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7권 23화
8. 음악 여행
진호는 하품을 하며 대본을 옆에 내려놓았다.
"하아암, 진짜……."
마음에 드는 작품이 하나도 없다. 미간을 좁힌 진호는 몸을 일으켜 연습실을 나섰다.
복도 맞은편에서 재준이 추레한 몰골로 걸어오고 있었다.
"안 씻냐?"
"방금 24시간 방송 끝났다."
"……수고했다. 얼른 집에 들어가서 쉬어."
"수고."
재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회사를 빠져나갔고, 진호는 탕비실로 향했다.
"아, 진호 씨."
직원 몇 명이 나른한 표정으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진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땡땡인가요……."
"땡땡이 칠 거면 찜질방을 갔겠지?"
"빙고."
진호도 장난이었다는 듯 웃었다.
"무슨 이야기들 나누고 계셨어요?"
"지 실장님에 대해서."
"아."
지경철은 장고 끝에 중국 아이돌 파트를 맡기로 했다.
같은 레벨의 연습생이라면, 중국이 더 도전 정신을 발휘할 수 있겠다는 이유에서였다.
일본 아이돌 파트는 원래 PJY 소속이었다가 독립했던 인물을 스카우트했다.
비록 독립해서 만든 레이블은 망했지만, 그럼에도 그 능력은 지경철과 장경아 실장 모두 인정하는 사람이었다.
'진짜 PJY는……에휴.'
"중국에 여행 갈 때 가이드를 맡길까 생각하신 거예요?"
"빙고, 그것도 있지. 지인 좋다는 게 뭐야. 으흐흐, 그런데 여긴 웬 일이야? 연습실에도 탕비실 있잖아."
"매일 같은 풍경만 보면 우울증 걸려요."
"심심해?"
"……네. 장 감독님이나 최 감독 님 모두 연락 없죠?"
"그 두 분이 우리한테 연락하겠어? 진호 씨한테 다이렉트로 하지."
"하긴……."
'최은수 작가님도 연락이 없으시네. 새 작품 쓰신다고 했는데 최은수 작가는 엄청난 대작을 쓰려는지 벌써 한 달째 칩거 중이었다.
"진짜 우리나라 감독 작가들도 너무하지. 아니, 이렇게 활발히 활동하는 연예인한테 왜 대본을 안 보내는 거야?"
대본이야 보냈다. 여태껏 받은 대본을 쌓으면 아파트 3층 높이는 될 수 있다.
그저 진호의 눈이 까다로울 뿐이었다. 그걸 아는 직원들은 그저 진호의 마음을 풀어주고자 말을 꺼낸 것이다.
진호는 고맙다는 듯 눈웃음을 지었다.
"나연석 피디님 예능 출연 준비는 잘 돼 가?"
"준비할게 뭐 있나요. 어디를 갈 지도 모르는데……."
촬영장소가 국내인지 해외인지 조차 모른다.
소집 장소는 광화문 광장이었지만, 그렇다고 촬영장소가 국내라 단정 지을 수 없다.
"하여간 그 사기꾼……."
"제 말이요."
우우웅!
"응?"
진호는 얼른 전화를 받았다.
"네, 윤식 아저씨."
김윤식이었다.
-진호야, 요새 많이 바쁘냐?
"아뇨. 그렇게 바쁘지는 않아요."
-그래? 그러면 아저씨랑 영화 하나 찍자.
"네. 알았어요."
진호는 생각할 것 없다는 듯 대답했다.
-……크흐흐, 그래. 대본 보낼게.
"넵. 리딩 때 봬요."
전화를 끊은 진호는 언제 나른했냐는 듯 눈에 열의를 품은 직원들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앞으로 바빠지겠네요."
* * *
아침 일찍 일어난 진호는 광화문 광장으로 향했다.
'그때, 그 시절이라…….'
김윤식은 바로 그날 대본을 보내 왔다.
아직 진짜 제목이 정해지지 않은 대본의 내용이 굉장히 무거웠다. 과연 자신이 그 역할을 맡아도 되는 건지 갈등할 만큼 무거운 시대상의 이야기와 배역이었다.
"도착했어."
진호는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정 대리, 아니 이젠 정 실장인 그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정 실장은 스케줄 매니저가 되었다.
"왜, 왜?"
"저 속이는 거 있으면 지금 말하세요. 그러면 용서할게요."
"……내가 너한테 속이는 게 어디 있어? 왜? 내가 제작진에게 여권이라도 넘겼을까 봐? 확실히 말하는데 난 아니다."
"흐응……."
진호는 운전석에 앉은 드라이빙 매니저를 보았다.
진호보다 두 살 많은 그는 백미러를 통해 눈이 마주치자 어깨를 움츠렸다.
'아니네. 흠. 그럼 아무도 연관되지 않은 건가?'
다미앙, 기획부, 마케팅부 등 모든 직원이 나연석의 수작에 어울리지 않은 듯했다.
'뭐지? 해외가 아닌 건가?'
해외에 나가기 위해선 무조건 필요한 여권.
그건 회사 장경아 실장의 책상 서람에 고이 모셔져 있다.
"어서 가기나 해."
"넵."
차에서 내린 진호는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 자리를 편 제작진에게로 향했다.
"제가 가장 일찍 왔나 보네요?"
"어, 곧 오실 거야. 팔 들어."
진호는 양팔을 번쩍 들었고, 스태프가 마이크를 달았다.
"그게 진호 네 기타야?"
"범용성 높게 어쿠스틱 기타로 가져왔습니다."
혹시 몰라서 잭도 연결할 수 있는 기타로 가져왔다.
"역시 준비성 좋아."
"그런데 왜 실망하는 표정이세요?"
"내가? 아닌데?"
다시 눈을 가늘게 뜬 진호는 나연석에게 다가갔다.
"오! 왔어?"
"잘 계셨죠? 그래서 오늘 출연자가 누구예요?"
"좋은 사람? 너 내 표정 읽지마. 정말 굴릴 거야!"
나연석이 질겁하며 고개를 돌렸다.
"……쳇."
진호는 혹시나 하며 제작진을 둘러봤지만, 그들 모두 시선을 피했다.
"아니, 곧 만나게 될 텐데 지금 말해 주면 좀 어떻다고……."
"서프라이즈?"
"킁, 알겠습니다. 그럼 전 뭐하고 있으면 돼요?"
"내가 말했잖아. 하고 싶은 거 다 해."
"오프닝에서만요?"
"아니?"
'……내가 이럴 줄 알았지.'
고개를 저은 진호는 제작진이 힘들도록 이곳을 콘서트장으로 만들어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놀고 있을 팬들을 불러 모으면 금세 콘서트장이 열릴 테지만, 이후 수습이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저 악랄한 제작진은 오히려 그걸 좋아할지도 몰랐다.
끌고 온 캐리어 위에 앉은 진호는 핸드폰을 들었다.
"캬! 좋다, 좋아."
"아니, 쟤는 어떻게 저런 모습도 화보야?"
"진호야, 옆 좀 봐줘! 나 사진 찍게!"
'이 사람들이 진짜!'
발을 강하게 구르며 고개를 번쩍 든 진호가 옆을 보았다.
"이렇게요?"
"오케이!"
"고개 좀 살짝 들까요?"
"땡큐!"
"으흐흐."
"음흉하게는 웃지 말고!"
'쩝.'
그렇게 한바탕 사진 촬영이 끝나자 나연석이 슬그미니 다가왔다.
"출연자들이 좀 늦네. 그치?"
"선생님들은 아니시죠?"
"왜? 싫어?"
'아니네.'
천만다행이었다.
"그분들이 절 싫어하실 수도 있으니까요."
"에이, 다들 좋은 분…… 들이셔."
"호오, 카메라 감독님. 이거 무조건 편집 막으세요."
"편집은 내가 하는 거다, 진호야!"
"제 입을 편집하실 수는 없겠죠."
"뭐 먹고 싶니!"
진호는 나연석과 옥신각신하며 분량을 뽑아냈다.
그러다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너무 안 오는데?'
진호 자신이 일찍 온 것도 있지만, 현재 시각은 촬영시작 10분 전이다.
'어? 설마?'
진호는 나연석을 보았다.
"설마……."
"응?"
"저 혼자 여행 가는 거예요?"
"아, 그건 아냐. 몇 명하고 같이가."
"그럼 다행이고요."
'응?'
안심하며 광화문 광장을 둘러보러 고개를 돌리던 진호는 다급히 제작진의 뒤편을 보았다.
그리고 경악했다.
"허어억!"
진호는 재빨리 몸을 바로 세웠다.
"아, 안녕하십니까!"
"오우! 반가워요. 나 알아요?"
큰 성량이 인상적인 중년인.
한국 록의 계보를 다시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록 밴드 KD 밴드의 보컬, 김대원이었다.
"예! 팬입니다!"
"오, 다행이다. 김대원이에요. 하하하."
"이진호입니다! 말 편하게 해 주십시오!"
진호는 다시 한번 허리를 숙이며 나연석을 노려봤다.
한 번쯤 됐으면 싶었지만, 이렇게 볼 줄은 몰랐다.
'귀띔이라도 해 주지!'
심장이 쿵쿵 뛰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경악스러운 일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오! 대원이!"
"오, 이열이 형!"
나이열.
음흉한 매의 눈으로 유명한 작곡가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진호는 다시 나연석을 보았다.
'진짜 음악 여행입니까? 뭔 일이래?'
믿고 싶지 않지만, 이 정도가 되면 믿어야 할 듯싶었다.
"오! 하이, 하이. 나 알지?"
"그럼요."
"캬 우리 이 배우, 아니 이 가수가 나를 다 알아봐 주는구나. 감격이다, 진짜. 봤지? 날 무시하는 건 너희들뿐이야. 듣고 있냐, 직원들!"
나이열은 텐션이 참 높은 것 같았다.
그래서 참 다행이었다.
진호는 3번 카메라를 향해 삿대질을 하고 있는 나이열을 외면하며 김대원을 보았다.
"실례된 말이지만, 괜찮으시겠어요?"
진호는 김대원이 이런 식의 리얼리티 여행 예능 프로그램에 처음 출연하는 걸로 알고 있다.
"괜찮아요, 괜찮아.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요?"
호탕하게 웃는 그의 어깨와 목소리가 굳어 있다.
긴장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죽일 수도.'
그 어떤 상황에서도 믿으면 안 될 존재가 나연석이다.
최악에 최악을 가정하고 움직여야 했다.
'그런데 출연자는 이게 끝인가?'
진호는 제작진들 앞에서 이쪽을 향해 싱글벙글 웃고 있는 나연석을 흘겨봤다.
'시종 맞네.'
거의 아버지뻘인 김대원과 나이열이었다.
시종 노릇을 하라는 게 맞았다.
'한번 해보자는 거지?'
"그런데 나 피디, 출연자는 이게 다야?"
나이열이 뭔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대원도 하지 않았지만, 동의하고 있었다.
남자 세 명만의 여행.
물론, 나쁘다는 건 아니다.
남자들만 있으니 서로 편하게 여행할 수 있다.
"하긴, 이렇게 미남들만 모아 뒀으니, 여성 시청자들은 좋아하겠지. 모두 훈훈한 비주얼이잖아."
역시 MC 경력이 짙은 나이열다웠다.
능청이 수준급이었다.
"우리야 아저씨니까 그렇다 쳐도 여기 이 가수, 아니 진호는 어쩔 거야?"
뜬금없이 공격을 받은 진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 괜찮은데요? 그리고 연애전 선 같은 건 옛날 코드예요, 작곡가님."
"그, 그래? 그랬어? 으하핫! 우리 진호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언제부터 '우리 진호'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밉지 않았다.
그의 두 눈에 서린 귀여운 욕심도 말이다.
'곡 작업을 같이하려는 건가? 음?'
진호는 시선이 느껴져서 나연석을 보았다.
나연석이 불길하게도 말없이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나이가 많거나 어린 분인가 보구나. 나중에 합류하겠네.'
나연석의 표정은 진심으로 무언가를 꾸미는 게 아니었다.
"그럼 이동하시죠."
"잠시만요!"
진호는 다급히 사람들을 불러 세웠고, 사람들은 진호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진호는 나연석을 보며 눈을 가늘 게 떴다.
"그래서 이번 촬영 콘셉트가 뭔데요?"
"……흠, 뭐 어차피 다들 도장을 찍었으니 이젠 말해도 되겠네요. 여행 콘셉트는 간단합니다. 다섯 명이 노래를 하는 영상을 찍어 SNS에 올리고, 그 조회수만큼 저희가 여행 경비를 드립니다. 그리고 그 여행 경비를 가지고 최종 목적지까지 도착하시면 됩니다."
"……응?"
"엥?"
사람들은 의아해 했다. 아니 이해를 하지 못했다.
"뭐야, 진짜 호화 힐링 여행이야? 제작비 감당되겠어?"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호도 마찬가지였다.
진호 자신은 SNS 팔로워 숫자가 천만이 넘었다.
'왜 이런 일을……. 아! 잠깐, 설마…… 아니겠지?'
뭔가를 눈치첸 진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연석이 그런 진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물론 그냥 올리면 너무 치트키겠죠. 그래서 여러분은 영상을 올릴 때, 얼굴을 가리셔야 합니다. SNS 계정도 저희 제작진이 미리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최종 목적지는 그리스! 출발지는 이곳 한국입니다. 뮤지션들끼리 떠나는 힐링 음악 여행! 특별히 한국에서의 영상은 나이열씨 계정으로 올리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순간 시끄러운 광화문 광장이 고요해진 것 같았다.
"……뭐, 뭐라고요?"
"야! 나 피디!"
'아, 멱살 잡을까?'
진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