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7권 20화
7. 다음 단계
"도착했어."
"으그그!"
기지개를 편 진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축제도 별거 없네요."
"행사가 별거 있겠냐."
"그 지역 대표 축제라기에 먹을 거리도 많고, 놀거리나 구경거리도 많을 줄 알았어요. 하다못해 꽃이 들어간 음식이라도……."
연예인 스케줄의 꽃이라는 축제 행사.
그래서 잔뜩 기대를 하고 갔는데, 음악 방송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 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관객의 연령대와 가족 단위라는 것만 달랐다.
물론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아니, 환호해 줘서 무척이나 고맙고 행복했다.
하지만, 나머지는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활짝핀 꽃들만 아름다웠다.
"하다못해 꽃으로 향초라도 만들 던가, 어?"
"응? 너 향초 샀잖아."
"아까 켜 보니까 색소를 넣은 것 뿐이더라고요. 향기도 여러가지가 혼합되어 있고. 이게 무슨 특산품이야. 소비자 우롱이지. 봐요, 월터도 실망한 얼굴이잖아요."
진호가 영어로 방금 정 대리와 나눈 대화를 설명해 주자 월터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생전 처음 겪는 한국의 축제였기에 그도 나름 기대를 했었다.
"시끄러워. 내리기나 해."
"췟."
'흠, 그나저나 PJY에서 연락이 없네.'
벌써 5일이 지났다.
그럼에도 마노는 연락이 없었다.
'하긴 내부 회의가 길어질 수밖에 없나?'
PJY도 JH처럼 지분을 가진 투자자가 많았다.
'이렇게 시간이 길어질수록 얻어 갈 것은 줄어들 테지만, 그건 그 사람들 사정이지.'
박재영이 비즈니스로 생각했으니, 진호 자신도 비즈니스로 생각할 뿐이었다.
'어차피 PJY의 시스템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니까.'
박재영에게 말한 것처럼 일을 조금 더 쉽게 하려고 PJY의 시스템을 노리는 거다. JH에게 전수받은 아이돌 육성 시스템과 노하우만 있어도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아니면 장경아 실장님처럼 PJY 소속사람을 스카웃해도 되고.'
길은 많았다.
어깨를 으쓱인 진호는 차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우우웅!
010으로 시작하는데, 모르는 번호였다.
"……아."
시간을 확인한 진호는 얼른 전화를 받았다.
"잘 도착했어?"
-……와후, 나인 줄 어떻게 알았어?
제니퍼 로제다.
"이쯤에 도착한다고 했잖아."
-역시 기억력이 좋아. 그런데 어디야? 너 안 보여.
"당연히 안 보이겠지. 나 회사야."
-왜?
"응?"
-왜! 얼른 와! 나 피곤해.
"시끄러워. 안가. 나도 피곤해."
-왓 더…… 벌써 사랑이 식은 거야, 지노?
"마중 나오라는 소리를 안 한 네가 잘못한 거지."
-그럼 지금 나와!
"스케줄 잘 소화하고, 시사회 때 봐."
-자, 잠깐 지노! 진!
전화를 끊은 진호는 이쪽을 대단 하다는 듯 바라보는 월터의 시선에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왜요?"
"그 제니퍼 로제를 그렇게 대하는 남자가 있을 줄 몰랐어, 지노."
"친구니까요."
"하긴 친구끼리도 잠자리를 가지기는 하지."
"……하하."
얼굴이 달아오른 진호는 얼른 차에서 내렸고, 월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뒤따랐다.
제니퍼 로제의 방한은 큰 이슈가 되었다.
미국을 제외하고 '지 아이 제인 : 리메이크'가 개봉되는 나라 중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했기 때문이다. 중국 일본 보다 먼저 왔다는 점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국뽕을 한 사발 거하게 마시게 만들었다. 일부에서는 그녀를 친한 미국인이라 부르며 명예한국인으로 위촉해야 하는 거 아니냐 말하기도 했다.
"아뇽하세요. 연예가 TV."
그녀가 머무는 호텔의 로비카페.
보자마자 말하는 그녀의 한국어에 진호는 미간을 좁혔다.
"너 한국어 연습 안 했지?"
"했는데?"
"발음이 파리에서 만났을 때보다 퇴보했는데?"
"그럴 리가……. 한국계 배우 친구들에게 강습 많이 받았어."
"한국계 배우는 미국인이고."
"한국인 아니야?"
"부모가 한국인이지, 그 사람이 한국인은 아니잖아."
"……아."
제니퍼 로제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진호는 모른 척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현재 시각은 아침 8시다.
"시차 적응은 된 거야?"
"아니, 영국 신사라는 미튜버와 스케줄이 있어. 식사 겸 인터뷰."
"아, 그 사람."
진호는 한국인과 결혼한 영국인을 떠올렸다.
그는 방한하는 영미권 스타들과의 인터뷰를 주력 콘텐츠 중 하나로 삼는데, 한국어가 한국인 수준이고, 주 활동 무대도 한국이다.
"같이 갈래?"
"아침부터 삼겹살은 좀……."
영국 신사는 미국 영국 스타들과 식사 인터뷰를 할 때, 거의 삼겹살 부터 먹였다.
삼겹살이 호불호가 적은 한국의 대표 요리기 때문이다.
"아니면 나 사고 칠거야."
"그럼 네 매니저가 혈압 올라서 기절하겠지."
"응? 응? 나 한국에 혼자 왔는데, 이대로 내버려 둘 거야?"
"……하아."
여성의 처량한 눈은 정말 무서운 무기였다.
"일단 연락해 보고."
"이예!"
'이걸 쥐어박아 말아?'
갈등을 마음 한구석을 밀어 놓은 진호는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회사는 뭘 물어보냐는 듯 바로 허락했다.
정 대리와 최 실장, 월터가 달려 왔다.
가볍게 분장을 한 그들은 영국 신사와의 식사 인터뷰 장소로 향했다.
'삼겹살 집 맞네.'
먼저와 기다리고 있던 영국 신사와 그의 스태프들이 진호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
"이, 이진호 씨?"
"동행자가 있다고 해서 지 아이 제인의 다른 출연자인 줄 알았는데……."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던 제니퍼 로제가 진호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 모습이 너무 다정해 보여서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놀랐다.
"뭐라고 말하는 거야?"
"내가 와서 놀란 거야."
"오-."
퍽!
짓궂은 미소와 함께 그녀의 팔꿈치가 진호의 배를 때렸다.
'윽?'
"처음 뵙겠습니다. 이진호입니다."
"아, 네네네. 미튜브에서 영국 신사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허쉬입니다. 음악 정말 잘 듣고 있습니다. 이쪽은 놀리."
"가끔 야식이 고플 때, 잘 보고 있습니다."
영국 신사의 다른 주력 콘텐츠는 영국에 있는 가족 지인들과 함께 하는 먹방이다.
"하하하, 영광입니다. 저와 아내도 새로운 요리 도전 할 때는 꼭 진호 씨 미튜브를 찾아봅니다. 구독도 했습니다."
"아니, 르 꼬르동 블루를 졸업하신 아내분께서요?"
"어? 아세요?"
"아마 아버님 취향이 뭔지도 알 겁니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한국어라 알아듣지 못한 제니퍼 로제가 볼을 부풀리자 그들은 얼른 자리에 앉았다.
허쉬가 놀란 표정으로 말해 왔다.
"제니퍼 로제에게 한국인 친구가 있을 줄은 몰랐어요. 그것도 한국이 낳은 최고의 모델이자 배우, 가수인 이진호라니……."
제니퍼 로제가 괜찮겠냐는 듯 진호를 봤다.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고, 제니퍼 로제는 그 일화를 설명해줬다. 인터뷰는 영어로 진행되었다.
"The J!"
"그렇죠. 그 험한 다인코프 훈련소에 마른 동양인이 나타나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처음에는 용병을 하기엔 너무 아까운 얼굴이야! 라고 생각했죠."
"저도 이 여자가 그곳에 있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의외로 비율이 안 좋더라고요."
퍽!
제니퍼 로제의 감정이 담긴 일격이 진호의 어깨를 때렸다.
"악!"
"하하하하하."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 고기는 제가 구울게요. 남에게는 맡기지 못하는 성미라서."
셰프들이 극찬한 불 조절 능력을 떠올린 허쉬는 얼른 집게를 넘겼다. 진호는 불판이 최적의 온도로 달아오르기를 기다렸다.
'지금!'
치이이이익!
확 퍼지는 고기의 냄새에 잠시 사람들이 대화가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진호는 삼겹살이 다 구워지자 그녀의 앞 접시 위에 삼겹살 한 점을 놓고, 그 위에 소금을 살짝 뿌렸다.
"먹어 봐."
"아, 응."
인터뷰에 정신이 팔린 그녀는 생각 없이 삼겹살을 입에 넣었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사각 씹는 것과 동시에 녹는 고소한 지방의 맛과 부드러우면서도 쫀쫀한 살코기의 야성미 넘치는 육즙을 짭짤하면서도 깔끔한 소금이 품으며 입안을 농락하고 있었다.
"왓 더…… 이, 이건 뭐야?"
"삼겹살."
태연한 진호의 대답에 그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제니퍼 로제는 테이블을 강하게 두드렸다.
"삼겹살 본고장의 맛은 이렇게 대단한 거였어? 미국에서 파는 삼겹살은 싸구려 등급만 썼던 거야?"
진호는 씩 웃었다.
"한국 돼지고기가 맛있기는 하지."
"말도 안돼! 난 200그램에 50달러가 넘는 곳에서 먹었다고!"
"그래?"
진호는 자신이 구운 삼겹살을 먹곤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평범한 한국의 맛인데?"
웻 에이징과 드라이 에이징을 제대로 했다.
"한국은 천국이야?"
미국인으로서 수많은 고기를 먹어 오고, 성공한 이후 웬만한 맛집은 다 가본 그녀였다. 장담컨대 그녀가 먹어 본 돼지고기 중 이게 최고였다.
둘의 대화에 의아해하며 고기를 먹은 허쉬는 헛숨을 삼켰다.
"……와우, 어메이징. 여기 고기 괜찮네요."
"그렇죠? 아, 이럴 땐 소주가 있어야 하는데."
"시킬까요?"
허쉬는 한국어로 말했지만, '괜찮다.'라는 단어를 사전적으로만 알고 있는 제니퍼 로제로서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삼겹살로 가볍게 배를 채운 그들은 경복궁을 한 바퀴 둘러 본 다음 한국의 대표 요리 중 하나인 파전과 막걸리를 먹었다.
막걸리의 크리미한 맛이 취향이었던 것인지 그녀는 넙죽넙죽 마시다가 약간 취해 버리고 말았다. 다음 스케줄을 위한 듯 조절해서 마시기는 모습을 보였지만, 흥이 오른 그녀는 굉장한 장난꾸러기가 되었다.
다행이 눈이 풀리거나 혀가 꼬이지는 않았지만, 촬영이 끝났음에도 그녀의 흥은 가라앉을 줄 몰랐다.
"나 이런 촬영 너무 좋아! 왜 미국에는 이런 인터뷰가 없는 거지? 와! 저거 예쁘다!"
제니퍼 로제는 길거리에서 장신구를 파는 좌판으로 달려갔고, 매니저는 놀라 펄쩍 뛰며 재빨리 뒤 따랐다.
진호는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지금 당장 사라진다고 해도 찾을 자신이 있기 때문에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지노. 3시, 7시, 12시 방향. 카메라."
월터가 말하자 진호는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서부터 파파라치가 따라붙었다.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아이 쇼핑을 하는 그녀를 향해 진호가 입을 열었다.
"다음 스케줄은 뭐야?"
"6시에 연예가 TV와 인터뷰, 그리고 클럽! 한국 클럽에도 가 보고 싶어."
"너 내일 시사회잖아."
"내가 왜 이틀이나 먼저 한국에 왔다고 생각해? 오늘 왔어도 됐는데 말이야."
뜨겁게 타오르는 그녀의 눈으로 응시해 오자 진호는 입맛을 다셨다.
"첩보물 좀 찍겠네……."
"응?"
"파파라치 붙었어. 저기, 저기, 저기. 인사 할래?"
"어디? 안 보이는데?"
"가장 가까운 곳은 저쪽 삼십 미터 밖, 차에서 찍고 있어."
"……와후, 슈퍼 솔져야? 그게 느껴져?"
"내 경호원이 군인이었지."
진호와 제니퍼 로제는 어깨동무를 하며 한 곳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녀의 매니저가 깜짝 놀라 둘이 응시하는 방향을 보았다.
우우웅!
전화가 왔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진호 씨.
장경아 실장이었다.
-연예가 TV에서 제니퍼 로제와 함께 출연해 줄 수 있겠냐고 연락해 왔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연예가 TV에서요? 흠."
진호는 제니퍼 로제를 보았다.
고개를 모로 기울이는 그녀는 제법 귀여웠다.
그리고 어차피 오늘 내일 스케줄이 없었다.
4NBS 2TV 부국장님과 약속한 것도 있으니까……
"알았어요. 승낙하겠다고 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스타일리스트 팀을 보내겠습니다.
"예, 수고하세요."
-그런데…….
"네?"
-아닙니다. 수고하십시오.
전화가 끊기자 진호는 피식 웃었다. 장경아 실장이 뭘 물으려고 했는 지 알 것 같았다.
'나와 제니퍼는 연인 관계일까?'
그런 것치고는 서로에게 너무 쿨 하다.
"왜 그래?"
"아냐. 가자. 서울 볼거리는 아직도 많아."
다시 실소를 지은 진호는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