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7권 8화
공원엔 사람들이 많았다.
적당한 자리에 가져온 돗자리를 펴고 앉은 그들은 한 입 깨물자마자 주룩 육즙과 치즈가 입안에서 폭발하는 칼로리 폭탄 샌드위치에 연신 엄지를 치켜세웠다.
거기다 방금 산 시원한 탄산음료가 목으로 넘어가니 얼굴이 느슨하게 풀렸다.
"하, 좋다."
"풍경도 좋아."
짧은 잔디와 높은 나무들. 햇빛이 포근하게 쏟아지니 절로 어깨가 가벼워졌다.
아이들은 주위를 둘러보며 신기 해했다.
"사람들이 많아요. 역시 외국."
"응. 주말도 아닌데 이렇게 피크닉을 즐기고 있어."
진호와 곽종훈을 비롯한 어른들은 아이들 셋의 말에 피식 웃었다. 확실히 한국과 약간은 다른 모습이긴 하다. 그러나 한국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모습은 아니다.
"빅 벤은 어땠어. 볼만했어?"
런던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시계 탑을 말하는 거다.
방금 전 보았다.
아이들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네! 마술사는 못 봤지만요."
"크으, 내가 시계탑을 보다니!"
"이 시기엔 누가 시계탑에 남아있지?"
어른들은 얘들이 무슨 말을 하나 싶었다.
"마술사? 해리포터? 마법부는 시계탑이 아니잖아."
아차 한 아이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배를 잡고 소리 없이 웃은 진호가 입을 열었다.
"일본 소설 이야기예요. 세계관이나 설정이 탄탄해서 일본 애니메이션 쪽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웬만하면 아는 소설이에요."
"아, 그래? 재밌나?"
"꿈과 희망이 없어서 좀 마이너 취향이죠. 잔인…… 음?"
오늘 아침에도 만든 딸기 빵을 입에 가져가던 진호는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이제 막 여섯 살이나 됐을 법한 소녀가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엄마로 보이는 사람과 소꿈놀이 같은 걸 하고 있던 소녀였다.
'음?'
진호는 손에 든 딸기 빵을 움직여 보았다.
아이의 시선이 딸기 빵을 따라 움직였다.
"……풋."
사람들도 웃음을 참았다.
진호는 딸기 빵을 소녀를 향해 내밀었다.
소녀는 스스럼없이 다가와 빵을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어이구, 인사 잘하네."
사람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나연석은 좋아서 찢어지려는 입을 억지로 참았다.
"에밀리!"
"엄마!"
한 손에 셀카봉을 든 채 빠르게 달려온 아이 엄마가 소녀를 안아 들었다. 아이 엄마는 꽤 젊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유. 아이가 그럴 수도 있쥬."
'곽 대표님은 영어로도 사투리를 구사하는구나.'
참 놀라운 모습이었다.
"애가 활기차서 엄마 좀 괴롭히겠다. 그쥬?"
곽종훈의 선한 미소는 어디에서 든 통하는 것 같았다.
하얗게 질렸던 아이 엄마의 낯빛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엄마, 이거."
곽종훈은 눈을 빛냈다.
"식사 안 했으면 이리 앉아서 같이 먹어유. 나 피디도 카메라 끄고 같이 먹자고."
놀란 아이 엄마를 향한 배려였다.
"카메라는 끄지 않아도 될 거예요."
조금 모자라긴 하지만 이만하면 그림이 꽤나온 것 같아서 스태프들에게 신호를 주던 나연석이 그 말에 진호를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진호는 여성이 든 셀카봉과 그녀가 달려온 방향을 가리켰다.
멀지 않은 곳에 분홍 식탁보가 깔린 작은 테이블이 있었다.
"저희가 공원에 오기 전부터 인터넷 방송을 하고 계셨어요."
그래서 다른 곳으로 갈까 했다가 공원에 사람들이 많아서 그냥 포기했다.
"……아!"
진호는 여성을 보았다.
"시청자들에게 어서 아이의 멀쩡한 얼굴부터 보여 주세요. 그들도 많이 걱정하고 있을 거예요."
"아!"
진호의 얼굴에 잠시 넋을 놓았던 아이 엄마는 아차하며 셀카봉을 들어서 소녀가 무사함을 알렸다. 그렇게 시청자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음을 진정시킨 아이 엄마는 진호를 보며 눈을 빛냈다.
"저기……."
"허락은 여기 폼 잡고 서 계신 분에게 맡으면 돼요."
움찔한 나연석은 잠시 고민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론 태연했지만, 그는 현재 좋아서 죽을 것 같았다.
우연이 만들어 낸 재미난 해프닝이었다.
편집할 때 자막만 제대로 넣는다면, 기가 막힌 흥미 포인트를 만들어 낼 수 있을 듯했다.
3일 전, 이틀 전, 어제, 오늘. 분량이 마구마구 뽑히고 있었다. 진호는 씰룩이는 나연석의 입꼬리를 보며 피식 웃었다.
'홍보도 하고 좋지, 뭐.'
이 인터넷 방송을 통해 흥미를 가지게 된 영국인이 이 프로그램을 '다시 보기' 할 수도 있다.
단 한 명, 단 한 번이라도 홍보는 홍보다.
아이 엄마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안녕하세요. 미튜브 크리에이터 아일라라고 해요. 저희 에밀리와 함께 '모녀의 요리'라는 채널을 운영하고 있어요. 본업은 따로 있지만…… 지금은 딱히 설명할 필요 없을 것 같네요."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배우 겸 모델 일을 하고 있는 이진호라고 합니다. 이쪽은 한국에서 요식업의 대부라고 불리시는 곽종훈 대표님, 그리고 이 아이들은……."
진호는 일행들과 제작진들도 소개했다.
"한국! 더 원! 레오!"
사람들이 놀랐다.
'오, 레오 형. 여기서도 유명해.'
한류 최고의 아이돌 그룹의 리더 다웠다.
"저희는 영국에 빵을 배우러 왔어요."
"……왜요?"
흡사 '미쳤냐'라는 눈빛이었다. 진호는 순간 빵 터질 뻔했다.
다른 이들도 웃어 버릴 뻔했다. 그녀가 든 핸드폰 속 채팅창은 이미 웃음이 터졌지만 말이다.
"여기 악독한 사람이 영국을 촬영지로 골랐거든요."
"영국 출신인가요?"
"아뇨. 저희를 골탕 먹이려고요."
"아, 그런 의도라면 제대로 고르셨네요. 요리의 불모지, 영국에 온 걸 환영해요."
"……푸하핫!"
아이 엄마의 입담이 대단했다.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나연석은 좋아서 죽으려고 했다.
그들은 그때부터 재밌는 인터뷰 시간을 가졌다.
아이 엄마는 자신의 짐들을 모두 가져왔다.
"이것 좀 드세요."
"잘 먹을게요."
진호가 내민 딸기 빵을 한 입 깨문 아이 엄마는 눈을 부릅떴다.
"따, 딸기의 폭풍이-!"
크리에이 터다운 리액션이었다. 소녀도 허겁지겁 먹고 있었다.
"쓰, 쓰리 스타 파티세인가요?"
"……영국 요리가 얼마나 형편없는지 알게 된 것 같아서 참 슬프네요."
"쓰레기죠. 그나저나 이건……."
그녀는 빵으로도 감동받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이건 혁명이었다.
"이것도 드셔 보세요. 이 영국에 빵을 배우러 온 아이들이 만든 거 예요."
초코 쿠키와 슈, 마카롱이었다.
"……배울 게 있나요?"
곽종훈이 통역해 주자 아이들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진호는 옅게 웃었다.
"보다 많은 맛을 혀에 각인시키는 것도 중요하죠."
"암, 요리사에게 그보다 중요한건 없제."
진호와 곽종훈, 두 사람의 말에 아이 엄마는 멍해졌다.
아이 엄마는 참으로 궁금한 점이 많았다.
현재 머무르고 있는 숙소 위치까지 물어서 약간 곤란해지기도 했다.
"안녕, 잘 가."
"Bye, bye!"
돌아보며 고사리 같은 손을 흔드는 소녀의 모습은 너무도 심장에 좋지 못했다.
"아따, 예쁘다. 물론 내 딸들보다는 못하지만!"
팔불출이었다.
슬그미니 무시한 진호는 희희낙락 웃는 나연석을 보았다.
제작진들까지 모두 웃고 있었다.
"캬, 어떻게 이런 상황이 벌어지지?"
그들은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미아가 된 아이를 빵으로 꼬드겼는데, 아이를 애타게 찾던 엄마가 구독자 수 50만의 미튜브 크리에이 터였다.
방금 인터넷 방송도 무려 3천 명이나 시청하고 있었다.
"진호가 관찰력이 좋아서죠."
모두의 시선이 몰리자 진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상황이 끝난 건 아니지만…….'
아이 엄마가 밝히길 망설였던 직업을 알아차린 진호는 속으로 씩 웃었다.
그러다 흠칫 놀라 하늘을 보았다.
"아, 비 오겠다."
"비?"
뜬금없는 말에 의아해하던 사람들은 이내 입을 벌렸다.
'리얼, 정글에 가다.'에서 인간 기상관측기라 불렸던 진호.
어제도 진호가 아니었다면 촬영 도구가 몽땅 젖을 뻔했다.
"어, 언제 오는데?"
"30분 후에요."
'진짜 지독하다, 영국. 이런 곳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지?'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린다.
"……에휴. 자, 모두 우천 촬영 준비하세요."
"오! 나 피디, 오늘은 타워 브리지 가나? 빅 벤을 봤으면 타워 브리지도 봐야지."
곽종훈이 세 아이를 힐끔 보았다.
타워 브리지는 시계탑과 더불어 런던을 대표하는 랜드마크 중 하나다. 모두의 시선이 진호에게로 몰렸다.
진호는 비가 그치는 시간까지 기가 막히게 집어냈기 때문이다.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밤에 봐야 가장 멋진 타워 브리지.
나연석과 제작진, 그리고 세 아이들도 환하게 웃었다.
* * *
부슬비를 맞으며 걸은 템스강 주변은 마치 고대 중세의 거리를 걷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유람선도 타고, 저녁에 불이 켜진 타워 브리지도 구경한 진호와 일행들은 굉장히 만족하며 숙소로 복귀했다.
다음 날, 아침 운동을 마친 진호는 시큼한 냄새가 나는 물을 들이켰다.
'크헉!'
나연석과 제작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진호야, 먹는 식초 CF 노리니? 드라마 끝나서 힘들어?"
"아뇨."
'스킬 해금 때문이에요!'
3차 해금 조건은 '식초 물 5리터 마시기'다.
물과 식초의 비율이 1:0.5인 식초 물을 말이다.
마시면 몸이 유연해진다는 속설이 있는 식초.
물론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이지만, 3차 해금을 하려면 어쩔 수 없다.
대신 3차 해금이 되면 엄청난 유연성을 갖는 '여왕의 손'을 얻는다.
제법 많은 스킬과 시너지 효과를 낼 듯했다.
"몸에 쌓인 독소 좀 빼려는 거예요. 자, 너희도 마셔."
혼자만 죽을 순 없었다.
당연히 아이들은 펄쩍 뛰었다.
"싫은데요!"
"괜찮아. 맛있어."
"절대 맛없어 보이는데요!"
"맛있다니까. 형 표정 보면 알잖아."
그냥 맹물을 마신 듯 무심한 표정.
아이들은 긴가민가했고, 진호는 쐐기를 박았다.
"여드름 안 없앨 거야?"
"엄마가 대학 가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고 했는데……."
"안 사라져. 형도 대학생이었어."
"……끄으응."
'옳지.'
아이들은 미심쩍어 하면서도 식초 물을 받아 들었고, 벌칙 식초 물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는 나연석은 아침부터 나오려는 새로운 그림에 입을 꾹 다물었다.
제작진도 마찬가지였다.
"……끄에엑!"
"아아악!"
"우웨엑!"
진호는 괴성을 터트리며 발버둥 치는 아이들을 향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제작진은 웃음을 터트렸다.
"정신이 번쩍 들지?"
"형!"
"진짜!"
"자, 마무리하자!"
"……아오오!"
차마 형이라 때릴 수 없다는 듯 한 얼굴들이었다.
키득키득 웃은 진호는 위생 백에 빵과 쿠키를 종류별로 담기 시작 했다. 이를 간 아이들도 곧 포장을 시작했다.
띵동!
"응?"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아직 물물 교환을 할 시간이 아니었다.
"누구지?"
정태란 아이가 의아해하며 현관 문을 열었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정태를 마크한 카메라맨도 마찬가지였다.
"여, 연석이 형."
당황이란 감정으로 가득한 부름. 나연석과 제작진, 그 외 사람들이 의아해할 때 진호는 피식 웃었다.
'역시, 행동력 빠르네.'
"왜? 누군데?"
나연석이어슬렁 걸음을 옮겼다.
"안녕하세요. 채널 파이브의 기자 아일라 포터라고 합니다."
그랬다. 그녀는 기자였다.
'집요하게 물을 때부터 알아봤지.'
언론인은 언론인 특유의 화법이 있고, 몸짓이나 눈빛도 다르다.
"한국에서 저희 영국의 빵을 배우기 위해 찾아온 분들을 촬영하고 싶은데, 허락해 주실 수 있을까요?"
옅게 웃은 진호는 컵에 식초 물을 따랐다.
'홍보, 진짜 제대로 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