넘기면서 점점 인터넷에서 소문이 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꽤 천천히 오르고 있었다.
인터넷에는 고수들이 너무 많아서 잘 드러나지 않은 것도 있지만, 나연석이 길거리 공연 촬영에선 얼굴을 가리는 초강수를 두면서 한국인 관광객이 소문을 내는 걸 차단한 것도 있다.
제목도 유치하고 어설퍼서 손이 잘 가지 않게 했다.
"현장 수익도 시원치 않고."
스케줄 상 공연을 할 수 있는 시간이 하루 한 번뿐이라서 수익은 더 적을 수밖에 없었다.
만일 인천공항에서 공연한 영상이 300만 조회수를 넘지 않았다면, 이렇게 독일에 도착하기는 커녕 폴란드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뭐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긴 하지만, 이왕이면 누이 좋고 매부 좋자는 거죠. 뜬금없는 선물, 좋잖아요. 추억도 되고."
"그, 그건 맞는 것 같은데……."
맞다.
맞는 말이지만, 그렇지 않아도 독일 사람에게 독일어로 길을 물으면서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든 진호가 또 사고를 쳤다는 게 문제다. 진호는 이미 예전에 독일어를 익혀 둔 상태였다.
독일 음식점에 독일어로 레시피를 묻기 위해서 말이다.
"잠시만. 너 이거 들고 여기 꼼짝 하지 말고 있어!"
카메라 감독이후다닥 달려나가자 진호는 그가 맡긴 카메라로 자신을 찍으며 셀카 놀이를 시작했다.
이윽고 나연석과 작가들이 뛰어 오면서 시끄러운 아침이 시작되었다.
진호와 김대원, 나이열은 공연 준비를 시작했다. 셋이 영화의 특수 분장 같은 분장을 시작하자 감시를 위해 나왔던 독일 공무원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분장에 대한 건 사전에 이야기가 되었지만, 이렇게까지 특수 분장을 할 거라곤 예상을 못했던 것 같다. 독일어를 능숙하게 할 줄 아는 스태프가 없어서 진호가 대신 말했다.
"특이하군요. 가난한 여행을 자청 하다니."
"저희 셋 모두 한국에서 유명한 사람들이거든요. 아, 이거 선물이에요. 제가 만든 건데, 아내분이나 애인분께 선물하시면 사랑 받으실 거예요. 긴장을 풀어 주는데 좋아요."
진호는 샘플로 쓸 향초에 불을 붙인 후 공무원에게 내밀었다.
향을 맡은 그의 경직된 표정이 느슨하게 풀렸다.
"손재주가 좋군요."
"아, 집중력을 높여 주는 향초도 드릴까요? 아이들 공부할 때 켜 놓으면 정말 좋아요."
"……어흠, 선물이니 거부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진호는 만들어온 향초의 30퍼센트를 그에게 주었다.
"아니, 뭘 이렇게 많이."
"좋은 상사, 좋은 부하 직원 되시라고요."
"허흠. 라이프치히로 간다고요?"
'오, 높은 분이신가보다.'
"함부르크나 뮌헨에는 들리는 겁니까?"
"저희도 그러고 싶지만, 시간과 예산이 부족해서요. 저기에 있는 악독한 피디 때문에."
"하핫, 알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주십시오."
"이렇게 길거리 공연을 허락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한 걸요."
옅게 웃은 공무원이 물러나자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가린 나연석이 다가와 엄지를 치켜들었다.
"잘했어."
"흐흐흐. 아, 오늘 저녁엔 정산해 주세요. 10만 원 정도."
"그래, 그래."
'흠?'
진호는 돌아서는 나연석을 보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물론 나연석이 줘야 하는 돈이긴 하지만, 이렇게 순순히 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나연석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뭔 꿍꿍이야?"
의심하던 진호는 이내 생각을 관두며 다시 분장팀 스태프들에게 얼굴을 맡겼다.
무슨 일이든 상황이 닥치면 그때 풀어나가도 되기 때문이었다.
이내 곧 공연을 위한 자리를 만들었다.
디리링.
감미로운 피아노 소리가 멎자 몰려든 수십 명의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마음 같아선 일렉트로닉 장르 같은 신나는 음악을 연주하고 싶지만, 이런 좋은 분위기에서 그랬다간 모두 일어서시겠죠?"
"하하하하하."
나이열의 능청스런 영어와 동시 통역하는 진호의 독일어에 사람들은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나눠 준 향초 때문인지 관객들의 호응도가 높았다.
"다음 부를 곡은 음……."
나이열이 말을 아끼자 관객들은 의아해 했다.
진호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커플이 아닌 분은 잠시 귀를 막고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은 곡이에요. Drei Haselnusse fiir Asche nbrdde (신데렐라) 주제곡으로도 유명하죠? Kuss mich halt mich 1ieb mich 입니다."
"……오오!"
"와아아!"
독일인들이 환하게 웃으며 박수를 쳐주었다.
그게 신호가 된 듯 나이열이 건 반에 손을 얹었다.
* * *
"……향초 만들 때 우리도 도울게."
기타 케이스 안에 쌓인 돈의 액수가 폴란드 때보다 두 배는 많았다.
비교적 국민의 삶이 여유로운 독일이라서 그런 것 일수도 있지만,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것처럼 향초의 효과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흐흐. 오늘 저녁은 학센과 소시지에 맥주 한 잔 곁들일 수 있겠네요."
"학센? 슈바인 학센? 독일식 족발 요리?"
"독일에 왔는데, 학센과 소시지, 수제 맥주는 먹어 봐야지 않겠어요?"
김대원과 나이열이 침을 꿀꺽 삼켰다.
세계에서 맛 좋기로 유명한 독일 맥주.
"하, 때만 맞았다면 옥토버페스트에 참가 했을 텐데."
독일 국민들뿐만 아니라 세계인이 좋아하는 축제 옥토버 페스트는 독일에서 만드는 모든 맥주를 한 자리에서 마실 수 있는 맥주 축제다.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진호는 이내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때를 맞췄어도 못 갔을 걸요. 시간과 예산, 그리고 나 피디님 문제로."
"……야 이씨! 나 피디!"
난데없이 욕을 먹은 나연석은 깜짝 놀랐지만, 다가오지 않았다. 정말 눈치 하나는 대단했다.
"하아. 우린 왜 이렇게 궁상맞게 여행하냐. 진짜 러시아에 있을 때가 좋았다. 아, 진호가 구워 준 샤슬릭에 러시아 맥주먹고 싶어!"
김대원이 우렁차게 외치자 나이열도 동의했다.
"나도-!"
"저도요……."
우울하게 답한 진호는 나연석을 째려봤다.
나연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실실 웃으며 다가왔다.
"여러분, 이제 버스 여행과 기차 여행이 질리시지 않나요?"
"……또, 뭐, 왜!"
"흠. 저희 제작진이 여태껏 별다른 사고 없이 잘 따라와 주신 여러분을 위해 아주 좋은 선물을 준비했는데, 필요 없으시다면 뭐……."
턱! 턱!
진호와 김대원, 나이열은 재빨리 나연석을 잡았다.
나이열이 억지로 웃었다.
"누가 필요 없데? 우린 선물이라면 양잿물도 마실 사람들이야."
"비굴하시네요."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데!'
셋 모두 울컥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래서 선물이 뭔데? 아니요, 그냥 주세요."
"크흠. 여태껏 버스나 기차타고 이동했기 때문에 좋은 풍경이 있어도 사진 한 번 제대로 못 찍으셨죠? 그래서 저희 제작진이 준비한 선물은 차입니다."
"오!"
"우와!"
사람들은 깜짝 놀라면서도 나연석을 경계했다.
이런 선물을 이렇게 순순히 줄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신 한 가지만 허락해 주시면요."
'…….그럼 그렇지.'
나이열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뭔데?"
"게스트. 현재 라이프치히에는 게스트 한 분이 도착해 계십니다. 그 분과 함께 체코 국경을 넘어 오스 트리아까지 가시면 됩니다. 이게 저희 제작진의 조건입니다."
"겨우 그거?"
셋은 당황했다. 나연석치고는 너무 평범한 조건.
그가 짓는 웃음마저 너무 선해서 더 의심스러웠다.
"아니면 더 조건을 붙일까요?"
"아, 아니! 알았어! 콜!"
상의 할 것도 없었다.
셋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함정이 있더라도 버스와 기차를 타고 움직이는 것보다는 나았다. 예산 문제에서도 말이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진호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라이프치히에 도착하자마자 후회했다.
* * *
"안녕하십니까! 촤하하!"
선한 미소가 참 좋은 40대 중년인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 왔다. 너무도 유명한 연예인이라서 진호와 김대원, 나이열은 깜짝 놀랐다. 그래서 나연석의 멱살을 잡았다.
"야 이! 너 이것 때문에 차 준 거지!"
"와…… 우와!"
진호는 당황하는 그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박준연 선배님. 나연석 피디님이 나연석 같은 짓을 해서요. 선배님 잘못이 아니니까 너무 놀라지 마세요."
그랬다. 그는 먹보 개그맨 박준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