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164화 (164/424)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7권 14화

5. 위대한 유산

아직 3월이 되려면 멀었건만 날은 점점 따뜻해지고 있었다.

햇볕이 내려쬐고, 바람이 불지 않는 날에는 봄이 왔다고 착각을 할 정도였다.

아직 개나리나 진달래는 펴지 않았지만 말이다.

"……에라이."

탁!

진호는 신경질 적으로 노트북을 닫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노래를 고르는 게 참 기뻤는데, 이젠 아니다. 하루 24시간 중 최소 12시간을 곡만 고르고 있으니, 이젠 노래 한 소절은 커녕 노래 제목조차 보기 싫었다.

양진혁이 MP3 파일들을 넘겨준 지 벌써 보름.

어찌어찌 리스트를 50개까지 줄이긴 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아니, 왜 이렇게 주옥 같은 곡들만 있냐고……."

특히나 하우스 힙합이 크로스된 잔잔한 곡들은 모두 취향 저격이었다.

"그냥 진짜로 작곡을 해 버려?"

그렇다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혹여 실패해도 그 과정이 재미있을 테니 말이다.

심각하게 고민하던 진호는 이내 기지개를 켜며 창밖 너머의 하늘을 보았다.

"아- 아무것도 하기 싫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었다. 진호는 차가운 커피 잔을 뜨거운 이마로 가져갔다.

"으음."

머리가 차가워지는 느낌은 일종의 쾌감이었다.

"진호 씨."

다미앙이 다가왔다.

오늘따라 유난히 그의 사무적인 옷차림에 날이 서 있는 것 같다.

'……아차, 재계약.'

진호는 자책했다.

오늘은 디올과 재계약을 하는 날이다.

정확히는 미영 이모가 디올 차이나로 영전하는 걸 축하할 겸, 앞으로의 후원 계약에 더 이상의 이의가 없도록 못을 박는 날.

그녀는 결국 디올 차이나의 지사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옆 자리 놓은 꽃다발을 확인한 진호는 환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가시죠."

* * *

"이모!"

"아들!"

진호는 미영을 힘주어 껴안았다.

"축하드려요."

진호는 그녀를 진심으로 축하했다.

디올 차이나는 크리스챤 디올의 본사, 그리고 미국 지사와 매출 순위 1위를 다투는 곳이다. LVMH 본사에 입성하고 싶다는 그녀의 꿈에 한발 다가섰다고 봐야 했다.

"모두 아들 덕분이지."

"제가 한 게 있나요."

"왜 없어. 너무 많아서 탈이지."

"흐흐흐. 아, 여기요."

"어머, 예뻐라."

미영은 꽃다발을 보며 진심 가득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최초가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안젤라."

한국인 최초 디올 차이나 지사장.

여성 최초 디올 차이나 지사장.

그녀는 크리스찬 디올이라는 거대 패션 브랜드에서 역사를 쓰고 있는 중이었다.

"고마워요, 다미앙. 덕분이에요."

다미앙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영은 두 사람에게 앉으라는 듯 신호를 주었다.

자리에 앉은 진호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이모 혼자 가는 거예요?"

"아니? 조 부장 기억해?"

"조명희 부장님이요? 당연히 기억하죠."

처음 디올 코리아와 후원 계약을 했을 때, 스케줄에 데려다 주었던 고마운 분이다.

"어? 설마? 진짜로요?"

미영이 푸근하게 웃었다.

"응. 조 부장도 함께 가기로 했어."

"워, 벌써부터 인사권을 남발하시는 거예요?"

"최소한 내 편은 있어야 일 하기가 편하잖니."

"그건 맞죠."

장난이었다는 듯 웃은 진호가 걱정 어린 눈빛을 지었다.

"지영이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데려가실 거예요?"

"아니, 지영이는 밀라노로 유학보낼 거야. 지영이도 찬성했고."

"……오, 후계자 수업에 들어가는 건가요."

"후계자는 무슨. 지영이 걔가 본격적으로 경영과 패션에 대해 배워 보고 싶다고 해서 보내는 거야."

"음, 그런 의미라면 밀라노도 나쁘지……."

진호는 입을 다물었다.

패션의 도시 밀라노.

나쁘지 않다.

나쁘지 않은데, 좋지도 않다.

'이탈리아 놈들! 바람둥이 쉬키들!'

이탈리아는 나이가 적건 많건 안심할 수 없는 나라다.

"아뇨. 나쁘죠. 보내면 안돼요. 차라리 뉴욕…… 아니야, 거기는 너무 자유로워. 파리? 프랑스 놈 이나 이탈리아 놈이나! 런던! 그래, 런던이 좋겠네요! 차라리 런던으로 보내죠!"

"지, 진정해, 아들."

"지금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그놈들이 얼마나 늑댄데! 난 이 결정 반댈세!"

진호는 반대 의사를 온몸으로 표현했다.

진호가 진정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소요됐다.

그래도 완전히 진정되지는 않았다.

"전기 충격기…… 아냐, 약해. 차라리 총이 낫겠다. 권총? 라이플? 음, 그래도 순간 파괴력은 샷건이 낫겠지? 월터에게 부탁하면……"

짜아악!

"아악!"

"진정하라니까! 지영이 못 믿니?"

"지영이를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발정난 놈들을 믿지 못하는 거예요."

모델일을 하면서 세계 각국의 남녀들을 만나면서 내린 결론이다. 함께 어울려 놀 때는 그렇게 재밌을 수 없지만, 절대 동생에게는 소개시켜 줄 수 없는 족속들이 방금 언급한 나라의 남자들이었다.

"솔직히 이모도 믿지 못하잖아요."

"나는 내 딸을 믿는답니다, 아드님."

이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입을 다문 진호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도 더 이상 투덜대지는 않았다.

미영은 걱정해 줘서 고맙다는 듯 웃으며 계약서를 내밀었다. 계약서를 주욱 훑어본 진호는 다미앙에게 보여 주었다.

꼼꼼히 살핀 다미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군요. 이 정도면 HU 역사상 다시없을 최고의 후원 계약이 될 것 같습니다."

한 해에 품위 유지 등을 위해 후원하는 액수만 현금으로 20억.

그 외 여러가지 항목들에서 발생하는 돈을 합하면 진호가 1년 동안 벌어들이는 수익은 최소 50 억이 넘는다.

런웨이를 걷지 않아도 말이다. 디올 본사와 디올 코리아 두 곳에서 하는 후원금이 합쳐졌기에 이런 액수가 가능해졌다.

'디올에서만 한화로 약 50억. 나머지 브랜드의 후원 계약을 모두 합한다면?'

다미앙은 속으로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내년 포브스에서 선정할 '세계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모델'의 순위에 지각 변동이 일어날 듯했다.

그러나 미영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이모가 차이나 지사장이 되면, 디올 차이나 명의로 후원 계약서를 보낼 거야. 거기에도 싸인 부탁해?"

이번엔 진호도 놀랐다.

'이러다 디올 재팬도 후원 계약을 하자고 달려드는 거 아냐?'

그럴 확률이 없잖아 있었다.

"그럼요. 디올 차이나 화보도 팍팍 찍을게요."

"그래 주면 고맙고?"

미영은 진호의 볼을 쓰다듬었고, 진호는 배시시 웃었다.

"아, 맞아. 음반 만든다면서?"

흠칫!

진호와 다미앙 모두 놀라서 미영을 보았다.

앨범 제작은 양측 회사의 수뇌들 만 알 정도로 극비로 진행되는 프로젝트였다.

"어떻게……."

"JH 이사들 입이 좀 싸더라."

"……끙."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예상이 되었다.

JH에서 앨범 제작비 중 반절을 부담한다고 하니, JH 이사들 중 이 일이 못마땅한 누군가가 진호 자신에게 무조건적인 후원을 하는 디올을 끌어들여 제작비를 절감하려는 듯했다.

양진혁에게서 연락이 없는 것을 보니, 그도 아직 이 상황을 모르는 것 같았다.

"무시하세요. 제작비 분담은 서로의 제휴 관계를 더 끈끈하게 만들려는 비즈니스니까요."

"당연히 알지. 이 이모가 그걸 모를까. 그보다 할 만해? 처음으로 앨범 내는 거잖니."

진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재밌기는 한데, 머리가 좀 아프네요. 좋은 곡들이 왜 이렇게 많은 지…… 양진혁 사장님이 아이돌 음악만 파고드는 이유를 알 것 같더라니까요?"

흔히 비주류라고 말하는 장르의 음악들도 귀에 쏙쏙 박혔다.

JH의 강점이자 최고 장점인 아이돌 음악은 듣지 않아도 그 수준이 짐작될 정도였다.

"쿡쿡, 그러니?"

진호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휴. 우리 아들, 머리 많이 아프겠다."

"곧 익숙해지겠죠, 뭐."

"안 되는 거 계속 붙잡고 있는 것도 안 좋아. 이럴 땐 바람이라도 쐬어 봐."

"바람이요?"

"아, 말 나온 김에 이모랑 바람이나 쐬러 갈까?"

진호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안 그래도 인수인계로 바쁜 그녀다.

거기다 디올 차이나로 넘어가면 인수인계를 받아야 한다.

'하긴 이모도 힘들겠네.'

그녀의 눈가에 피로가 잔뜩 내려 앉아 있다.

진호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갈까요? 양평? 강원도? 제주도? 아님 동남아?"

"아니, 경매장."

"……네?"

진호는 눈을 끔뻑였다.

"스트레스 해소에는 지르는 게 최고란다, 아들. 그리고 경매는 지름신이 강림하기 딱 좋은 장소지."

흠칫!

맞다. 맞는 말이다.

스트레스가 쌓일 땐 맛있는 걸 먹거나 지르는 게 최고다.

평소에 사지 못했던 게임 아이템 이라든지, 얼마나 쓸지 모르는 기타라든지.

비싼 옷도 좋았고, 여행을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경매라…….'

경매는 여태껏 진호가 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생에 처음으로 겪는 경험.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어디서 열리는데요?"

진호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 * *

경매는 서울에서 열렸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돈 많은 자들만의 비밀 경매나 소더비 같은 대규모 경매가 아니었다.

신인 작가의 미술품부터 시작해 스타들의 애장품들이 출품되는 소규모자선 경매.

이 경매는 한국에서 열리는 많은 자선 경매 중 매달 정기적으로 열리는 경매라서 한국의 각계각층 인사들이나 연예인, 스포츠 스타들이 자주 참석한다고 했다.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들은 대부분 불우 이웃을 돕기 위해 애장품을 파는데 참가 의의를 둔다고 한다.

우글우글. 와글와글.

의자들이 빼곡하게 놓인 커다란 공간엔 편하게 등산복을 입은 사람도 있었고, 청바지에 얇은 잠바만 입은 운동선수도 있었다.

'경매하니깐 미술 감정 관련 스킬이 생각…… 어?'

"현이 형?"

국내 최고의 테니스 플레이어 박현이다.

"헐? 네가 여기 왜 있어?"

"괜찮은 기타나 피아노 있으면 사 보려고요? 형은요?"

"나? 헌 라켓 팔려고 왔지. 가끔 이용해."

"……하긴 형도 스타긴 스타죠."

"죽을래?"

"흐흐흐. 아, 이쪽 아름다운 여사님은 제 이모예요."

"처음 뵙겠습니다. 박현입니다. 진호와는 형 동생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쪽은 제 형 박홍입니다."

"안녕하세요."

"호호. 박현 선수와 박홍 선수, 형제 플레이어를 여기서 볼 줄 몰랐네요. 진호 이모예요."

"안녕하세요, 박홍 선수. 이진호 라고 합니다."

"현이 콧대를 눌러 준 사람을 이렇게 될 줄 몰랐네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박홍입니다."

"편하게 말해 주세요."

그렇게 안부 인사를 나눈 진호와 미영은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운만 맞으면 10만 원만 있어도 물품을 살 수 있는 소규모 경매지만, 취객이나 진상들이 분위기를 흐리면 안 되기에 좌석이 지정되는 초대권을 발송했다.

초대권은 사이트에 신청하면 받을 수 있었다.

진호는 주위를 둘러보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경매라고 생각하니 모든 게 신기하게 다가왔다.

톡톡!

"고개 안 돌릴 겁니다, 레오 형."

"……에이."

미영에게 인사를 한 레오가 진호의 옆자리에 앉았다.

"리스트는 좀 만들었어?"

진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콘셉트도 못 정했어요."

"큭큭, 내가 그 심정 잘 알지. 스트레스 풀러 왔구나?"

"그렇죠. 형은요?"

"난 전자 키보드 내놨지. 중고로 파는 것보다 이게 더 뜻깊잖아. 그리고 게임기 있으면 하나 사려고."

"진짜요?"

진호는 다급히 오늘의 경매품 리스트가 적힌 팸플릿을 살폈다. 진짜로 있었다.

"와, 가격이……."

경매 시작가가 중고가의 3분의 1 밖에 안 된다.

"이거 내 거, 무조건 내 거."

"힘들걸? 내 팬클럽회장도 참석 했거든. 저기 있네."

"……에이."

팬, 그것도 팬클럽 회장과의 대결.

이겨도 손해 볼 확률이 100퍼센트였다. 포기한 진호는 살 만한 물건이 있나 팜플릿을 살피다가 어느 지점에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있다고?"

생각지도 못한 물품이 경매 리스트에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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