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7권 15화
"187번! 203번! 211번! 어휴, 참가하신 분이 많으시네요. 빠른 경매 진행을 위해 지금부터 5만 원 씩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35만 원!"
열정이 가득한 여성 경매사의 외침이 경매장을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움찔움찔!
"그림에 관심 있니?"
"……아뇨."
진호는 번호가 적힌 팻말을 무릎 위에 두며 심호흡을 했다.
그런 그의 낯빛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큭큭, 경매가 또 이런 마력이 있지. 필요 없는 물건도 사게끔 만드는 그런 마력."
옆자리에 앉은 레오가 다 안다는 듯 웃었다.
정답이었다.
강렬하고 빠른 경매사의 외침과 너도나도 팻말을 드는 것을 보니 지금 팻말을 들지 않으면 마치 엄청난 손해를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 이거 재밌네. 이러면 피아노 포기 못하는데…… 진짜를 사기 전에 워밍업한다고 생각할까?'
팜플릿을 본 순간 사야겠다고 마음먹은 어느 대가수의 유품.
이런 자선 경매에 나온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또 한편으론 자선 경매에 잘 어울리는 물품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걸 본 순간 진호는 결심했다.
'해금하자.'
"57만 원! 57만 원! 더 이상 안 계십니까?"
5만 원씩 상승하던 경매 입찰 금액이 다시 만 원 단위로 돌아왔다. 50만 원이 넘어가자 대부분의 입찰자들이 경매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스윽!
그때, 미영이 고아하게 팻말을 들었다.
"응? 이모?"
"199번 손님께서 참가하셨습니다! 58만 원 가겠습니다!"
"원래 경매는 뜨내기들이 모두 떨어져 나간 다음에 참가하는 거야."
턱을 살짝 들며 눈웃음을 짓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딱 하나의 생각만 들었다.
'성격 나빠라…….'
처음부터 참가해서 열심히 펫말을 들었던 19번 손님은 무슨 죄인 지 몰랐다.
결국 그림은 62만 원에 미영에게 낙찰되었다.
다음 물품이 나왔다.
"오! 이번 물품은 국내 최고, 세계 최고의 아이돌 그룹 더 원의 리더 레오 씨께서 기증하신 전자 피아노입니다!"
경매사는 피아노의 제품명과 스팩, 그리고 현재 형성된 중고 시세를 옮었다.
"레오씨의 첨언에 따르면 지난 3 년간 이 전자 피아노로 수많은 곡을 작곡했다고 합니다. 새 제품 값을 주고 산다고 해도 아깝지 않을 스타의 애장품입니다! 시작가 80 만 원을 외쳐 보겠습니다!"
진호는 팻말을 들었다.
경매사의 외침이 더 이상 참지 못하게 했다.
"어? 사게?"
"좋은 제품이잖아요. 회사 작업실에 가져다 놓으면 좋을 것 같아요."
"네 회사 작업실에 좋은 거 있잖아."
작업실에 있는 건 천만 원 가까이 하는 고가의 전자 피아노다.
"좋은 건 사 둬야죠. 말리지 마세요. 지름신 왔습니다. 정인비 선수의 골프 세트도 내 거예요."
'엄마 줘야지!'
진호의 눈이 불타올랐다.
"아, 이런 거에 맛 들리면 큰일 나는데."
레오의 한탄에 미영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물론 진호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아오!"
코앞까지 왔다가 사라진 정인비 선수의 골프 세트. 다시 생각해도 너무 아까웠다. 진호는 끝까지 접점을 벌인 50대의 남성을 원망스럽다는 듯 노려봤다.
"돈 많은 분 같은데, 양보 좀 하시지."
일반인은 잘 알지 못하는 명품으로 온몸을 치장한 중년인.
경매 물품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모습만 아니었어도 어떻게든 따라 갔을 거다.
"네가 할 말이냐."
레오가 어이없다는 듯 보았다.
진호가 낙찰 받은 경매 물품은 총 다섯 개.
그중엔 레오의 전자 피아노도 있었다.
상대방을 돈으로 누른 건 진호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내가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에요."
"내로남불 쩌네!"
"으흐흐흐흐."
진호는 조용히 앉아 있는 미영을 보았다.
경매장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힘이 없던 그녀의 두 눈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녀는 총 열 개의 물품을 낙찰 받았다.
"이번에 소개드릴 물품은 오늘 경매에서 최고로 의미 있는 물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경매사가 목이 터져라 외치자 진호는 다급히 앞을 보며 눈을 빛냈다. 진호 뿐 만이 아니다. 오늘 경매에 참가한 사람들 중 반수 이상이 자세를 바로하며 정면의 단상을 보았다.
한 자루의 허름한 만년필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전시되어 있다.
"이번에도 나왔군."
"또 그 사람이 기증한 건가? 저번에는 윤태원의 기타였지?"
"흠. 오늘은 사 볼까?"
'음?'
뭔가 이상한 반응들이었다.
"익명의 독지가께서 의미 있는 곳에 써 달라며 기증하신 이 물품! 80년대, 노래하는 철학자로 불리셨지만 비운에 돌아가신 그분!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워하시는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 고 김광재 씨께서 남기신 이 유품을 소개할 수 있게 되어 참으로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 김광재, 그 어떤 설명도 필요 하지 않은 대가수였다.
현재까지도 따라 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 그만의 감성, 그만의 목소리, 그만의 음악 세계.
"이 유품을 기증하신 익명의 독지가께서는 이렇게 첨언하셨습니다. 이 만년필로 작사작곡하시는 걸 직접 목격하신 것도 모자라 새 만년필을 사 드리며 교환하셨다고 합니다. 이 익명의 독지가의 신원은 본 경매 주관사에서 보장합니다! 시작가 50만 원 외쳐 보겠습니다!"
진호는 당연하다는 듯 팻말을 들었다.
작곡 관련 스킬의 1차 해금 조건 인 '유명 작곡가가 작곡을 할 때 쓴 펜 습득하기.'
음악에 관련된 스킬을 얻을수록 그의 아름답지만 어두웠던, 그렇지만 밝아지고 싶었던 세계관을 더욱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스킬 해금 조건 때문이 아니라도 음악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어떻게든 소장하고 싶은 물품이었다.
'이건 무조건 내거다.'
진호는 어깨 위로든 팻말을 든 손을 그대로 고정시켰다.
그 어떤 액수가 나와도 절대 내리지 않을 생각으로 말이다.
그건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고 김광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나 레오, 미영도 마찬가지였다.
치열한 접전이 시작되었다.
"583만 원! 583만 원! 더 이상 안 계십니까?"
경매장을 둘러본 경매사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곤 크게 외쳤다.
"583만 원! 고 김광재 씨의 유품 인 만년필은 198번 손님에게 낙찰 되었습니다!"
땅!
나무 망치가 나무판을 때리는 소리가 경매장을 울렸다.
"그렇지!"
진호는 주먹을 불끈 쥐었고, 경매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축하의 의미로 박수를 쳐 줬다.
일어선 진호가 그들에게 감사하다는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그렇지는 뭐가 그렇지야, 인마."
"그래. 이건 너무 손해다, 아들."
"으흐흐, 그래도 전 만족합니다."
털썩 자리에 앉은 진호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휘유."
'고 김광재 씨의 유품이 많이 풀려서 다행이지.'
고 김광재의 유품은 의외로 많았다.
그의 친구, 지인, 팬이었다는 사람들이고 김광재에게 받았다며 사인이나 잡동사니를 보여 주는 경우도 많고, 따로 추모관을 지어 백여 점의 유품을 전시했을 정도로 희소성은 그리 크지 않았다. 양진혁도 고 김광재 씨가 썼다는 하모니카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겨우 583만 원에 습득할 수 있었던 거다.
만약 진짜로 밝혀진 그의 유품이 50점 이하였다면 583만 원이 아니라, 5830만 원을 지불했을 수도 있었다.
진호는 이번에도 끝까지 접전을 벌인 50대의 중년인을 보았다.
그가 아니었다면 3백만 원 초반에 낙찰 받을 수 있었다.
그걸 생각하면 아깝기도 하지만, 스킬을 얻은 후에 일어날 일을 생각하면 절대 아깝지 않았다.
"열기가 너무 뜨거운 것 같군요. 잠시 쉬어가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경매는 30분 후 다시 진행됩니다."
진호는 레오와 미영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50대의 중년인에게로 향했다. 중년인은 화장실을 가려는 듯 경매장을 나서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중년인이 살짝 놀랐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항의하러 온 건가?"
"아뇨."
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진호는 그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이쪽을 집중하는 주위 사람들을 의식해 목소리를 작게 했다.
"만년필, 잘 쓰겠다 말하려고 왔습니다."
움찔!
깜짝 놀란 중년인은 이내 피식 웃었다.
"눈치했나?"
"낙찰이 목적이 아니라 경매 호가를 올리는데 목적을 두셨잖아요. 그러다 다 포기하면 본인께서 낙찰 받으려고 마음먹으셨고요. 그 모습에서 애장품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중년인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하핫, 아들 놈 말처럼 정말 비범하구만."
"예?"
고개를 모로 기울이던 진호는 이내 눈을 크게 떴다.
"어? 어어? 서, 설마?"
낯선 중년인의 얼굴에서 지인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놈이 외탁을 많이해서 알아 보기 힘들 텐데 알아보는군. 만나서 반갑네. 영재 애비일세."
"헉!"
한발 물러선 진호는 다급히 허리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버님! 영재 형 후배 이진호입니다!"
싸움이 일어날까 이쪽을 주시하던 사람들이나, 진호의 행동을 보고 다가왔던 레오와 미영 모두 깜짝 놀랐다.
"아버님이신 줄 알았다면…… 끙."
그와 접전을 벌였던 다른 경매들이 떠올랐다.
"하핫, 됐네. 경매에서 그러면 쓰나. 그럼 내년에 보도록 하지."
"아, 벌써 가시려고요?"
"살 건 다 샀거든."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너무 빠지지는 말게."
"하하, 옙!"
진호의 어깨를 두드린 중년인은 경매장을 빠져나갔고, 그런 그의 등을 보며 머리를 긁적인 진호는 미영과 레오에게 다가갔다.
레오가 입을 열었다.
"누군데 그렇게 깍듯이 대해?"
"아, 학교 선배 아버님이셨어요."
"……그 선배 아버지와 싸운 거야?
"싸, 싸우다뇨! 정당한 어? 선의의 경쟁을 벌인 거죠!"
"그래. 그렇다치자."
"상황을 그렇게 몰아가면 안 되죠! 누구 죽는 꼴 보려…… 응? 이모?"
미영이 중년인이 사라진 방향을 보고 있다.
그러다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우리 아들은 운도 넘치네?"
"잉? 이모가 영재 형 아버님을 어떻게 알아요? 두 분이 만나신 적 있어요?"
"금수저 물고 태어나는 집안인데 이 이모가 모를 리 없잖니."
"발도 넓어라."
"자산이 오백 억 이상인 사람은 모두 이 이모의 레이더 안에 있답니다, 아드님. 이모는 화장실 다녀올게."
"아, 같이 가요. 형은요?"
"나도 갈 거야. 어후, 오늘 커피를 너무 많이 먹었나."
셋은 경매장을 빠져나갔다.
셋이 낙찰한 물품을 넘겨받은 건 경매가 모두 끝난 뒤였다.
택배 서비스를 이용해 낙찰 받은 물품 대부분을 집과 회사로 보낸 진호는 강화 플라스틱 케이스에 담긴 만년필을 손에 쥐었다.
미영은 한껏 밝은 표정을 지으며 회사로 복귀했다.
저녁에 다시 보자는 말을 남기고 말이다.
"어? 그렇게 막 빼도 돼?"
찌릿!
'아, 해금했다.'
경매장 밖을 본 진호는 피식 웃고 말았다.
아직은 서늘한 하늘 아래 빵빵 차들이 매연을 뿜으며 달리는 모습과 봄을 기다리며 나뭇가지에 위태롭게 맺혀 있는 꽃봉오리를 보자마자 머릿속에서 악상이 휘몰아쳤다.
지금 당장이라도 오선지를 위에 음표를 그리고 싶었다.
'플라시보 효과 죽이네!'
플라시보 효과이되 플라시보 효과가 아니다.
원래부터 재능이 있었던 어린 주인공은 유명 작곡가의 펜을 습득함으로써 그 재능을 폭발시켰다. 마치 전교 1등이 쓰는 볼펜으로 공부를 하면 공부가 더 잘되는 것 처럼 느껴지듯이.
'2차 해금 조건은 작사 작곡 10 곡 하기.'
그럼으로써 스킬은 완벽하게 습득된다.
이 스킬은 1차만 해금해도 그 능력을 대부분 발휘하지만, 스킬을 얻기 위해선 2차 조건까지 해금해야 했다.
"진호야, 얼른 이 손수건으로 닦고 다시 집어넣어. 손 기름 묻으면 오래 보관 못해. 그게 어느 분 유품인데, 인마!"
만져 보고 싶다는 욕심이 레오의 눈에 가득했다.
"형."
"아, 왜? 어허, 이 손수건 위에 조심히 내려놔. 그렇지. 옳지."
"나랑 작곡할래요?"
"…….어?"
"악상이 떠오르고 있어요. 우리 빨리 작곡하러 가죠."
레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킬: 위대한 언어]
[오, 음악! 오, 노래! 그 위대한 언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