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7권 9화
'이 여자가 기자였어?'
어제 보았던 그 아이 엄마다. 그러나 나연석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속으로 환하게 웃었다.
어젯밤 한국에서 연락이 왔다.
한국으로 치면 지상파인 영국의 방송국 채널 파이브에서 자신들을 촬영하고 싶다고 말이다.
여태껏 많은 예능을 찍으며 많은 나라들을 돌아다녔지만, 현지 방송 사에서 촬영을 온 적은 처음이었다.
대박이었다.
혹여 진호가 눈치채서 그림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된 나연석은 이 일을 자신과 메인 작가만 알기로 했다.
나연석은 세상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오셨어요. 안으로 들어오세요."
어제의 아이 엄마와 커다란 카메라를 어깨에 짊어진 사내가 들어 왔다.
'뭐야, 피디님은 알고 있었네?'
생각해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촬영 당사자인 이쪽에게 미리 양해를 구해야 하니 말이다.
'감쪽같이 속였네.'
어쩐지, 오늘 뭐 마려운 강아지 같다 싶었다.
'미션을 주려는 줄 알았는데….'
진호 자신이 눈치챌까 다른 스태프에게도 알리지 않았다고만 생각 했었다.
진호는 주위를 둘러보다 이쪽을 발견하곤 환하게 웃는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식초 물을 마시며 말이다.
꿀꺽!
'아, 해금했다.'
어제 숙소에 복귀하고부터 마셨던 식초 물이다. 손가락을 포함해 팔목, 팔꿈치까지 모든 근육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 남은 건 초콜릿 만들기와 작품 만들기네.'
4차 해금 조건인 초콜릿 만들기는 시중에서 파는 초콜릿을 녹여서 만드는 게 아니라 코코아 가루 부터 재료들을 배합해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걱정 없었다.
지난 며칠간의 물물 교환을 통해 재료는 모두 구비되어 있었다.
"오셨어요."
"어머, 놀라지 않으시네요?"
"기자인지 아나운서인지 좀 헛갈렸을 뿐이죠."
"제 말투가 티 났나요?"
"무척?"
"호호홋!"
진호는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있는 사내에게 고개를 숙였다. 나연석이 입을 열었다.
"물물 교환과 빵을 만드는 모습을 찍으시려는 겁니까?"
"역시, 한국 최고의 디렉터라서 포인트를 아시네요. 촬영을 허락해 주신다면 오늘 저녁 뉴스에 특집으로 5분 가량 방송될 거예요."
세 아이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놀랐다.
뉴스에서 5분은 정말 긴 시간이다.
"저, 정말입니까?"
"당신들을 이루는 모든 요소가 너무도 특별하니까요."
한류의 한국부터 진호라는 최고 의미남,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요식업 기업 대표, 요리의 불모지인 영국에 빵을 배우러 온 어린 천재들. 지금은 영국인조차 잘 하지 않는 물물교환까지. 정말 모든 것이 특별했다.
아일라의 눈이 간절함으로 빛났다.
진호는 세 아이들을 보았다.
"어떻게 할래?"
진호는 방금 어른들끼리 영어로 나눈 이야기를 설명해 주었다.
이 프로그램의 진짜 메인이자 주연은 세 아이들이다.
나연석이나 곽종훈, 진호 자신은 무조건 찬성이지만 말이다.
"……저희에게 좋은 일인가요?"
"너희가 영국에 이민을 올 게 아니라면 딱히? 여러모로 따져 봐도 십대인 너희들에게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지. 다만, 어쩌면 영국 제빵 학교나 빵 좀 만드는 사람들에게서 연락이 올 수 있지. 니들이 그렇게 잘해? 한번 겨뤄 보자! 하면서."
흠칫 놀란 사람들이 진호를 바라 봤다.
뉴스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세 아이들은 서로를 보며 눈빛을 교환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할게요!"
"연락이 오지 않아도 저희가 만든 게 전파를 타는 거잖아요!"
"푸하핫! 그래, 오케이. 대신 잘 만들어야 한다?"
"네!"
진호는 초조하게 기다리는 아일라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와 채널 파이브 카메라맨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손을 번쩍 들었던 그녀는 진호의 손에 들린 컵을 낚아챘다.
"마셔도 되죠? 정말 목이 탔거든요."
"어? 잠까……."
늦었다. 그녀는 말릴 틈도 없이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삼켜 버렸다.
"……크허억?"
'아이구.'
곽종훈과 세 아이들은 바로 빵 제작에 들어갔다.
"초콜릿 쓸 사람 있어요?"
"뭐여, 초콜릿 만들게?"
"만날 똑같은 빵만 만들면 지루 하잖아요. 간식으로 달달한 페레로 로셰와 저녁으로 초콜릿 퐁뒤 콜? 비전 레시피 있습니다!"
정말이다. 딸기 빵처럼 [스킬: 태양여왕의 황금 손]을 지닌 주인공은 초콜릿 레시피도 개발한다.
이 주인공이 만든 모든 레시피가 진호의 머릿속에 있었다.
"콜!"
"코올-!"
여자 스태프들이 악을 지르듯 외쳤다.
나연석은 깜짝 놀란 아일라에게 방금 상황을 설명했다.
'비전'이라는 말에 아일라가 다급히 다가왔다.
"아, 이건 절대 찍으면 안돼요. 레시피 퍼지면 딱 2년 묵혀 뒀다가 손해 배상 청구할 겁니다."
아일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진호는 LVMH의 뮤즈고, LVMH는 없는 일도 사실로 만들어 버리는 초거대 기업이다.
아일라와 카메라맨은 슬그미니 물러났고, 진호는 곽종훈과 세 아이들을 보았다.
"그래서 쓰실 분? 시간상 액체형 초콜릿이 될 테지만요."
"저요! 저 쓸래요. 안 그래도 오늘 초콜릿 슈 만들려고 했어요."
"나도 줘 봐. 도나쓰나 만들게."
"오케이. 자, 작업합시다. 이제 두 시간도 안 남았어요."
반죽은 진호가 운동을 나갔을 때 모두 만들어 두었다.
세 아이들과 곽종훈이 반죽을 만지기 시작하자 진호도 가스레인지 앞에 섰다.
'가스레인지는 세밀한 불 조절이 힘들지만…….'
지금부터 만들려는 비전 초콜릿은 0.1 도 단위의 정밀한 불 조절이 필요하다. 리셋라이프를 할 시절, [스킬: 태양여왕의 황금 손]을 해금할 때 이 불 조절 때문에 정말 많이 실패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스킬: 불을 지배하는 자]가 있으니까.
화륵! 물이 든 냄비에 볼을 올린 진호는 촉각에 모든 신경을 집중 했다.
'……지금!'
진호는 재빨리 개량해 놓은 코코아 가루를 부었다.
아일라가 눈을 빛냈다.
"이렇게 초콜릿을 처음부터 만드는 이유가 있나요? 당신을 비롯한 다섯 명 모두 모든 제조 공정을 수작업으로 하고 있어요."
질문이 너무 어이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영국이었다.
"이 편이 더 맛있고 재밌잖아요."
"……아."
"그리고 밀가루의 종류부터 생산지, 비율, 언제 탈곡을 했는지, 언제 분쇄를 했는지 등 모든 걸 꼼꼼히 따져야 손님에게 자신 있게 내밀 수 있죠."
아일라는 식겁했다.
"빵에 그런 정성을 들인다고요?"
"빵뿐만이 아니라 모든 요리에 이런 정성이 들어가야죠. 그렇지 않나요, 대표님?"
"그럼- 프로라면 당연히 그래야 제. 손님께 대접하는디 생산지조차 모르믄 쓰간디?"
그사이 진호가 한국어로 설명해주자 세 아이들도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일라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카메라맨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마트에 가서 채소를 고를 때 싱싱한 것을 고르잖아요? 약간 비싸더라도 말이죠. 유통 기한도 마찬가지죠. 왜 그렇죠?"
"당연히 나와 내 가족이 건강하게 먹어야…… 아."
그녀는 진호가 하고 싶은 말을 깨달았다.
"프로페셔널 정신을 말하시는 거 군요!"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혀를 내두른 아일라가 눈을 빛냈다.
"한국은 모두 이렇게 꼼꼼히 따지면서 요리를 파는 건가요?"
"한국도 사람이 사는 곳인데 어떻게 그렇겠어요. 대신 그렇게 꼼꼼하게 따져 가며 요리를 파는 사람만이 성공을 하는 거죠."
참으로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곽종훈이 흐뭇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밖에서 뭘 사먹으면, 외식을 하면 웬만하면 프랜차이즈를 가쥬?"
"그렇죠. 가장 보편적이면서 실패를 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면 그 프랜차이즈의 맛을 레벨을 하이 미들 로우로 따졌을 때, 어디쯤에 해당할 것 같아요?"
"미들 아닌가요? 보편적이니까."
"단언건대 프랜차이즈는 가장 저급한 맛입니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드는 게 맛있겠어요, 아님 저 작은 냄비에 온갖 재료를 넣고 다 끓을 때까지 거품도 걷어 내고 불 조절도 하는 육수가 맛이 있겠어요?"
"……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의 요식업 기업 대표답게 정말 요리 철학이 대단하시네요."
"하핫, 과찬…… 응?"
곽종훈은 진호를 보았다.
아일라도, 그리고 모든 사람이 진호를 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콧속을 훅 파고든 진한 초콜릿의 냄새를 쫓는 거다. 진호는 막 물물 교환으로 얻은 코 냑을 넣고 있었다.
마치 요리의 숨김 맛처럼 몇 방 울만 말이다.
그 순간 초콜릿 냄새가 다시 한 번 폭발하듯 퍼졌다.
코냑의 향기가 그 뒤를이었다. 여성들의 무릎이 후들, 흔들렸다.
……꿀꺽!
"맛 좀 보실래요?"
"그,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사람이 먹으라고 만든 건데요."
진호는 작은 스푼으로 초콜릿을 떠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원래는 진호 자신부터 맛을 봐야 했지만, 레시피대로 만들었기에 자신 있었다.
아일라의 빨간 앵두 같은 입술
안으로 파고든 황갈색의 초콜릿이 분홍빛 혀에 닿았다.
"흐음!"
지리릿!
아일라는 눈을 부릅떴다.
우유가 감싸 안은 진한 카카오의 맛이 마치 벼락에 맞은 것처럼 온 몸에 충격을 주며 퍼진다. 미세한 코냑이 혀끝을 내달리며 몸과 마음을 무장 해제시킨다.
세상 모든 초콜릿의 장점만 모아 응축한다면 이럴까.
혀와 전신에 초콜릿의 폭격이 쏟아지고 있었다.
휘청!
순간 무릎이 풀린 그녀는 주저앉을 뻔했지만, 진호가 다급히 잡았다.
"괜찮으세요?"
"……하아아."
'우와아.'
야했다.
마치 절정에 이른 후의 제니퍼 로제의 얼굴을 보는 것처럼 섹시 했다. 카메라맨이나 이곳을 보는 모든 남자들의 얼굴이 붉어지는 걸 보니 진호 자신만 그렇게 생각 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뭐여, 얼마나 맛있기에 이런 반응인…… 흡?"
곽종훈도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상해서 따라온 아이들도 초콜릿을 맛보았다가 경악했다.
그래서 진호는 좀 당황스러웠다.
'겨우 이 정도 레시피로 이런 반응을 보이나? 너무 오버하는 거 아냐?'
[태양여왕의 황금 손] 주인공이 만든 많은 레시피에 맛의 등급을 매기자면, 이 초콜릿은 겨우 중간 레벨밖에 안 된다.
딸기 빵도 이 중간 레벨에 해당한다.
스킬을 온전히 얻지 않는 이상 지금보다 더 높은 등급의 레시피는 도전할 수 없다.
'대체 얼마나 맛있기에…….'
"어후야."
한 입 맛본 진호는 사람들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먼저 맛을 볼 걸 그랬네.'
그랬다면 배합 비율을 약간 달리 했을지 모른다.
그만큼 너무도 맛있었다.
[스킬: 불을 지배하는 자]와 [스킬: 태양여왕의 황금 손]의 주인공이 만든 레시피가 미친 듯한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큼, 죄송합니다. 추태를 보였습니다."
"아, 아니요. 괜찮으시죠?"
"네. 괜찮습니다."
아일라의 얼굴은 아직도 빨개서 괜찮지 않아 보였다.
"다행이네요."
싱긋 웃은 진호는 사람들을 보았다.
"맛보실 분은 줄을 서세요!"
혼돈을 부르는 외침이었다.
여성 스태프들이 이쪽을 향해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 * *
-한국에서 찾아온 '정성'이라는 일침. 이제 영국도 식사를 단순히 먹는다는 개념이 아닌 맛을 신경 써야 할 때가 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까지 채널 파이브의 아일라 포터였습니다.
TV속 등장인물이 아일라에서 앵커로 바뀌자 나연석은 TV를 꼈다.
"……이슈 되겠네."
"그러게요."
진호의 외모 때문이 아니다. 아일라 포터가 요리에 대한 영국인의 안일한 마음을 후려쳐 버렸다. 거기다 어린 세 천재가 작정하고 만든 빵도 있다.
웬만한 파티세라도 만들기 까다로운 총 256겹의 크루아상이나, 액상 초콜릿을 넣었는데도 바삭한 슈, 가르는 순간 치즈가 물처럼 흐르는 번.
다행히 그녀의 야한 표정은 송출 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수첩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는 진호를 보았다.
"그렇게 보셔도 더 안 만들어 드립니다."
"왜!"
"그런 생각으로 본 건 아니지만, 왜!"
"돼지 되니까요."
오늘 사람들이 먹은 초콜릿의 양은 각자 200그램이 넘었다.
"……돼도 내가 되니까 괜찮아!"
"얼마면 되겠니, 진호야!"
모두의 간절한 바람을 가볍게 무시한 진호는 세 아이들과 곽종훈을 보았다.
"다 적었어요?"
"87.3도에서 몇 초라고?"
"16초요. 시계 반대 방향으로 회오리를 그리며 열두 바퀴 저으시고요."
"오케이. 16초, 열두 바퀴."
그랬다.
진호는 지금 오늘 만든 초콜릿 레시피를 알려 주고 있었다.
"형, 이렇게 다 알려 주셔도 돼요? 무, 물론 저희야 좋지만."
"응, 괜찮아. 어차피 내가 빵집 오픈할 것도 아닌데 뭘. 나중에 너희 개업하면 빵이나 공짜로 줘."
"다, 당연하죠!"
"형은 평생 공짜예요!"
곽종훈에겐 레시피 몇 개를 더 넘겨주는 대신 그가 후에 만들 프랜차이즈 베이커리의 지분 1퍼센트 받기로 합의 보았다.
"그런데 아까부터 뭘 그렇게 그리는 거여?"
"아, 내일 만들어 볼까 싶은 케이크요. 아일라 씨에게 보내기도 할 겸."
뉴스가 기가 막히게 뽑혔다.
나연석이 이를 잘만 이용한다면 한국에서 이슈 몰이를 할 수 있을것 같았다.
"봐도 돼?"
진호는 대답 대신 수첩을 넘겨주었다.
곽종훈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진호와 수첩을 번갈아 보았다.
"이게 가능혀?"
세 아이들도 경악하며 진호를 보았다.
"충분히?"
'스킬을 온전히 얻으면 가능하죠.'
대수롭지 않다는 그 대답에 세 아이들은 허탈히 웃으며 천장을 보았다.
"하늘이 씨……."
주위에 어른들만 없었더라면 '씨' 다음에 '발'을 붙였을 것이다.
'……반성하자. 난 천재가 아니었어.'
'진호 형과 비교하면 난 수재보다 약간 나은 수준일 뿐이야. 노력하자.'
'정말 세상은 넓어. 더 열심히 해야지.'
진호는 다짐하는 표정을 짓는 아이들을 보며 흐뭇이 웃었다.
우우웅!
모두의 시선이 나연석에게로 향했다.
"여보세요? 아, 예. 국장님."
사람들 모두 깜짝 놀랐다.
"흠, 그래요? 알겠습니다. 예, 상의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사무적인 말투로 전화를 끊은 나연석이 조연출을 보았다.
그의 눈에 흥분이 차오르기 시작 했다.
"다음에 갈 곳이 맨체스터지?"
"그렇죠?"
"취소해."
"네?"
나연석이 진호를 보았다.
'어, 설마? 진짜?'
진호는 눈을 크게 떴고, 나연석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채널 파이브에서 연락 왔단다. 양국 천재들끼리 한판 붙자고."
쿵.
사람들 모두 입을 쩍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