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7권 22화
제니퍼 로제는 시사회 다음 날 아침에 중국으로 향했다.
떠나며 진호의 볼에 입을 맞추어 한바탕 한국을 뒤집어 놓은 채 말이다.
겨우겨우 무마한 진호는 음악 방송 및 음악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가수로서의 스케줄을 소화해 갔다.
"지 실장,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PJY의 대표이사 박재영이 서글서글한 인상을 지닌 중년인을 붙잡았다.
기획 3팀의 실장 지경철.
PJY라는 간판을 달았을 때부터 박재영 자신과 함께했던 사람이다.
"내가 잘못했거나 부족하게 대한 점이 있으면 말해 주세요. 고치겠습니다."
"그럼 스톡 옵션 주실 수 있습니까?"
"그건……."
"농담입니다. 저만의 작품을 만들어 보고 싶어서 이러는 겁니다. 대표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가수, 아이돌을 키우는 건 이 바닥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 꾸는 일이다. 그러나 박재영은 그걸 인정할 수 없었다.
지경철은 지난 15년간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일해 온 사람이었다.
"내가 개국공신 대우를 안 해 줘서 이러는 겁니까? 아니면 기획 3 팀으로 보내서 이러는 겁니까? 말했잖아요. 기획 3팀은 좌천이 아니라고요."
지경철은 원래 기획 1팀의 실장이었다.
완벽히 뜬 스타들만 관리하는 기획 1팀.
"보세요. 제 말대로 지금 상황이……."
"엄밀히 말하면 제가 개국공신은 아니었기 때문에 입사할 때부터 그런 건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
맞다.
PJY의 개국공신은 전신인 태진기획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모두 부장 및 이사급 대우를 받고 있었다.
지경철은 말이 실장이지 기업으로 치자면 과장밖에 안 되었다. 직급도 기획 3팀의 실장이지, 기획부의 부장이 아닌 것이다.
"지금 어떤 상황인 줄 알면서도 이러면 곤란하잖아요. 아래 직원들이 힘들어하는 건 보이지 않아요?"
모델 파트가 재단장을 하고 있다.
그 때문에 마케팅과 홍보, 기획팀들이 바빠진 상태였다.
"상황이 안정되면 모델 파트를 다시 3팀으로 이관한다고 말했잖아요."
원래 모델 파트는 기획 3팀의 업무였다.
박재영은 PJY의 총력을 기울이고자 그 업무를 기획 1팀으로 이관 했다.
"독립은 이 바닥에서 흔한 일 아닙니까. 그러니 이만 보내 주십시오."
"……정말 냉정하군요. 지 실장이 이런 성격일 줄은 몰랐습니다."
박재영은 배신감 어린 눈빛을 지었다.
지경철은 사내에서 좋은 상사, 좋은 아버지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부하 직원들의 사소한 경조사까지 모두 챙기는 꼼꼼하고도 자상한 상사, 그게 지경철이다.
"저도 이런 성격일 줄은 몰랐습니다. 여태까지 이 못난 사람 데리고 일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끝까지 내 적이 되겠다는 거군요."
박재영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러나 지경철은 흔들리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수고 많았어요. 나가 보세요."
고개를 숙인 지경철이 나가자 박재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그는 언제부터 이렇게 틀어져 버렸는지를 고민했다.
* * *
PJY 사옥을 나온 지경철은 바로 인천공항으로 향했고, 그가 다시 나타난 곳은 일본 도쿄의 나리타 공항이었다.
웅성웅성, 와글와글.
입국 게이트를 빠져나온 지경철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한 여성을 발견하곤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장 실장, 아니 장 부장이라고 불러 줄까?"
장경아 실장이었다.
그녀는 최대한 정중하고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큰 결단을 내려 주셔서 감사 합니다, 지 실장님."
"뭘, 개국공신 아들내미가 기획 1 팀 실장 자리를 차지했을 때부터 죽지 못해 사는 거였어. 자식들만 아니었으면 그때 때려치웠다."
"박 대표는 뭐라고 합니까?"
"진부한 소리지. 이제부터 적이라고 하더라."
"역시……."
장경아 실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멍청한 사람입니다, 박 대표는. 미국 진출에 있어 실장님만큼 노하우가 쌓인 인재가 어디 있다고."
지경철은 씁쓸히 웃었다.
그는 한때 한국에 걸 그룹을 열풍을 불러 일으켰던 그룹의 미국 진출에서 박재영의 손과 발이 되었던 사람이다.
그 그룹의 미국 진출이 실패로 끝났고, 꽤 오랜 시간이 흘러 와이즈가 데뷔하자마자 대박을 치기 무섭게 지경철은 기획 3팀으로 좌천되었다.
그때 한 차례 회사가 뒤집어 졌었다.
와이즈를 기획한 사람이 지경철 그였기 때문이다.
"옛날이야기는 이제 그만해."
"하지만 그건 모두 박대표의 잘못이었잖습니까. 지 실장님의 조언을 듣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한……."
"그만하라니까. 그보다 괜찮겠어? 이거 걸리면 뭐 된다."
장경아 실장은 혀를 찼다.
"장담컨대 박 대표는 항의조차 못합니다. 투정은 부리겠지만."
"……그 정도였어?"
지경철은 깜짝 놀랐다.
"만나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가시죠. 차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어, 그래."
그렇게 둘은 HU 에이전시 아시아 총괄지사로 향했다.
지경철은 거대한 HU 에이전시 아시아 총괄지사의 건물 크기에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층수는 15층밖에 되지 않았지만, 옆으로 엄청 넓었다.
땅값 비싸기로 유명한 시부야 한복판에서 말이다.
"앞으로 지 실장님이 소속될 HU 에이전시 아시아 총괄지사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내가…… 이런 곳에 소속된다고? 너희 팀이 아니라?"
"소속 자체는 아시아 총괄지사입니다."
"……허, 살다 보니 내가 글로벌 기업에도 입사하네."
"이쪽입니다."
장경아 실장은 그를 총괄지사 지사장실로 안내했다.
지사장실 안에는 지사장과 다미앙, 진호가 앉아 있었다.
지사장이 벌떡 일어났다.
"오! 이분이 다미앙 치프 디렉터의 새로운 수익 모델을 담당해 줄 사령관이시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다미앙은 올해 초 인사 이동 때 치프 디렉터가 되었다.
"아, 예예."
덩치 큰 백인 중년인이 환대해 주자 지경철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다미앙 토마소입니다."
"한 팀이 된 걸 환영합니다. 이진호입니다."
"지경철입니다."
인사를 나눈 그들은 소파에 앉았다.
심호흡을 크게 한 지경철이 입을 열었다.
"정확히 제가 할 일이 뭡니까? 여기 장 실장에게 듣기는 했지만, 명확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명확한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장 실장의 제의를 허락했을 만큼 지경철은 지친 상태였다.
다미앙이 입을 열었다. 그는 지사장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영어로 말했다. 지경철도 영어를 할 줄 알아서 대화를 하는데 무리가 없었다.
"아이돌 그룹을 만드시면 됩니다. 그에 관한 모든 권한을 드리겠습니다."
"……예, 예산 집행까지 말입니까?"
"예산뿐만 아니라 인적지원까지 모두. 여기 총괄지사장님께서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사령관이 되시는 겁니다."
"헉!"
지경철은 경악했다.
"대체 저의 뭘 믿고……."
"장경아 실장님이 적극 추천해 주셔서요."
진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이진호 배우가 여긴 왜?"
"제가 그룹 육성에 들어가는 돈을 투자해서요."
"예?"
"No, no. 뮤즈 혼자 투자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지사장이 눈을 가늘게 뜨자 진호는 씩 웃었다.
"아, 죄송합니다. 정정할게요. H U 에이전시가 오백억. 그리고 제가 백억을 투자 하는 겁니다. 아, 디올 차이나에서도 백억을 투자할 예정입니다."
지경철은 다시금 경악했다.
"치, 칠백억짜리 프로젝트라고요?"
"부족하시다면 다른 패션 브랜드도 끌어올 수 있습니다. 성공한 아이돌 그룹들을 통한 브랜드 홍보를 생각하면 백억 이백억 정도는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으니까요."
"……자, 잠깐 그 말은?"
"예. 지경철 실장님께서 만드실 그룹의 스폰서 업체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디올, 지방시, 겐조 등 제게 붙은 6개의 패션 브랜드 입니다. 그러니 실장님은 일본에서 그룹을 만들지, 중국에서 그룹을 만들지만 정하시면 됩니다."
"그 무슨……."
평균적으로 아이돌 그룹 하나를 데뷔시키기까지 대략 백억 정도가 들어간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는 기획사의 꼼수에 불과했다.
데뷔를 못하고 기획사에서 방출 되는 연습생에게 들어간 돈과 데뷔를 위해 열심히 연습하는 연습생들에게 들어가는 돈까지 데뷔한 아이돌 그룹의 육성비로 잡아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중에게 유명한 아이돌 그룹임에도 아직 정산을 받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종종 나오는 것이다.
"HU 에이전시는 현재 여기 다미앙 씨를 통해서 새로운 수익 창출 모델을 만들어 보려 투자를 하는 겁니다. 만약 성공을 한다면……."
"공신이 되겠군요……."
"전 세계에 있는 HU 에이전시 지사에서 지 실장님을 모셔 가려 전쟁을 벌이게 될 겁니다."
지경철은 전율했다.
지금 자신은 실패하고 싶어도 실패할 수 없는 프로젝트의 사령관이 된 것이다.
진호가 말한 6개의 패션 브랜드가 어떻게든 지경철 자신이 만든 아이돌 그룹을 띄우려 노력할 테니 말이다.
그는 진호를 보았다.
"이 프로젝트는 이진호 배우 덕분에 발족된 것이군요."
진호는 살짝 놀랐다.
거기까지 읽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예. HU와 6개 패션 브랜드는 제게 종신 계약서를 내밀고 싶어서 안달이니까요."
"괘, 괜찮습니까?"
순간 진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 앉았다.
'흡!'
"실패한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그를 통해 LVMH의 회장 자리를 노려봐도 되는 거니까요."
"……예?"
"호오, 피에트로 베타리 CEO와 경쟁자가 되려는 겁니까?"
"이런, 그때가 되면 HU를 잘 부탁드립니다, 뮤즈."
'……다들 미친 건가?'
너무도 차원이 다른 스케일에 지경철은 이들과 손을 잡은 게 후회가 되었지만, 이미 PJY를 나온 후였다.
그는 서로 덕담을 하는 세 명을 멍하니 볼 수밖에 없었다.
지경철과 진호, 장경아 실장은 HU 에이전시를 나와 거리를 걸었다. 다미앙은 일 때문에 총괄지사에 남았다.
"지 실장님은 일본 아이돌이 왜 세계적으로 성공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섹스 어필이 현저히 부족합니다."
지경철은 생각할 것 없다는 듯 답했다.
"외모, 목소리, 노래. 그 어디에서도 이성적으로 어필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품 안의 자식일 뿐입니다."
진호는 눈을 빛냈다.
정확했다. 특히 뒷말이 말이다.
"일본 여자 아이돌은 경쟁 시스템을 차용하는데도요?"
그들은 분기마다, 길면 반년마다 투표를 통해 소위 메이저 방송과 메이저 대우를 받을 멤버를 선별 했다.
"말이 경쟁이지 일본에서 여자 아이돌은 프린세스 메이커의 현실판일 뿐입니다. 부모가 어화둥둥 과보호로 다루는 딸들이죠. 대중이 아니라 마니아만 타깃으로 노려선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남자 아이돌은 그런 시스템을 차용 하지 않는다지만, 일본인에게만 매력적일 뿐입니다."
남자치곤 작은 키에 왜소한 체구, 마른 몸매.
엄밀히 따지고 보면 보편적인 취향은 아니다.
진호는 눈을 빛냈다.
맥락을 정확하게 짚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경철은 말을 이어 갔다.
"아무리 근육질 몸을 만들어도 일본인만 남자답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인만 꽃미남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정확히는 강제적으로라도 남자답다고 강요할 수 있는 요소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 여기군요."
지경철의 뒷말을 끊은 진호는 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5층 규모의 제법 큰 건물이었다. 그들은 5층으로 향했다.
진호는 계단을 오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불안하시다고요? 그런 사람들만 모았을까 봐?"
"……그렇습니다."
"흠, 확실히 일본을 타깃으로 한 아이돌을 만든다고 하면 충분히 가질 수 있는 걱정이겠군요. 하지만 그건 너무 이른 걱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진호는 단단히 닫힌 5층의 철문을 열었다.
그리고 곧게 뻗은 복도 양 옆에 세워진 문 중 하나를 열고 들어갔다. 그제야 쿵쿵쿵 음악 소리가 셋의 귀를 강타했다.
"……헉! 모두 차렷-!"
우르르르르!
다섯 명의 선남선녀들이 다급히 한쪽 벽면에 열을 맞추어 섰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음악 소리가 강하게 귀를 때리지만, 지경철은 그에 신경 쓸 수 없었다. 아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 이게……."
최소 신장 160센티미터. 외모도 수준급이다.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멋진 놈 옆에 멋진 놈.
모두 땀에 젖은 민낯이지만, 화장을 했을 때의 얼굴을 예상하지 못 할 정도로 지경철의 내공은 얄지 않았다.
그런데 그중 몇 명은 지경철도 아는 얼굴이었다.
PJY에서 길거리 캐스팅을 하려다가 실패한 이들이었으니까.
지경철은 다급히 진호와 장경아 실장을 보았다.
그가 생각한 수준의 퀄리티의 연습생이 아니었다.
진호가 입을 열었다.
"HU는 모델 에이전시입니다. 브라질의 오지에서도 세계적인 모델을 발굴해 내는 시야와 영업력을 갖춘 곳이죠."
"하, 하지만 저중 몇 명은 쟈니즈에서도 캐스팅을 실패했습니다. 모두 꿈이 확고하다고 했는데?!"
쟈니즈, 일본에서 최고의 남자 아이돌이 되고 싶으면 쟈니즈에 가라는 말이 나오는 일본 최고의 기획사 중 하나였다.
"그건 그들이 확실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강요만 했기 때문이죠. 꿈을 계속 꿀 수 있는 방도 하나 제시하지 않은 채."
진호는 이 연습실의 맞은편 문을 가리켰다.
다급히 달려간 지경철은 문에 난 창문을 통해 투영되는 광경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 이건……."
강사로 보이는 이가 칠판에 온갖 수학 기호들이 적어가며 수업을 하고 있고, 잘생기고 예쁜 다섯 명의 아이들이 수업을 받고 있었다. 지경철은 다급히 그 옆의 문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도 다섯 명의 남녀들이 수업을 받고 있었다.
그 옆도, 그 옆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대체!"
"의사, 검사, 변호사, 판사, 경찰 등등. 그 확고한 꿈의 직업 앞에 스타라는 개념이 붙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론 예쁘고 잘생기고 실력이 좋으면 되겠죠. 하지만, 더 빠른 지름길이 있습니다."
지경철은 다급히 진호를 보았다.
"대, 대중에게 얼굴을 알리는 것?"
진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데뷔 후 3년. 그게 이 아이들의 계약 기간입니다. 이후 재계약을 할지, 본래의 꿈을 이어 갈지는 모두 이 아이들의 선택입니다. 그럼 이제 운동 선수를 꿈꾸는 아이들을 보러 갈까요?"
지경철은 입을 쩍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