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7권 18화
대기실은 개인 실이었다.
방송국 측에서는 고맙게도 개인실을 배정해 주었다.
안으로 들어온 진호는 문이 닫히자마자 재준을 향해 주먹을 내밀었다.
툭!
둘의 주먹이 부딪쳤다.
걸 그룹들은 놀랍게도 재준도 알아 봐주었다.
그래서 재준도 그녀들과 악수도 하고, 사진도 찍고, 싸인도 받을 수 있었다.
"에휴. 걸 그룹이 그렇게 좋니?"
한심하다는 듯한 여성 직원들의 눈빛에 진호의 눈에 불이 켜졌다.
"남자라면 걸 그룹!"
재준의 눈에도 불이 켜졌다.
"걸 그룹을 사랑하지 않으면 남자가 아니다!"
진호와 재준은 어깨동무를 하며 입을 열었다.
"워워워! 친구여!"
여성 직원들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얼굴이 못생겼으면 욕이라도 할 텐데, 너무 잘생기니 이런 한심한 모습마저도 그림이었다.
"시끄러워, 앉아!"
"넵!"
최 실장의 외침에 냉큼 소파에 앉은 진호는 핸드폰을 켜 코코아 톡 단톡방들에 방금 걸 그룹이 사인해 준 씨디를 든 채 걸 그룹과 찍은 사진들을 올리기 시작했다.
우우웅!
"네, 재정 삼촌."
-진호야, 내 건?
"제가 또 누굽니까? 당연히 받았죠-역시 우리 진호! 오늘 시간 되니?
"모레에 소갈비가 먹고 싶을 것 같아요!"
-그래. 우리 진호가 사 달라는데 사 줘야지. 모레 저녁에 보자?
"넵!"
딱 용건만 말한 재정은 전화를 끊었고, 그사이 단톡방들에는 메시지가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
거의 이재정처럼 자기 싸인도 받았냐, 받지 않았으면 받아다 달라는 내용이었다.
여성들은 모두 남자 아이돌 그룹 명을 외치고 있었다.
쿵쿵쿵!
모두의 시선이 대기실 문으로 향했다.
정 대리가 입을 열었다.
"네, 들어오세요."
달칵 문이 열리며 50대의 중년인이 들어왔다.
눈을 부릅뜬 진호가 벌떡 일어났다.
팀 이진호의 직원들도 급히 일어나 자세를 바로 했다.
"부국장님!"
예능국 부국장이었다.
"아이고! 처음 뵙겠습니다, 이진호 배우. 예능국 부국장 박정호입니다."
진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무려 예능국의 부국장이 자신을 직접 만나러 왔다.
부국장뿐만 아니라 오늘 출연하는 음악 방송의 PD와 스태프들도 뒤에 줄줄이 서 있었다. 놀라서 온 가수들도 있었다.
"이렇게 우리 방송국을 데뷔 무대로 정해 줘서 참 고마워요."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부국장이 손을 내밀었다.
정신을 차린 진호는 옅게 웃으며 손을 잡았다.
"피디님께서 섭외 전화를 주실 때 개인 실을 배정해 주신다고 하셔서요. 낯을 가리는 제게는 너무 큰 제안이라서 이 방송국을 데뷔 무대로 택하게 됐습니다."
데뷔 무대 때문에 지상파 3사에서 연락이 왔다.
자신들 방송국에서 데뷔 무대를 가져 달라고 말이다.
이 주의 이슈를 모두 가져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진호는 단순히 방송일이 가장 빠른 이 방송사를 택한 것이지만, 사회생활에서 그런 것까지 말 할 필요는 없었다.
"오! 그랬습니까?"
부국장이 잘했다는 듯 PD를 보았다.
PD는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다시 진호를 본 부국장은 허허롭게 웃었다.
"그런데, 이 배우."
"예, 부국장님."
"예능을 잘 안 하시던데, 이유가 있습니까?"
부국장이라는 높은 사람이 이렇게 직접 찾아온 이유가 이 때문인 것 같았다.
"아, 죄송합니다. 그동안 재충전의 시간을 갖고자 바깥활동을 자제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이렇게 가수 데뷔도 하게 됐으니……."
말을 줄인 진호는 부국장의 눈을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허허헛! 그래요. 불편한 점이 있으면 연락해 주세요."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리겠습니다."
"허허허허헛!"
진호의 어깨를 두드린 부국장은 만족스러워하며 돌아섰고, 진호를 향해 고맙다는 눈빛을 보낸 PD와 스태프들이 얼른 뒤따랐다.
진호는 부러워하며 돌아서는 아이돌과 그들의 스태프들에게서 시선을 떼며 문을 닫는 정 대리를 보았다.
"정 대리님, 이 방송국 예능 중에 제가 출연할 만한 예능이 있을까요?"
"음악 예능도 있고, 여행 예능도 있고, 여러가지 있지. 그 프로그램들 모두 인지도가 좀 없을 뿐이지만. 그런데 그건 왜 물어?"
스케줄은 기획부의 일이다.
"이제 스케줄 매니저나 카운슬링 매니저로 진급하시라고요."
"뭐? 야, 그건!"
"아, 몰라요. 다음 주 회의 때 안 건 올릴 겁니다. 그렇게 알고 계세요."
정 대리와 함께한 지 거의 4년이다.
진급을 해도 벌써 해야 했을 정 대리지만, 그동안 계속 드라이빙 매니저로 남은 건 그가 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진호 자신이 가수라는 영역까지 넘보게 되면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게 될 예정이다. 그가 홀로 고생하는 것은 보기 싫었다.
"끄으응."
앓는 소리를 내는 그를 무시한 진호는 최 실장을 보았다.
"가수들에게는 어떤 순서로 인사 해야 돼요? 연차? 나이?"
연차가 적은데 나이가 많은 멤버가 있는 팀이나 개인이 있다.
"하긴 가요계 족보가 좀 꼬여 있기는 하지. 팀 데뷔 연차가 높은 팀부터 줄줄이 인사하면 돼."
"흠. 레오 형처럼 어렸을 때 데뷔 했다가 공백기를 가진 후 그룹으로 데뷔한 사람이 있어도요?"
지금도 몇 개의 방송사에서 행해지는 오디션 프로그램.
아쉽게 데뷔 순위 밖에서 탈락해 몇 년간 연습하다가 팀이나 개인으로 데뷔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룹 명으로 나온 앨범이나 음원 발매일이 가요계 선후배의 기준이야. 어차피 네가 인사 안 한다고 뭐라 할 간 큰 놈들도 없을 테지만."
"에이, 제가 뭐라고. 아무튼 알았어요."
"왜? 지금 인사하게?"
"네! 그리고 리허설도!"
"리허설!"
재준의 눈도 반짝였다.
리허설, 듣기로 객석에 앉아 지켜 볼 수 있다고 했다.
걸 그룹의 무대를 코앞에서 볼 수 있다는 소리다.
최 실장의 눈이 한심함으로 물들었다.
"……그래, 가라. 가. 방해하지 말고. 아니, 정 대리가 좀 봐줘."
"하하, 예."
"다녀오겠습니다! 재준아, 앨범 챙겨!"
"네, 형!"
'에라이.'
최 실장의 속말은 오늘 이 자리에 있는 팀 이진호 직원들이 속으로 하는 말과 똑같았다.
* * *
다행히도 성격이 모난 사람들은 없었다.
'아니, 모날 수가 없다고 해야 하나.'
가수들이 제법 모이자 별세계가 되어 버린 복도를 걷던 진호는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헉! 안녕하십니까, 이진호 배우 님! 빅스비의 매니저 송창섭이라고 합니다. 저희 빅스비 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셋, 둘! 안녕하십니까! 빅스비 입니다!"
생전 처음 보는 남자 아이돌의 인사를 시작으로 만나는 가수들마다 명함을 안겨 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들의 우렁찬 인사에 대기실에서 뛰어나온 가수들 때문에 대기실에 들어갈 틈도 없었다.
'예상을 하긴 했지만, 작곡가 위상이 엄청나긴 엄청나구나.'
작곡가, 드라마나 영화로 치면 메인 작가와 비교할 수 있는 존재였다.
최 실장의 말은 틀린 게 아니었다.
'물론…….'
"캬! 난 그 하우스 힙합이 크로스 된 노래가 제일 좋더라."
원래는 아이돌 그룹으로 활동하다가 솔로가 된 남자가수가 손수 음료수를 내주며 칭찬했다.
진호는 일반적인 발라드나 락뿐만 아니라, 힙합과 아이돌 음악도 작곡했다.
대중적인 장르에 속한 모든 음악이 진호의 앨범 속에 있고, 그중 10곡을 진호가 만들었다.
힙합이나 아이돌 음악은 그동안 곡을 함께 작업했던 레오의 영향이 컸다.
첫 데뷔곡이라고 할 수 있는 'Si Tu'.
특히 양진혁이 줬던 JH의 곡을 들은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이렇게 다양한 장르의 곡을 만들지 않았다면?'
반응은 좀 달라졌을지도 몰랐다.
'여기저기서 들었던 이야기처럼 텃세를 부렸을지도.'
그와 술 약속을 잡은 진호는 리허설 무대로 향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재준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이돌은 의외로 작다?"
"아, 동감. 영상이나 사진으로 볼 때는 정말 커 보였는데……."
작다. 그냥 작은 게 아니라 많이 작다.
남자아이돌 중 173센티미터를 넘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173센티미터.
대한민국 평균 신장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진호와 재준은 그보다 클 줄 알았다.
'얼굴이 작아서 비율이 좋았던 거 구나.'
둘의 뒤를 따르던 장대리는 어이 없어했다
"어려서부터 춤 연습으로 신체를 혹사시켜온 애들인데 크겠어?"
"운동 선수는 크잖아요. 그 근육질인 현이 형도 백팔십 넘는데요?"
진호의 말에 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 대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실망이야? 걸 그룹도 싫어졌어?"
"……하!"
어이없어한 진호가 무슨 말을 하냐는 듯 정 대리를 보았다.
"정 대리님, 걸 그룹은 이야기가 다르죠."
재준이 다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걸 그룹은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축복이고."
"힐링입니다. 모두 다 여신님들이에요."
"이 형님이 뭘 모르시네. 어딜 감히 남자들하고 여신님들을 비교합니까? 작은 게 어때서요? 귀엽고 사랑스럽기만한데!"
"헉! 무대 쪽에서 라라랜드 랜시 님의 목소리가!"
"뭐해? 뛰어!"
이마를 붙잡은 정 대리는 빠르게 멀어지는 둘을 보다가 한숨을 내 쉬었다.
"재준이 놈을 진호에게서 떼어 놓던가 해야지, 원."
둘이 만나기만 하면, 그 의젓한 진호가 망가진다.
그런데 그게 또래의 모습 같아서 보기가 좋았고, 진호의 팬들이나 재준의 팬들도 그런 둘의 모습을 좋아했다.
정 대리는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역시나 걸 그룹 무대는 힐링 그 자체였다.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다 이쪽을 발견하고 윙크를 해 주는 모습에 진호와 재준은 함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이곳이 음악 방송 무대가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이었다면, 뛰어 올라가 뒤에서 같이 춤을 췄을지도 몰탔다.
남자들 무대에서는 핸드폰을 보았다.
굳이 남자들의 땀내 나는 모습까지 눈에 담을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잔뜩 힐링을 한 진호는 차례가 되자 무대에 올랐다.
쿵쿵
'튼튼하네.'
난생처음 밟아보는 음악 방송 무대.
진호 자신이 처음부터 만들어 맺은 결실로 오르는 무대.
콘서트와는 느낌이 좀 달랐다.
'전력으로 뛰어 놀아도 안전하겠다.'
오늘 부를 노래는 그런 노래가 아니지만, 그래도 느낌이 좋았다. 옅게 웃은 진호는 객석을 보았다.
'뭘 또 고맙게 이렇게 보러 와주셨는지…….'
객석에 앉아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는 걸 그룹들을 보자니 절로 미소가 나왔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예능국 부국장과 기대 가득한 음악 방송 스태프들의 눈빛은 마음을 무겁게 했지만 말이다.
"흐음."
그래도 진호 자신의 눈과 [스킬: 셜록의 후예]를 피할 수는 없다.
"얼마나 잘하는지 보겠다는 건가?"
그들은 얼굴엔 그런 감정이 담겨져 있었다.
'빡세게 가 볼까?'
의미심장하게 웃은 진호는 기타를 고쳐 떴고, 곧 봄 향기가 가득한 전주가 흘러나왔다.
칙칙칙칙칙 드럼 하이햇의 귀여운 소리를 수줍은 피아노 소리가 따른다.
경쾌하지만, 기타와 노래가 빠진MR.
진호는 스탠딩 마이크에 입을 가져다대며 옅은 허밍을 시작했다. 그리고 기타 줄을 부드럽게 훑었다.
[스킬 : 옥탑방 스타]의 기타연주와 허밍이 퍼지며 사람들의 귀를 붙잡았다.
단숨에 몰입되어 이쪽을 보는 그들을 향해 진호는 입을 열었다.
"뚫어지게 쳐다 좀 보지마."
연인의 시선이 수줍은 한 남자의 속삭임.
[스킬 : 연신연왕]과 [스킬 : 마음을 울리는 노래] 등 음악과 연기 스킬의 결합이 관객들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진호는 놀라 굳는 그들을, 두 눈에 핑크빛 기류가 차오르기 시작 하는 걸 그룹들을 향해 속삭임을 이어 갔다.
아주 수줍고, 달콤하고, 간질간질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