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7권 3화
쌩쨍.
매미조차 울지 않는 더위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중국이나."
다 똑같이 덥다.
날씨가 해가 넘어갈수록 미쳐간다.
"다녀와."
고작 미팅이지만, 정 대리의 얼굴이 진지하다.
"네, 안 속을게요."
나연석, 십 년 함께한 연예인도 가차 없이 속여 궁핍이라는 굴레를 씌워 버리는 악덕 프로듀서. 소속사는 물론이고, 매니저까지 한편으로 만들어 연예인을 속이는 나쁜 인간.
다행히 정 대리는 자신을 속이려 하지 않고 있었다.
"믿을게. 절대 말조심!"
히죽 웃은 진호는 약속 장소인 고깃집 안으로 들어갔다.
* * *
"다시 한번 말하지만, 쉽지 않은 사람인 거 다들 알지?"
수더분한 차림의 나연석이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여태껏 진호가 출연한 모든 예능 프로그램은 진호가 캐리했다. 그림과 재미는 기가 막히게 뽑혔지만, 피디를 비롯한 제작진은 된통 당했다.
자신이 데리고 있던 어디까지 먹힐까의 박영후 피디나 리얼 정글에 가다의 여정호 피디 등.
당하지 않은 제작진이 없었다.
"다들 입도 뻥긋하지 말고, 보조나 잘 맞춰."
"……정말 할 수 있을까요?"
"걱정 마. 내가 누구고, 여기 있는 카메라가 몇 대야?"
나연석은 정말 철저하게 진호를 뒷조사했다.
자신 있었다.
"미덥지 못한데……."
나연석은 출연자들을 골탕 먹이는 만큼 자신도 자주 당했다.
"시끄러워."
"왔습니다."
사람들은 급히 입을 다물며 고기를 불판에 올리기 시작했고, 나연석은 맞은편에 앉은 곽종훈을 보았다.
그랬다. 이건 일본에서 말한 프로그램의 미팅 자리였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대표님."
"……아, 진호 개 눈치 엄청 빠른 데. 속이기 힘들 텐데."
"약간의 재미를 더하려는 거죠. 일단 말만 하게 만들면 됩니다. 아시잖아요, 낙장불입."
"흠, 뭐 알았어요. 나도 이런 거 좋아하니까. 어후…… 긴장되네. 크크크."
"2미터 앞."
룸 밖에서 망을 보던 이가 후다닥 들어와서 앉자 사람들은 재빨리 웃음을 터트리며 분위기를 만들었다.
똑똑똑!
"네!"
드르륵!
열리는 문을 쳐다봤던 사람들이 환하게 웃었다.
곽종훈도 손을 들었다.
"어, 왔어?"
"왔어요? 반가워요, 나연석이에요."
나연석도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진호입니다."
순한 미소에 나연석은 활짝 웃었다.
시작이 좋았다.
"어유, 내가 이진호 씨를 모를까요. 어서 자리에 앉아요."
'이제 분위기만 만들면 되겠군!'
속으로 키득키득 웃던 나연석은 무슨 일인지 머뭇거리는 진호를 보며 의아해 했다.
"왜 그래요? 자리는 저기 곽 대표님……."
"아뇨. 카메라 사각지대에 앉아야 할지, 정면에 앉아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네?"
순간 룸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진호는 룸 한구석 천장을 가리켰다.
"저기 카메라, 저기 카메라, 저기, 저기, 저기도. 와, 카메라가 다섯 대네요. 가방에 숨겨져 있는 것까지 합하면 일곱 대군요? 아무튼 저는 저기 앉으면 되나요?"
일단은 기선 제압이었다.
진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활짝 웃었다.
딸그랑!
누군가 집게를 떨어뜨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치이이익!
한동안 고기가 익어가는 소리만 울렸다.
"……어떻게 아셨어요?"
나연석이 억지로 웃었다.
카메라의 위치는 가방에 있는 것을 제외하면 나연석이나 이 룸 안에 있는 다른 스태프들도 몰랐다. 위치를 알면 의식을 하기 때문에 확인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머릿속에 온갖 망상이 스쳐 지나갔다.
'혹 설치한 스태프들 중 한 명이?'
표정으로 나연석의 생각을 읽은 진호가 입을 열었다.
"제가 관찰력이 좋아서요. 들어오는 순간 이질적으로 느껴지더라고요. 믿기지 않으면 다시 숨기셔도 돼요."
어차피 [스킬 : 나는야, 자연의 왕자]와 [스킬 : 괴도 루팡]의 눈이 잡아낼 테지만 말이다.
"……들켰는데, 무슨. 에휴, 앉으세요."
순순히 말해서 더 의심스러웠다.
곽종훈을 제외하고 이 룸에 앉은 여섯 제작진 중 나연석을 제외한 다섯 명이 모른 체하며 핸드폰을 켰기에 더 그렇게 느껴졌다.
'와, 손발 척척 맞는 거 봐라.'
이건 2차 함정이 아니라 그들의 본능이 만들어 낸 행동이었으나, 그 철처함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진호는 이건 눈감아 주기로 했다.
그보다 먼저 응징해야 할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대표님."
"난 몰랐던 일이야. 와, 나 피디 이 사람 못 쓰겠네. 대체 뭔 굴레를 씌우려고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를 했데? 진호야, 나가자. 나 이런 사람하고 일 못해. 아니, 안 해!"
"자, 잠시만요! 대표님, 그게 아니라……."
당황한 나연석이 무릎을 꿇었다.
진호는 변명을 시작하는 나연석 말고 곽종훈만 쳐다보았다.
"어제 게임하셨죠?"
"그게 아니긴 뭐가…… 응?"
"고급시계? 배틀존? 와우? 오, 아직도 와우하세요?"
"자, 잠깐?"
"유진 선배님, 대표님 어제 게임 하셨어요! PC방? 네. PC방에서 하셨네요. 요새 PC방 참 좋죠? 전부 금연구역이라 담배 냄새도 안 나고."
진호는 카메라 하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소리쳤고, 곽종훈은 사색이 되었다.
"어허! 게임이라니! 나 게임 끊었어! 여보, 아니야. 절대 아니야!"
"회사 근처 PC방? 선배님, 본사 근처 PC방 수소문해 보시면 아실 거예요."
"어허! 아니라니까! 여보, 진짜 믿어 줘!"
진호는 카메라를 향해 애원하는 곽종훈을 외면하며 나연석을 보았다.
이게 뭔가 싶었던 나연석은 순간 자세를 최대한 바르게 잡았다.
"속여서 미안합니다."
"저도 재미없게 밝혀서 죄송합니다. 대표님, 이제 앉으세요. 여기 피디님이 모두 편집해 주실 거예요. 그렇죠?"
"그럼요."
나연석은 활짝 웃었고, 곽종훈은 미심쩍다는 듯 바라보다가 다시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나 진호의 날카로운 눈은 바로 알아차렸다.
'편집 안 하겠네.'
살짝 미안했지만, 그래도 자신을 속이려 했던 것과 비교하면 약하다.
"거봐, 내가 얘 속이기 힘들 거라고 했잖아요."
"……유구무언입니다. 한 잔 받으시죠, 진호 씨."
자리에 앉은 진호는 공손히 술을 받았다.
"곽 대표님과 준비하던 프로그램에 제가 끼어들어서 놀라셨을 겁니다."
진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잔에 술을 따랐다.
원래 곽종훈과 일본에서 이야기를 나눴던 프로그램의 피디는 나연석 사단, 즉 나연석의 아래서 자란 피디도 아니었다.
방송국도 요리 관련 케이블이었다.
더욱이 처음 이야기를 나눴던 토너먼트 형식은 나연석이 선호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그런데 나연석이 중간에 낚아챘다.
정확히는 프로그램 아이디어를 그 피디에게서 사 버렸다.
"공통점이라고는 휴머니즘뿐이니까요."
"바로 그 휴머니즘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 대표님과 진호 씨가 출연 확정이 되었다는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저도 탐내지 않았을 겁니다. 아직도 간절한 아이들을 토너먼트라는 어른 사회의 경쟁에 내미는 건 가혹하다고 생각합니다."
"동의합니다. 하지만, 대신 얻는 것도 크겠죠."
중간에 탈락하는 아이들도 이미지만 잘 관리하면 훗날 취직을 할 때 기록할 커리어가 생길 것이다. 프로그램에 나오는 것 자체만으로도 재능을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
"그러나 누군가는 상처를 받을 겁니다. 거기다 출연자는 십 대 아이들. 우승한다고 해도 사회에 발을 내딛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리죠."
"……."
정론이었다.
진호가 곽종훈의 권유를 허락하면서 제일 마음에 걸렸던 부분이라 계속 고민해 왔고, 한국에 오면 곽종훈과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려고 했다.
나연석이 이 프로그램을 맡게 되지 않았다면 말이다.
계속 콜을 해 온 이유도 진호 자신이 일본에서 떠 버린 것도 있지만, 나연석 본인이 만드는 프로그램 성향 때문에 고사할 것 같아서 그랬다고 한다.
"그 부분을 타파하고자 합니다."
눈을 빛낸 진호는 자세를 다시 바로잡았다.
"어떻게요?"
"일단 여행을 떠나야죠. 꿈과 희망, 즐거움으로 가득한. 첫 주제가 빵이니 빵의 나라들에서 그 나라의 빵을 보고 먹고 배우고요. 해외는 커녕 사는 도시조차 벗어나지 못한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선물 이겠어요. 견식과 창의성도 커질 테죠."
"대신 여비는 쥐꼬리만큼 주시겠죠."
"에이, 그럴 리가요."
'쥐꼬리 맞네.'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는 걸 보면 천성이 사기꾼이다.
'아, 뭔지 알겠다.'
진호는 자신과 곽종훈의 진정한 역할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진짜 사기꾼이네, 욕심쟁이 사기꾼.'
그래도 의도가 좋아 보였다. 원안 보다 백배천배 낫다.
"흠, 장편이 되겠네요."
"일단 한 시즌당 12화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직 다음 작품을 정하지 않았으니 나쁘지 않았다.
"대중들도 이 좋은 일에 기쁘게 반응해 줄 거라고 생각하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나연석 특유의 휴머니즘 연출이라면, 충분히 그럴 것이다.
"그러면 하시는 건가요?"
번쩍 빛나는 그 눈이 참 불길했으나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예능 피디들 가운데 사단을 만든 이는 많았지만, 그걸 모두 성공시킨 사람은 나연석이 유일했다.
현 시대 대한민국 예능계의 거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
"전 이미 한다고 말했는걸요? 그쵸, 대표님."
"그럼, 이미 한다고 했지."
"……그렇지! 좋았어! 녹음했지?"
"저를 어떻게 보고! 당연히 녹음 했죠!"
그들은 재빨리 핸드폰을 조작했고, 진호와 곽종훈은 멍하니 그 모습을 보았다.
"……하하핫! 아무것도 아닙니다. 습관이라서요. 자, 어서 드시죠. 이 집이 참고기 맛이 좋아요."
"씁, 이거 뭔가 불안한데. 우리 시간을 가지고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낙장불입! 이미 한다고 하셨잖아요."
"……진호야, 일단 카메라들부터 뽑아 와 봐. 수리비는 내가 내지 뭐."
"그럴까요?"
"자, 잠깐! 에이, 말 바꾸시면 안 되죠!"
"저 카메라를 뽑으려면 뾰족한 게 있어야 하는데……."
"진호 씨 붙잡아!"
고깃집은 난장판이 됐다.
* * *
잠시 후, 소란이 정리되자 그들은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치이이이익!
검정색 불판에서 선홍빛 고기가 노릇노릇 익어 갔다.
'지금!'
"다 됐어요. 드세요."
"그려?"
곽종훈은 냉큼 고기를 집어 입안에 가져갔다.
소스는 소금 몇 알갱이가 전부였다.
사각거리며 씹힌 지방이 소금과 함께 혀 위에서 고소하게 녹아내렸고, 그 뒤를 탱글한 살코기가 따라붙으며 입안을 고기의 풍미로 가득 채웠다.
"워메, 내 고기 어디 갔어? 방금 까지 입 안에 있었는디?"
"으흐흐, 고기가 숙성이 제대로 됐어요."
"숙성도 숙성인디, 셰프 솜씨가 좋네. 이런 고기라면 일 년 삼백육 십오 일 내내 먹어도 안 질리겠다."
나연석은 고기 한 점에 호들갑을 떠는 둘을 어이없다는 듯 보았다.
'고기가 거기서 거기지, 무슨. 그래도 리액션이 좋으니 영상은 잘 뽑히겠네.'
피식 웃은 나연석이 잔을 들었다.
"자, 한 잔씩 하시죠."
챙.
소주를 들이켠 나연석은 진호가 자신의 앞접시에 놔준 고기를 입에 가져갔다.
"어……?"
"나 피디, 맛있지?"
다 안다는 듯한 곽종훈의 말은 나연석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어? 이게, 어?!"
나연석은 고기와 진호를 번갈아 보았다.
스태프들은 그런 나연석을 의아해 하며 쳐다보았다.
진호는 푸근히 웃었다.
"많이 드세요."
"……아니, 진호 씨. 학창시절에 고깃집에서 알바했어요?"
"고기가 좋다 보니 대충 구워도 맛있는 것 같아요. 좋은 집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 뭐."
속으로 아닌 것 같은데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연석은 이내 고기에 집중하며 연신 감탄했고, 진호와 곽종훈은 서로를 의미심장하게 보았다.
"아, 맞아. 진호 씨, 외국어는 뭐 뭐 할 줄 알아요?"
진호는 외국어 능력자로도 알려져 있었다.
"중국어, 일본어,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요."
원어민처럼 할 줄 아는 언어가 몇 개 더 있었지만, 나연석과의 미팅에서는 무엇이든 최대한 감춰야 했다.
스태프들과 나연석이 감탄을 터트렸다.
"와, 그럼 어딜 가도 말은 통하겠네."
"좋다, 좋아."
그들은 방송을 쉽게 찍을 수 있겠다고 서로 좋아했지만, 그걸 지켜보는 진호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이것 봐. 방금 말한 나라는 안 가려고 하잖아.'
표정이 딱 그랬다.
도무지 방심할 수가 없었다. 진호는 입을 열었다. 이번엔 자신이 물을 차례였다.
"그래서 저희 목적지는 어딘데요?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입니다. 더 이상 물어보면 이야기가 나온 나라엔 안 가도록 하겠습니다."
진호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곽종훈도 마찬가지였다.
나연석이 걱정말라는 듯 선하게 웃었다.
"일반 학생들이 참가하는 방송인데, 설마 제가 고생시키겠어요?"
굉장히 설득력 있는 말이었다.
뭔가 아닌 것 같지만, 진호는 일단 수긍하기로 했다.
곽종훈도 고개를 끄덕이며 먹는데 집중했다.
"아따, 맛나다. 진호 너도 얼른 먹어."
"네. 대표님도 많이 드세요."
나연석은 그런 둘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를 잘 아는, 그에게 많이 당한 사람이 보았다면, 또 뭘 꾸미고 있냐며 멱살부터 잡았을 미소였다.